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범주
2022년 8월 10일 본문 말씀: 나훔 1:6-8
(1: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1: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세계에 이질적인 것을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벌리시고 하시는 일에는 필히 ‘대적’, 즉 ‘원수’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에 대한 분노가 대단합니다. 불같은 진노를 퍼붓고 그리고 그들을 결국에는 깜깜한 곳으로 내어쫓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의 이유를 알아야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입니다. 곧 하나님께 피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천국가기 참 쉽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피신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체질이 자기 말고 다른 이를 의지하거나 피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상대에게 피하는 것과 상대방을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십니다. 체질을 아십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즉 인간은 그 어려움이 와도 체질이 달라지지 않음을 아십니다. 결코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는 자임을 압니다.
더나아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의지한다든지, 하나님께 피한다든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로 증명이 됩니다. 이사야 31:1에 보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20:7에도,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왜 자꾸 말과 병거를 의지하느냐고 다꾸치지 마세요. 도리어 아무 것도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하는 것이 이상할 뿐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요.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영토, 자신의 통치 영역, 곧 자신의 범주를 확보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의 통치 범주로 전환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범주를 위해 지상을 살았던 자가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6-19)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이 사는 땅에 양식을 끊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더욱 더 양식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말씀에 이끌려갔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가는 곳마다 말씀의 범주가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양식을 의지하는 쪽과 말씀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쪽이 대비되어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체질적으로 기존의 자기 범주에 살던 방식으로만 살려고 한다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말(馬)과 병거 같은 것을 먼저 찾고 챙긴다는 점도 잘 아십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의뢰하는 자는 말씀의 범주에 들어설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4:12-13에 보면,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범주(범위, 영토, 천국)에는 오직 말씀만 의지하는 자만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만이 복이 있는 자라고 시편 1편에 나와 있습니다. 왜 말씀으로 관절과 골수를 쪼개듯이 마음의 뜻과 생각을 쪼개야 할까요? 그것은 이미 인간들은 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따라서 자진해서 말씀을 의지할 자가 아예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16-19)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부자 농부가 창고를 더 지은 많은 곡식을 저장하고 마음으로 흐뭇해하는 것이 왜 어리석은 것으로 비난받아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축하해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런 경우가 소망하며 사는 게 아닐까요? 이런 일이 어리석음으로 비난받는다면, 도대체 비난받지 않을 경우가 인간 삶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이유는 바로 인간의 범주가 하나님의 범주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범주는 말씀의 범주입니다. 반면의 인간의 범주는 자신이 애씀과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범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매는 예수님의 하신 일의 열매로서 맺어지는 범주 뿐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예수님의 범주까지 내다 본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십자가 달린 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살해 당한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범주 안에는 죽음이 범주의 끝이고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인간 범주를 하나님의 범주로 바꾸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점을 같이 십자가 달린 어떤 강도는 알았던 겁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눅 23:42)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응을 보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말씀은 인간의 체질을 알기에 그 체질을 골수까지 부수고 찢어버립니다. 이는 곧 말씀으로 시작하는 자리가 나의 죽음의 자리라는 겁니다. 나의 의미의 범주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되풀어해서 찢어져서 늘 말씀에 새로움에 열매 자체가 되는 자가 곧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이용할 생각말고 말씀에 늘 새롭게 깨어지는 즐거움이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나훔 1장 6-8절(두 범주)2208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나훔 1장 6-8절까지입니다.
나훔 1:2-5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성경에 나오는 그 내용들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이지요. 그 하나님의 일하시는 현장, 그 작업현장, 그 현장에는 대적들, 대적이란 하나님의 적들, 거기서 하나님께서 발굴하고 끄집어내고 그들이 하는 활동을 속속들이 소위 발라낸다 하지요, 뼈에서 살을 발라내듯이 그들을 찾아내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적들에게 하나님의 그 반응은 6절에 보면 그 분노한다는 말이 나와 있어요.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적들에 관한 거지요. 그다음에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 진노하심, 그 진노를 6절에 보면 불같이 쏟으신다고 합니다.
그 진노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그다음에 적들에 대해서 8절에 보면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그리고 역시 8절에 보면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아주 분주하고 바쁘신 활동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을 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지 그 이유 알면 이 성경 말씀 깔끔하게 정리가 되겠지요. 왜 적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분노하는가?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적들이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범주(範疇)를 생각하고 있는데 범주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범위, 그리고 더 불분명하지만 다른 단어로 옮긴다면 영토, 영역, 환경,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구약에 나오는 나훔, 하나님의 예언인데 이 예언에 의하면, 나훔이라는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기의 범주, 이제부터 제가 범주라는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영토지요, 자기구역이지요, 자기 영역, 자기 공간, 이 범주에 있어서는 안 될 것에 대해서 크게 노하시고 분노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는 그 범주에, 천국이지요, 하나님의 그 범주에 들어와서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노를,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뭐냐 하면, 자기의 범주 확정 짓기, 또는 하나님의 자기의 범주 완료하시기, 하늘나라 완성하기, 그런 겁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구성해놓은, 생각하고 있는 그 범주가 있는데 그 조성하는 범주에 ‘이런이런 자들은 절대로 끼어들면 안 돼. 그런 자에게 내가 가만있지 않고 저주하고 심판할 거야.’라는 뜻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범주를 딱 따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서 뭘 생각하면 되느냐? 어떤 것이 하나님의 범주고 어떤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화내는 범주인가? 이 범주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그 차이점을 알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그 대적들이, 원수들이 생각하는 그들의 삶의 터전, 삶의 범주가 어떤 거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이지요.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셔서 하신 일이 이 세상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생활범주를 하나님의 범주로 다 뒤바꿔놓는, 그걸 주의 범주로 다 갱신하는 그 일을 하신 거예요.
‘이런 자는 하나님의 범주에 소속이 되고, 또 이런 자는 하나님의 범주에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자들이다.’ 그것을 가려내고 분류하는 작업, 그것을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범주에 끼어들면 안 되고, 만약에 끼어들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단박에 알아보고 저주하고 분노해서 “네 흑암의 자리, 네 범주는 저쪽이야. 깜깜한 데야.” 하고 내쫓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 범주개념이 어떤 것인가?
오늘 본문 나훔 1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의뢰하는 자를 아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이유가 하나님에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좋게 보신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그런, 하나님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의 그런 피조물의 특징은 결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그런 족속들이지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족속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 그 의지한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 나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시편 105편 16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에 의지하지 않는 것, 그 둘의 차이가 16-19절 한 절에 잘 나와 있는데요.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의지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바로 창세기 39장 이야기인데 창세기 39장에서 야곱의 가족이 약속의 땅에서 살았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에 기근이 오게 해서 양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집에 양식이 없던 그 시점에 야곱의 사랑하는 요셉은 어디에 가 있느냐? 요셉은 양식이 풍부한 애굽나라에 국무총리로 가 있었어요.
아들 하나는 애굽의 국무총리로 가 있고, 그 약속의 땅이라고 주저앉아 있는 야곱의 집은 현재 양식이 없고. 그래서 그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의지하니까, 양식을 의지하니까 ‘큰일 났다’ 싶은데 소문 들으니 애굽에 양식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식 구하러 갑니다.
형들이 양식 구하러 가겠다고 아버지한테 이야기했지요. 결코 우리가 학대해서 내다 버린 요셉을 구하러 애굽으로 가지 않습니다. 동생 요셉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고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양식, 먹을 양식만 의지하는 거지요. 요새 같으면 돈과 양식만 의지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범주에 해당되는 사람은 누구냐? 요셉이지요. 요셉이 종으로 팔렸습니다. 종으로 팔렸는데 18절에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쉽게 말해서 요셉이 스스로 자기가 생존할 수 있는 여지는 지금 없습니다. 노예로 팔려갑니다. 내가 어떤 앞길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이 되지 못해요.
그래서 이 요셉은 특수한 범주입니다. 그 특수한 범주를 시편 105편 19절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이 원하는 범주는 말씀으로 구성된 세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된 세계, 양식을 의지하는 세계가 아니라 말씀이 실현된다는 그 사실, 그 약속을 의지하는 그 범주, 그 범주를 하나님이 인정하고 나머지 범주는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분노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시편 105편에 보면 바로 양식을 의지했던 그 형들과 어쩔 수 없이 양식 의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착고(着庫, 족쇄)에 채여서 오직 말씀이 이끄는 대로 일생을, 평생을 살아야 될 요셉과 극한 대비를 이루면서 여기 의뢰한다, 또는 의지한다는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두 다른 세계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을 자기의 범주, 천국에 넣어주는데 문제는 인간치고, 인간치고 하나님을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갈 수 있는데 인간치고, 사람이라고 해당되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사람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양식 의지하는 것은 체질입니다. 시편 103편 14절에 보면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성을 압니다. 우리의 성깔을 알고 우리의 근성을 압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우리의 사는 방식, 우리의 양식 의지하는 것을 우리가 포기할 자들이 아닙니다.
결국은 양식이 있어야 살고 돈이 있어야 산다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삶의 범주입니다. 이것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도 계속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31장 1절에도,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치고, 사람치고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그럴싸한 힘이 되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 의뢰하지 않는 자는 없어요. 그런데 이사야 31장에서는 그런 자를 두고 “화가 있을찌어다. 세상 것을 의지했다는 그 자체가 너는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압박해요. 시편 20편 7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성경에 보면 혹은 병거, 병거는 마차지요, 혹은 말(馬)을 의지하나 전쟁할 때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얼른 들어보면 상당히 신앙인 것처럼 보이지요.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왜? 인간체질이 그러니까. 체질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를 하나님의 범주에 넣어준다.” 아무리 하나님 쪽에서 이렇게 약속을 해도 하나님을 의지할 자가 인간 속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뭐 사람 다 겪어봐야 아는 것이지 없다고 그렇게 함부로 단정할 수 있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약에서, 로마서 3장 9절에서 이미 그것은 찾아볼 필요도 없이 이미 확정 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스라엘인이나 그 외 모든 이방인이나 이미 죄 아래 있다고 이미 선언되었다. 죄 아래 있는 거예요. 그게 우리 체질이에요. 죄 아래 있는데 그 죄가 뭐냐?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의지보다도 우리가 의지하고 싶은 것을 먼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체질과 습관과 습성으로 똘똘 뭉쳐 있는 우리, 그러니까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범주, 천국에 들어 간다? 이것은 언어도단,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오늘 나훔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분노하신다, 라고 하나님의 진노, 분노, 무섭지요, 흑암의 지옥으로 보내고, 바위도 깨고, 불로 심판하니 무섭지요. 문제는 아무리 심판이 무섭지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나 그런 자질이 아예 우리한테는, 아예 일체 영 프로도 없다는 것도 명확한 사실이에요.
무섭다고 하나님 믿는 것, 그것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은 없단 말인가? 아까 제가 시편 105편 말씀드렸잖아요. 요셉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쳐들어와서 말씀으로 그 요셉의 일생을 꽁꽁 묶어 버렸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는데 사실은 정확하게 말해서 요셉이 말씀에 팔린 거예요.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은 종으로 팔렸으니까 종으로 팔렸다는 그것보다 더 우세한 조건이 뭐냐?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요셉은 종으로 팔린 겁니다. 이런 경우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우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아셔야 돼요. 성경에 좋은 말씀 있다고 믿자, 이것은 정말 엉터리입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아셔야 돼요. 하나님이 분노하고 저주하는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고 의지하지 않느냐?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데요. 누가복음 12장 20절의 내용을 읽어드리고 제가 한번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농부가 있는데 올해 농사가 너무 잘 되었어요. 그래서 곡식을 다 저장을 못 해서 창고를 크게 지었습니다.
창고 크게 짓고 그 안에 풍년 든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 두었습니다. 거기에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다고 되어 있지요. 19-21절에 보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제가 질문드리는 것은, ‘농사가 잘 되었다. 그래서 창고 짓고 곡식 많이 넣어놨다.’ 이게 왜 어리석은 자라고 비난받아야 됩니까? 성경을 덮어버리고 교회 안 다녔다고 칩시다. 그리고 하나님 생각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가 너무너무 잘되었어요. 그래서 농사 잘되어서 기분 좋아서 ‘여러 해 먹을 것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 몇 해 동안 편히 쉬겠다.’ 이게 왜 어리석다는 비난을 받아야 될 이유가 되느냐, 이 말이지요.
만약에 여러분 주위에 그런 사람 있을 때 “이 어리석은 자여!”라고 그 사람보고 욕을 하면 그 사람이 우리보고 뭐라고 해요? “너는 그렇게 안 사냐?”라고 되받아 칠 거에요. “너는 평소에 그렇게 안 살아? 네가 하나님 믿고 교회 간다 해도 네 마음, 네 속마음을 한번 봐. 속마음은 어떤 마음이야? 부자 되면 기분 좋지? 바로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그 마음이 네 마음이잖아. 그게 왜 어리석은데? 어리석다는 증거를 대봐.”라고 할 때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린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리석다고 욕하든 말든 우리는 그렇게 한번은 살고 싶은 게 아니겠어요? ‘현금이고 금괴고 간에 쌓아놓은 것을 크게 했으면 더는 소원이 없겠다.’ 그게 평소 우리의 바람이고 바램이고 그렇잖아요. 우리는 그걸 의지하잖아요. 그게 우리 삶의 범주입니다. 거기서 절대로 벗어나고 싶지도 않고, 벗어난 적도 없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와서 말씀은 그냥 우리의 이해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친히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다 찌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교회 와서 말씀 들을 때 그렇습니까? 요 근래 서울 근방에 500밀리 폭우가 쏟아졌다는 거예요. 한꺼번에 비 500밀리, 그 정도 아니지요. 그동안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들었던 복음의 말씀, 성경 말씀은 500밀리보다 더 많을걸요?
갖다 쏟아부었습니다. 쏟아부으니 뭐합니까? 다 흘러내리는데요. 우리의 체질이 그래요, 체질이. 절대로 우리 안의 골수나 관절은 끄떡도 없어요. 우리는 쪼개진 적이 없습니다. 대단해요. 우리의 고집은. 우리는 말씀이 백날 와도 어리석은 부자, 농부 되고 싶어요.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찔러 쪼갠다.” 언제 찔러 쪼갰습니까? 들으면 흘러내리고, 주일 낮 설교 들으면 흘러내리고, 또 몇 시간 뒤에 오후 설교 들으면 그것도 흘러내리고, 남아 있는 것은 빤질빤질한 차돌 같은, 그런 차돌만 반짝반짝 빛이 나지요.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셔 No No No No No……Gee Gee Gee Gee Gee~” 그야말로 이건 뭐 반짝반짝 눈이 부셔요. 얼마나 뺀질인지 말씀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부자 농부 이야기했는데 성경 이야기 좀 떠나서 어떤 사람, 평범한 어떤 사람 이야기해 드릴 테니 이 사람이 과연 뭐가 문제인가 한번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은,
초가 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
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물레방아 돌고도는 내 고향 정든 땅
푸른잔디 벼게 삼아
풀내음을 맡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내 사랑 순이와 손을 맞잡고
흙에 살리라~
이게 뭐가 어리석습니까? 홍세민 노래인데요,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초가삼간, 마음도 겸손해. 욕심도 없어요. “초가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 아기 염소 벗을 삼아.” 욕심도 없어. 완전 자연인이에요.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아무 탐욕도 없어요.
남들은 출세하겠다고 서울 갔지만 오히려 이 사람은 그 사람들 보고 이야기합니다.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이게 <흙에 살리라>라는 노래인데 맨날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아이고 얼마나 착합니까? 이게 왜 어리석으냐 그 말이지요.
그것은 범주가 달라서 그래요, 범주가. 지금 오늘 본문은 범주를 언급하는 거예요. 생소하기 짝이 없는 범주. 인간은 자기 믿는 재미로 살거든요.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의 노력을 의지해요. 그런데 그게 어리석다는 거예요.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고 그게 대적이라는 거예요, 대적. 하나님의 원수라는 겁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에 대해서 말하면서 저주를 언급합니다. 복을 알아야 저주를 알고 저주를 알아야 복을 아는데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좆지 아니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은 뭐고 악인은 뭐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의지하는 자, 우리 혼과 영을 쪼개는 그 말씀, 쪼개지면서 맨날 쪼개는 그것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과, 내가 농사 잘되어서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과, 주님께서는 주님이 거할만한 범주가 확연하게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범주가.
복 있는 자는 뭐냐?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요. 시편 1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포도나무라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정했던 범주에요. 환경입니다. 하나님 세계에요. 거기서는 뭐냐? 포도나무가 주님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 포도나무에서 나온 열매에요. 예수님의 열매를 하나님은 원합니다. 내가 노력한 내 성과를 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붙어 있어서 달린 그 말씀의 성과, 열매, 그 열매만 하나님이 생명으로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의, 율법의 열매지요. 거기에 대해서 율법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시편 1편에 나와 있어요.
이런 차원에서 볼 때에 그 농부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범주는 자기가 알고 있는 범주, 인간의 체질에서 그냥 나왔던 그 범주를 끝까지 고집하는 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 땅에서 ‘범주 바꿔치기’하는 작업에 대해서 모독하는 겁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달라. 채워주세요.” 이렇게 할 뿐, 왜 우리가 못 알아듣는 딴소리를 하느냐고 비난하고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범주 이야기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례가 또 하나 나와요. 누가복음 23장 42절의 말씀입니다. 유명한 십자가에 달린 어느 강도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형수에게 소원이 있다. 이건 개그 같은 겁니다. 실제로 어떤 개그에 보면 나와요.
사형수에게 사형집행인이 “이제 네가 30분 지나면 죽을 건데 마지막 소원은 인간적으로 들어줄게. 뭐 먹고 싶으냐?” “따뜻한 커피 한잔 먹고 싶습니다.” “좋아. 소박하구먼. 여기 커피 갖다 줘라.” 커피 갖다 줬어요. 커피 먹는데 30분 더 걸립니다. “그만 먹어라.” “커피 맛 좀 음미하고요.”
이것은 개그예요. 사형수가 무슨 소원이 있습니까? 인간의 범주에서는요, 사형수는 인간의 범주에서 끝이에요. 예수님도 사형당했잖아요. 예수님을 사형시킬 때 예수님을 사형시킨 인간들은 예수님의 모든 소원을 예수님 살해로 죽음으로써 끝났다고 봤습니다. 영원히 예수님을 퇴출한다고 봤어요.
쉽게 말해서 ‘예수 당신이 생각하는 범주는, 당신의 사형집행으로 당신의 모든 것은 절망으로 끝났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당신도 죽음을 못 면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구원자라고 할 수 있느냐.” 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23장 42절,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게 사형수의 소원입니다. “당신의 나라 임할 때” 이 사형수, 어느 한쪽 사형수는요, 범주를 예수님의 범주까지 확장 시켰어요. 나의 범주에서 예수의 범주로 합류시켰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오늘 나훔에서는 그걸 의뢰한다, 라고 해요. 의지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의지하는 거예요. 요셉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제로 족쇄를 채워놨기 때문에 요셉은 자기의 꿈, 말씀 외에는 달리 의지할 게 없지요. 어쨌든 그것도 의지예요. 하나님의 말씀의 범주에 강제로 묶여서 요셉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인간세계의 범주의 차단막을 넓혀버리고 말씀으로 그 인간세계의 범주를 뛰어넘는 그러한 행로를 요셉이 보여줬습니다. 그게 말씀의 위력이지요.
아까 히브리서 4장에서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을 쪼개고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고집하고 있는 나의 일한 것, 내가 생각하는 것만 의지하는 그 범주를 쪼개는 것은 주님의 범주에 속한 그 말씀이 우리에게 활동력 있게 작용하는 그 경우밖에 없어요.
이 사형수 이야기 말고 대비되어서 흔히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세요. 어떤 가정인데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어머니가 장성한 자식 둘을 모아놓고 넋두리를 합니다. 넋두리 하면서 제일 먼저 운을 떼는 게 이렇게 운 뗍니다.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리고 애 둘 낳은 젊은 나밖에 안 남아서 너그 밥이라도 먹이고 공부는 시켜야 되겠다, 해서 내가 죽을 고생해서 내가 뼛조각만 남았다.” 하고 주저리주저리 넋두리할 때 이게 바로, 이 범주가, 그 할머니의 범주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께 대적이 되는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꺼내고 있습니다.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리고.”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리고, 가 무슨 뜻입니까? 이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우리의 삶의 범주의 전부라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 23장 42절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이것하고 “느그아부지 세상 버리고 어린 느그들 키운다꼬 내 고생 마이 했다. 너그들 나한테 잘해 줘야된다. 결혼했다고 느그끼리 살지 말고 나한테 잘해줘야 돼. 한달에 백만 원씩 가져와. 너그 아부지 세상 버리고 연약한 여자 몸으로 느그 다 키웠다. 느그도 자식 키워봐라. 그거 모르지?”
이 할머니 이야기가 오늘날 세상 사람한테는 그렇게 감동이 되고, 독려가 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같이 동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똑같은 체질인 거예요. 범주문제에요, 범주문제. 눈에 보이는 삶의 범주,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없어요. 무슨 재주로, 눈에 보이는 이게 진리고 전부고 현실 그 자체인데 무슨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배부를 때는 다 나중 문제지요. 배부를 때 믿는 것은 그것은 믿는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은 그걸 믿음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의지할 게 없어요. 곧 15분 지나면 사형 집행해서 목숨 끊어지는 판인데 거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 강도가 강도질한 것, 그 살인자가 살인한 것,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살인을 했고 강도질했다는 사실을 이 강도가 그걸 이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왜냐하면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로부터 의지하는 게 아니라 말씀부터 시작해서 말씀으로 자기를 되비쳐보니까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요셉에게 일어난 것처럼 말씀이 말씀대로 응하기 위해서 꼭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일들이었습니다. 방금 이러한 해설, 이러한 해석, 설명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분노를 유발할 거예요. 아마 욕설을 하고 싶을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서울 강남에 비가 많이 와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맨홀 뚜껑이 잘 닫혀 있는데 밑으로 흐르던 하수구의 물이 넘치니 맨홀 뚜껑이 공중으로 물줄기 따라서 혹처럼 공중으로 튀어 나와버렸어요. 그러면 보통 비 오지 않을 때는 맨홀 뚜껑은 아스팔트하고 같은 지표면에 딱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가 오니까 맨홀 뚜껑은 공중에 떠 있고 그 밑에서 강력한 물줄기가 기둥처럼 받치고 있는 이 모습이 얼마나 낯선 것이 돌출했다고 보겠습니까? 낯선 것이 돌출한 것이지요.
바로 나훔 선지자가 하나님의 범주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적이 물기둥으로 거꾸로 이 범주, 하나님의 범주, 말씀의 범주에 돌출되지 말아야 될 적들이 돌출되어 솟아오르니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만있지 않고 제때에 분노하시고,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고, 그리고 8절 마지막에 그 대적들을 너그들 범주에 가서 놀아라, 해가지고 그들을 흑암의 범주에 집어넣는다, 지금 그 이야기를 나훔 선지자가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데 어리석은 부자 농부같은 그런 인간들이 이 땅에서 감히 여기서 살려고 그렇게 하느냐?” 하고 나훔은 지금 그런 차원에서, 주의 분노 차원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훔 선지자 입장이고, 하나님 입장이고, 말씀 입장이고 우리 입장은 이렇습니다. ‘나도 밥 먹고 삽시다.’
이게 뭐가 어리석은 것이고 이게 무슨 욕 얻어먹을 거리입니까? 나도 좀 살자, 이 말이지요. 너그 아부지 세상 버리고 애 둘 있는데, 그러면 뭐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지요. “장사를 하든 뭘 하든 간에 여자의 아름다움은 다 버리고 몸이 뼛조각 될 때까지 이만큼 살았으면 되었지 이게 왜 하나님께 하나님의 원수라는 비난을 받아야 될 이유가 되느냐? 도저히 납득이 안되겠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게 네 체질이야. 그게 네 타고난 체질이야.” 죄 아래 있는 자의 체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하고 도저히 생각도 못 한 낯선 범주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용서로써, 피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의지하는, 다 이루었음을 의지하는 새로운 사람들로 천국 공간을 채우는 그 범주를 채우기를 원했던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두 종류의 범주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차단막을 쳐버리고 말씀 안의 세계, 주님의 범주가 있고 말씀 안에 들어오지를 못해서 말씀 전하는 자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그러한 흑암에 갈 그런 사람의 범주가, 두 종류의 범주가 확실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확실하게 가려지고 규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말씀이 오면 어떻게 주님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느냐?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을 처음 자리, 새로 시작하는 자리로 만듭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부터 출발한다면 그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자기의 처음 자리에서, 말씀의 자리에서 그 예수님의 하신 일이 새롭게 해석이 되었던 겁니다.
‘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이 말씀의 효과요 능력이고, 주님의 일이었구나.’ 그렇게 자기 죽는 자리가 새로 시작하는 자리가 된 겁니다. 이게 나의 범주를 버리고 주님의 말씀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이름만 의뢰한다, 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얼마나 말씀을 도용했습니까. 그런 속임수에 일체 하나님이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여, 모든 것이 매일같이 말씀으로 깨어지고 새로 시작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