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장 7절 다른복음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복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한테만 해당 되는 거예요. 다른복음은 나를 구원하는 복음입니다. 있는 나를 하나님이여 사랑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해달라 이게 다른복음이에요 이게. 있지도 않은 걸 왜 구원해요?
율법은 나를 살리기위해서 있는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자체가 없기 때문이죠. 나가 없으면 뭐가있느냐, 우리가있지요. 하늘에 계신 그 주기도문 뭡니까? 우리 하나님, 우리죠. 나 빼고 우리죠. 그 나 자리에 주님 들어가는 우리죠.
나를 두고 우리는 주님과 경쟁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바로 내 구원을 위해서 해석을 그렇게 해 온 겁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5장 39절 모든 율법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한다는 그 예수님을 제거할 필요가 있는 거에요.
“예수님은 내 손에 꼭 죽으셔야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당신이 죽는 것은 당신을 제거하는 것은 이거는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감안 해주세요 라고 믿으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은 나에게 나에대해서 철저하게 방해자였습니다. 하여튼 내 하는일을 다 가로막았고, 나를 철저하게 구원받지 못하게 하신 그 예수님을 저는 찬양합니다.”
이 세상에는 복음이라는 것은 모조리 다 다른복음만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 인간세계의 현실입니다. 이걸 리얼리티라고 해요. 리얼 이걸 제껴버리고 있는 리얼리티에요.
리얼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에게는 리얼리티 현실만 있는데 현실은 뭐냐하면 언어에 의해서 납득이 되고 언어로 설명이되는 세계가 리얼리티 현실이에요.
인간의 말로 설명이 안되는 다른 세계가 리얼세계에요. 그걸 실제라고해요. 실제세계라고합니다. 실제세계라고하는 것은 이쪽에 있는 현실세계에서 만들어낸 거예요. 리얼리티에 리얼이 낀 거예요. 내가 니는 도대체 감당이 안된다 내 통제 밖이다. 그게 뭐냐? 우리 모습이고 내 모습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니 대신 죽었다가 의미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마태복음 9장에서 그런말씀 하셨죠. 그러면 우리의 역할은 뭡니까? 그 죄인됨에 충실하는거에요. 충성! 자기 죄인됨에 충성하는거에요
■"나는 나다 "라는 것에 충실한 그 죄인에서 충성하고 봉사하고 거기다 복종하는, 내가 나 한테 복종하는, 그게 바로 우리! 살아있는 악마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누가 발견할 수 있는가. 성령을 받는 성도만 자기자신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어요. 성도만. 모조리 전부다 남 탓이고 사회 탓이고. 나만 불행하고 남들은 왜 행복한데? 그렇게 해서 얻고자하는건 뭐에요? 나 안죽었어 그거잖아요. 우리도 똑같은 자예요. 똑같은 생각을 갖고있어요.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복음은 다른 복음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면 오직 다른 복음만 유통될 수 밖에 없어요.
나를 잘해주고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주는 교회 밖에없어요. 다른 복음만 전하는 교회만 있어요. 그게 무슨 교회냐, 리얼리티교회에요. 현실교회에요. 현실을 살면서 현실교회를 찾아야지 그러면 있지도않는 리얼 교회를 찾을 수 있겠어요? 없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된 거예요. 사도 바울은 죽었지요. 리얼리티 현실에서 죽은 자죠. 사도 바울 자살했습니까? 아닙니다. 사건이 터진 거예요. 자기안에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죽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안에서 나는 없는 채로 있고, 십자가에서 나는 죽은 채로 있고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죄인인 채로 살아있고, 그리고 이 십자가 안이 영생이 되는 것은 영생 되시는 주님이 거기에 살아 계시고 이래되는 거예요. 주님은 살아 계시고 주님이 내 대신 나가 되어버렸고.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함께 있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면서 내 아버지가 되었다.
1장 8절. “우리나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외에 다른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의 실제화, 저주의 구체화 가 있는데 그 계기가 뭐냐, 진짜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진짜 복음 때문에 이 리얼리티에 있는 모든 복음은 다른 복음이 되면서 저주의 정당성,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 처리, 취급 이것이 복음이 해야 될 일의 결과로서 이 세상이 아직 유효하게 유지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니까 잘 먹고 잘살아야 돼요. 그것보다 위대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최곱니다. 왜? 계속해서 내 안에서 다른 복음과 복음의 차이가 있어야 되니까. 그래야 나를 부정할 수가 있잖아요. 알뜰하게 살펴서 부정해야될 것이 계속 살아줘야 복음이 살아요. 철저하게 개인주의로 남이 죽든 말든 나만 살면 그만이고, 여기에 철저하게 해줘야 돼요. 갑자기 복음적이 되 버렸어요. 다른 복음은 복음에 예속된 겁니다. 진짜 복음은 숨겨져 있어요. 숨겨져 있는데, 진짜 복음이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다른 복음을 인정하는, 다른 복음이 내가 다른 복음에 속했다고 인정하는 성도의 출현이 진짜 복음이 실제 리얼 세계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내가 어떤 경우라도 다른 복음을 전할 경우는 없다는 것이 통용적인 상식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 말합니다. “니는 너를 몰라.” 너는 너를 모른다는 거예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니 안에 너 밖이 있다는 거예요. 외밀성이라고 해요 안에 있는 외부요소.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 안에 있는 외부요소. 따라서 여기에서 1장 8절에서 우리나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남이 전한 것 말고.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누가 저주 받는다? 내가 저주받는다 라는 말이 성립 되려면 안과 밖이 우리 안에서 공존해야 돼요.
왜 공존해야 되는가? 모든 인간은 악마가 그런 식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리얼리티 현실에 없는 악마가 이미 현실 인간 속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 속에 있는 인간들은 알 길이 없고 바깥에 있는 예수님만 아시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옴으로써 성령이 들어옴으로써 니 안에 마귀 있다 이렇게 하는 순간 이미 인간은 내가 죽는게 아니고 우리가 죽고 그 우리 안에 누가 포함 되어있어요? 악마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림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거 위에 옆으로 이렇게 두 개의 원환면, 토러스TORUS, 우리말로 원환면이라고 하는데요. 도너츠보면 도너츠 있는데, 여기서 주체와 타자가 있다. 인간은 누구든지 바깥에서 외부에서 누구가 응시를 해요 시선이라고 하는데, 누가 시선을 주게 되면 인간은 눈이 있잖아요. 눈이 있으면서 세상을 보죠, 현실을 볼 때를 이것을 시각이라고 합니다. 시각과 시선은 어디서 협상을 하느냐하면 여기 스크린이 있어요. 스크린에서. 인간은 혼자 있어도 타인에 응시되 있어요. 항상 결핍이, 결함이 있어요. 내가 자립은 했고 독립은 했고 개별자 되고 개인주의는 됐지만 이게 안에 구멍을 가진 거예요. 어떤 결함이 있어서 자꾸 외부에서 채워줘야 되는데 채워 줄려면 내 것을 양도하지 않으면 저쪽 것이 오지를 않아요. 타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스크린입니다. 이걸 가지고 환상이라 하죠.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이 보는 것은 환상입니다. 누가 있다고 여기고 환상 속에 있는 거예요. 그 환상은 어디서 나오냐? 인간의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 창고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기억의 뭉치를 가지고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 자아란 무엇이냐? 늘 착각. 남들이 날 이렇게 볼 것이다 늘 착각속에 있는겁니다. 어쨌든 여기 주체가 있고 타자가 있잖아요. 타자라 하는 것은 나의 이용물이 되어야 된다고 꾸준하게 고집부리는 나. 주님 오시면 이 타자가 누구였습니까? 이게 악마였습니다. 악마와 인간이 같이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어요. 이게 같이 망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공멸.
■이러한 시스템을 누가 그대로 사용하느냐하면 우리 주님이 그대로 사용하신 거에요, 주님이.이게 세례에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 니가 전에 니라는 주체는 악마로부터 함께 죽었는데 거기에 누가 뛰어든다? 예수님이 여기 뛰어든 거예요. 그리고 나보고 빠지래. 빠지고 내 주체 자리에 주님이 들어가버린 거에요. 대신 일을 하신 정도가 아니고 대신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자리가서 대신 죽었다는 말은 내가 엄연히 살아있어도 주님 보시기에 이미 뭘해도 소용없는 이미 죽은자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나는 죽었고, 나는 죽었고 할 때 사도바울이 얼마나 기뻤겠 어요.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죠? 그 죽었고 할 때 죽은 채로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살아있으면 무슨 일을 하느냐. 다른 복음이 이렇다고 설명할 수 있는 비로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있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주인공도 아니고 복음 자체가 나로 하여금 변화할 운명을 결정짓는 주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나라 할지라도 내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기뻐하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저주를 이야기하면서 그게 기쁨의 요소가 되는사람은 성도들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 지라도 그것을, 뭐 이거 신났어, 신났어. 사도 바울은 신났어.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신났어요. 여러분 주위 환경이 이미 천국이고 나는 그 속에있다는 좀 티를 내시기 바랍니다. 티 내는 방법은 뭐냐. 다른 복음을 설명하는 거예요. 누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다른 복음이 아니면 복음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해 놓고 입을 다무는게 아니고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에 대해서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10장 11절.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이게 지금 전도에 관한 겁니까 아니면 베드로를 가르치기 위함입니까? 내려오는게? 결과적으로 고넬료를 전도했잖아요. 그러나 전도하기 전에 베드로부터 수습들어가야 되겠죠. 베드로에게 뭐냐 “먹어라”했어요. 뭔가 보니까 못먹는거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저 그거 “율법에 준해서 먹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할 때 비로소 베드로는 전도할 준비가 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그 전도에서 자기가 빠질만한 요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요. 내가 감히 전도라는 것은 내한테 있을 수 없다는 자세를 갖추게 하시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전도는 누가합니까? 내속에 있는 외재적인 분이 전도하지요. 나는 전도 안해요. 근데 내 속에 함께 계신분 누굽니까? 나도 치고 내가 내 되기 위해서 내가 늘 응시했던 염두에 두었던 주체도 양쪽 다 치시는 분이 전도하시는 거에요.
※레위기 10장에 보면, 그 아론의 아들 둘이 죽어요. 그러고 난 뒤에 모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이 속죄제물은 먹어라했는데 니가 왜 불태웠느냐 라고 이야기했어요. 여기 아론이 나서요. 아론이 19절에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속죄 제물은 거룩한곳에 반드시 먹어야된다. 왜? 그게 너의 식량이 되기 때문이다. 모세 말이 맞죠. 왜냐하면 모세 말은 하나님 말을 그렇게 한겁니다. 맞습니다. 아까 그 사도행전 10장 한번 봅시다. 베드로가 거룩한 것은 먹지마라하는 것을 보자기가 내려왔을 때 베드로가 안먹었잖아요. 베드로 행동이 맞죠? 맞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게 틀린거에요. 왜 율법을 해석할 때 이게 왜 자꾸 하나님 보시기에 틀린 해석만 나오느냐 하는거에요. 왜 틀린 해석만 나오느냐?
예수 이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했잖아요. 그러면 주여주여 하면 뭐됩니까? 구원받지요. 주님 주의 이름이니까. 그러면 그 이야기를 했으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누구든지 주여주여 한다고 천국갈 일이 아니요” 라는 말을 굳이 할 이유가 없잖아요. 왜 성경이 사람을 헷갈리게 해요? 마귀와 함께 공멸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평소에 마귀가 그런식으로 해석을 해 왔던겁니다. 니가 말씀을 지켜 구원을 받는다고 평소에 마귀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고 다른 복음말고 진짜복음 믿으면 우리는 저주 받지않고 구원받는다는 글로 갈라디아서 봐 왔던거에요. 마귀가 그렇게 한 거에요. 우리는 막 여호와를 붙이고 형용사를 붙여요. 순수하게 순결한 마음으로 깊은 신앙심으로 온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쳐다보게되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우리는 그런식으로 우리 자신을 세뇌시켰는데 왜 우리는 복음마저도 그걸 율법화 시키냐 이말이에요, 율법화. 이게 뭐냐하면 이게 다른복음이에요. 이미 결정났는데 시편 82편 6절에서 이미 결정났잖아요. 우리는 망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율법을 지킬수 없는 겁니다.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복음도 율법화 시키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가려내서 그걸 뽑아낼 것인가
율법해석은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들이 해석할 수 있는 그 한계를 십자가가 넘어섭니다. 안과 밖이 같이 섞여있어야되는데 나는 내 안에 있는거는 내 안에있고 내 바깥에 있는거는 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할 때 이미 그게 다른복음이에요. 바깥에 있는 것이 내안으로 이미 들어와 버려야 되요, 이미.
구원을 받아놓고 사후에 내가 왜 구원받지 못한가를 구원받고난뒤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알게 되는거에요.
그래야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나라 할지라도 다른복음 전하면 나는 저주받지롱. 아주 신이나는거에요, 신이. 저주받는 이야기를 신바람나서 하는거에요. 신바람나서.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모든 사태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구원받았음이, 구원이 끝났음이 구원 받고자 하는 내안에 들어와서 같이 공존하는겁니다. 그게 세례요, 그게 연합이에요. 함께 하는거에요.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구원받는게 목적이었는데 이제부터는 복음을 증거, 주께서 하신 일, 안되는 일을 되게 하신 일을 증인하는 증인이 되는겁니다. 이게 사도행전 1장 8절 네가 성령이 임하면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니가 니답게 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증인말고 니 구원받은 증인 말고 예수님이 이런일을 행하셨다는 증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