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이스라엘
2022년 7월 6일 본문 말씀: 미가 7:10-13
(7:10)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7:11)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7:12)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7:13)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이스라엘은 원형은 고정됨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와의 분할되는 움직임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본디 지니고 있돈 자신의 본색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을 이스라엘 주변에 포진해 있는 이방민족들의 의식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무지 이스라엘다운 면모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방민족민들처럼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무가치하다고 단정지은 주변의 이방나라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공격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그 이스라엘 나라를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자극했고 동원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성을 이스라엘이 다 잃어버렸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방나라가 무가치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무가치했던 겁니다. 즉 인간 세계에 그 어떤 것도 가치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가치가 있을 수 없는 자들이 마치 자신에게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신의 가치를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멸망으로 갚아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것은 무가치를 가치없이 심판하시는 바로 그 심판 행위만이 가치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가치있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근거로 해서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강한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덮쳐서 깔아뭉개버리도록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방민족을 손보실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도끼, 칼, 몽둥이에 불과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치 생선요리를 먹을 때 젓가락으로 생선의 껍질을 헤집어서 한쪽으로 치워놓아서 껍질 밑에 들어 있는 속살을 먹을 수 있듯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이방민족의 권력을 무력화해서 그 영향력을 치워놓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이 통치했던 영역은 새로운 가치를 지닌 이스라엘의 영토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 영토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게 되면 그 나라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해 평면적이 수평적인 모형으로 다루어집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 거주지가 되는 새 영토는 신약에 어디에 있을까요? 그곳은 일단 이방민족의 지배와 통치를 무가치한 것을 간주되어 철저한 심판이 가해지는 영토 밑에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 세상 모든 수평적 영토는 불의 심판으로 다 태워집니다.
불에 태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영토는 이 지평에 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치있는 영토, 즉 이방민족의 지배하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사도행전 5장을 보면, 한날에 죽은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부가 교회에 대해서 행한 일은 여전히 자신의 수평적인 평지에 자기만의 소유를 가지려고 한 자들입니다.
땅을 판 헌금의 일부를 교회를 내고 나머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따로 사유하려 했던 겁니다. 이 부부의 문제점을 자신의 소유로서 교회에 헌금이 가능하다고 여긴 점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지 자신의 소유물을 교회에 바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왜 그런게 하면, 인간이 가진 모든 소유는 다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가치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가치는 인간이 소유하거나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계속 움직이고 움직이는 가치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 명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다가갑니다. 움직이는 겁니다. 이동하는 겁니다. 특정 수평적 자리에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가 오셨다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다나엘에게 찾아갑니다. 너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 전에 무화과 나무 밑에 있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등장합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호응하여 예수님을 참 이스라엘을 임금으로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20:21에 보면, 두 세 사람이라는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약에 와서 새로운 이스라엘은 지정된 평면적 장소가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간을 수직적으로 소개하십니다. 마치 하늘에서 땅으로 치맛자락이 펼친 것처럼 하늘에서 펄럭이는 공간입니다.
북극점에서 밤에 볼 수 있는, 하늘에서 땅까지 펼쳐진 자기장의 커튼인 오로라처럼 말입니다. 창세기 28:12에서는 밤에 야곱의 머리 부분에서 이 공간이 펼쳐집니다. “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야곱의 입장에서 밤에 이 새로운 공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인물 자체가 이 하늘의 사다리가 멸망의 대상인 이 땅의 세계의 접전 지점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활동하시고 움직이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 이 세상은 깜깜한 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온통 깜깜한 밤인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존재를 보장받기 위해 따로 소유를 생각하는 것이 아나리아 삽비라처럼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사도들처럼 이 세상에 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4:19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 보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오늘날 칼의 기능으로 특화된 자들입니다. 세상을 땅과 하늘을 분할하는 칼 말입니다. 이 칼을 쥔 분은 주님이시에 나타난 자들은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과 땅 사이에 새로 형성된 십자가 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성도가 삶은 바로 새로운 가치있는 이스라엘과 멸망당한 가치없는 이 세상과에 형성된 접점을 형성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여호와의 칼이요 기드온의 칼임(삿 7:20)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6강-미가 7장 10-13절(움직이는 이스라엘)2207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7장 10-13절까지입니다.
미가 7:10-13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 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하나님의 일은, 말씀은 항상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어떤 변화가 있느냐? 그것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고, 그 변화 하나하나가 바로 숨어 있는 하나님의 본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그렇게 하시면 안 되고요,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알려졌습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겠다, 주님의 뜻은 알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시고 이스라엘에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시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남김없이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변화를 겪게 하는데 그 변화가 이방 민족,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부추겼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민족으로 하여금 들고 일어나서 하나님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거예요.
그렇게 공격을 하게 되면 이방 민족에게는 어떤 면이 드러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별거 없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니네.’라는 생각을 이방 민족들이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 나라를 그들이 손쉽게 정복을 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은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신이고 그것은 있으나 마나 한 신이라는 것을 그들의 공격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실감할 겁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이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대단한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이 막상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 민족한테 제대로 당하고 난 뒤에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도 속으로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잘살고 잘 먹고 큰 나라 되는 이방 민족의 신보다 별것 없다.’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는 것이 들통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은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마음도 전혀 없었습니다. 있으나 마나 한 하나님처럼 그렇게 쉽게 생각했지요. 하나님이 있어도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있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사람들은 멸망 당하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면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을 시시하게 보는 쪽에서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없애버린다는 그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뜻을 도와주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도와주고 안 도와주고 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자기의 불신앙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드러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은 나타났습니다.
불신앙적인 자는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없앤다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이용한다든지, 하나님을 통해서 이익을 보겠다든지 이런 것을 불신앙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이 쳤을 때 ‘아, 그 여호와 하나님 별거 아니네. 우리가 믿는 하나님보다, 마르둑 신보다 못하네.’라고 교만을 떨면서 하나님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스라엘을 쉽게 정복할 때 그들 또한 하나님이 없는 자로 규정이 되어서 그들도 멸망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멸망시키고 이방 나라는 이방 나라대로 멸망시켜서 이 세상 모든 인간세계를 멸망시키는 것,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참 쉽지요.
이 핑계 대고 저 핑계 대서 다 멸망시키는 거예요. 멸망시키면서 그 인간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으냐 하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여, 제 인생의 뜻이 뭡니까? 제 인생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하나님 저에 대한 일이 뭡니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이미 하나님의 뜻은 확정났어요. “너는 무가치해. 끝. 너는 가치 없어. 네가 나한테 기도하는 것은 네 가치를 좀 높여보고 가치를 쥐려고 한번 시도해보는데 애당초 너는 가치가 없어. 무가치해.”
이 무가치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게 돼요. 목회를 해도 무가치하고, 교회 다녀도 무가치하고, 예배드려도 무가치하고, 모조리 다 무가치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무가치한 것밖에 없다면 그러면 가치 있는 게 뭐냐?
무가치한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덮어서 그 무가치함을 통해서 무가치함을 작살 내시고 작살 낸 그 행위 자체가 가치 있는 행위에요. 이런 겁니다. 이방 민족은 무가치해요.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이방 민족을 동원해가지고 자칭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가치 있을 것이다.’라고 여긴 이스라엘을 위에서 덮어버려요. 덮어버립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그래요. 덮고 난 뒤에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덮여 있는, 덮여 있으니까 두꺼운 껍질같이 되어 있겠지요, 덮개처럼 완전히 질식하도록 덮어놓은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그 덮어놓은 이방 민족을 헤집습니다. 살살 헤집는데 그 헤집는 게 뭐냐 하면, 12절에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하지만, 13절에, 원래 바탕이 되는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그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바다, 지중해에서 저 바다, 지금의 이란 밑에 있는 이란만, 바사만이지요, 이산, 시내산에서 저 산, 레바논 저 윗 산까지 어쨌든 간에 하나님의 일은 구약 때는 이스라엘 그 영토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이 출현해요.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느냐고 자꾸 기도하면서 따지지 말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오늘 본문 미가같은 예가 되겠는데요, 그 하나님이 계셨던 그 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어떤 조짐이 있는가 살펴보면 그 덩어리 자체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헤집는다는 말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갈치조림 같은 것 먹을 때 껍질 잘 안 먹잖아요. 그러면 젓가락 가지고 껍질 벌려놓으면 그 안에 속살 나오지요. 속살만 파먹습니다. 위에 붙어있는 게 무가치한 거예요. 무가치한 것을, 주님께서는 무가치한 이스라엘을 무가치한 이방 민족이 레슬링 할 때처럼 완전히 엎어지게 만들었어요. 꼼짝 말라, 하고 완전히 정복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정복하게 만들어놓으니 이방 나라가 기세가 등등했지요. ‘이스라엘 꼴 좋~다! 하나님 여호와 믿더니 너희들 꼴 좋~다.’ 하고 기세가 등등한데 위에 있는 그 덩치 큰 게 덮쳐 있고 무가치한 이스라엘은 밑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무가치한 밑에 깔린 이스라엘이 새로운 진짜 이스라엘로 가치가 부여가 돼요. 분명히 깔려있을 때는 무가치한데 이게 무가치한 이방 나라로 깔리고 난 뒤부터는 거기서 예상 못 한, 하나님이 원하는 가치가 거기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사야 10장 15절에 보면,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완전히 정복할 것이라고 언급해 놓고 그 뒤에 15절 이야기가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을 톱과 그리고 도끼와 몽둥이로 이렇게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때리라고 지시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 민족은 기껏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몽둥이고 톱이요 그리고 도끼에 불과한 것을 알아야 되는데 이방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 안 하거든요.
그러면 자신들이 믿던 신 또는 자기 신의 능력으로 저 약소국가 이스라엘을 거침없이 밟았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했노라, 이런 식으로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사야 10장 15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기껏 너희들은 몽둥이고 톱이고 그냥 도끼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너희들이 정복한 그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을 만든 그 하나님이 내 백성 치라고 너희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치게 했는데 너희들은 너희를 들어서 치는 그 도끼를 드는 그분을 너희들은 망각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너희들이 좀 맞아야 되겠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에요.
교회에서 금요일에 철야 하면서, 온밤 새우면서 기도할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커피 석 잔씩 마셔가면서 막 이렇게 하는데 “너 자체에서는 어떤 가치가 안 나오니까 나를 가치 있게 해 달라는 그러한 생각은 하지 말아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내가 내 가치를 다시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떤 영화 제가 본 영화에 <교회 오빠>라는 영화가 있어요. 다큐멘터리 영화로 아주 유명한데 암 말기가 되어서 자기가 기도하고 교인들도 기도하는 그 영화를 봤거든요. 보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거예요. 어떤 청년, 유능한 청년 이야기인데요. <교회 오빠>라는 영화평 십자가 마을에 다 올려놨어요.
유능하고 인텔리고 과학자로서 살아가던 그 사람이 암 말기가 된 거예요. 왜 말기암이 되었냐고,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왜 말기암이 되었냐 하면요, 무가치하기 때문에 그런 게 걸린 거예요, 무가치하기 때문에. 그러니 살아 있는 같은 교회 교우들은 열심히 살려달라고 기도한다고요.
그들이 왜 기도하느냐? 기도하는 그들의 기도가 무가치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기도하게 하는 거예요. 둘 다 무가치해요, 둘 다. 그래서 <교회 오빠>라는 영화를 아무리 봐도 주의 뜻이 가려졌지 주의 뜻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무가치한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내는데 그게 뭐가 이상한 일입니까?
그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말로는 죄인입니다, 무가치합니다, 해놓고는 내가 무가치합니다, 죄인입니다, 이 말 했으니까 가치 있다고 좀 간주해달라는 거예요. 어디서 꼼수를 쓰고 있어요, 꼼수를! 부족합니다, 회개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니까 가치 있게 봐달라는 겁니다.
그런 꼼수는 같은 무가치한 인간한테나 통하지요, 어떻게 주님한테 그게 통합니까? 그래서 여기서 무가치한 것밖에 없는 데서 하나님께서 덮어놓은 이방 민족을 갈치조림 헤집듯이 껍데기를 헤쳐버려요. 껍데기를 헤치니까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이 원했던 면적이 나와요. 지경이 나온다고요.
여기 본문 11절에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했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지경이 넓혀진다는 말은 더 이상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서 실시하는 바벨론 제국의 법령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법령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나름대로의 자신의 폭을 넓혀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 잡혔다가 거기서 해방되니까 이제는 더는 그동안 압제했던 바벨론의 법령이 이 새로운 이스라엘한테는 전혀 적용이 안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이 가는 곳마다 바벨론이 접수했고 권력을 행했던 그 권력이 찢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새로운 가치에요.
기존에 무가치한 인간 세상에서 만든 모든 법에 대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특징은 그 법을 개무시해버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말입니다. 모든 인간의 모든 인간이 지어낸 모든 법에 대해서, 윤리 도덕이고 사회질서고 간에 그것을 완전히 동쪽으로 물러가, 서쪽으로 물러가, 물러가, 다 물러가는 거예요. 다 밀쳐버리니까 거기서 새로운 영토가,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 이스라엘 영토가 거기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지요. 이게 지경이 넓혀지는 거예요.
이것이 구약이기 때문에 구약의 특징은 수평적입니다, 수평적. 평면적으로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이스라엘 땅이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바벨론, 저 밑에는 애굽, 이렇게 구약 자체가 모형이기 때문에 평면적으로 알기 쉽게요, 여기서 여기까지 이스라엘 땅, 여기는 사해 바다, 요단강, 지중해, 다른 나라, 여기는 이집트, 앗수르, 이렇게 하지만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평면적이 아니고 수직적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새로운 이스라엘 등장과 더불어서 그들이 사는 영토가 그동안에는 이방 민족한테 장악당했는데 서서히 하나님이 작용해서 이방 민족을 쳐버리니까 그들이 잠식했던 그 약속의 땅이 조금씩 조금씩 껍질이 벗겨지니까, 껍질이 벗겨져 나가니까 속살처럼 진짜 약속의 땅이 펼쳐지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모아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건설된다, 라는 식으로 미가가 그렇게 기록했거든요.
이것은 뭐냐? 구약이기 때문에 이게 평면적이에요. 실제로 그런 땅이 생겨났고 이게 평면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그렇게 평면적이 아닙니다. 평면적이 아니면 뭐냐? 수직적이지요. 수직적인 곳에, 하나님의 천국, 새로운 이스라엘이 살던 그 영토가 수직적으로 나타나고 평면적으로는 한 평의 땅도 성도의 땅은 이 땅에는 없습니다.
왜 없어야 되느냐? 이 땅은 불로써 다 타버려야 되는데 이 땅에 성도가 있을 이유가 없지요. 마태복음 18장에 보게 되면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교회라면 그 교회가 최소 몇 평 되어야 되겠습니까? 한 사람은 설교하니까 교인 한 명이라 보면 몇 평이 있어야 돼요? 한두 평만 있어도 충분하지요.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한 영토가 신약에서는 어떤 평면적인 영토가 필요치 않습니다. 교인들이 신자가 아니면 굳이 목사가 신자 될 필요 없잖아요. 왜 뭐하러 됩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만약에 5천 명 모인 가운데서 그중에 성령 받은 신자가 딱 두 명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교회가 필요한 평수는 3평 내지는 5평 필요해요. 5천 명을 수용할 예배당이 필요치 않습니다. 어차피 그것은 교인 아니니까요.
한 명의 신자가 있으면 목사가 꼭 필요해요. 한 명의 신자가 있으면. 왜냐? 두세 사람이니까. 그러면 그 두세 사람이 있는 그 영토는 신약에서는 그 영토, 이스라엘이 거주할 영토는 어디 있는가? 수직적으로 있습니다.
수직적으로 있다는 말은 하늘에서 치마가 펄럭인다고 보면 되지요. 하늘에서 땅까지 치맛자락이 펄럭이듯이 하늘에서 땅으로 펼쳐진 자기장, 오로라라고 하지요, 오로라, 그 오로라가 펄럭이면 그 하늘과 땅에 수직적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그곳에 거주해요.
그러면 그 수직적인 것이 땅을 만나면 신자는 뭐냐? 하나의 경계선이 돼요. 면적이 아니고 선(線)이 된다고요. 선이니까 이것은 뭘 로 표현하냐 하면, 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칼로. 어떤 칼? 이 세상을 분할 할 수 있는 기능으로만 특화되는 칼. 칼의 특징은 소유가 아니고 잘라내는 기능이에요, 칼은.
스테이크 잡숴 봤지요? 스테이크 고기 잘라놓고 “칼아, 너 수고했다. 너도 고기 한 점 먹어봐라.” 칼한테 고기를 줄 이유가 없어요. 칼은 자르는 기능만 하면 되니까요. 그 자르는 기능, 선으로만 기능, 이 선으로만 하는 기능이니까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운동이에요.
신약에는 존재하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운동하는 이스라엘, 선(線)으로만 작용하는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이 선으로만 작용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이 땅에서 어떤 면적을 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이 칼날처럼 작용해서 그 면적을 부정해 버립니다.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식의 내 소유의 땅을 따로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리면, 자기 소유의 땅을 가져버리면 이것은 구약적 안목을 지녔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의 뜻의 공격대상이 돼요. 예를 들어서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도행전 5장 8절 보게 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이 부부 사이인데요, 그 사람이 사도 앞에 헌금을 하다가 그 날로 두 사람 다 죽습니다. 남편이 먼저 죽고 그다음에 아내가 뒤늦게 죽는데요.
7절에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여기 ‘생긴 일’이라는 것은 남편이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버린 사건, 그 일을 알지 못하고 아내가 들어오니, 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라고 그 아내가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9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그러니까 죽은 즉시 시체를 치우려고 장사를 치렀던 모양이지요. 남편 죽고 난 뒤에 세 시간 만에 아내 장사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새로운 가치를 지닌 새로운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자기 소유, 나의 소유, 다시 말해서 고정된 구원, 고정된 구원을 확보하려는 그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에서는 용납이 될 수가 없어요.
새로운 가치는 소유를 함으로, 어떤 영토를 소유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토라고 이 땅에서 내가 평면적으로 갖고자 하는 이 소유성은 미가에 나오는 새로운 가치에 의하면 그것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가치는 그들을 잘라내고 도려내는, 무가치한 것을 잘라내고 도려내는 분할적인 기능이라는 것을 특화하는 방식으로만 이 땅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또 이야기 안 해도 되지요? 두 사람 있는데 교회 몇 평 필요합니까? 필요 없지요. 교회 평수가 필요 없다니까요. 두세 사람인데요. 그러면 두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바로 두세 사람 위에 주님이, 위에 있는 하늘과 땅 사이에 그 공간에 수직적으로 있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공간에 이미 그들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지상에 따로 나를 위한 어떤 소유적인 것은 필요치 않아요.
나를 위해서 소유하겠다는 뜻은 뭐냐 하면, 내가 이 땅에 어떤 고정적인 존재성을 갖겠다는 거예요. 고정적인 것, 소유를 통해서 고정적인 것을 갖겠다는데 이것은 아나니아 삽비라가 그렇게 해서 죽었잖아요.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되실 거예요. 그래서 신약의 요한복음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빌립이라는 사람이 나오고 그 사람이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나다나엘을 찾아가고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아를 우리가 만났다, 이렇게 하니까 46절에,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나오는 안드레와 베드로 전부 다 예수님 제자지요. 그다음에 같은 동네 사람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인정 못 하고 있다가 와 보라, 고 이야기했고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먼저 나다나엘에게 평을 해버려요. “쟤는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여기에 무슨 영토가 필요합니까? 여기에 무슨 자기 소유성이 필요합니까? 여기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움직이고 있는 이스라엘, 움직이고 있는 이스라엘이에요. 빌립, 안드레, 베드로, 모두 움직이고 있어요. 어떤 자기만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4장 19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보고,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했다 이 말이지요. 사람 낚는 어부니까 이것은 운동하는 거예요. 신약에는 존재하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운동하는 이스라엘이에요. 고정된 이스라엘이 아니고 움직이는 이스라엘.
운동을 자꾸 고정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게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그렇게 되어버려요. 줄 것 주고 내 것 챙기면 되지, 내 것 챙긴다는 자체가 소유성이고 고정된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 이용해서 결국은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는 옛날 무가치한 이스라엘의 그 무가치성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 망했습니까? 이방 나라 사고방식이나 이스라엘 사고방식이나 똑같이 내 것 소유해서 이 땅에 어떤 고정적인 내 자리를 마련해 보려는 그런 의식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신약의 입장에서 그것은 무가치한 거예요. 하늘나라의 천국 입장에서는 무가치한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다음에 뭐라 하느냐? 요한복음 1장 48절에 나다나엘이,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할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지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하고 계시는데 무슨 홀 빌렸습니까? 지금 건물 하나 빌렸어요? 어디 평수가 필요합니까? 예수님 움직이고 있고, 그 움직임 속에 나다나엘이 함께 합류했으면 그것을 가지고 뭐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찾아오신 예수님과 만난 그 나다나엘,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 모인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가치입니다. 내 가치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 가치 따로 챙길 필요가 없어요. 교인 5천 명이 필요 없다니까요!
우리 교회 5 천명이라도 성령 받은 사람 한 사람 있습니다, 뭐 한 사람 있으면 목사는 그 한 사람을 위해서, 5 천명 그 사람들은 모르겠고, 그 한 사람을 위해서 같이 있다면 바로 주님, 그리고 그 사람, 이 사람, 이 두 사람이 주님과 함께 그게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새로운 가치에요. 왜? 어떤 존재성, 어떤 소유성이 거기에는 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나옵니다. 49절에,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계속 이스라엘 나오지요. 그럴 때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50, 51절에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갑자기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면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수직적으로 펼쳐지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이 원했던 이스라엘의 원형이었다는 겁니다. 야곱이 해 저문 뒤에 돌 베개 베고 잠을 자는데 창세기 28장 12, 13절에 보면,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자, 이 사닥다리가 위치하는데 그 사닥다리가 위치하는 곳은 뭐냐? 이것은 야곱의 머리맡이에요. 이것은 면적이 아니고 그냥 선(線)이에요, 선, 폭이 좁은 선이라고요. 그 사다리 설치하는데 사다리 스토퍼가 필요한 게 아니고 그냥 야곱의 머리 위에 하나의 접점지점으로, 하늘에서 펼쳐진 그 평면이 지상의 평면과 만날 때는 하나의 선으로만 만나고 점으로만 만날 뿐이에요.
인자가 하늘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요한복음 1장 51절, 거기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라 같은 그런 면적이 필요한 거예요. 그 면적이 언약으로 가득 찬, 진짜 무가치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하나님이 가치 있게 보는 그 새로운 영토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거기에 총 집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 그게 안 보이느냐? 우리한테 왜 안 보이느냐, 할 수 있는데 원래 창세기 28장 12절에 야곱에게 나타났을 때는 그게 밤이었어요. 밤에 잠을 자고 꿈을 꾸니까 야곱의 머리 위에서 사닥다리가 나왔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했잖아요. 그 깜깜한 밤, 그 깜깜한 밤이 요한복음 1장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이 움직일 때마다 이 세상은 자체적으로 깜깜한 밤이 되어서 완전히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깜깜한 밤 같은 존재로 그렇게, 그렇게 돌변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움직일 때마다, 사도들이 움직일 때마다 이 세상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부 다 깜깜한 밤에 포함이 되어버려요. 이방 나라가 되어버려요. 무가치한 것들이 범람하는 그런 밤 같은 겁니다. 예수님이 밤이에요. 야곱이 밤에 사닥다리를 본 것처럼 예수님이 밤이에요. 예수님이 밤을 만들어내 버려요. 이 세상이 깜깜한 밤으로,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야곱이 꿈에 봤던 그 밤, 멀쩡한 대낮에 예수님께서 설교하면 그게 밤이 되어버려요. 야곱의 밤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뭐냐, ‘저 예수님한테 어떻게 능력받아서 내 소유가 넉넉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예수님 자리에서 뭐가 보이는가를 봐야 돼요. 그러면 거기서 새로운 면적이 나와요. 새로운 영토가 나온다고요. 천사들이 활동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새로운 영토가 예수님이라는 그 선, 경계선에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제가 그것을 칼 같다고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쉽게 해봅니다. 아무리 떼 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그 티눈 같은 것, 딱딱한 피부요, 굳은살이 있고 안 보이게 그 속에 티눈이 있는 그것을 독한 용액을 바르게 되면 껍질이 벗겨지면서 그 안에 티눈이 보이듯이, 주님께서는 이방 민족이라는 무가치한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무가치한 나라를 덮어버리고, 그다음에 덮고 난 뒤에 독한 용액처럼 이제는 이방 나라를 심판하는 가운데서, 무가치한 이방 나라를 심판하면서 그 심판하는 그 자체가 주의 뜻이에요.
강남강의에서 제가 그걸 강조했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독한 용액이에요. 독하게 뜯어버리면 거기서 비로소 내 백성 이스라엘은 죄인 맞다, 무가치한 것 맞다, 라는 그러한 언질이 주어지게 되면 죽어 마땅한, 우리는 원래 인간은 무가치해서 죽어 마땅하다는 고백이 나온다면 그 고백 안에 주의 뜻이 담겨 있고 그게 가치 있는 거예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예수님, 제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너한테 다가가서 이스라엘 되게 하려고 내가 미리 너를 알았다.” “예수님은 진짜 이스라엘 임금님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 내가 알았다고 그것 가지고 놀라나? 네가 장차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새로운 영역, 새로운 영토, 새로운 성도들,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될 새로운 것이 수직적으로 펼쳐지는 것을 네가 알리라.”
그러니까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예수그리스도가 그 어떤 점을 만들고 선을 만들면 바로 그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작은 면적이지만, 그 접점이지만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이루어진 천국 안에 들어온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 자들이 누구냐 하면, 사도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부동산 몇 개 갖고 있었습니까? 사도들은 움직이는 존재,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그냥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왜? 성령이 움직이니까, 성령이 움직이고 그 안에 십자가 움직이지요, 예수님 움직이지요, 움직이는 거예요, 움직이는 것, 움직이는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할 고정된 장소, 자리 같은 게 필요치 않습니다. 칼이라는 것을 언급한 것은 사사기 7장 20절에 기드온이 나옵니다. 기드온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 해요. 3백 명 데리고 전쟁하면서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이렇게 했어요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그러니까 기드온 나라는 존재는 어떤 기능이냐? 하나님의 잘라내고 분할 하는, 쪼개서 나누는 그 기능으로서의 나일 뿐이다, 그 말이지요. 내가 칼을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설치는 칼날에 해당 되는 자가 바로 나 기드온이다, 그 말입니다. 칼 든 자는 안보이고 칼날만 보이는데 그 보이는 칼날이 나 기드온이다, 그 말이에요.
그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에요. 그냥 칼이에요. 칼은 선(線)이에요. 그냥 점입니다. 뭐 다들 집에 땅 한 5백 평 있고, 50평 아파트는 다 갖고 있잖아요. 그게 점이에요. 그걸 면적으로 50평, 35평, 그렇게 하지만 그게 점이라니까요.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무리 큰 수입이 있더라도 성도한테는 그게 하나의 점이에요.
아까 아나니아 삽비라 할 때 땅 판 것을 나눴거든요. 그러면 안 돼요. 나눌 것이 아니고 그게 전부고, 수직적으로 주님과 우리가 만나는 접점, 그 지점이 1500평 땅이고, 90평짜리 아파트고요, 점(點)치고는 좀 넓다, 그렇지요, 가느다란 칼날, 지나간 칼날 자국이 어떤 것도 거기에, 나를 거기에 기대서 내가 평생 잘 먹고 잘살고 편안하게 염려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어떤 소유성, 나를 고정시키는 나의 면적이 되면 안 돼요. 나의 바탕이 되면 안 돼요. 우리는 바탕이 없습니다. 그 1500평 부동산 가지고, 아파트 가지고, 다들 7억 정도는 현찰 있잖아요, 그것 가지고 마음껏 이 땅을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이 땅을 고정적으로 이것은 내 재산이다, 내 것이다, 하지 마시고 그것은 아나니아삽비라처럼 죽는 수가 있어요, 그냥 주님의 그 면적, 칼이 좀 두껍기는 두꺼워요, 두껍지만 어쨌든 칼날이에요, 그 면적 그것 가지고 마음껏, 수평적인 이 땅 재산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천사가 활동하는 그 수직적인 새로운 이스라엘 영토에 속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갔던 그 길은 자기에게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임 그 자체가 주님의 상급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어떻게 살든지 간에 두세 사람이 주와 함께 있음으로써 천국 백성임을 드러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