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소멸하시는 은혜

아빠와 함께 2022. 7. 28. 14:22

소멸하시는 은혜 

2022년 7월 27일                     본문 말씀: 나훔 1:1

(1: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니느웨는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라는 제국은 그 시대의 마치 도사견처럼 보이는대로 닥치는 대로 주변 나라를 물고 뜯고 멸망시켰던 나라입니다. 묻지마 전쟁 기계 같은 나라입니다. 한때 이 나라는 요나 선지자의 심판 소식을 듣고 온 나라가 겸비해서 금식했던 것이 있습니다.

나훔 시대보다 약 70년 전의 일입니다.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7-8)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면 늘 겸비하게 살아서 다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바램일 겁니다. 하지만 은혜란 인간의 소지용이 아닙니다. 진정한 은혜다움의 작용은 그 은혜받은 자가 소실되면서 은혜만 남는 경우입니다. 즉 인간은 이 땅에서 마땅히 사라져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를 은혜답게 하는 겁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언약이요 예수님이요 복음입니다. 결코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안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기 것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니느웨 나라, 곧 앗수르 나라가 이 세상의 구심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비교해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심점이지 앗수르는 아닙니다. 니느웨가 은혜를 받아 심판이 면제된 것은 우회적으로 이스라엘의 근본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영원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사라질 판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벌써 사라졌습니다)

즉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내부에 영원하신 주님, 혹은 주님의 언약이 박혀있으면 됩니다. 바로 구약에서 그런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이 있음을 세상이 끝의 관점을 가지고 외쳤던 자들입니다. 아모스 3:7-8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외침에 대해서 세상의 반응은 싸늘하고 핍박이 들어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사리판별의 기준은 본인이 살아있음 외에는 다른 결정적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본인이 죽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이 사리판별의 기준으로 도입할 능력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정보라도 “내가 계속 생존하고 살아남는데 있는 유리할까 불리할까”를 우선 고려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왜 니느웨 사람들이 니느웨 사람들이 그냥 살게 놔두지 않는가?”를 의아해 합니다. 예를 들면,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를 왜 하나님께서는 용인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생각하는 것은 바탕으로 하지 아니하면 선지자의 말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보존을 우선시합니다. 그런 버릇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꾸만 나의 것을 탐낸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20:33에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을 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괜히 인간들이 자기 목숨과 가진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니까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도 협상과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이 정도 바치면 나머지 것에 손 대지 않으실거죠?”하는 식입니다. 시대를 해석하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늘날 지난 일제 강점기 때의 활동했던 사람들을 ‘친일파’라는 규정을 내립니다. 구한 말,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는 겁니다. 분명히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들 뿐이고 자기를 둘러싼 환경은 일본의 통치력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사라진 조선에 대해 미련갖고 살아야 합니까? 일제 시다 때에 어느 누구도 일본이 36년만 통치하고 다시 조선이 나라를 되찾는다고 생각할 경우는 없습니다. 36년이 될수도 있지만 36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 한복판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자기에게 유리할 겁니까?

당연히 조선이 그만 잊어야겠지요. 이게 가장 현실적인 처신입니다. 유명한 작가와 음악가, 교육가, 사업가, 특히 종교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시류에 맞추어 활동했습니다. 결코 그들은 본인들이 소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조선이 더는 없으니 친일파라고 규정한 자들도 또한 미래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겁니다. 하지만 이들의 잘못은 자신이 시대의 구심점이 아닌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구심점이었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말씀을 경고하시지만 우리는 그런 주님 앞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경계합니다.

1917년, 프랑스의 어느 전람회에서 시중에서 파는 남자 소변기가 작품으로 전시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소변기에는 R. Mutt라는 제자업자의 싸인까지 적어서 말입니다. 기존의 사람들은 예술작품이란 예술가가 직접 본인이 제작해야 되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가는, 예술작품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미술관이라는 환경이 결정한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미술계에 있어 새로운 발상이요 이것이 예술적 창조로 후세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오늘날의 선지자는 성령받은 성도들입니다. 날마다 소실되지만 영원하신 주님께서 날마다 성도를 살게하셔서 이미 확정된 우주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복음에 있습니다. 나훔 1: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이 말씀이 로마서 10:15에는 이렇게 적용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말씀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롭게 증거됩니다. 이런 식으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 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한 환경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환경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강-나훔 1장 1절(소멸하시는 은혜)2207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1장 1절까지입니다.

나훔 1:1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나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자기를 말하는 것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가 자기 이스라엘에 대해서 예언하는 것이 아니고 니느웨에 예언을 합니다. 니느웨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나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직접 가서 심판을 전했고, 그러자 그 니느웨의 왕부터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요나 선지자의 멸망의 그 이야기를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금식하면서 멸망 당하지 않도록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철회되면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약속한 심판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요나 3장에 보면 그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삐져서 이래서는 하나님일 못하겠다, 하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으려는 자살소동까지 벌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니느웨에서 일어난 일이 결코 니느웨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롭게 너희들을 그동안 이끌어 왔는지를 다시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외부나라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깨우치게 하는 일이 요나였습니다.

따라서 나훔이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니느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알아야 될 하나님의 본뜻을 니느웨에 대한 계시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 니느웨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거대제국이 되었는데 그 제국 이름이 앗수르라는 제국입니다.

이 앗수르라는 나라는 늘 하는 일이 뭐냐? 주변 나라를 아주 잔인하게 침공해서 빼앗는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앗수르 자기 나라를 크게 확장 시켜서 자기 통치하에 들어 있지 아니하면 아주 속이 상하는 모양이에요. 모조리 다 접수하고 다 차지해야 성이 차는데 이 니느웨에 수도를 두고 있는 앗수르 나라가 계속해서 멈추지 못하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침범한 거예요.

이걸 가지고 ‘분노의 질주’라 이렇게 해요. 끊임없이 질주하고 끊임없이 차지하고. 그러니 이것은 뭐 풀어놓은 개같아요. 도사견, 딱 도사견, 주인도 없는 도사견, 미친 듯이 날뛰는 도사견, 물리면 그냥 물리는. 그 당시에는 그 앗수르보다 더 센 이빨을 가진 개가 없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진돗개고 뭐고 간에 다 무는 하나님께서 개를 풀어놨습니다.

왜 이런 개를 풀어놨을까요? 그래서 이 개가 북쪽 이스라엘도 먹고 남쪽 나라에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빼놓고 나머지 다 잡쉈어요. 다 먹었습니다.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이나 유다 나라는 저 미친 듯이 날뛰는 도사견 앗수르가 하나님이 의도 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눈을 떴어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나훔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야기하지요. “니느웨가 멸망한다. 그런데 니느웨가 70년 전에 요나 선지자가 와가지고 말씀 전할 때는 그렇게 회개하고 하더니만 70년 지나고 교만해져 가지고 이 나라가 이제 망하는구나. 그러니까 우리도 이 니느웨를 교훈 삼아서 바르게 살고 늘 회개하면서, 한번 회개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늘 회개하면서 니느웨처럼 망하지 말자.” 그런 식으로 이 나훔을 해석을 하는 겁니다. 겁나 가지고, 무서워서.

그런데 그것은 반대로 해석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은혜를 줬는데 그 나라가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교만해서 망했다.’ 그게 아니라 그 니느웨에게 준 앗수르에게 준 은혜가 어떤 은혜냐 하면, 기어이 멸망한다는 그 모습 자체가 은혜에요. 인간이 그 은혜를 소지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더 진전된 내용, 은혜의 더 진전된 내용은 예수님 빼놓고 모조리 다 소멸시키는 그 작업이 그게 지극히 은혜롭다, 그 말입니다. 지극히 은혜로운 거예요.

은혜롭지 않은 게 뭐냐? 반대로 은혜롭지 않은 게 뭐냐? 내 것 그대로 유지하려는 게 은혜롭지 못해요. 내 것 따로 챙기면서 복음을 언급한다? 그것은 복음 아닙니다. 자기 목숨 챙기면서 복음 이야기할 때 그게 복음이겠어요? 아니지요. 내 목숨 내놓기 전까지는 복음 이야기하지 마세요.

어떤 인간치고 이 니느웨의 그 행세, 태도, 모든 인간이 니느웨하고 똑같아요. 은혜받고 하나님께서 모든 징계를 철수해가니까 헤헤거리면서 ‘역시 하나님 은혜로 살았구나. 역시 내 것은 아주 건재하네. 내 것 별로 안 다쳤네. 내 인생 선방했네. 이만큼이라도 내 것 건졌으니 되었잖아.’

전혀 이것은……, 그게 바로 멸망해야 될 것이고 그 멸망해야 될 것을 하나님께서 놓치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 지구상에서 없애버릴 때 그 없애버리는 작업이 바로 은혜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만 남고 나머지는 다 소실되는 것이 은혜가 은혜 되는 작업이에요.

사람들이 교회에서 헌금을 하는데 헌금하는 심보가 뭐냐 하면, 안 빼앗기려고 헌금해요. ‘에이, 줘버리자, 줘버리자. 이 정도는 줘버리자.’ 안 빼앗기려고 하는데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것을 탐내지 않습니다. 탐내지 않아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언급한 겁니다.

사도행전 20장 33절에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거든요. 사도가! 사도가 복음 전할 때 사람들은 사도의 복음을 좋아하면서도 경계해요, 경계. 지금 오늘 본문은요,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에요. 경고지 경계가 아니에요.

경고하니까, 선지자가 경고하니까 니느웨는 경계하는 거예요. 혹시 내 것 손실 날까 봐서.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을 탐하지 않느냐 하면,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을 탐내요? 이거 말도 아니지요. 말도 안 돼지요. 원래 그거 내(주님) 것인데요? 우리 목숨은 없어요. 주님의 목숨입니다. 내것이 아니라니까요!

주님이 내 목숨을 탐을 안 내는 이유가, 내 목숨이 아니고 주님의 목숨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께서 안 뺏어 갑니다. 다만 빼앗길까 싶어서 내 것 챙기려는 그 인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지지 않지요.

“이게 뭐 평생 내 것 가지고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게 어딨어? 이건 내 거야.” 하나님이 그렇게 나오면 “그동안 하나님께 충성봉사 헌금 많이 했잖아요!” “아니 지금 네가 그 이야기하는 의도가 뭐냐?” “얼마나 충성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이야기하는 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 이야기하는 그 의도가 뭐냐?” “제발 내 자식만큼은 지켜주시고, 공부 1등 하게 해주시고 ……, 좀 있으면 10월에 내 아들이 결혼하는데 아직 그 때까지는 재림하면 안 되고…….”

도대체 지금 흥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드릴 것 드릴 테니 제발 내 것은 손타지 마세요.’ 이런 뜻이에요. 부들부들 떨면서.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해요.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은혜인 줄 아니까 그러니까 갖고 가지 마시라.’ 그 말이에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욥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인간은 그게 아니고 “주셨잖아요. 그런데 줘놓고 이걸 왜 빼앗아가십니까?” 이런 식이에요. 인간들, 니느웨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이스라엘뿐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아요.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을 구분을 못 합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주님의 은혜, 주님의 언약, 그것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면 나머지는 마땅히 사라져야 되지요, 마땅히. 마땅히 사라져야 되지요. 하나님께서 니느웨 너 망한다고 경고하는 것은, 이 경고는 니느웨 경고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경고에요. 유다 나라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으니까 유다 나라 경고에요.

“니느웨 소멸시키듯이 이번에는 내가 유다 나라를 소멸시키는데 이게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복이고 은혜인 줄 네가 알아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성경 말씀 연구해가지고 기도회도 하고 수련회도 참석도 하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 결국 그 몸부림치는 모든 노력이 도대체 누구를 위함이에요?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립니까? 누구를 위해서 그래요, 누구를 위해서?

말로는 ‘주님을 위해서’ 하지만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게 아니고 그동안 평생토록 고생해서 만든 내 것, 그 내 것에 흠집 안 내려고 지켜보려고 하는 거예요. 상당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성도가 뭐냐 하면, 성도는 간단하게 이거예요. 성도도 사라지고 소멸되어야 하는데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성도 안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게 이미 들어온 사람,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니느웨의 소실, 소멸되거든요, 경고하는 거예요. 네 나라 없어진다, 그 말이에요. 네 제국은 없어진다, 그 말이거든요.

없어질 때 이 경고를 니느웨는 당연히 안 받아들이지요. “아이고, 무서워라.” 이러지를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믿으려 하면 어떤 경우에나 믿어지느냐 하면, 이미 니느웨 자체가 이 땅에서 소실되고 난 뒤에 그 때 상황을 미리 앞당겨서 그 안목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이 말씀에 대해서 고개 끄덕이면서 ‘음, 주께서 하시는 일을 누가 막아?’ 하고 그걸 감사하고 기쁘게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어떤 인간이 자기가 소멸 되고 난 뒤의 상황을 미리, 아주 소멸 되기 전에 미리 알 수가 있을까요?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 있는 이상 비교 거리가 살아 있는 것들만 비교하고 살아 있는 소멸 뒤의 것은 그 기준은 인간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이게 굉장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에요. “내가 왜 사라져야 됩니까?” 반발이 나온다고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정답은 간단해요. “너 중심이 아니니까. 너의 중심이 네가 아니라 네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중심이지 네가 중심이 아니니까. 너는 사라져도 괜찮잖아. 네 중심은 안 사라진다니까?” “예, 예수님이 안 사라지는 것은 아는데 왜 내가 사라져야 됩니까?” “니느웨 봐라.” 니느웨 사라지게 하잖아요.

이게 계시거든요. 니느웨는 사라집니다. 이 계시가 살아남아야 돼요. 이게 안 사라져요. 니느웨는 사라져도 ‘니느웨는 사라진다’는 이 계시는 안 사라집니다. 이게 선지자에요.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3장 6, 7절에 보면,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그 성읍이 멸망합니다. 그 성읍이 멸망해요. 멸망하는데 그 멸망하는 성읍 가운데 유일하게 멸망해야만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선지자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러면 앞일을 미리 당겨서 알고 있는 선지자가 나팔을 안 불겠습니까? 불지요. 나팔을 부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선지자 보고 “너도 죽는데?” 이렇게 하면 선지자는 같잖아서 말을 가볍게 “흥!” 이러지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주님께서 이 도성에 있는 모든 인간을 멸망시킨다, 라는 이야기가 중요하지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안 사라진다는 이것은 전혀 중요치 않아. 내가 너하고 똑같나, 인간아?”

너희는 목숨이 내거라고 생각하니까 내 목숨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선지자에게는 내 목숨이 끝나고, 내 목숨이 끝나고 난 뒤에 주께서 하실 일을 살아 있는 나에게 미리 앞당겨서 언질을 줬으니까 그 언질이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는 거예요. 누구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은 문제도 안 되고요, 심지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께서 일한다는데, 뭐 내가 뭔데? “그거 아닙니다!” 할 수가 있겠어요? 주께서 그렇게 일하신다는데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께서 어떻게 일하시느냐 하면, 사라질 것과 사라지지 않는 일을 구분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럼 이 성경 말씀, 이 선지자의 말씀, 성경 말씀, 이걸 믿는다는 것은 아, 참,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믿을 수가 없고요, 자기 목숨 그까짓 거 그것은, 자기 목숨은 말씀, 내 모든 게 사라지고 난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게 된 그 정보, 그 내용에 대해서 기꺼이 내 목숨은 그냥 버려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미리 당겨서 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 선지자가 이러한 이야기, 니느웨가 망한다, 이 말은 이게 왜 이스라엘에게 은혜가 되느냐 하면, “그다음 차례는 유다 나라 너도 망한다. 니느웨, 은혜받은 니느웨가 망하는 것 봤지? 너희 유다 나라야, 너 은혜받았지? 그다음에 네가 망해.” “아이고, 안 되는데?” “안되기는 뭐 안돼? 네가, 유다 나라가 망해야 예수의 나라가 온다.”고요. 예수님의 나라가 와요. 예수님의 나라가 오는 게 기쁘지 않습니까?

지금 대한민국 사라지는 것, 대한민국 사라지는 게 그렇게 슬퍼요? 이런 말을 하니까 매국노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매국노라 해도 괜찮아요. 인간에게는 이 있음, 있다는 게 발목을 잡아요. 내가 여기 있고 그래서 아무리 성경 봐도, 오른쪽 눈 2.0, 왼쪽 눈 2.0이 되어서, 몽골 사람은 5.0까지 본다는데 이걸 믿어야 할지, 하여튼 시력이 2.0이 되어도 아무리 봐도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큼은 믿고 그것만큼은 부정 못 하겠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실제 예를 들어봅시다. 구한말에 일본이 침략해서 우리 조선을, 그때는 대한민국이 없었으니까요, 대한민국은 1948년도에 만들었기 때문에 그때는 대한민국이 아니고 조선이 있지요, 조선을 점령했어요. 조선을 점령하고 난 뒤에 이제 합병을 했습니다.

그러니 조선은 없어요. 없고 일본영토로 합병된 겁니다. 합류되었어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다 그 말입니다. 없는데 왜 사람들은 3.1운동, 유관순 누나부터 왜 조선의 독립을 외칩니까? 조선이 없는데. 바보 아니에요? 그 당시에 어느 누구도요, 이 통치가 36년 딱 아귀 맞춰서 끝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면 그 당시에 배운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은 이게 36년이 아니고 360년까지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렇게 360년까지 간다면, 그래서 내 살아생전에 다시 일본이 조선을 내놓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그걸 이광수 그리고 김활란, 노천명, 김동인, 이인직, 최남선, 현제명, 홍난파, 미당 서정주, 이런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삽니까?” 그러면 그들은 이래요. “지금 있는 게 뭐냐? 지금 있는 게 조선이냐?” 그것은 무식한 인간들인 거예요. 지금 있는 것은요, 일본제국주의에요. 그것만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살아 있는 겁니다.

목이 길어 사슴을 닮았다고 시를 지은 그 노천명 친일파, 이광수 친일파, 작곡가 현제명 친일파,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친일파, 명단이라 할 것도 없어요, 이 사람들은 유명한데요, 뭐. 연극 하는 사람 윤치진, 송병준이라는 사람은 홋카이도에서 거대한 목장을 했어요. 혈의 누 이인직, 역사학자 최남선, 작곡가 홍난파, “아 내 고향……” 그 홍난파, 김소월은 모르겠습니다만, 김동인, 유명한 작가 김동인.

이 사람들이 왜 나중에 친일파 소리를 들었습니까? 나중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현재를 봐요, 현재를. 현재를 보게 되면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나는 살고 있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텐노헤이카 반자이, 천황폐하만세, 이게 현 정치적 상황이에요. 이게 현 정치적 상황이라는 겁니다.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뭐 한다 해가지고 일본 정부가 물러갑니까? 좀 머리가 있으면, 좀 깨어 있으면 생각을 해봐요. 조선은 없어요. 조선은 없는 거예요. 이미 날라 가버렸어요.

여러분이 지금 친일파 옹호하냐, 이렇게 할 텐데 지금 친일파 옹호하는 게 아니고 니느웨 옹호하고 있고, 지금 이방 민족의 입장이 되어서 이방 민족을 생각해 보자 그 말이지요. 그 당시 유다 나라를 생각해보자.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예언과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까? 못 믿어요.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요.

이 멀쩡한 나, 이 내 목숨을 말씀이 뭐고 예언이 뭔데 그걸 갖다가 바치느냐는 말이지요. 말씀이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건데! 어느 정도는 선교하고 헌금하고 하겠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중요하잖아요, 내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를……. 내가 중요하잖아요, 내가. 교회 나오는 것은 그냥 흉내 내기고.

우리는 본문 1절을 통해서,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왜 니느웨 사람으로 하여금 니느웨 사람으로 왜 살지 못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니느웨 사람 그 동네, 거기가 오늘의 이라크거든요, 그 이라크 사람이 이라크 사람으로,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왜 하나님께서는 그 소박한 소망도 안 들어주느냐 그 말이지요.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게 왜 이 소망을 안 들어주느냐 그 말입니다.

왜 대한민국을 없애는 거예요? 왜 대한민국을 없애고 이 땅에 하늘나라가, 예루살렘이 왜 오는 겁니까? 이유가 뭐예요? 그게 은혜거든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제가 언젠가, 같은 예인데 서너 번 한 적이 있는데요, 벌써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천주교의 지도자급 신부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공개적으로. “성당이고 교회고 간에 나라가 있어야 교회고 성당이지 나라가 없는데 무슨 성당이고 교회가 있느냐?” 했어요. 아이고, 불신앙을 제대로 보여줘서 속으로 얼마나 감사한지요. 불신앙을.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이 비교할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어느 것이 사는 데 유리하냐, 그러한 아이디어와 그런 계산만 비교 대상이지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불심판 되고 난 뒤의 그때 상황이 기준인 사람은 성령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없어요. 성령 받지 아니하면. 사도들, 성령 받은 사도들 아니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진짜 성령 받은 신자 아니면 그게 안 됩니다. 자신이 사라짐을 바탕으로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주장하는 복음이론은 엉터리입니다. 자기의 소실을 요청해야 돼요. 하나님이 복음으로, 남 욕하지 말고, 남 심판하지 말고, “저부터 심판해 주세요, 저부터 소멸되게 하옵소서 더워서 이 습기 차고 더워서 못 살겠습니다. 복음으로 나를 아예 어서 하루빨리 소실되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이 복음 중심, 이 복음 중심에 대해서 여러분이 나훔선지자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신다면요……, 갖기를 바랍니다. 이런 믿음, 나는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이걸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앗수르는 뭐냐? 니느웨는 뭐냐? 성경에서는 몽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로소 이 성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사야 30장 30-3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 니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인데”

지금 앗수르가 대세입니다. 그 당시에 앗수르가 전부에요. 앗수르 외 다른 나라는 없어요. 앗수르는 완전히 도사견이라니까요. 감히 누가 그 성질을 건드립니까? 건드리면 그냥 물고 완전히 파괴시키는데요. 아주 냉혹한 자들이에요.

그런데 이사야는 앗수르 그 이후를 봅니다.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몽둥이를 막대기, 몽둥이를 가지고 앗수르를 패는데 앗수르 그 다음은 다른 몽둥이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벨론이에요, 바벨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몽둥이로 사용해 가지고 자기의 택한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를 치시고, 그렇게 유다 나라를 치기는 쳤지만 아직 망하지는 않았어요.

하여튼 예루살렘 빼놓고는 몽땅 다 가져갔어요. 그다음에 그 쳤던 몽둥이, 그 몽둥이를 몽둥이가 쳐버리는 거예요. 그다음 몽둥이가 바벨론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할때는 세상 사람들은 지금 앗수르가 대세고 앗수르 그 다음나라,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선지자예요. 선지자가 자기가 지어낸 게 아니고, 공부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는 미래에 되어질 일을 앞당겨서 선지자 입에 담아서 그게 오기 전에 현재에 있는 백성들에게 이 말을 믿으라, 하고 그냥 선포해 버리는 겁니다.

이거 뭐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하지요. 불가능한 거예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요. “그건 선지자 네 생각이고.” 그러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심점입니다. 왜 니느웨가 멸망하느냐 하면, 니느웨가 구심점이아니거든요. 이스라엘이 구심점이에요. 이스라엘이 구심점이고 이스라엘 멸망시킬 때 진짜 이스라엘이 그 안에 핵심이 들어 있어요. 티눈처럼 안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몽둥이로 팹니다. 그 몽둥이를 누가 패느냐? 바벨론이 패거든요. 그 바벨론 몽둥이를 누가 패느냐? 메대바사 나라가, 페르사 나라가 패거든요. 그 메대바사 몽둥이를 누가 패느냐? 헬라마케도니아가 패거든요. 알렉산더가, 알렉산더가 패고 난 뒤에 그 알렉산더는 누가 패느냐? 로마가 패거든요. 로마를 누가 패느냐? 다니엘에 보면 주님이 패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주님 쪽에 가 있어야 돼요. 패고, 패고, 또 패고, 또 패고, 그냥 이 세상은 계속 그리스도 빼놓고는 패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정말 이것을 같이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된 것을 주께 감사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앗수르가 몽둥이로서 대적할 적이 없어서 좀 까불었어요. 까부니까 이사야 37장에 보면 까불어도 너무 까불어가지고 37장 36절에 보게 되면, 예루살렘을 아주 얕잡아 봤어요.

예루살렘을 얕잡아 보고 포위해서 항복하라고 했는데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 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 18만 5 천명이 단 하루에, 하루에 다 죽었습니다, 단 하루에. 보통 무기 아니지요.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은 건드린 거예요.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린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우습게 보고 잡아 가두었는데 사울은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사울은,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죽어서 없다고 옛날에 사망한 사람으로 봤는데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어요. 벌써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사태의 끝 지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령 받은 것이고, 이게 복음을 아는 것이고, 이게 믿음 있는 사람 된 거예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울아! 지금 누굴 건드리느냐? 너만 고생이다.”(행 26:14) 그러니 이 사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못할 일이 없는 거예요.(빌 4:13) 왜? 내 것이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쓰시는 대로 쓰시면 되니까. 이게 자유고 이게 얼마나 편합니까? “하나님께 잘 해드릴 테니 내 것 건드리지 마세요.” 지금 이것은 신앙 흉내 내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했어요.

몽둥이로 패고, 또 다른 몽둥이가 패고, 또 패고, 마지막에 패는 자는 누구냐?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 패가지고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 있다고 해서 여러분 뭐 금방 믿어지지요? 지금 이럴 수 없는 게 일제시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일제시대를.

일제 시대때 많은 교회들, 평양이고 어디고 많은 선교사들이 교회를 만들었어요. 일제때 부흥사들이 하는 설교 내용의 태반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면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됩니다.” 그게 설교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왝! 왝! 하고 “교회 종 내놔. 무기 만들게.” 하니까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다 갖다 바쳤어요. 다 갖다 바쳤고 “너희 동네 예수 믿는 사람 누구누구야?” 목사를 앞장세워서 전부 다 교인들 다 잡아오도록 했습니다.

목사를 앞장세운 그 내막은 뭐냐? 목사를 뒷조사해서 그 약점을 잡아요. “네가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네 자식, 일본에 유학 간 자식 죽을 줄 알아라.” 이런 것 있잖아요.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것. 회장 비서가 자기 아들 아픈 바람에 누구한테 약점 잡혀서는 회장한테 나쁜 짓 다 하는거요.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그러면 이 시대에 선지자가 누굽니까? 나훔 있으면 따라가겠습니다, 아모스 있으면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 진짜 미래까지 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있으면 제가 믿겠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그 현상의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1917년에 어떤 미술전람회가 있었는데요. 프랑스에서. 그 전람회 작품전시를 하려고 하는데 어떤 작가가 자기 작품을 들고 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남자 소변기를 들고 온 거예요. 남자 소변기.

전람회 전시 담당하는 사람이 거절했습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십니까? 당신이 직접 제작을 해야지 시중에 파는 것……”, 이미 기성품(ready-made)이거든요, “시중에서 만든 것을 왜 가져왔습니까?” 하고 거절했어요.

그런데 그 작품이 세계적으로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게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Fountain, <샘>이라는 작품입니다. 나중에 전시는 했는데요. 남자 소변기를 그대로 전시장에 두면서 그거에 리처드 머트(R. Mutt), 라는 그 변기제작업자의 이름까지 사인을 해서 그 전시장에 두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술이란 누가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장소가 결정한다는 겁니다. 이게 소변기지만, 종합설비 업체에 보면 있잖아요, 배관이라든지 싱크대 파는 것, 변기 파는데, 그 변기 파는데 그곳에 있으면 그것들은 하나의 상품이 되지만 변기 하나 들고 와서 현대미술관에 놓게 되면 그게 작품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의미라는 것은 기존의 보편성과 섞이지 않는 새로운 것이 그 장소에 놓이게 되면 거기서 아주 엄청난 차이가 발생 되는 거예요. 안목이 확 달라지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뭐냐? 직접 작가가 땀 흘리면서 변기를 만들더라도 자기가 손수 변기를 만들어내면 그게 작품이지 그냥 시중에 파는 것을 제작업자의 사인까지 새겨진 그걸 가지고 장소만 옮겼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공간관을 창조해버린 거예요. 창조, 창조하는 것.

말씀은 매일매일 우리를 어제와 다른 나를 새롭게 창조해버립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 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왔던 내 기억 속에 있는 나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할 때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음 행동의 기준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새로움이 없어요.

‘아, 내가 살아가는데 이렇게 착하게 사니까 하나님이 복 주셔서 잘 살았구나. 오늘도 바르게 살아서 조기에 죽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내 기억이, 이것은 나쁜 짓이고 이것은 옳은 것이고, 이걸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러면 우리 몸은 내 것이 돼요. 말씀의 것이 아니에요.

말씀의 것은 뭐냐 하면, 나는 소멸되는데 내 안의 분이 소멸 되지 않아서 날마다 나를 새롭게, 날마다 죽고 날마다 태어나게 새로운 작품이 되게 하는 거예요. 하나의 Fountain, 샘이 되게 하는 것, 날마다 말씀이 여기에 선지자로서, 현대의 선지자로서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고 해석할 수 있는 새사람을 창조하는 그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선지자가 누구냐? 모든 성령 받은 성도가 다 선지자에요. 바로 윤복희의 여러분! 누가 여러분을 위로해주지, 그 여러분! 여러분들이에요, 여러분들! ‘내가 왜 살아 있지? 말도 안돼. 내가 왜 살아있는 거야? 아, 말씀이 복음 전파하기 위해서 살아 있구나. 복음 전파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훔 1장 15절에 이렇습니다.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아름다운 소식을 복음이라 하거든요. 놀랍게도 로마서 10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걸 그대로, 물론 사도바울 생각이 아니고 주님 생각이지만, 그대로 이걸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5절에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기록된 바 나훔이지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많은 인간들이 있지만 주님께서 오직 주목하고 있는 것은 말씀이 새롭게, 매일같이 새롭게 하는 사람, 소실되더라도 복음 전하면서 소실되어가는 사람입니다. 기쁜 소식 전하면서, 멸망의 소식이지요.

기쁜 소식이 딴 게 아니고 은혜가 뭐냐?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주님이 영원하니까.’ 이 기쁜 소식, 이 기쁜 소식을 매일같이 전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 그게 성경에서는 아름다운 발이여, 아름답다, 아름다운 발이여. 14, 15절에 보면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하나님의 주 관심사는 이 복음에 있습니다. 세상이 멸망하고 그 멸망하는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정말 다행스럽게 이걸 알아챈다는 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너무 고마운 거예요. 내가 만약 일제때 태어났다면, 그리고 복음을 알았다면, 실제로 성령 받은 사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망한다.” 그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기존목사하고 똑같이 되지요. “일본은 망한다. 그리고 조선도 망한다. 그리고 아무리 천년만년이 되어도 이 세상은 망한다. 하하! 기쁘다. 이게 바로 십자가다.” 이렇게 전했을 거예요. 전해봤자 먹히는 사람 아무도 없겠지만.

그러나 소위 나중에, 나중에 친일파라고 억울한 소리를 들었던, 어떤 의미로는 친일파가 아니고 현실주의자지요,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이 현실주의자입니다, 친일파가 아니고, 다들 자기를 위해 살잖아요, 그런 것, “니느웨같은 사람들 소멸한다.” “웃기고 있네. 내가 멀쩡한데 왜 내가 소멸해?” 지금도 복음에 대해서 이러한 반발과 반항, 자기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복음을 이용하는, 그저 나 챙기기에 급급한 우리 이 자체, 안 그런 사람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여, 이런 인간 제발 좀 날씨도 더운데 데려가 주옵소서. 그래도 저는 그것이 더 기쁘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서슴없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가 달리 선지자가 아니라 세상심판 이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그 안목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주를 미워했던 이 세상이 결국은 마땅히 저주 받아야된다는 것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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