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강-YouTube강의(짐 마태복음 11:28)20230718-이 근호 목사
제440강, ‘짐’. 짐이라면 성경말씀 중에 딱 떠오르는 게 있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이 말씀은 나한테 올 때는 ‘나한테 이렇게 무거운 짐이 있는데 이 짐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주님한테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는 사람들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그동안 자기 무거운 짐을 본인들이 해결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다는 것, 그걸 자인해야 돼요. 그걸 스스로 인정해줘야 됩니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 안하면 해결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철떡 같이 그동안 믿고 살아온 거예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많은 시험을 했겠습니까. 테스트를 했겠습니까. 내게 있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놓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벼락 같이 기적적으로 예상 못할 행운으로 내 문제를 깔끔하게 해소하는지를 은근히 고대하면서 하나님 믿는 척을 한 거죠. 그걸 간 본다 하죠.
내가 어느 정도까지 헌신하고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했을 때 하나님 쪽에서 나한테 어느 정도까지 문제해결을 할 것인가를 줄다리기한 거예요. 흥정을 하고 딜을 하고 밀당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 그것은 주께 오는 태도가 수상하죠. 잘못된 거예요.
주님께 온다는 것은,
■자기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그대로 있어야 돼요. 그리고 자기 쪽에서 그걸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내가 짊어진 짐이
■내 수고와 희생으로 해결되지 않는 짐이란 사실을 인정해줘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짐도 우리 스스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오늘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온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동안 너희들이 이걸 벗어보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애를 썼느냐? 그러나 너희가 편히 쉬게 할 짐이 아니고 주님이 해결해야 될, 그래서 너희들이 ‘아 주님이 해소했구나. 해결했구나.’ 그럴 때 비로소 편히 쉼이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을 표구사에 가면 액자로 해서 기독교 표구사에 많이 붙여놨죠. 집 현관이나 거실에 떡 붙여놓고 어떤 희망 같은 것을 거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짐을 진 우리와 예수님 자신과 일대일로 만나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죄 짐을 가지고 온 인간과 예수님 본인 사이에 무엇이 중간에 끼어드느냐 하면 아버지의 지시와 명령이 끼어들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야, 이리 와. 우리끼리 해결하자.’ 그렇게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무슨 혜택을 주기 전에 먼저 경유해야 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 짐을 지고 아버지에게 그 짐을 감당 못했다는 그러한 상태, 짐을 감당 못하면 그 짐에 눌려서 깔려서 돌아가시겠죠, 그게 바로 저주의 압박이죠, 주님께서 저주를 받아야 되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8장에 나와요. 문둥병자가 왔을 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문둥병자는 내막도 모르고 룰루랄라 신나라 했죠. ‘예수님 솜씨가 괜찮구나. 병 고치는 솜씨가 유대인보다 낫네.’ 이러고 갔는데 예수님은 그 뒤에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그의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진다고 되어 있어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인간들은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만 그 말씀을 이룰 수가 있어요. 방금 했던 것이 마태복음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할 때 편히 쉬게 된다는 그 결과가 어떻게 해서 편히 쉬느냐 하면, 내 문제가 해결돼서 쉬는 게 아니고 내게 있던 짐마저도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편히 쉬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라는 인생, 세월을 살았고 남들의 시선 앞에서 내 인생이 그럴싸해야 된다는 그런 심적인 압박감을 받지 않을 수 없죠. 길에서 누구 만나면, ‘요새 잘 지내나? 요새 너 뭐하는데? 요새 한 달에 수입 얼마 버는데?’ 이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압박감이 되겠어요. 부담되겠어요. 그러니까 빨리 성공해서 남 앞에 ‘나 얼마 못 벌어. 한 달에 뭐 이번 달은 천 오백밖에 못 벌고… 지난 달엔 이천 벌었는데 이번 달은 천 오백밖에 못 벌었어.’ 그럼 친구가 ‘와~ 너 성공했네.’ 그러면 ‘천 오백원. 지난 달엔 이천원.’ 만(萬) 하나 떼나 안 떼나 상대방이 잘못 해석하면 그건 자기 마음대로고.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짐이에요. 쳐다보니까.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예수님께서 쉬게 해주겠는데 조건은 뭐냐 하면 그 쉬게 할 때 네 짐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너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 마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 시작하는 인생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매일같이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나 얼마 벌었어’가 아니라 ‘주께서 얼마 주셨어’가 되는 거예요. ‘나 몸이 여기저기 아파’가 아니라 ‘주께서 여기저기 아프게 하셨어’. 항상 주도권을 주님 쪽에서 쥐고 있을 때 그 관계, 그 관계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 노선에 같이 합류하게 되는 그런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준다는 말은 ‘쉬게 해줄 테니까 너 혼자 따로 살아라’ 가 아니라 쉬게 해주는데 그 조건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그 사람이 함께 사는 조건 하에 편히 쉬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난 많은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네가 환난을 당하나 항상 기뻐하라. ‘나 짐이 없다’라는 그런 소극적인 태도 말고 ‘나 기뻐’라는 적극적 태도를 이야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주님도 몰랐죠. 하나님도 몰랐죠. 심지어 나도 몰라요. ‘그저 이 문제만 해결한다면 나는 어떤 신이든 믿겠습니다’는 식으로 자기중심으로 살았는데, 주께서 우리의 짐을 다 해결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애초부터 내 짐은 따로 없었고 주께서 나를 자기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거예요.
나에게 이런 인생의 힘들고 무겁고 어려움을 준 것은, ‘우리 새로 시작하자. 네가 아는 너 말고 내가 오늘 새롭게 만든 나로 새로 시작하자. 그래서 우리 함께 살자.’ 그러한 취지로 주께서 편히 쉬게 해주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