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가 영원히 분리되었음을 보여주는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너희들이 알지도 못하고 너희들이 들어갈 수도 없는 그 세계에서 나타나신 분이 진짜 메시아에요. 그 말은 뭐냐? 너는 너 자신에게 가짜라는 뜻이에요. 너는 네게 가짜라는 사실. 적그리스도는 여기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내가 왜 가짜야? 진짜지. 진짜니까 이 진짜 나를 살릴 수 있는 메시아나 하나님도 오직 절대적 유일신, 하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제가 적그리스도라면 이 성경가지고 적그리스도적인 복음을 전할 거예요. 그럼 어떤 설교가 나오느냐? 뭐 교회에서 다 하는 얘기 나오죠.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이게 적그리스도적인 설교입니다. 마귀가 하는 설교에요. 지금 뭐를 빼먹고 있어요? 주님께서 너 가짜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 피는 무슨 피인 줄 알아요? 너 가짜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널 구원하러 온 게 아니라 널 죽이러 왔다는 겁니다. 가짜를 가짜로 폭로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갈라졌으면 너희도 갈라져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내가 하나라는 것은 하나여서가 아니라 내 기억이 나를 하나로 기억하기 때문에 하나에요.
나는 나다’ 하면, 땡! 틀렸어. ‘나는 흙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름 안에 자신의 출처가 담겨있어야 되기 때문이에요. 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한국 교육이나 과학에서는 그 이야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출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 외부에 인간 바깥에서 인간의 처음 시작과 끝을 다 알고계시는 다른, 인간보다 월등한 지능을 가진 존재를 전제로 해야 이 말이 성립되기 때문에 그래요.
진화론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에 대해서 반발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데에 대해서 반발로 만들었다. 그럼 처음엔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건 맞는데 그 절차를 세분화해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진화론적으로 만들었다’ 그거 하나 살짝 삽입한 거예요. 나중에는 앞에 것을 떼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를 떼어버리니까 뭐가 남겠어요? 인간은 환경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뭐냐? 나는, 영원히 변하는 그 자체가 바로 나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인간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하나 더 추가하게 되면 ‘인간과 함께 영원히’. 인간과 함께 영원하자. 이 적그리스도는 ‘나는 너희를 배반하지 않고 떼어내지 않을게. 나는 너희들과 함께 영원히 가겠다.’ 이게 적그리스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이르느냐 하면, 인간들이 믿는 그리스도가 바로 적그리스도였다. 왜? 나를 부정하지 않으니까.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결정적 차이는 적그리스도에게는 성령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성령이 안 나와요. 성령세례는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거든요. 사건이 터져야 돼요. 성령이 내려오는 사건. 인간 쪽에서 메시아를 못 잡아요. 왜? 분리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세계, 인간이 들어가봤자 살 수도 없는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실 때는 인간의 모든 기대치와 예측을 피해가면서 오시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은혜라는 거예요. 은혜는 인간이 예측한대로 오질 않습니다.
성령께선, 특히 요한일서에는 그래요, 이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역 또는 영역은 인간 바깥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 안, 그 안에서는 철저하게 인간적이죠. 철저하게 인간적이에요. 인간에겐 적그리스도가 없어요. 인간은 그리스도도 본인이 선택하기 때문에 세상에 적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아니,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이단이라 하는 교회가 어디 있어요. 이단은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거죠.
주님께서는 “너한테 성령 갔다. 그거 받았나?” 이렇게 합니다. 성령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그 성령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죠. “아들 예수의 피”죠.
예수님의 피가 왜 흘려졌습니까? 무엇 때문에 흘려졌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긴 피거든요.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긴 피입니다. 완벽하게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피에요. 완벽하게.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음이 완벽하게 명확해진 게 피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미 끊어진 그 끊어짐을 가져와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걸 들이대는 거예요. 성령께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아버지하고 함께 있었잖아요.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령이 있었어요.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오면서 명확하게 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고 이미 그 관계가, 제3 제4 누구도 끼어들 수 없고 그 관계가 그 자체로 확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언약, 그 중간에 그걸 준비하신 분은 성령, 그 구조 그 틀을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는 분리. 그런데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분리되었다는 그 피를 성령과 동반해서 찾아오게 되면 그것은 그다음부터 피 가운데 예수님과 서로 사귐이 생겨버려요. 피 가운데서 사귐이 생겨버려요. 이미 분리되었다는 그 사실이 재료가 되어서 사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피 앞에서 내 구원 시도가 성립이 됩니까, 안 됩니까? 그 피 앞에서? 성립이 안 되죠.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성령은 제자들을 구원하는 용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메시아가 참된 메시아인지를 증거해야 될 사명이 제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진짜 메시아,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진짜 그리스도의 차이점은 뭐냐? 피를 생산한 창 자국과 못 자국과의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미 예언했어요. 마지막 때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도 나가지 마라. 모조리 다 적그리스도에요. 주께서 오실 때에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게 아니라 완전히 세상이 다 깨지면서 찾아오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무대 세팅한 거거든요. 무대장치란 말이죠. 무대장치를 찢어버리고 이걸 완전히 허물어버리고 오는 거예요.
‘예수님에게는 이항대립이 없다.’ 서로 반대되는 두 항이잖아요. 이야기하는 사람 있으면 들리고 없으면 안 들린다는 이항대립구조가 환청 들리는 사람한테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 당신들한테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안 들리지. 문제는 나한테 들린다는 게 문제잖아요. 나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 이 말이죠. 그래. 물세례는 있어도 성령세례는 없다. 그런데 나는 성령세례 받았는데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할 건데요? 그건 10분 뒤에.
인간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적그리스도이고 주님께서 그걸 염두에 두었죠. 예수님께서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 자신이 떠난 자리, 인간의 한계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버렸어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여러 명의 적그리스도가 시대마다 다 나타나게 했어요. 적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없어요. 인간에게는 메시아나 필요하지, 적그리스도가 필요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필수적으로 적그리스도가 존재해야 됩니다. 적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적그리스도가 한 종류가 아니고 여러 종류가 나왔어요. 어느 게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서로가 서로를 베끼기 때문에. 인간에게 인기 있는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베꼈기 때문에 도대체 적그리스도가 취향 따라 시대 따라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요. 한결같이 그들에게는 성령이 안 나온다는 것, 다시 말해서 피가 앞장세워지지 않는 그리스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을 아예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그런 내용은 적그리스도에서는 나오지 않죠.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접촉점을 가져야 되는데 접촉점 자체를 없애버렸으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이점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만일 거예요. 그러나 그 불만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 군데만 더 찾아보면 사무엘상 2장 16절,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은 엘리 제사장 아들들이, 옛날엔 제사장이 최고 권력자였으니까 요새 같으면 재벌2세나 3세쯤 된다고 보고 제사하는 데에 가서 맛있는 고기 부위를 내가 먼저 먹겠다고 지금 먹고 싶다 해서 강제로 뺏는 이야기이고, 아간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여리고 전쟁하고 난 뒤에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아간이 몰래 빼돌렸죠. 삥 뜯진 않고 몰래 빼돌렸죠.
지금 이 두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어느 인간이 아간을 욕할 수 있습니까? 어느 인간이 엘리 아들들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아간 요소와 엘리 아들 요소가 모든 인간에게 다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그리고 기어이 그것을 인간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아간, 이 아간의 행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돌로서 아간을 쳐 죽였잖아요. 쳐 죽일 때 아간을 뽑는 그 과정을 보세요. 아간을 뽑는 과정이 하나님께서 “아간, 너 나와!” 이렇게 뽑은 게 아니고, 전체 이스라엘을 다 모아놓고 제비뽑아서 뽑은 거예요. 제비뽑아서. 그리고 그 뽑힌 아간을 돌로 쳤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인간이 본인을 돌로 치지 아니하면 어떤 전쟁에도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나를 향하여 돌을 치지 아니하면 어떤 자도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거예요. 천국은 들어갈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곳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돌로 치지 않아서 그래요.
자기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했을 때, 그때 하나님의 활동이 그때 보이는 거예요. 내가 먼저 죽을 때, 나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눈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성도를 가지고 소위 살았다고 큰소리치는 세상나라 지옥나라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식으로 일관성 있게 계속 지속되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나와 나 사이를 단절시킬 때, 비-연속성이죠, 연결시키지 않고 단절시켰을 때 이게 마땅하고, 하나님만이 연속성을 지닌다. ‘하나님만이 쉬지도 않고 계속 힘차게 일하신다’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만약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 내 하는 일이 필연이 되어버리고 내 하는 일에 대해서 소기의 성과를 자꾸 노리게 되고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다 날아가버리는 거예요.
나는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우연적 존재입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고 싶네요. 인간은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를 분리 안 해요. 인간은 분리가 없고 대신 소외를 느껴요. 인간은 소외를 느낍니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 자기가 엄마, 아빠 사랑을 다 받을 때 그게 자기 자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둘째 애가 태어났을 때 먼저 태어난 애의 시기, 질투가 뭐 대단하죠. 일부러 동생을 괴롭혀보기도 하고 아빠, 엄마의 모든 사랑이 동생한테 다 가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럼 뭘 느끼는가? 내가 알고 있는 나로부터 뭔가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죠. 이건 분리가 아니고 그걸 ‘소외되었다’ 합니다. 소외되었다는 말은 내가 알고 있는 내 쪽에 어떤 구멍이 생겼다, 빈터가 생겼다, 뭔가 마저 채울 수 없는 허점이 발견되었다. 그게 소외입니다.
이 소외된 빈터를 인간은 뭐로 채우는가? 향락, 이걸로 채워요. 향락(享樂), 주이상스(jouissance)라 하는데 이 향락이라 하는 것은 마냥 즐거운 쾌락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 향락이란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것은 내가 나로 인하여 한껏 즐거웠던 그때 그 시절의 기분, 느낌을 말해요. 내가 내 만족에 빠져가지고 한껏 즐거울 때 그때 그 기분.
그 빠진 부분, 향락이 빠진 부분을 a라 합시다. 이 a가 빠졌으니까 소외를 느끼겠죠. 이걸 어디서 찾느냐 하면 큰 어른(대타자), 큰 남한테 이걸 찾아요. ‘혹시 비어있는, 나의 나다움으로 즐거웠던 그 즐거움을 당신은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요청하게 되죠.
자, 여러분께 묻습니다. 이 큰 어른, 제일 큰 타자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바로 신이죠. 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왜 찾는가? 내가 나에 대해서 스스로 완벽한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성경을 본 이상 소외의 빈터가 더 늘어났죠. 차라리 몰랐으면. 절에 갔으면 이런 걸 모르잖아요. 절에 갔으면 불경만 외우지, 이런 건 몰랐잖아요. 종교 바꾸고 교회 와서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 9절, 10절 보니까 야, 이거 예수 안 믿으면 작살나는 수가 있겠다. 누가 손해나는 거예요? 내가 손해나죠. 가만있지 못하겠죠. 어떻게 해야 돼요? 믿습니다. 이래야죠. 믿습니다. 누굴 위하여? 나를 위하여.
여러분, 적그리스도가 적부처가 아니에요. 적부처가 아니죠? 가짜 부처 아니에요. 뭡니까? ‘적’ 그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죠. 그리스도. 나를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후서 2장 3-4절,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방금 2장 4절 보셨잖아요. 1장 8절, 9절 보셨잖아요. 2장 4절 같이 봤죠? 그럼 딱 보는 순간, 뭐는 거부하고 뭐는 받아들이고 딱 계산 섰죠? 1장 8절 복음은 받아들이고 뭐는 거부한다? 적그리스도 이것은 거부하면 된다, 딱 섰죠. 그런데 2장 9절을 봅시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나타나죠.
그러니까 1장 8절, 9절, 2장 4절, 그리고 2장 9절, 모든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더불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예언에 의하면 적그리스도, 거짓 기적들이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마구 마구 채워줬다고 한 거예요. 채워준 거예요. 그러니까 2장 9절 같은 사단의 역사는 피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그런 논리가 등장하죠. 문제는 피할 길이 없다는 거예요. 왜? 내가 원하는 걸 주는데 내가 그걸 피해요? 내가 원하는 걸 주는데.
그 제사 고기가 맛이 없으면 우리는 그렇게 안해요. 맛이 있으니까 그러죠. 내가 재벌 3세인데 맛이 있다. 그럼 강제로 그걸 먼저 빼앗아 먹는 겁니다. 사람이 이미 내가 나를 위해서 살겠다고 굳어져버리면 악마의 유혹과 악마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그걸 거부할 능력은 상실되어 있습니다. 없어요.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에. 악마는 천사입니다. 인간보다 더 똑똑해요. 우리가 뭘 원하고 있는지, 소외를 채울 빈칸 향락을 원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악마가 알고 있다고요. 알고 있으니까 이걸 채워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큰 어른, 우리는 신을 믿잖아요. 신에 대한 복음을 믿잖아요. 큰 어른을 왜 믿습니까? 내가 소외되었으니까.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니까 소외되었으니까 큰 타자에게 기대고 나중에 천국까지 보장 받겠다 하잖아요. 이 사항을 사탄이 모르겠습니까? 적그리스도가 바보입니까? 인간들이 이걸 원하고 있다는 걸 적그리스도가 모르겠어요? 아니, 뱀 같이 지혜로운 악마가 인간의 속셈을 모를 리 있습니까? 인간의 속을 장악하고 있는데. 다 알죠. 아니까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예요. 성경구절가지고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겁니다. 성경 어느 구절에 뭐 있고 어느 구절에 뭐 있고 믿으면 된다 다 해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어떻고 666이 어떻고 다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 적그리스도가 못하는 게 하나 있어요. 모든 기적과 원하는 걸 다 해주는데 인간이 원하는 성령은 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원하는 영을 주는데 그건 악령이 되겠죠. 하나님이 원하고 예수님의 피를 앞장세우는 성령은 악령의 힘으로도 그걸 주라 마라 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다 할 때에 악마는 충분히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끼어듭니까? 악마하고 인간 사이에, 베드로가 악마한테 안 붙잡히려고 몸부림을 쳤습니까? 아니에요. 칠 수도 없고 쳐도 소용없어요. 그냥 끌려가는 거예요. 악마가 베드로보다 더 세니까.
그런데 악마보다 더 센 분이 개입했죠. “사탄이 너를 알곡삼기 위해서 요리조리 요리를 하고 있는데 내가 내 기도를 함으로써 너는 거기에 끌려가지 않게 되었다. 예수님 내가 너를 지켜준다.”라는 말을 누가복음에서 하고 있습니다. (눅 22:31-32)
아담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정신분석학적으로 자기 소외된 것, 자기의 영원한 기쁨을 찾고자 하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누가 극복해주십니까? 예수님이 피의 능력으로 이걸 극복해주시는 거예요. 피의 능력으로.
네가 예상 못한 기쁨, 네가 예상 못한 감사, 네가 상상도 못한 세계가 예수님의 피와 사귐 가운데서 이미 마련되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내가 나로부터 소외가 아니라 내가 나로부터 ‘분리’되는 거예요. 아담 안에 있는 나와 예수님 안에 있는, 창세 전부터 택하신 예수 안에 있는 나와 분리되는 거예요.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야곱이 선택을 받은 거예요. 예수 안에서. 나와 나의 분리의 원형은 인간 속에서 인간이 나온 분,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인간 속에서 나온 그 인간, 인자죠, 인자,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인간과 분리시켜버렸어요. 그러니까 잉태되고 그다음에 분리되고요. 잉태되고 분리되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그다음 부활하시고 하늘 우편에 앉으시는 승천되시고.
잉태→분리→죽으심→부활→승천. 잉태되고 죽으시고 죽었는데 빈 무덤 되고 부활하시고 승천했다 할 때 필수적으로 중간에 들어가는 게 뭡니까? 인간에게서 나와서 인간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나 우리나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거든요. 인간은 인간이로되 인간은 아닌 것,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항 대립이 아니라 했죠. 이항 대립은 뭐냐 하면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이런 거예요.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이게 이항 대립이에요. 이 이항 대립은 동양 철학에서도 음양론으로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는 ‘나는 빛이고 너는 어둠이라’ 할 때, 이 이항 대립은 누구 편에서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간에서 인간으로 분리된 예수님 쪽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빛이고 너는 어둠이라 하니까 난 예수 믿어서 빛 되고 어둠 안 될래,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그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에게서 나왔지만 인간에서 분리된 예수님이 이런 빛과 어둠과 낮과 밤을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고 나쁜 고기, 좋은 고기, 양과 염소를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지옥 갈 사람과 천국 백성은 달리 분리시키고. 누구 입장에서요? 예수님 입장이에요.
1마리 양이 99마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왜? 분리를 보여주거든요. 분리.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거든요. 예수님 자신을. 99마리는 분리가 없어요. 분리를 체험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1마리 양은 잃었다가 얻는 과정이 있어요. 절차를 보여준다고요. 잃었다가 얻는 것.
누구든지 잃었다가 얻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내가 나한테 잃어버리는 것을 성령세례라 합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릴 때, 그것도 기쁘게 잃어버릴 때 그것이 성령세례에요. 나와 분리된 분이 내 바깥에 계신 분이 죽은 나를 바깥에서 건지는 거예요.주께서 바깥에서 건지는데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막 5:41) “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잔다.” 하는 것은 인간과 분리된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이에요. 일방적 주장. 말씀은요,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 그냥 밀어붙이기에요. “얘는 구원받고자 얼마나 애써도 소용없고 내가 창세 전에 예정했기 때문에 너를 백성으로 데려간다.” 하는 것은 우리보고 납득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거예요. 일방적인 것.
‘물론 주님도 선택했겠지만 나도 주님을 선택했는데.’ 이렇게 나올 거 아니냔 말이죠. 그러면 한평생 살아가면서 무엇과 무엇이 나누어지겠습니까? 분리되겠습니까? 교체되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선택했다’는 사실과 ‘아니다. 그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를 선택했다.’는 두 가지 사실 가운데서 그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태와 사건들, 길가다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까지 합해서, 집에 오는데 갑자기 배가 아픈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태가 나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전에 배 안 아플 때도 주께서 선택해서 배 안 아프게 했다는 것을 순간순간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깨닫게 하죠.
그러면 사나 죽으나 우리의 몸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약간의 내 것? 아니죠. 그 순간만큼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죠. 살아질 때 주의 것, 이건 쉬운데 문제는 죽을 때 주의 것으로 죽는다는 이것은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하기에는 굉장히 난해해보이지만, 막상 또 주께서 은혜주시면 ‘주의 것 데려가는구나.’ 하고 가뿐하게 주님께 넘길 수가 있습니다.
매일 성도의 삶은 주께 넘겨지는 삶이에요. 그런데 넘겨지기 전에 우리가 한고집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이 내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나의 기쁨, 사는 즐거움 이걸 우리는 안 놓으려고 해요. 이게 우리의 옛사람, 육신 때문에 그래요.
감사한 것은 모든 것이 결국은 말씀이 승리한다는 것. 내 고집보다도, 나의 소외보다도 말씀이 승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한 텀(term), 한 텀만, 짤막짤막한 에피소드, 그걸 일화라 하는데, 에피소드만 보여주는 인생이지만 그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살아계심입니다.
이것을 늘 에피소드 끝날 때 알아요. 끝날 때 복기해서 알아요. 되돌아보면서 아는 겁니다. 아, 천국은 내가 미리 살 수 없는 곳이고 미리 들어갈 수도 없고 내가 알지 못하는 나라, 그 나라에 가게 하시는구나.
그러면 성도가 할 것은 내 고집과 피를 앞장세우시는 성령, 기름 부음이 성령이니까, 성령과 일처리가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매일같이 경험하면 되죠. 그건 뭐 어렵지 않죠. 내 뜻대로 되었는데 전혀 기쁘지 않고 모든 게 만사형통했는데 전혀 내 향락, 내 욕구가 만족스럽지 않아요. 분명히 내 기분이 좋아야 되는데 기분이 안 좋아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뭔가 찝찝해.
이유를 알아보니까 말씀 앞에 보니까 내가 오만했어. 내가 교만했어요. 하나님의 성도니까 이제는 내 기도 응답되고 내 뜻대로 주께서 내 편에 서니까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잠시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한 거예요. 절대로 주님은 우리 뜻대로 하지 않고 성령의 뜻대로 하고 성령은 누구 뜻대로? 예수님의 뜻대로 하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거예요.
마치 옛날 예수님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그것을 그대로 우리 인생에다 새겨 복사를 하고 박아 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내 만족을 위해서 내 소외를 만회하고 내 빈칸을 마저 채워서 나도 룰루랄라 즐겁게 사는 보람을 느끼고자 하는 일에 우리가 매진하는데 그 일의 진행과정에서 나 말고 성령의 개입을 우리가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적그리스도와 무관한 진짜 주님과 함께 관계있는 성도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러니까 매일이 성경적인 삶이에요. 그거는 매일 성경 보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말씀과 턱없이 나밖에 모르는 인간과 늘 매치시킵니다.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디에서도 늘 그걸 맞닥뜨리게 하는 거예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했죠. 히브리서 12장 22절, 하늘에 있는 시온산에 가면 천군 천사와 많은 교회들이 같이 살고 있어요. 이미 같이 살고 있어요.
여기(하늘)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흐르지 않아요. 그러나 이 밑에는 시간이 흐릅니다. 이 자리(하늘과 땅의 경계)에 스데반 집사를 집어넣어봅시다. 스데반 집사의 특징은 성령을 받은 거예요. 성령을 받았으니까 스데반 집사의 팔다리에 돌멩이들이 날아와요. 이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왜 던집니까? ‘너 곧 죽을 거야. 너 죽을 거야.’ 때문에 죽이는 거예요. 돌을 던지는 거예요.그들이 돌 던지는 것은 물론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이단이기 때문에 던지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이 순교는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당한 순교를 되풀이하는 거예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와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하늘에서 일어서서 스데반 집사를 기다렸죠. 그러니 예수님이 함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긴 사지, 지체가 되는 거예요. 지체. 이름은 스데반 집사이지만 스데반 집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손이고 팔이고 사지라 보면 돼요. 하나의 코고 눈이고 그렇게 보면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인 줄 알고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한 거예요. 예수님을 죽이려고 돌 던진 자가 누구죠? 어디에 속합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죠. 마귀에 속한 자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 바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적그리스도 메시아, 메시아도 아닌데 가짜 메시아를 여기에 유포시켜서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있는 이 세상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지금 성도들과 함께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께서 살아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질 거예요. 자기만족에.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천당은 갔고 슬슬 기도해서 복이나 받아 부자나 될까. 아간의 모습, 딱 내 본모습이네. 엘리 아들 모습. 나도 권세 있어서 하만처럼 권세 좀 부렸으면 좋겠다. 모르드개 이 사람 좀 이상한 사람이네. 죽으면 죽으리라. 태어났으면 뭐 한가닥 해야지, 왜 죽으려 해. 납득이 안되네. 스데반 집사는 그거 좀 양보해가지고 예수 안 믿는다 하면 되고 나중에 산에 가서 ‘예수 믿는다~ 난 자연인이다~’ 하면 될 거가지고 괜히 보는 데서 예수 믿는다 해서 왜 얻어터지고 그래.
자, 이런 이야기가 뭐냐 하면 이중성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과 지상에 아들을 보냈죠. 그러면 신이 두 분이에요. 성령 빼놓고. 하나님 계시고 이 땅에 예수님 계시고. 하나님이 둘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악마와 함께 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도저히 도저히 상상도 못한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두 분이기 때문에 성도도 두 개의 자아가 되는 거예요. 돌 맞는 스데반과 이미 예수님 안에 있는 스데반과 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위에서 때리라고 부추겨야 되는가? 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나에게, 이 육신이 우리를 자꾸 유혹하죠. 육신이 타고났으니까. 그러면 위에 있는 사령부에서 가만두지 않고 떼찌 떼찌를 하는 거예요. 일이 그렇게 안 되도록 하는 거예요. 일이 그렇게 안 되도록.
예를 들겠습니다. 이 예 안 들면 찝찝해서 못 마쳐요. 찝찝해서 해답 없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은행 다니면서 돈이 급해가지고 한 천 만원 다음에 메꾸면 된다 하고 천 만원 횡령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왜 나쁜 짓을 했느냐?’ 이렇게 물을까요, 아니면 ‘네가 십자가가 기쁘냐?’ 이렇게 물을까요? 어느 쪽을 물을까요? ‘네가 예수 믿는 자인데 왜 돈을 탐내? 돈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을 알아, 몰라?’ 이렇게 할까요? 아니면 ‘십자가가 기뻐, 안 기뻐?’를 묻겠습니까? 어느 쪽을 묻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와가지고 나한테 벌 내리면서 ‘천만 원 횡령했으니까 네 집에 이천만 원 날라가라!’ 이런 식으로 할 거라는 예측은 누가 해요?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 있음, 없음을 내가 알아채려는 그 시도를 주께서 무산시켜버립니다.
그거 말고 ‘네가 지금 기쁨이, 주님 십자가 죄 용서 기쁨이 없기 때문에 네 생각이 엉뚱한 데 가 있구나. 다시 한번 네가 십자가를 알아봐. 그 돈 훔치고 안 훔치고 그게 아무 의미 없어. 너는 애초부터 네가 무의미한 것을 기뻐해라.’ 이게 바로 복음이 주는 기쁨입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인도해요.
‘상관하지 마. 내 피로 이미 네 죄 용서했다.’라는 이 기쁨이, 알고 있지만 상상도 못한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은 주께서는 우리 행동을 보고 딱 찾아오는 겁니다. 나는 잃어버린 너를 얻었다. 어깨에 메고 “기뻐, 안 기뻐?” “기뻐요.” “그럼 돈은 너 먹어라.” “(울상 지으며) 이거 돈 횡령 재미 하나도 없어.” “그렇지 그럼. 재미있는 게 있는 줄 알았어? 죄 사함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는데.” 이렇게 되겠죠. 해답됐죠. 이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가지고 우리가 예측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인생을 미리 재단하지 않게 하옵소서. 단정 짓지 않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께서 이끄는 그것이 잃어버린 것을 얻는 주님의 살아계심의 흔적인 것을, 저희들 이제 그 흔적만 보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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