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화에 대하여 ]
2001,7,27 여쭙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성화론에 대하여 여쭙고자 합니다.
흔히(일반적으로) 성화를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화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십자가 마을의 입장으로 압니다. 그 점에 대하여 이 목사님께서 피력해 놓으신 글들을 일부 살펴보면서 그러한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는 합니다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대할 때마다 자꾸 혼동이 되거든요. 예를 들면,
1)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 자랄찌라는 명령으로 미루어보건대 성숙의 여지, 또는 성장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2)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꼭 무슨 성화의 단계를 대하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 영적 측면에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의 차이는 뭔가 성장 또는 성숙의 과정이라는 걸 암시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4)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위의 말씀들을 흔히 알려져 있는 성화론이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목사님의 고견 기다리겠습니다(결코 변론이 아니라, 궁금증의 차원에서입니다). 건강하십시오.
[ Re: 성화에 대하여 ]
2001,7,28 이근호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구약적으로 말해서는 '언약 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아담 안'에서는 도저히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상했더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질문에 에베소서에서 2개, 히브리서에서 하나, 베드로후서 1개의 구절을 거론하셨습니다. 모든 귀절은 오직 하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딴 게 아니라 상상도 못할 모든 선한 것들이 '그리스도 안' 혹은 '그리스도 몸 안'에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같은 경우를 보면, '신의 성품'이라고까지 표현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갈라디아서 5:22에 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 같은 열매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의 성품이나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주어지는 겁니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점차 점차 훈련을 하고 세월을 보내면 추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주님의 대한 첫 사랑이 유지된 상태에서 회개가 일어나며 단번에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너무나 구원의 은사나 능력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과 경험에 의존해서 하나 하나 추가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니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식이 아니라 '아담 안'에 사는 식이 됩니다. 소위 이것이 '성화' 혹은 '성숙'이라고 말하는 것들입니다. 즉 늘 회개하는 것 대신에 늘 자신의 성품 고치기에 관심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하니, 믿음은 일단 있고 덕만 더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 다음에는 절제를 더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절제를 더하는 순간에 이르면 믿음과 덕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을 확보하고 유지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바로 베드로후서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의 말씀은 바로 이런 성화 주의를 오히려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처음부터 새로 출발한다고 여기는 참된 성도는 늘 회개할 것 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 저는 믿음과 덕과 절제에 대해서는 한 가닥 한다고 여겼는데 사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하나님의 은사는 항상 성령에 의해서 은혜로 주어져야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군요"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어느 정도 섰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교만한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이미 확보해 놓은 기술이나 기능으로 버틸 수 없는 겁니다. 오직 날마다 회개하게 하시는 주님의 공로로 이루어집니다. 이 일을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지적할까요? 바로 베드로후서와 같은 말씀이나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이야기는 멜기세덱의 이야기입니다.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인간의 그 어떤 육신으로 하는 행위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일방적인 축복으로 그 맹세대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말씀하는 몸을 온전케 한다, 혹은 자라난다는 것은 개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그리스도 몸을 의미합니다. 즉 이미 그리스도가 한물 간 존재로 간주하겠지만 어느 구석인가, 어느 시대에서인가 택한 백성은 출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대하면서 교사와 전도자로 성도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그 목적은 개인이 구원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몸의 온전함, 즉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라는 그 몸의 온전함을 증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회개를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온유하고 화평스럽고 절제하게 되고 믿게 되고 이웃 사랑을 하게 되는 신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했다는 그 경험자의 자질 때문에 그 신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 1초 이상을 경과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환하게 빛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구름이 늘 걷히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성도에게 늘 회개케해서 구름 위에 빛나는 태양만 바라보게 하지요. 그럴 때 그 순간을 신의 성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성품을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것으로 삼아 보존할 수 있는 그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회개케 하시는 주님이 공로와 은혜 덕분입니다.
저는 차라리 야고보서가 이런 성화주의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적절하다고 봅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모든 각양 좋은 은사는 오직 위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ㄷ이 지상에서는 뭘 합니까? 바로 '더이상 위를 쳐다 볼 필요가 없다'라는 점을 야고보서는 공박합니다. 사람이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이 어기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늘 말씀을 보면서 회개해야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회개하는 자체가 신앙 성숙이 많이 된 사람의 전용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누구든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스스로 신학에 신앙에 정통하면 어느 정도 실수가 없다고 자신하는 자에게는 도리어 교만이라는 악령이 쒸어져 있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이 회개가 안되고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기껏 하는 소리가 "나도 안다. 옛날에 다 그런 체험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더 발전해져 있다. 나는 너보다 더 성화된 사람인 걸 알아야지. 어디 초보자가 감히...."라는 주장을 늘어놓습니다.
성화를 주장하고 성숙을 주장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백이면 백, 사이비 교주의 길로 갑니다. 자신의 훌륭함을 근거로 예수를 증거하고자 하는 거짓 선지자를 경고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7:14-23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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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Re: 성화에 대하여 ]
2001,7,28 여쭙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글을 통하여 성화론 뿐만 아니라, 회개, 교회 성도들이 서로 하나된다는 의미, 언약과 주님 안에 거한다는 말씀의 의미..까지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과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 Re: Re: Re: 성화에 대하여 ]
2001,7,29 조규현
이근호 목사님에게 ‘성화’ 이론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어느 분의 글이 실렸고, 거기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 또 그 답변에 대한 이 분의 불만스런 글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글들이 어찌하여 삭제되어 버렸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저는 삭제된 그 글들에 대한 저의 생각을 피력하고 싶다.
교회사에 있어서 신학적 논쟁이나 '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성경 말씀을 ‘율법적’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 ‘은혜적’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 같다. 율법적 관점에서 보면 성경 말씀대로 신자는 실천하고 행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은혜적 관점에서 보면, 신자들에게, 실천하고 행할 수 없는 죄인임을(롬3;10, 20)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도, 예수님의 산상보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삶’을 강조한 바울의 권면과 실천도, 그대로 행하라는 것보다 “죄인의 괴수(딤전1:5)”인 <나>를 바라보라는 ‘거울’의 말씀이 된다. 따라서 구약에서 출애굽 당시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의 은혜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됨을 깨닫게 된다.
‘새 생명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신자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교회에 충성 봉사 잘 하고 이웃에게 희생 봉사하는 삶이란 말인가? 그리고 어떤 도달점을 정해 놓고 거기에 도착하면 성화된 자인가? 성서에 기록된 눈뜬 소경의 기쁨과 간음한 여인의 용서함 받은 기쁨이 현상적으로 같을 수가 없듯이 예수 안에서의 ‘새 생명의 삶’이 구체적으로 객관성을 띌 수 없다고 본다. 사람마다 환경따라 다른 것이 아닌가?
때문에 신자는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예수 안에서 의인’된 죄인이 아닌가? 이 십자가의 은혜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욱 더 깨달아 가는 것을(엡3:19) ‘성화’ 또는 ‘성숙’이라 보면 어떨가?
성서 해석에 있어 ‘인간의 행함’의 관점보다 ‘예수님과의 정당한 관계성(은혜)’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여야 타당하다고 본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저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요9:2)”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실 따름이다(요9:3)”라고 답변하신다. 이처럼 ‘인간의 행함’의 관점에서는 그 기준이 인간의 윤리 도덕일 수밖에 없으나 은혜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초월하여 생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되기 위해 인간의 행함을 구체적으로 요구한다면 또다시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부디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신 천국 백성에게 ‘성화’ 혹은 ‘성숙’이란 것을 명목으로 또 다시 율법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 Re: Re: Re: Re: 성화에 대하여 ]
2001,7,30 방문자
이다. 싶다. 된다.
이렇게 말고, 입니다, 싶습니다, 됩니다 이렇게 쓰심이 어떠신지요,
이런 적은 부분에서도 님의 어떠하심이 나타납니다.
아래 내용도 애매모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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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Re: Re: Re: Re: 성화에 대하여 ]
2001,7,30 조규현
바른 지적을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다' 보다는 '입니다'로 '싶다' 보다는 싶습니다 로 표현을 하면 좋겠다는 님의 지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보통 글을 쓸 때처럼 습관이 되어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편지글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을 그냥 써보는 가벼운 글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혹 이 표현들이 님의 마음에 거리낌이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부탁드리는 것은 익명이 아니라 당당히 이름을 밝히면서 자기의 생각을 들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성화'에 대한 저의 글에 대하여 애매모호 하다고 지적해 주셨는데 님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동의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역시 님의 생각에 따를 수는 없지만 다를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를 합니다. 계속 성경 공부를 통해 성령께서 저를 깨닫게 하실 것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