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구원방식

아빠와 함께 2023. 11. 1. 18:49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자기밖에 모르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께서 어떻게 구원하는가? 아까 힌트를 줬어요. 인간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인간 속에 악마의 정신이 있죠. 악마는 어떤 자세입니까? 벌써 당했죠. 예수님께 당했잖아요.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대들면서 원한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원한이 있음으로서 예수님은 그냥 이 땅에 곱게 사신 분이 아니고 그 악마의 상처로 인하여 주님도 상처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창세기 3장 15절을 중심으로 한 현실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된다는 말은 주님이 갖고 있던 상처 있잖아요. 아까 제가 메시지 답변한 것처럼 상처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줘요. 집어넣으면 이미 우리는 우리 상처에 예민해요. 우린 아픈 게 싫어요. 왜? 부끄러우니까. 남들은 멀쩡한데 혼자 아프니까 내가 안 그래도 비정상인데 비정상인 게 티 나는 게 더 싫어요. 싫으면 그냥 싫습니까? 복수하고 싶어요? 어느 누구든 복수하고 싶어요. 아까 그랬죠. 하나님 앞에 복수하는 방법? 내가 스스로 자살하는 게 하나님께 제일 크게 대드는 방법이라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말씀이 우리를 이기거든요. 이기면 주님의 상처에 가까이 가도록 접근을 해줘요. 티눈 있죠? 티눈이 원래 아픈데 잘 안 보여요. 그런데 티눈 치료하는 약을 바르면 바깥이 허옇게 되면서 떨어지면서 티눈이 보이죠. 주님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주님의 상처가 보이는 쪽으로 일을 해요. 도마가 예수님 만날 때 한 것이 바로 그거였어요. 내 창자국 보아라. 내 못자국 보아라. 너는 네 상처에만 정신 팔려있지. 그러나 네가 너라고 하는 것은 마귀가 너한테 네가 절대적이라는 그 성질을 심어줬기 때문에 너밖에 모르지만 주님은 주님 나가 따로 있어요. 주님 상처가 따로 있다고요. 그래서

결론은 뭐냐? 내 상처와 주님 상처의 만남. 왜 만나야 되는가? 주님 상처는 누구 때문에 생긴 상처에요?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 하나가 전부다 주님에 대한 복수극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종이 되기 싫습니다. 나는 내가 주인이고 싶지, 그 외에는 어떤 누구의 종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조차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대로 그것이 다 이루어진 거라고. 우리는 반항할 대로 반항했는데 그것조차 주께서 다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거라는 거예요. 여기 p.256 봅시다. p.256 하기 전에 오늘로 이거 끝나는데요. 다음에 어느 책 할까요? 갑자기 물어서 그런데… 제가 일방적으로 정할까요, 다음에 어느 책 할지? 성경 말고 책으로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광고시간이었습니다. p.256 중간에

【관심사가 자신의 생존문제나 구원문제로 되돌아오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덮친 바 되어 자신의 거취 문제조차 문제가 안 될 지경인지를 묻게 한다.】자신의 거취 문제조차 문제가 안 된다. 내가 자살할까요, 더 살까요, 어떻게 할까요, 자체가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의하면 그게 문젯거리가 안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이미 너희는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이게 사랑이잖아요.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 참 쉽죠. 간단하죠. 우리가 고민할 필요 없죠. 우리가 남 걱정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우리가 우리 자신 걱정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 주님 안에서 움직여지는 거예요.

우리는 개인 개인하지만 사실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생활해온 거예요. 우리 인간들끼리, 우리 잘난 인간들끼리.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죄의 종, 악마의 종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우리 인간들끼리 우리 인간들 생각들끼리가 무슨 결과를 낳았는가 그걸 먼저 전제로 하고 성경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좋은 게 좋다는 게, 그 인간들끼리가 뭐냐 이 말이죠. 서로 돕는 사회, 서로 위로하는 사회, 이걸 교회에서는 서로 구원해주는 그런 사회 아닙니까. 이게 인간들끼리라니까요.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고 구원해주면 안 되는 이유가 이 ‘서로’속에 뭐가 포함이 안 되었어요? 죽음이 포함이 안돼서 그래요. 우리 죽어가고 있잖아. 그러니까 죽어가기 전에 열심히 주사도 맞고 열심히 해서 좋은 정보, 아이디어 있으면 같이 하자. 이게 우리 일상생활이잖아요. 그게 일상생활이고 그게 하나님에 대한 복수라고요. 대드는 거라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서로’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도우려고 시도했고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위로하려고 했고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서로 구원하려고 했다 이 말이죠. 네 주제나 파악하세요. 네 주제나. 너 이미 죽었어.
그러면 왜 사는가? 이미 죽은 자가 뒤치다꺼리하기 위해서 쓰레기 집어넣는 거 하라고 주께서 계속 살려두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주의 종, 예수님의 종, 의의 종이에요. ‘당신 누구요?’ 라고 묻지 마세요. ‘당신 누구 종입니까?’ 질문을 그렇게 바꾸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한테 분노하고 누구한테 화내고 복수하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나 잘되고자 하는 모든 일이, 모든 것이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우리 주님을 죽게 만든 동기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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