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의 일이 아닙니다. 주의 일입니다. -광주강의230623
우리는 정리할 자격도 없고 정리할 권한도 없어요. 주께서 사건화 시켜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특히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닙니다.
2. 말씀은 항상 주님을 경유해서 오기 때문에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가 본인 일이 아니고 ‘가라 오라’ 하는 주의 일속에 본인이 거기 소환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백부장이 가라 오라 할 때 본인이 나선 게 아니고 자기는 자기만의 일이 있고 자기만의 갈 일이 있고 올 일이 있는데 주께서는 ㉮그걸 압축하고 ㉯나를 제거해버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제거하고 끝나면 안되죠. ㉰주의 종으로 대체해버렸으니까 ㉱‘가고 오고 하는 이게 나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의 일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경유하는 거예요.
이것은 물탱크를 거쳐 오는 거예요. 7이레에 있던 것, 62이레에 있던 것은 전부다 1이레를 거쳐서 다시 부여받는 겁니다. 압축하면서 제거되고 압축되면서 제거되고. 그러니까 압축이라 하는 말은 ‘나는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에서 많은 일을 나에다가 집어넣고 나를 제거해버린단 말이죠. 모든 일은 내가 했습니다, 하는 나 자체를 죽여버리는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3. 성도는 자신이 복음이 작렬하는 현장임을 압니다.
4. 우리의 확정된 운명은 나 자신에게 내 운명이 맡겨진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이에요.
5.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 안과 뱀의 후손인 예수 밖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신앙인입니다. 모든 인간에게서 내뱉는 역사는 허구이고 허상이다. 어디에 근거해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룬, 그 십자가의 그림자일 뿐이에요.
㉮그게 이 세상을 악마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접수하도록 정복하도록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렇게 이끌어온 거예요.
㉯그런데 그 역사는 인간 쪽에서는 역사가 없어요. 없는데 누구한테는 있느냐 하면
㉰언약의 계보로서 구약성경이라는 역사가 주님에게 필요했던 겁니다. 주님에게. 주님에게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6.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 안에 십자가가 지금도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내가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나를 갖고 노시는 거예요. 모든 매사에 십자가의 효과가 드러나도록 주께서 우리 인생을 끌고 가시는 거예요.
7.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말은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가 ‘나는 십자가만 자랑해야지.’ 하는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고 오직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접수되었으니까요. 주님이 우리를 장악했으니까요. 이제는 우리가 자랑할 것도 이미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제공하는 거예요.
8.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쓰겠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인데 딱 두 자에요.‘자유’입니다. 이게 자유에요.전에는 내가 나한테 종이 되었는데 나와 결별이 된 거예요. 나와 이별하게 된 겁니다. 나와 헤어지게 된 거예요. 내가 나한테 손을 놓은 거예요. 손을 놔버리는 거예요. 목 딱 제키고 온몸으로 맞바람 다 느끼면서. 십자가 능력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한테 손을 놔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이불 손빨래하게 하신 것을 자랑한다.’ 이게 돼요, 안돼요? 이게 안되죠. 따라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 능력이 아니고, 주께서 이런 자랑을 내어 쫓도록 우리는 이불 손빨래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내 안에 쫓겨 나갈 것들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의 이 죄 있는 육신에서 계속 생산되는지를, 주님께 일임하는 그것을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니라, 주께서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우리는 어디에 충실해야 되느냐 하면 내 육체의 소욕에 충실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 봅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그럼 여기 조건이 있어요. 둘 다가 있어야 되겠죠. 그러면 우리 담당은 뭡니까? 육체의 소욕인 거예요, 육체의 소욕. 아, 이제 여러분 눈 좀 뜨이는 것 같아요? 감잡힙니까, 지금? 나 혼자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장소가 십자가의 장소가 되고 이 장소가 육체를 쫓아내는 장소가 되어야 돼요. 새로움이 새 부대에 담긴 포도주가 옛 부대의 포도주를 쫓아내는 현장이어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는 그 장소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그 모든 일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외밀이라 했잖아요, 외부와 내부가 함께 있는 것, 함께 있는 그분이 일을 하셔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께서 시켰거든 구애받지 말고 하세요. 뭐가 됐든지 하세요. 교사가 돼서 시위 현장에도 가고. 먼지 나거든 안가도 되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라는 것을 하세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하나 안하나 내 소관이 아니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비트> 영화의 주인공 정우성처럼 그냥 오토바이가 가는데 자기는 잠시 손을 놓고 싶은 거예요. 자율주행도 아니고. 그러나 우리는 지금 4등급 자율차를 타고 있어요. 4등급이 뭐냐 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딴 짓해도 차가 가는 거예요. 가는데 그렇게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인 제공을 제시해야 돼요. 그것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을 하는 거예요.
9. 시편 51편에 누가 봐도 다윗이 죄를 지은 것으로 보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완전히 위치가 바뀌어요.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구나. 죄가 죄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죄가 나를 사용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순간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두 갈래길, 두 개의 노선이 지금도 나를 가지고 유효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겁니다. 나온다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의 뜻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통해서 매일같이 나오는데 한쪽은 ‘죄가 나를 다루었다’가 되고 다른 한쪽은 뭐냐 하면, ‘약속이 너를 다루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두 개의 나로 구분하고 있어요. ①죄가 너를 다루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나는 나다’. 나는 나인데 그 현상은 ‘나는 내 안에 있다’ 이렇게 되고 ②번은 약속이 너를 다루어버리면 나는 내 안에 있을 때에도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 있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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