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나를 위한 믿음, 나를 위한 소망, 나를 위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걱정과 고민을 할 건더기가 모두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런 고민거리를 제공해주던 바탕자체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네가 살아온 인생을 복음으로 설명해봐라" 그렇게 복음으로 설명하면 여기서 무엇이 나올까?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나의 인생'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이므로 이것을 복음으로 설명하면, "내 인생은 매일 매일 주님에게 빼앗긴 인생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주님께서 가져가시고, 또 가져가고, 또 가져가시는데, 즉 "이것은 네 것이 아니다. 노타치!" 라고 하시면서, 매일같이 가지고 가신다
사람은 말을 할 때, 그냥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은 내 것이다. 그러니 건드리지 마라.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당당하게 살아왔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남의 이야기를 한다. 정말로 복음을 안다고 하면, "내가 제일모직도 알고 김우중과 박정희도 아는데, 하지만 내가 진짜로 아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빼앗겨야 마땅하다" 라고 하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감추지 않는 인생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 것은 감추고 남의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위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평소에 내뱉는 단어들은, 자기를 교묘하게 감추는 용도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나'와 '복음' 이라는 것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데, 결합이 되지 않는다. 자기가 말하는 복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종교로서의 복음이다. "죄인 + 복음" 이라고 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나는 믿음이 좋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는 무엇이 나오는고 하면,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현실성' 즉 "십자가가 지금 나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했다" 라는 것인데, 그런 고백을 하면 그게 주의 증인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참된 이스라엘이다.
"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되지 않으면 성경자체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복음을 말이죠. 왜냐하면 복음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의 것이 따로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 목숨이고 가정이고 직장이라는 겁니다. "죄인 + 복음" 이라고 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현실성' 이다. 즉 "십자가가 지금 나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했다" 라는 것인데, 그런 고백을 하면 그게 주의 증인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게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이, 그들이 이스라엘이 되려고 하면 여기에 무엇이 개입이 되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인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난 이유가 방주인데, 그 방주가 곧 언약이다. 그러면 애굽 당시에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방주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방주가 큽니까? 노아의 가족이 큽니까? 방주가 큰데, 그래서 방주 안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옹기종기 들어있다. 이것을 신약으로 표현하면, "십자가가 큽니까? 인간이 큽니까?"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십자가가 크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다. 즉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같은 말로 '성령 안'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성령 안이라고 할 때는 방주를 생각하면 된다. '그리스도 안'도 역시나 마찬가지이고, 방주 안에서의 노아 가족을 생각하면 된다. 방주 안에서 노아의 식구들이 다투기도 했을 텐데, 그래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방주가 더 크기 때문인데, 거기에 실려간다. 그렇다면 방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물이 있다. 그 물은 마시라고 준 것이 아니고 심판용이다. 그러니 방주 바깥에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노아가 착하다고 해도, 죽는다. 즉 착하고 착한 인간이 십자가 바깥에 나가면, 그러면 저주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어린양의 바깥으로 나가면 저주를 받는데, 그런데 히브리인들이라는 이방인들이 유월절 언약을 만나서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자기를 지켜야 합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를 지켜야 합니까? 언약이죠. 그래서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언약을 지켰느냐?" 라고 하는데, 잔소리도 그런 잔소리가 없다.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 언약은 율법과 제사법으로 되어있는데, 율법을 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율법은 칼이라는 말이죠. 율법을 가지고 소위 잘났다고 하는 인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연을 전혀 이길 수 없다. 어제 낮 시간에 잉태되지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연에서 인간은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미 태어난 육적인 본성, 그 요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인간이 자연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항상 자연은 인간을 이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인간을 포함해서 자연이라고 한다.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기에, 그래서 하루 하루를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면 이 자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물은 '썩는다' 라고 한다. 냉장고가 고장이 나면 냄새가 나는데, 썩어서 그렇다. 그렇게 자연이 썩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인간도 역시 같이 썩는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방주 안에 노아가 있는데, 그렇다면 "방주 안에서 노아는 늙어갑니까? 젊어갑니까? 그게 아니면 그대로입니까?" 라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죠. 문제가 너무 쉬운가요? 노아와 그 식구들은 방주 안에서 늙어간다는. 그러니 방주는 물에서는 구원을 시켜줘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 후패함, 즉 썩어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노아언약은 보다 더 완전한 언약까지 진척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완전한 언약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고, 그리고 사흘만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심,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곧 완전한 언약이고 오늘날의 방주라는 말이죠. 그러니 생명이라는 언약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썩어가는 죄인의 이 더러운 목숨을 주님을 직접 찾아오셔서 빼앗아 가신다. 이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제가 두 가지 보기를 제시해드리겠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맞춰보시라는 말이죠. "1번, 내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2번, 복음이 나를 찾아왔다" 라는 것인데, 이것 중에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이것도 어렵지 않은데, 2번이라는 겁니다.
(마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나의 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신랑의 있음' 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여기 있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주님의 여기 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그런 주님이 자기를 찾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나의 있음'이 아닌 '주님의 있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빼앗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을 빼앗기고 없어지는 것이 제일 통탄할 문제가 된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새로운 말씀이 없다고 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러니 제일모직이나 김우중 이야기를 하지 말고, 박정희 이야기를 하고 말고, 예수님 이야기를 해달라는 겁니다. 자기는 그분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그야말로 방주 안의 노아와도 같은 입장이라는 말이죠. 주님에게 다 빼앗기고 주님 안에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복음이 '쑥' 들어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복음이 예고도 없이 들어오니 무엇이 다 깨지고 말았습니까? 자기가 믿던 종교가 다 깨지고 말았는데, 기독교가 다 깨어졌다는 겁니다. 자기를 지켜주던 종교가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진 적이 없는데, 그러면 인간은 자연에 갇혀있고, 그 자연과 함께 썩어가고 있다. 자연이 썩어가고 있는데, 그런데 거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고 하면, 그러면 구원이 된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의 어린양과 함께 가니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홍해가 가로놓여 있는데, 이 홍해는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지요? 그런데 장차 이 자연을 이기는 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는데, 그게 '주의 이름' 이다.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자연을 이길 필요가 없어도,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는 분을 위해서는, 자연이 그분의 길을 가로막으면 안 된다. 그래서 홍해라는 자연이 길을 내주었다. 그러나 자연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내줘도,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그만 원위치를 해버린다.그렇게 열렸던 바닷길이 닫히니, 수많은 애굽의 군사들이 그만 홍해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홍해를 무사히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발견했는고 하니, 애굽 군사들의 무기와 갑옷이 바닷가에 떠밀려온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오직 언약이다. 즉 하늘의 요소라는 말이죠. 그 하늘의 요소가 찾아오게 되면, 하나님은 하늘의 요소 안에 계획된 대로,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구분하신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 하늘의 요소, 즉 언약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조치하시겠느냐는 말이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언약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가 없으면 살아도 그것은 전혀 산 것이 아닌데, 그것은 지옥이라는 말이죠. 지금의 우리 목숨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썩어지고 후패해간다. 그러니 하루가 다르게 몸이 허물어져 가는 것에 대해서, 전혀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죠. 최종언약은, 방주가 아니고, 교회가 아니고. 그게 자연을 이긴 최종언약이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안' 이죠. 그 능력이 자연도 이겼는데, 그러니 죽어도 괜찮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복음으로, 십자가로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오직 십자가만 나와야 하는데, 자기 종교가 아니고 말이죠. 종교는 우상이다. 심판이 없으면 구원도 없는데, 바로 그것을 새삼스럽게 광야생활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조금 전에 "율법 + 제사법" 이라고 했는데, 이 두 가지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았다.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율법 + 제사법" 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너희들은 이렇게 지켜야 한다" 라는 것이고, 제사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는 이렇게 심판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또한 그것을 제사법을 통해서 심판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심판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율법과 제사법을 통과하게 되면, 거기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생명이 나오는데, 즉 구원이 나온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제사법에서 어린양만 죽는 것이 아닌데, 그 양의 죽음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우리도 같이 동참해서 죽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도 합세해서 같이 죽어라" 라고 하는 조건 아래에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끄신다. 양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같이 죽는다. 죄를 지은 당사자가 뜰에서 양을 잡고, 그러면 제사장은 그 잡은 피를 받아서 뿌리는데, 또한 제물은 부위 별로 잘라서, 이것을 각을 뜬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제단 위에서 홀라당 다 태운다. 그런 하나님의 불 앞에서 어느 누구도 버틸 수가 없는데,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맛보게 된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목숨을 소재로 사용해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도이다. 그렇게 보니 우리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의 지은 죄도 주님께서 필요로 하신다. 이제 정리를 해보면, 이스라엘은 시내산에도 율법도 받고 제시법도 받았다. 그러면 반드시 피가 나오도록 되어있다. 율법과 제사법,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엔진부위다. 제일 중요하다. 만약 이스라엘에 바퀴가 달려있다고 하면, 어디에 굴뚝이라고 했으면 완전히 증기기관차라는 말이죠. 그래서 '칙칙폭폭' 소리를 내면서 달려가는데,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율법과 제사법이라는 엔진부위가 작동하고 있는데, 여기는 홍해가 있고, 또한 광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이 이스라엘을 증기기관차, 즉 방주라고 여기고, 여기 안에는 율법과 제사법이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다는. 그 주변의 환경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이방나라라는 겁니다. 이 이방나라는 우상을 섬기는데, 물론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우상이고, 그들은 그냥 자기들의 신을 섬기고 있다. 그러면 이런 신과 언약을 준 신 가운에서, 어느 쪽이 진짜 신이지, 그것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쳐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게 된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서 진공상태에서 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꾸만 부딪친다. 그것이 바로 비복음적인 세상관이고 아이디어들이다. 마치 운전을 할 때 눈보라가 몰아치면 유리창에 눈보라가 부딪치듯이, 그런 일들이 생긴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한 단어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행함' 이라는 말이죠. 로마서 9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 )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행위, 즉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게 걸림돌이 되어서 십자가 앞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까? 인간의 행함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서 계속해서 남은 자를 남기면서, 그 남은 자만 구원을 하신다.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즉 하나님이 은혜로 남기신 남은 자라는 것이죠.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방금 제가 두 가지 단어를 이야기했는데, 그게 바로 '행함'과 '은혜' 다. 행함이 아닌 은혜로 구원이 된다. 인간의 행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서 남은 자가 되어서, 즉 행함이 필요치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구원을 하신다.
그러면 이 은혜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그것은 "율법 + 제사법", 이것을 온전케 하는 것이 십자가인데, 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홀로 행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다. 즉 예수님의 행하심 그 행하심의 완성이 은혜로서 주어지게 되면, 그게 인간들의 개인적인 행함으로 이긴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아무튼 이스라엘 주변에는 이방나라들이 깔려있는데, 하나님은 이런 이방나라를 '더럽다' 라고 하시고, 이스라엘을 '거룩하다' 라고 하신다. "율법 + 제사법", 이것이 제대로 가동이 되면 거룩함이 나온다. 반면에 이방나라는 인간의 행함으로 신을 섬기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러움이 나온다. 선악체제에서는 더러움이 나온다.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했을 때,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강의에 의하면, 그게 '자연으로부터의 탈출' 이라는 말이죠. 이 자연 속에는 우리의 몸도 포함이 되어있는데, 그런 자연에서의 탈출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배를 타고 가는데, 그만 풍랑이 일어났다.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왜 주무셨을까요? 잠꾸러기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인간들이 자연을 대처하는 방법을 마음껏 보여주기 위해서 주무셨다. 기도해도 소용이 없고 물을 퍼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인간의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자연을 돌파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들로서는 도저히 안 되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다를 꾸짖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먼저 꾸짖었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주님과 동행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는데, 그러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졌다. 그러자 제자들이 하는 말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도 순종을 하는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기에, 이 자연이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는가?" 어떻게 대자연이 엎드려서 순종을 하느냐는 말이죠. 이렇게 대자연은 순종을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 악마는 굴복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는 사람을 바라보고 하면 안 되는데, 배후에 있는 악마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악마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악마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함이다. 악마는 인간들에게 자기처럼 구원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가지고, 계속해서 인간들을 윽박지른다. 자기와 같이 지옥에 가자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곧 행함이다. 분명하게 주님의 행함이 있는데, 그것은 뒷전이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시 해보면 "복음인가? 직장인가?" 라는 것 중에서, 이게 결합이 되지 않는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왜 행함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 자기 직장에서 행함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가 없다. 그냥 졸고 있으면 누가 월급을 주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자꾸만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 그러니 이런 버릇 때문에 복음도 행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복음은 행함을 부정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행함으로 더하고 더하면, 그러면 복음이 더욱 더 복음답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평소에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버릇이 남아서 복음도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니 누가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 하는,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지금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 라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게 휠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죠.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이 불의한 청지기는 누가 봐도 나쁜 놈이다. 그런데 그 청지기가 주님에게 칭찬을 받는다. 이 청지기 맞은편에 누가 있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지만 주님에게는 버림을 받는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사람들로부터 선택을 받을 정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버림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사울 왕이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존경을 받는 왕이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했는데, 그런데 그 피해가 누구에게 갔습니까? 지금부터 키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소년 다윗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어떤 공식이 발생하는고 하니,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 사람들은 자기가 화난 것만 생각하지, 그런 자기로 인해서 남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복음보다도 자기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게 마귀가 심어준 본성이나 습관처럼 되어있다. 그렇게 남들의 아픔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니, 그게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아픔도 역시 모른다는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성령께서 알려주신 것은 "그 어떤 것도 복음의 가치에 비할 바가 못된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경우에도 네가 구원이 되는 것은, 네가 착하게 살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발악을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십자가에서 죄를 다 용서하신 그 값어치가, 네가 잘 되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귀하고 중요하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천국이 그렇게 만만해?" 라고 하신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인데, 그 가치 앞에서 우리는 왕창 다 망해도 전혀 괜찮다. 언약 안에, 즉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면.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 예수님을 내부적으로 찌그러지게 뭉개버린다. 이스라엘을 택해놓고 이스라엘을 뭉개버림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뭉개지면서 나왔던 것이 선지자의 피다.그것이 바로 엘리 때문에 당하는 사무엘의 고난이고, 그리고 사울로 인해서 당하는 다윗의 고난이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쫓겨다니는 다윗의 아픔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인간세계에 들어온 예수님의 고난이고 아픔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것을 이방민족과 같은 우리를 통과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이 되셨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이 십자가 안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다. 다시 사는 능력은 이 십자가 안에만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데, "주여, 십자가 앞에서 제가 어떤 인생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언약이 우리보다 더욱 더 소중하고 선행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시켜주는 하나님으로 오해를 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만을 살리시고, 그들은 거기에 재료가 된 줄로 압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