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5강요약-새로운 존재자

아빠와 함께 2023. 8. 10. 19:42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신6:25)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2:16)

신명기 25장 이야기하고 갈라디아서 2장 16절하고 왜 이렇게 안맞냐. 왜 틀리느냐? 도대체 사도바울은 무슨 근거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돼있는데 사도바울은 아주 단정을 해버렸어요.


 의롭다함이 없다면, 의인 앞에서 쓸데없는 쓸모없는 육체는 폐기되어야되겠죠.  이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겁니다.

인간의 육체를 폐기시킴으로써 죽여 없앰으로써 달성할수 없었던 의가 의대로 나타난다면 인간의 육체는 그만한 가치가 의미가 생겼다고 보는겁니다. 하나님은 의를 원하는데 그 의에대해서 인간은 의를 회개로서는 의를 달성할 수 없어요. 그러면 육체를 폐기하게되면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폐기하는 방법이 뭐냐?

폐기하는 방법. 폐기하는 방법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이 육체를 폐기해줄게 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인간의 육체는 의를 얻을 수 없어서 폐기시키는데, 폐기시키시는 방법이 율법으로 폐기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계속 남아있는 것이 율법남아있고 여기 율법남아있고, 율법이 계속남아있는거에요.

율법이 남아있으면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나타날 수가 없어요. 백성은 소멸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계시의 가르침에 의해서 구약을 이렇게 본겁니다. 백성은 없다. 하나님 백성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면 어떻게 없어야 되는게 마땅한데 어떻게 나타나느냐?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백성만드는 그 무대 (연극무대라 할 수있어요.)에서  율법자체를 제거해버리면 된다는거에요. 율법이 사람을 종으로 삼았거든요. 율법은 종으로 삼았는데 율법의 종에서 벗어날자가 없으면 종을 폐기하는 동시에 율법이 종을 폐기했기 때문에 율법의 본래의 취지가 살아났을 때 율법도 같이 동반해서 날려 버리는거에요.(동반폐기방식) 만약에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면 이것은 율법이 이미 처리된상태, 율법에서 관여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자가 등장하는겁니다.


새로운 존재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율법에서 죄인됐는데 새로운 등장 했다면,  앞에 등장한 예수님이 율법과 상관없이 처음에 됐기 때문에 여기에는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과 상관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렇게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율법과 모든인간을 결부시켜가지고 이걸 폐기시켜버리는 겁니다. 없애 버려요.

■따라서 "나 율법 말고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을게" 하는 그런 인간은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통과를 해야 되는데 통과하기 전에 율법이 슈슈슝  쏘아  모조리 저주받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 갈라디아서가 사도바울이 율법으로 구원받지않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않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할 때  구원이라는 것, 새생명이라는 백성이라는 것은 내 손을 떠났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내가 추구하거나 시도함 조차도 안되는 내 손을 벗어난 일이 된 거에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게 믿음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 21절.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죄인주제에 율법을 지킨다는 건 말도 안된다 이 말이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이래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 “그래 나는 율법 앞에서 먼저 알아서 길게. 항복, 항복. 나 죄인 맞습니다.” 이 행동, 이행동은 뭐냐? 은근히 뭘 노린다?  믿음으로 쉽게 은혜받아서 구원받으려고 그러한 꼼수를 쓰는겁니다. 그 꼼수가 과연 그 꼼수를 주께서는 왜 그걸 감안하고 왜 먼저 율법부터 들이미는 이유가 뭐냐? 이거모르면 복음도 율법화가 되버려요. 그 이유는 뭐겠느냐하면 율법이 죄의 종이 되어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율법이 옵니다. 죄의 종이 되어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모르잖아요. 죄를 모르니까 죄아래 있는 종? 이게 죄야. 이렇게 안살면 죄야 라고 율법이 성문화된 율법이 와서 언급을 해줘버려요. 언급을 해줄 때 인간들은 그 조항을 보니까 도저히 이거는 인간의 능력을 한계를, 한도를 벗어난거에요. 예를 들면 산상설교에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라.” 웃음밖에 안나오죠. 이 말이 안되죠. 주님 뭐 유도리 없습니까? 타협할 수 있는 방안 없습니까? 이런거에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이제 코인한사람 다 끝났어. 펀드 넣은사람 다 끝났어요 이제 천국은 다갔어요. 니가 겉옷을 가지고자 하는자에게 속옷까지 주어라. 물론 속옷까지 줄 사람 아무도, 냄새나기 때문에 줄사람 없겠지만 그뜻은 그게아니잖아요.

 예수님은 일점일획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신다는데  왜 인간을 율법에 꼼짝마라 매여있게 하는가? 인간은 자기에게 매여있기 때문에 자기의 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왜 나는 나의 노예인가를 몰라요. “ 니가 너의 종이고 너의 노예인걸 몰라? 너는 너에게 매여있어. 너로부터 탈출이 안돼. 그게 무슨뜻인지 모르지? 그러면 알려줄게.” 니 자리에다가 율법을 대체해서 집어넣어요.  감당이 안되죠.  율법은 1점 1획이라도 양보없고 협상 없습니다. 봐주는 것 없습니다.

 "너희가 너의 종되는 것이 너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죄의 종이라는 뜻이다. 너는 너의 종이라는 형식으로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밖에 모른다는 식으로 그 자체가 죄의 종의 상태인거에요. 그래서 그걸 죄의 종. 죄의자리에, 또는 내 자리에 율법으로 바꿔치기 해버린겁니다.

인간은 진리보다 행복과 위로를 더 찾습니다.  진리는 포괄적이고 전체적이죠. 그러나 행복과 위로는  사적이에요. 인간은 자기한테 매인 종이에요. 나는 나만 행복하면 돼요. 이게 자기 죄의 종이고 자기한테 매여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마딱드리는 그 상황은 사적으로 해결하는 사항이 아니고 집단화돼요. 개인주의를 허락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움직이는 거예요. 만약에 그 이스라엘이 전체로 움직여서 나중의 결과로 사적으로 혜택을 입는 방식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전체로움직여서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전쟁을 이긴다면 거기서 무슨 결과가 주어지는가?  없던 결과가 나옵니다. 패배한 상대방 국가가 종이됩니다.  아들은 이러이러하고 종은 이러이러하다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는 그 내용이 그대로 이스라엘 집단을 통한 전쟁을 통해서 이걸 현실적으로 펼쳐지고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하고있는 거에요. “니 종이 뭔질 모르지?  그들 어떻게 처리했어?” “종으로 다루었습니다.” “그게 바로 종이야. 그게 바로 종이라고.” 종과 아들은 같이 단짝으로 같이 등장해야되요. 아들만 있는 경우가 없어요. 베드로후서 2장 19절에, ”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자의 종이 된다. 이게 이긴자가 아들이되고 진자는 종이 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남은 역사를 그런식으로 짜여가게 한거에요. 그런식으로 진척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에요, 조치를.

출애굽기 4장 24절에 보면, 모세한테 애굽에 내려보내면서 하는 이야기가 “너는 이스라엘은 내 장자요 내 아들”이라고 했지요. 이스라엘이 오해를한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장자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인정해주는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덮어씌운 그 프레임은 아들 되는 조건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운거에요.  만약에 그 아들되는 조건에 그게 온전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종이 된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긴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종으로 전락되는걸 보라.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 봐라. 아들이라는 그러한 명분을 얻고 계속 아들 아들 아들 가는데  끝에  종이 되있었던 거예요. 여기서 무엇을 놓쳤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아들이라는 것을 직접 아들과 자기자신을 직접 연결시키느냐? 이게 바로 무지의 소치라는 겁니다. 직접 연결시키면 안돼요.  아들처럼 대우해 줘가지고  이방민족을 치는 그런 주인공 하다가 나중에 아들된 이유가 그 하나님 추가적인 율법이 나중에는 이방나라 치는것이아니고 이스라엘 내부를 쳐 들어가요. 이스라엘 내부에. 이스라엘 내부에 쳐들어가 보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자기 자신들의 자신들이 못 빠져나오는 자신들의 종으로 살고 있었던 거예요. 종으로 살고 있으면서 이걸 어떻게 감추었느냐 하면, 할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마치 종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부심을 갖게된 겁니다. 자부심을.

 

서서히 이제 갈라디아서의 내막이 이제 풀려나오지요. 어떤 사람이 성도가 되어서 천국 갈려면 하나님께서 명분을 줘요. 너는 내 백성 내 아들이고 넌 천국백성이다. 알려줘요. 알려줄 때, 정신차리고 그 말을 잘 새겨들어야 돼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니 속에 죄있다” 그걸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이야기해준 거예요. “니 속에 죄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참고로 해서 니 속에 니가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종으로 행세하는 그런 너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우리가 오늘날 성도잖아요. 성도가 천국에 도착하기까지 차곡차곡 쌓여있던 자물쇠를 열어줘요.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우리가 해결하는게아니에요.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절차를 일곱 개로 봅니다.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고 일방적으로 천국백성 했는가?  왜 그것이 우리 선에서 해결 못할 일인가를 앞으로 살아남는 생애 통해서 우리가 해결할 수 없고 우리가 나가 주인이고 나는 나의 종이고 나는 나밖에 몰라 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둘씩 그것이 풀어지느냐, 자물통이 풀어지느냐 이 말이죠. 일곱인이 하나하나 지워지듯이. 그 하나 탁 풀어질 때마다 감사와 고마움으로 터져 나오죠.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거예요.
“아, 이래서 내 행함이 안되는구나 이래서. 이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 지키고 율법 지켜서 구원되는 게 아니었었었 구나,”  ‘었었’을 한 6개 집어넣으세요. 그래서 나는 내 행함으로 구원되는게 아니었었었었구나 이렇게 되는거에요.

집안에 돈이 한푼도 없다. 근데 마침 성경을 보니까 “니 돈을 땅에 쌓아두지말라” 그 말씀 듣는 순간 “땅에 쌓을 돈도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거지로 만들었잖아요. 이말씀 왜줬는지 모르겠어. 땅에 쌓을 여분의 돈도 없어.” 그런데 그사람이 갑자기 무슨일이 벌어져가지고 1500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자산가라 하면 안되죠 부채가 2천이 되는데. 1500대의 순 자기재산이 있습니다. 있는데 또 “우연히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말라.” 미쳤어요? 이 1500이 어떻게 굴러들어왔는데 이걸 포기합니까. “거봐 니 힘으로 안되잖아 이게, 율법이.” 그러니까 니는 율법의 종이라는 말은 니가 니 죄의 종이고 그 죄가 뭐냐 나는 내 한테 들어온 것은 나는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스러운 인간입니다 그걸 티를 내는 거예요.

일단 챙기면 안 망하는거에요. 소유가 없으면 존재가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 소유의 테두리를 존재라고 해요. 소유된 것들을 둘러치면 그게 존재가 돼요. 그래서 소유된 것이 빠져나가면 존재감이 없어서 자살합니다. 자살하는 이유가 내가 챙긴 소유가 나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그 어떤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 했죠.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지 말고 동정하지 말라고요. 왜냐하면 어려운사람 동정하고 도와줬다는 것은 내 자신이 챙긴 것을 내 안 빼앗기겠다 라는 절실한 이기주의자 입장에서는 그건 뭐가되느냐 하면 율법을 지킨게 아니고 동냥을 해주는 거예요. 돈이 나간만큼 그만큼 내한테 들어오는게 있어요. 나의 의로움이 들어와요. 그러면 갈라디아서하고 정 배치되죠.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의롭다 될 수 없다고 준 게 율법이에요.

사람이 행함으로 사람이 행함을 오른손이 하는걸 왼손이 눈치챘잖아요. 내가 남한테 “그냥 가져가세요. 빌려주는게 아니고 그냥드립니다.” 문제는 그냥드린게 율법의 산상설교를 이룬게 아니에요. 왜냐? 그냥 줬다는 것을 내가 잊을수가 없어요. 왜? 나는 나의 종이니까. 나의 가치와 나의 의로움의 종이니까 나로서는 벗어날 길이 없는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없는데 왜 천국 백성 했습니까? 내가 했다, 왜? 그러니까 이게 감사가 나오는거에요. 아주 여러분 그런 동정해봐야 뭐 그런 경험을하지 동정해봐야. 야, 이게 안되는, 내가 이게 내 힘으로 천국가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부모가 되어가 자식이 어려울 때 팍 인심써서 도와주었습니다. “엄마 내 이자 쳐서 은행이자보다 못한 이자 쳐서 갚아 줄게.” 그 소리 듣고 “그래 갚아라” 이런 부모는 거의 없어요. 하이고, 어미가, 그것도 엄마가 아니고 어미예요, “어미가 되어서 자식이 달라 하는데 안주는 어미가 어딨노. 그 짐승도 새끼한테 그렇게 안 한다. 날 우예 보고 니가 날 모독하고 있구나. 그냥 가져가.” 그러나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치매 걸리기 직전에 “이것들이 안 찾아와? 내가 큰놈한테는 2억 주고 작은아 한테는 1억 줬는데 딸래미한테 는 5억쥐어 줬는데 이것들이 코빼기 안보이네 자식 키워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고, 내 팔자야” 갑자기 자기자신을 왜 치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잊지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심지어 내가 죽더라도 끝까지 본인 생각하면서 죽게 되어 있어요. 왜? 자기의 종이니까. 노예이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주지 말고 빼앗겨라. 주지 말고 빼앗겨야 되요. 왜? 그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종에서 빼내기 위해서 다른 타인을 준비해 놨다가 강제로 빼앗기게 하는 거예요. 그 빼앗는 자를 다섯자로 보이스피싱이라고 해요. 근데, 이 보이스피싱이 날로 진화를 해 서 요새는 자식들이 보이스피싱이고 나중에 나이 들면 손자까지 보이스피싱이 돼요. 한때는 목사들이 보이스피싱이었는데 이제는 교인들이 목사한테 잘 안 속아넘어가지요. “십일조 하면 복 받습니다” 하면 “언제적 사긴데 그게 언제적 사기야?” 요새 그런 사기 먹히는 교회가 어디 있어요. 점심 먹고 점심값 500원내고 1000원내면 끝나는거지. 율법에는 이런 거 이런 거는 내가 할 수 있고 이런 건 못한다는 것을 주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사실은 전에 99개를 했다는 것이 그게 지킨게 아닌걸로 들통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제대로 율법을 지키게 된 상태가 어떻냐 하면 “내가 나의 노예입니다” 를 자각하는 그 순간이 모든 율법을 이루는 순간이에요. “나는 율법에 의해서 종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보내셔서 구원하세요.” 이것도 이것도 뭐냐. 내가 내 한테 종이된 사람에 나오는 고백 이예요. 그러면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율법 자체를 치워 줄게.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를 그렇게 시달리게 했던 율법 자체를 내가 폐기시켜 버릴게. 됐냐? 폐기시켜버려요. 폐기시킬 때. 그러면 우리는 고맙지요. 이러거든요. 저스트 어 모먼트. 갑자기 영어방언 막 터진다. 잠깐만. 너도 같이 폐기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너도 같이. 이게 바로 율법으로 의롭다 할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대책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고요. 주님의 죽으심이 와요.

하, 이게 보통 어려운게 아닙니다. 뭐냐하면 죽음 자체를 새 피조물의 바탕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꼼수를 써요.  주의 말씀 무슨 뜻인지 몰라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거는 본인이 안 죽은 거예요. 본인이 죽어버리면 만약에 죽게 되면 자기에 관한 다음 계획은 죽음과 함께 날아가버려요. 그게 폐기에요. 율법도 폐기되고 동반해서 나도 폐기되고 둘 다 다 폐기된 거예요. 그러면 둘 다 다 폐기되면 그러면 구원받은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잖아 이렇게 되죠. 주께서 폐기를 시킬 때 뭐로 폐기하느냐 하면 율법과 더불어 나를 폐기시키고 나는 여기 율법의 종이 되는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의해서 율법 완성자가 와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지킬 게 없는 누구의 종이 아니고 예수님 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아들. 아들은 지켜서 얻어내는 게 아니고요. 아들은 그냥 상속자예요. 갈라디아서 4장 1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라고 돼 있어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7절에,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 니라” 이래 되어있어요. “상속을 이을 자”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신분 자체. 자리 자체를 아들의 자리로 확정 시켜서 성령께서 오실 때 아들로서 대우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아들로서. 아들은 종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지킬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공간을 제공해버려요. 공간 속에서 새롭게 발생 된 아들이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실 때 그 세례 받을 때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깐 하나님의 아들의 새로운 조건이 뭐냐. 육신은 죄라도 성령 오게 되면 아들 된다는 조건을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것을 모델로 제시한 거예요. 시범사례로.

 아브라함의 자손은 딱 하나 에요. 그 하나가 예수님 이고 예수님이 오신 하나는 죄 있는 몸 인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죄가 있는 육신을 가진 대도 불구하고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은 포기 해야되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어야 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0절 11절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게 복음인데 안 죽고 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복음 조차도 율법화시켜버려요. 그러면 그 율법은 복음이 아니고 단어는 똑같아요.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믿습니다. 단어는 똑같은데 그게 그사람에 의해서 다른복음이 되어버립니다. 이게 굉장히 난해한 이야기죠. 이 다른복음이 되는 조건이, 문자는 그 기호 형식인데요. 보통 책에서 이걸 기표라고해요.  그 기표, 기호의 형식은 똑같아요. 쓰라면 씁니다. 왜? 할머니들도 교회권사님들도 성경책 펴놓고 뭐합니까? 복사하는거죠. 그러면 다 구원받는거에요? 그 성경책 복사한다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요 그것은 보통 이단이 아니죠.  
뭐 그거 유대인이 안 한 줄 압니까? 다 했던 건데. 기호 형식은 동일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믿으면 너가 구원을 얻으리라. 이거를 달달 외워요. 잘 외우는데 문제는 그렇게 외운 내가 이게 그것이 그 복음이 내게 있는 죄의 종. 육신에 있는 죄의 종을 직접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말씀이냐? 아니면 나 이제 살았어 라고 하는 쪽으로 나오는 말이냐를 봐야돼요. 복음을 들었던 사도 바울이 뭐라하고 하느냐 하면,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고 이야기했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도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하면 그 사람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른 복음을 언급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그렇죠? 다른 복음을 통해서 뭘 이야기한다? 복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베드로가 뭡니까? 베드로가 사도잖아요. 다른복음 주장 할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사도앞에서는 베드로고 야고보고 뭐고 필요없어요 전부다. 갈라디아서 2장 13절은 바나바까지 이제 바나바까 외식되었도다. 다른복음에 말려들었다. 지옥간다 그런뜻은 아니고. 그사람 다른복음에 말려들었다는거에요. 사도는 뭐냐하면 이제 자물쇠를 탁탁 열어주는거에요. 이게 바로 복음이 아닌 거야. 한 개 제끼고, 또 열어주고. 계속 열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지적하고 바나바에게 지적했을 때 그 소문이 바나바나 베드로가 왔을 때 여기서 베드로가 바나바가 화를 내거나 분노한다면 둘 다 구원못 받죠. 근데 그걸 지적할 때 바나바나 베드로가 화낼 사람들입니까? 감사할 사람이에요? 감사할 사람이죠? 저거는 사도바울의 말이 아니야. 이건 주님의 말이야. 이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야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다음에 뭐라고 나옵니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이게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해요.  전부 사람의 말로 지가 분석해 버려요.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이 말은  말씀자체가 어떤 안에 있고 어떤 공간안에 있는데 어떤 자리안에 역사하는 거예요. 자리 안에서. 이 자리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내 것이 내 것이라는 것이 이 말씀안에서는 죄로 인정받는다는 이걸 통해서 내 것이 내 것이라고 우기는 이 개인의 육신이 도리어 이 안에서는 즐거울 요소가 되는 거예요. 기쁨과 감사의 요소가 되는 겁니다. 또 들켰네 또 들켰어. “역시 나는 안돼.” 하면서 웃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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