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강-YouTube강의(마음 고린도전서 2:9)20230704-이 근호 목사
제439강, ‘마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마음은 안 보이는데 뭐는 보이느냐 하면 육체, 육신은 사람들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내 육신대로 한다.’ 또는 ‘내 육체대로 한다.’ 그런 말 잘 안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마음먹은 대로 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음이 어디 있는데? 보이지 않는데 마음이 어디 있어? 마음이 어디 있는데 네가 ‘내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마음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서 그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거대한 로봇 안에 있는데 로봇은 스스로 못 움직여요. 그런데 그 로봇의 심장부에 그걸 조종하는 인간이 거기 들어있어요. 로봇은 인간보다 한 열 배나 크고 거대한 로봇 그 전쟁 기계를 안에 있는 사람이 들어가서 이렇게 조종하게 되면 로봇은 따라 조정되는 것. 안에 들어있는 인간을 마음이라 하고 바깥에 있는 것을 육신 또는 육체라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편하게 쉽게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눈에서 눈물이 나올 때 눈물이 뭐냐? 그걸 화학으로 분석해서 눈물이라 하지 않잖아요. ‘네가 왜 슬펐지?’ 라고 묻는 거예요. 눈물의 성분이 나트륨이 얼마고 H₂O가 얼마고 그렇게 성분 따져봐야 의미 없죠. ‘그날 그때 왜 슬펐어?’ 마음이 슬프니까 그 징조가 현상이 눈의 눈물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육체, 육신이 진정한 인간의 주인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걸 이용해요.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네 마음 안에 율법 있다.’ 이렇게 이용해버립니다.
‘네 마음 안에 율법이 있는데 네 마음 안에 율법이 오기 전에 이미 네 마음은 마귀가 너를 통제하고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그 통제하는 방식이 율법과 좀 닮았어요. 그게 선악지식이라는 겁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
그러니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께 법을 위반했을 때 그 마음속에 선악지식이 들어왔잖아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위반하지 않았을 때 인간의 마음은 뭐로 들어차있는가 하는 그 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선악지식 말고 그 전에 인간의 마음에는 뭐가 들어있었는가?
그 인간의 마음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어요. 좀더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것, 요구하는 것을 반응을 나타내서 수용할 수 있는 자리가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 마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돌한테 이야기하면 우리말이 안 먹히죠. 돌 속에는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그것을 너희들이 이해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에덴 낙원에 있는 모든 것은 따먹을 수 있되 선과 악을 아는 과일은 따먹지 말라”라는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인간에겐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있었던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필요한 체계로서 주었던 거예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마귀로 인해 범죄함으로 그 체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술술 수용하는 체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마의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은 이미 달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달라져 있게 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로마서 2장이나 7장에 보면 양쪽에 다 나옵니다, 이방인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주신 거예요. 그걸 양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양심.
로마서 2장 14절에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마음에 새긴.
로마서 7장에서는 아주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너희 속에 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선하고 싶은 그 마음에다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기에 보냈느냐? 하나님의 계명을 보냈어요. 계명을 보내서 인간의 마음과 마주하게 했을 때, 그때 우리 마음속에 숨어있던 죄가 자기에게 찾아오는 그 계명을 도리어 위반하고 반대하고 그걸 어기는 즐거움과 쾌락이 인간의 마음속에 작용해버려요.
말씀이 안 들어올 땐 가만있다가 말씀 들어오면 그걸 위반하는 어떤 쾌감. 위반함으로써 자기가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 이것이 인간 마음속에 잠복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안 보면 본인들은 굉장히 착한 사람이에요. 말씀 안 보는 보통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품위 있고 예의범절 있고 남 배려할 줄 알고 나도 가정교육 잘 받았다고 자랑질 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점잖은 사람, 인격적이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 자처하는데 희한하게 성경 말씀만 전해버리면 발작을 일으킵니다. 부들부들 떠는 거 있죠. 눈동자가 희번덕 넘어가고 바들바들 떨어요. 발작을 한다고요.
어딜 봐서 내가 죄인이냐? 그게 바로 죄인인데. ‘내가 어딜 봐서 죄인이냐? 말씀 그딴 거 안줘도 나는 지금껏 양심에 크게 위배되는 삶을 산 적이 없다. 나는 내가 품은 양심으로 천당을 가든 지옥가든 나는 나 하고싶은 대로 내 인생 내가 꾸려나갈 거야.’ 라는 말을 말씀 앞에서 복음 앞에서 분노하면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처음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형상이 아니에요, 벌써. 악마의 손에 넘어갔어요. 넘어갔기 때문에 주께서 건드려보는 겁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자존감이 센지.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어 있고 틀어져 있는지. 그것은 말씀을 전하면서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의 잘못됨,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맛이 갔다는 것에 결정타를 날리는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 나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마음)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인간이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는 인간의 마음 한복판에 진짜 마음에 의해 살짝 가리워진 마귀의 본성을 주의 말씀과 그리고 십자가가 그걸 건드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 나와서 말씀 잘 지키는 사람이 있지만 십자가 이야기하면 그다음 또 넘어가요. 눈이 막 뒤집어지는 거죠. “안다. 그거 안다. 교회 다니면서 십자가 모르는 사람 어디 있는데?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나는 믿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복음 아는 사람이 물어봅니다. “너 십자가 왜 믿는데?” “구원받으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길 원하신다. 모든 인간이… 디모데전서 2장이 어떻고 저떻고…” 한다고요. 그게 바로 십자가의 원수죠.
그래서 여기 보면 고린도전서 2장 9절,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그 불신자들은 자기의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 복음하고 엮어보려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십자가 안다, 복음 안다,…. 진짜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내 마음은 마귀 마음이었구나. 이제 알았네. 아, 그동안 내가 나를 안 적이 없었구나. 이렇게 내가 전적으로 마귀 마음인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 아니면 어떻게 알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감사가 나오는 그 마음이 이미 천국 간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