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뭐가 됐습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뭐가 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된 게 아니에요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인간은 없고 모조리 다 죄 짓는 육신만 있기 때문에. 그 죄 속까지 주의 말씀이 침투해서 들어오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초반의 원리를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하죠. 초반에. 산상설교에서 “똑바로 살아. 이렇게 하는 게 하나님 뜻이야.” 해놓고 제자들이 “열심히 할게요. 할게요.” 해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너희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끝까지 사랑한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가면 너희가 나를 버리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내가 버린 너를 찾아가 구하는 것도 기정사실화시키는 것입니다. 그중 한 사람 가룟 유다는 배제되고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같이 너도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디를 경유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말씀을 버린 그 경로를 따라오다 보면 그게 이웃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배신하고 죄인이고 나밖에 모르는 경로를 계속 들어가다 보면 순환 루트, 사이클을 돌다 보면 중간에 뭐를 만나게 되겠어요? 단절을 만나고 그다음에 그 단절 자체가 바로 새로운 영생의 길이라는 것을 만나게 되겠죠. 죄인인데 주께서 값없이 구원한 것을 만나게 되겠죠. 그게 사도 바울의 복음이라 하잖아요.
만나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이 세상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자꾸 주저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는 의가 있기 때문에 주저하는 거예요. 그거 하나 지키려고. 그러나 죄인이라면 여러분들이 어떤 짓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짓도.
남한테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하는 전화, 여러분들이 그거 하기 힘들어요. 주의 성령의 기적 아니면 못합니다. ‘지가 뭔데 내가 사과해. 내가 지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이게 인간이거든요. 이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말도 안 듣는 게 인간 말 들을까요? 안 듣습니다. 아이고, 셉니다. 그야말로 강성이에요. 강성.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강성 노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