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답변

방언

아빠와 함께 2024. 8. 17. 13:34

작성자 [ 나그네 ] - 2001년 09월 11일 오후 5시 59분에 남기신 글
 
ⓝ 이근호 목사님, 방언 질문이 있는데요  
 
이 목사님, 지금도 방언이 있는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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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2일 오전 07시 15분에 남기신 글
 
지금도 방언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즉 복음적인 내용을 담은 계시 전달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방언이란 복음적 계시를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없이는 이런 종말적 현상이 안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가 곧 방언입니다. 따라서 "방언한다"는 말을 곧이 믿지 마시고 그 내용이 복음적인 계시를 전달하느냐 아니하느냐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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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나그네 ] - 2001년 09월 12일 오전 10시 26분에 남기신 글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교인들 가운데,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각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이상한 말을 하는 그런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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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2일 오후 5시 00분에 남기신 글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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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친절 ] - 2001년 09월 13일 오전 11시 00분에 남기신 글
 
어떻게 이해해야 되죠?
기독교도 여러 종교중의 하나로 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런 방언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이미 종교화가 되어있다는 말입니까?
좀 정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세요.
사실 저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언을 경험했으며
주위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 분들이 기도중에 간혹 방언을 하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야야 하나요.
목사님의 이해틀로 설명하지 마시고 일반 성도들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이해틀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선한 가을의 문턱에서 감기 조심하세요. 그리고 콜레라도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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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구득영 ] - 2001년 09월 13일 오전 11시 41분에 남기신 글
 
이근호 목사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요즘 이야기하는 소위 그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성경에 있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종교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방언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절에 있는 중들도 그런 방언을 한다고들 합니다. 저는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그런 방언이 종결되었음이 분명한 것 같은데도, 문제는 지금 그런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겠지요.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도 그런 일을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런 일들이 하나의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제대로 된 현실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저도 기도원 출신(?)이라서 이런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던 터라, 외람되게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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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3일 오후 7시 28분에 남기신 글
 
불교 신자도 밥을 해 먹고 기독교 신자도 밥을 해 먹습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밥을 해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와 상관없이 허황된 소음을 내는 것은 인간이라면 흔히 있는 현상입니다.
참고로 밥 먹는 것이 나쁜 짓이 아니듯이 허황된 소리하는 것이 죄라는 말은 아닙니다. 방귀 뀌는 것은 생리인데 어떻게 그것을 죄악된 것으로 보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방귀 뀌는 것을 신의 계시로 본다면 그것은 죄악된 겁니다.
이것 참, 어떻게 이 보다 더 친절히 설명해야 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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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어리둥절 ] - 2001년 09월 15일 오후 12시 36분에 남기신 글
 
역시 인간은 경험적 존재군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틀렸다 하네요.
성경 어느 부분에서 방언이 종결되었다고 합니까?
성경에서 방언을 조심스럽게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 때문이지 방언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방언도 은사요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목욕물 버릴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시길 당부 드립니다.
성경을 자신의 굳어진 이해 틀로만 보지 마시고 정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가능할런지...) 보시기 바랍니다.
가을입니다. 정신차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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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나그네 중 ] - 2001년 09월 15일 오후 1시 37분에 남기신 글
 
방언에 관하여 소위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 먼저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사람들은 방언을 말할 때 사도행전 2장에서의 방언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고, 나머지 방언이 나오는 것을 자신이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 전서12장과 14장에 언급되는 방언도 사도행전 2장의 본문과 비교해 보면 결코 달리 해석되어질 수 없는 복음(방언)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본문을 곡해하려고 애쓴다.
칼빈의 주석을 보더라도 방언은 외국말임을 선언한다. 물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외국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먼저 사도행전 2장을 보자.
4절을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바가 있다.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5)
그렇다. 성령께서 제자들(가롯유다제외)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이 곧 이 일이시다. 그렇다면 방언이 약속되었던가? 마가복음16:17절을 보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참으로 놀랍다. 새 방언. 그런데 지금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새 방언이 아니다. 원래 있던 말이다. 그러면 사도행전2장은 마가복음과 상관없는가? 억지로 주장(중얼거리는 말을 새 방언이다)하려면 방법이 없다. 그러나 분명 사도행전2장은 새 방언이다. 즉 새노래로 표현되는 바와 같다.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열한 사도의 설교에서도 방언에 대한 내용은 없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2:17-21)
사도들이 이렇게 말해놓고 정작 증거하는 내용은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해지는 예언, 환상, 꿈이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심에 관한 말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서 이미 딴 마음이 있는 자는 예언과 환상, 꿈을 이 본문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의 품은 것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방언도 이와 동일하다.
그러면 방언에 대한 언급은 왜 없는가? 그 이유를 6-13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한 종류는 방언으로 하는 말을 알아듣고 하나님의 큰일이라 말하며, 다른 한 부류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방언을 알아들었는지 알아듣지 못했는지는 성경에선 관심이 없다. 오직 이들이 조롱했다는 데 그 중심이 있다.
베드로의 설교는 1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설교였다. 그러니 방언의 역할은 갈라내는 역할(심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말하면, 외국말을 하지 않고 설교했어도 역시 듣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행3-4장). 새 방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니 못 알아 들을 수밖에.
그러면 이제 고린도전서12장으로 가보자. 10절 하반절을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여기에서 우리들은 비약을 하려고 한다. 방언이 외국말(사실은 말이 중요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 내용이 중요하다)이 아니라 무언가 특수한 말이라고 여기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 나오는 방언을 무엇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지껄어 대는 방언과 일치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면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 나오는 방언을 살펴보자.
먼저 2장 끝 부분에서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후 믿은 자들에겐 방언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무엇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지를 볼수 있다. 사도행전6장에서는 방언이란 것이 언급되지도 않는다. 9장에서 보면 바울이 부름을 받지만 방언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10장46절에서 방언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왜 이곳에서 방언을 언급하는가? 물론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 곧 복음이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시다. 그것은 47절에서 대답한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우리와 같다"라는 것이 강조된다. 행11:17절을 보라"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참조15:8)
18장은 고린도 교회에서의 1년 6개월간의 사역이 나온다. 그런데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19장1-7절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성령이 임할 때 방언하며 예언을 했다. 방언과 예언은 하나님의 큰일, 곧 복음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왜 방언이 언급되고 있는가?
그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데 있다. 4,5절을 보자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동일한 성령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의 전부이다. 사도행전 어느 본문에서 외국말이 아닌 말을 언급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외국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과 상관없이 방언을 말하는가?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에서도 동일할 것이 아닌가?
다시 12장으로 가보자.
10절에서는 외국말, 그리고 복음과 상관없는 방언에 대해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11). 28절과 30절도 그러하다.
그러면 문제는 14장이다.
2절을 사람들은 지 마음대로 해석한다. 하나님께 한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씀이요,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오직 그 영, 즉 성령으로 비밀(복음:골1:26)을 말할 뿐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여 비밀(복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게 하라는 것이다.
3-4절을 보자.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성경에서 우리는 자기의 덕을 세우라고 말씀하는 바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바울의 비판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5절을 보라. 방언은 분명 통역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지 않는가? 예언도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4). 그러면서 6-12절을 보면 통역없는 방언이 뜻 없는 소리와 같다라고 말하지 않는가?(10).
그러면 14-19절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통역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한마디로 통역없는 방언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마치 통역없어도 방언하면 자신에겐 유익된다고 생각된다면 착각이다. 이곳에서 바울은 방언을 인정한다. 그 방언의 내용도 복음이며,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이 다른 나라말로 되어질 때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함입니다. 이 말을 미국사람이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면 자신이 미국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이런 한국말을 했을 때 자신이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지 않는가? 자신에게도 열매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울 수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19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20절을 말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무엇이 지혜에 장성한 사람인가?
21절 말씀을 알아듣는 자이다.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이사야28:11절 말씀의 인용이다. 28장을 읽어 보라.
심판의 기능으로 방언을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22절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것이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여기에서 방언과 예언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은 어떤가? 똑 같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이 방언, 예언으로 인해 열 받는 자들이 발생하는 것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방언은 복음이다. 지금도 방언은 계속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그런 방언은 사기이다. 그러면 왜 목사들이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말했다가는 교인수가 절대적으로 감소. 자신이 쫓겨날 것이 뻔한데. 물론 자신이 알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해야 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내용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 앎을 자랑거리로 삼는 자들. 그들도 회개하라.
기존 목사들이 방언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이 살아남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이 방언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이 비빌 곳을 찾는 자들은 과연 그들과 다른가?
기존 방언을 부정하고 이렇게 말씀대로 해석한다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께 목숨을 걸어야 한다. 상한 심령이 없는 자들은 얼마나 강퍅한 자들인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신데, 다시 일생에 매여 살아가는 인생들이라면.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함을 아는 자가 성도가 아닐까요?
주님을 위해 죽으려고 하는 자들은 없고, 자신의 헛된 것을 위해 과감히 목숨을 버리는 자를 보면서, 또한 체면 살리기 위해서 다시 피의 복수를 하려는 인간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은 다 잘한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테러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올시다.
참으로 슬퍼오. 주님을 위해 자기의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드니.
자기 배가 신인 세대여. 어찌할꼬.
그러나 주님은 말씀대로 행하시니 감사할 따름이요. 말씀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익명으로 써 죄송합니다. 이 글을 읽고 방언(한국교회가 말하는)이 있다는 말하는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해 주시고, 그리고 부족한 면이 있으면 보충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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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5일 오후 10시 48분에 남기신 글
 
저는 방언은 계속되어야 된다고 했지 언제 종결되었다고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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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나그네 ] - 2001년 09월 19일 오전 11시 34분에 남기신 글
 
방언은 종결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신학의 부재가 이론 혼란스런 대화를 하게 하는군요. 이근호 목사님도 여기에 한 몫 하시고자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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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22일 오후 8시 23분에 남기신 글
 
방언이 종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질문한 분으로 인해 방언이라는 개념 안에 담긴 계시 개념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완성, 혹은 계시의 완성이 계속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방언은 계속 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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