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특징은 요구하는데 반면에 성령님의 특징은 거저 주시는데 있습니다.
이는 자아의 자율권을 뺏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타자화’입니다. 나를 남으로 여기게 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약속의 땅을 앞두고 갈렙과 여호수아가 보여준 태도가 이런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들은 종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에 대해서 타인처럼 임합니다. 자신이 자기를 관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앞일이 본인으로서는 전혀 예상 못할 일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저 소멸되어야 될 대상자일 뿐입니다. 내가 나에게 타인이 되는 조건이 만족되면서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신들은 ‘아무나’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요.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님의 혼인 잔치가 나옵니다. 원래 초청할 자들이 자아의 일을 핑계로 임금님의 잔치에 참석치 않고 임금님은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하십니다.(마 22:10) 이들은 결코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아무나’일 뿐임을 유지해야 합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임금님이 주신 예복만 중요할 뿐입니다.(마 22:12-13) 이처럼 인간은 외부에서 불러주심과 찾아주심이 중요합니다. 이는 곧 자아의 무용지물을 뜻합니다. 더는 자아를 지킬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에 와서 귀신은 재물을 매개로 하여 인간들의 자아지킴에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의 반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돈입니다. 재물입니다. 소유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 인간세상은 돈이 통치하고 돈이 의미를 주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