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너, 너말이야.

아빠와 함께 2024. 3. 22. 19:20

전도서 1장 1-2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은사는 나를 지목하고 나를 겨냥해서 찾아온다. 소위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걸 잊어버려요. 매일같이. ‘세상은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합니까?’ 지금 뭐를 빠뜨린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는 것을 파악하기를 내가 원했던 거예요. 뭐가 빠졌죠? 너 말이야. 너! 말씀이 나한테 바늘로 찌르듯이 온다는 사실을 놓친 거예요. 나에게. 세상 참 헛되고 헛돼. 아니야! 너. 너. 너 이야기야!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찾아와요. 그건 나를 녹여버리는 하나의 용액이에요. 무서운 용액이에요. 내 개별적 죽음이 무서워 벌벌 떨 때, ‘너는 벌써 죽은 거야!’ 하고 포괄 죽음이 나에게 찾아온 거예요.  
주께서는 경상도 말로 치아라! 치아뿌라! 전라도 경상도 다 나온다, 내가 찾아갈 거야. 네가 발언하지 마. 내가 찾아가서, 상어가 낚싯바늘에 낚이면 상어가 굉장히 아프겠죠, 아픔으로 말씀이 우리를 꿰뚫어 입을 딱 낚시 바늘로 걸듯이 꼼짝 마라는 식으로 먼저 찾아들죠. 고린도전서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우리는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에요. 예수님을 저주하려면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작살내야 저주가 돼요.  저주를 안 하면 뭐가 안 됩니까? 은사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잖아요. 이래도 저주 안해? 하고 우리를 조집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은 참으로 저주해야 될 자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버려요. 그걸 비로소 느끼게 되면 이제 와서 느끼는 게 아니고 원래부터 잠복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요. 내 안에 여차하면 예수님이라도 나는 저주하겠다는 그런 괴물을 처음 태어날 때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평소에 그게 안 들키기 위해서 믿음생활, 신앙생활, 복음생활 온갖 거 다 한 거예요. 그건 가짜 내 모습인데 진짜 내 모습은 저주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은사를 준 이유는, 은사는 비소유성이죠, 아주 깊이 있게 생각해보세요. 은사가 없다는 말은, 소유성으로 산다. 은사 없는 특징이 소유성이에요. 소유성은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내가 행위에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사가 없는데 은사가 주어진다는 것은 이 은사가 인간의 은사 없음을 십자가가 공격하는 거예요. ‘너는 은사 없지? 너는 너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라고 말씀이라는 용액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인간을 지목해왔다는 겁니다. 온 세상에.

로마가 끝났어요. 로마가 끝나면서 성경도 끝나요. 요한계시록으로 끝나요.

그다음 그 뒤에 시대는 뭐냐? 이걸 반복하는 겁니다.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마지막 때까지 계속해서 있어야 되고 영원히 천국 가도 십자가 사건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로마까지 있었던 인류의 역사를 그 다음 시대에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는 거예요.시대는 두 가지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시간과 하나는 어려운 단어로 묵시, 묵시는 너무 어려우니까 영적세계, 양쪽 다 중첩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은 어디 있겠어요? 시간 속에 있겠죠.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지면 아, 내 마음대로 안 되어야 다 이루어진 세상이고 이것이 바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강감찬 장군이 구원 못 받으면 어떻게 해. 구원 못 받으면 안되잖아. 세종대왕, 이순신 구원 못 받으면 안되잖아.’ 이러지 말고 이 강의 내용대로라면 강감찬 장군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강감찬 이전에 단군할아버지 때 강감찬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죠. 왜 고려 때 강감찬이 생겼습니까? 그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거예요. 언약이 없는 자는 은사가 없는 자는 지옥 갈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은 뭐냐? 인간에게는 마귀가 심어준 자기 의가 있다. 그런 경우를 보여주는 존재가 등장해야 십자가 사건이 살아요. 제가 예를 든 거니까 교회 안 나가고 복음을 모르는 그런 시누이가 있다는 것은 성도 입장에서는 올케 입장에서는 주께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되죠. 나는 지옥을 보았다. 나 살아생전에 지옥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거요. 내가 태어난 게 다 이때를 위함입니다. 그게 바로 은사가 주는 자유입니다.

모든 이 세상의 움직임이 예수님을 저주케 하는 상황들로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들이닥쳐요. ‘내 중보기도는 왜 응답 안 해주십니까. 나 혼자 구원받아서 나 혼자 천당 가면 재미지겠다, 정말. 나 지금 속상해 미치겠어.’ 이런 마음. 그게 저주에요. 그게 저주입니다.

그래서 12장 3절에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믿음이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믿음은 해석입니다. 결과적인 해석이에요. 믿음이라는 해석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왜냐하면 저주해야 될 예수님을 찬양하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을 지키면 안된다니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저주해야 돼요. 화를 내야 된다고요.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왜 주고 합치될 가능성도 없는 걸 왜 주셨습니까? 그게 은사의 시작이에요. 은혜의 시작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13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이제 이해되죠. 예수님의 몸은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 몸을 쳐다보는 몸들, 지체들이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아담과 하와가 두 사람이지만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 우리 둘이 한 몸이라 하죠. 그 한 몸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유지하는 조건 하에 한 몸이에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걸 신약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 몸은 없고 주의 몸을 지향하고 바라봐야 될 몸인데 말씀이 주는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쁨으로 한 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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