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답변

귀신 들림

아빠와 함께 2022. 7. 2. 19:26

※귀신 들림

질문 : 아까 무슨 질문을 드렸냐 하면 이제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하고 하시잖아요. 처소의 개념을 좀 여쭤봤어요.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에 목사님께서 14만 4천에 대해서 설명하셨잖아요. 12지파하고 12 해갖고 천 해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숫자, 그러면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 그 처소는 계속 그 저기 완성되는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거냐고 여쭤봤어요. 주님께서 그러면 택한 백성들이 다 구원돼야 되니까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이 그걸 기다리고 계신 거냐고 이제 여쭤봤는데 이 목사님께서 이제 지적해 주시는 게 기다림은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게 아니니까 생산하시는 걸로 이렇게 수정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냥 차 안에서 여기까지의 잠깐 질문을.
답변 : 생산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원칙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거. 성도는 없어요. 생산해야 생겨나는 거예요. 성도는 죽어 있는 자를 살려줘야 그게 성도가 되는 겁니다.
질문 : 성도는 그러면 창세전에 이미 생산돼 있는 자들 아니에요?
답변 : 예를 들어서 레시피가 이미 만들어진 거죠. 그 레시피가 만들어졌는데 그 레시피는 쉽게 하면 쉽게 말씀드리면 그 레시피는 이 땅에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죠. 죽 쑤어서 개 준 꼴이지만 레시피는 남아 있습니다. 그걸 이스라엘에게 먼저 적용을 했고요. 이스라엘은 그것을 개 줬지요. 죽 쑤어서 개 줬거든요. 근데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그것이 신약에 와서 성도 되는데 성도 본인이 아무것도 기여한 바 없음을 확인해 주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겁니다.
질문 : 저는요. 목사님. 아까 말씀에 의해 죽고 말씀에 의해 산다고 그랬잖아요. 그 말씀에 의해서 산다는 것은 결국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얘기.
답변 : 아니,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아까 참 중요한 질문 했는데요. 그런 오해를 할까봐 내가 약간 걱정을 하면서도 시간 관계상 그냥 넘어갔는데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주체가 결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대로 적용시키는 거죠. 예수님께서.
질문 : 아니 목사님 죄송합니다요.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답변 : 그럼 오케이. 그럼요. 그렇죠. 그거예요.
질문 : 성령으로 거듭나는 게 말씀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는 거죠.
답변 : 말씀의 적용이라 하는 것이 깔끔하죠. 말씀을 적용하는 거예요. 밀가루 부어놓고 앙꼬 집어넣을 때 국화빵 돼죠. 그 앙꼬를 집어넣는 것이 말씀이라면 말씀을 계속 찍어내는 거, 생산하는 거예요. 자기 말씀을 완성된 말씀을 집어넣어놓고. 닫아버리고 집어 넣어놓고 닫아버리고, 성도가 하나씩 생산되는 거죠. 그 안에 뭐냐? 주님이 다 이루신 말씀만 안에 계속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질문 : 저는 그게 궁금하거든요. 예수님은 성경으로 잉태를 하셨잖아요. 그러면 성도들 또한 저는 성령으로 앙태 된 게 아닌가?
답변 : 당연하지요. 오케이. 그렇습니다.
질문 : 그냥 우리 육은 어떤 육신의 부모 어차피 이게 이제 그런 것이고 창세전에 이미 저희도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답변 : 네. 당연하죠. 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하는 그 수모, 그 육적인 허약성 반복해야 돼요. 아까 제목을 반복이라 했잖아요. 반복해야 됩니다.
질문 : 제가요. 한 달 전에 목사님하고 사모님 꿈을 꿨거든요. 그런데 어떤 꿈을 꿨냐면, 이성대 교수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예배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 무슨 말씀을 전하셨냐 하면 누가복음의 귀신 얘기를.
답변 : 잠깐! 방금 그 오신 분이 꿈속에 오셨단 말입니까? 실제로 오셨단 말입니까? 이성대 집사님이?
질문 : 실제로. 그래서 군대 귀신 열두 귀신 돼지로 들어간 귀신. 이제 말씀을 전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이제 서로 이렇게 얘기를 했던 게 뭐냐면 제가 그 질문을 드렸거든요. 성령 받은 성도도 귀신이 틈을 타는가?
답변 : 본격적으로 설치죠. 본격적으로.
질문 : 그런데 내부에 성령께서 내재해 계신데 어떻게 감히 귀신이 설쳐대느냐 하는 거죠?
답변 : 성령께서 반복시키는 거예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상황을 그대로 반복시키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계실 때 예수님인데 어떻게 감히 예수님을 시험해? 아니에요. 귀신이 아예 예수님을 핍박을 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가는 데마다 조롱하고 그와 똑같이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이 설치는데 다만 차이점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이 하는 즐을 알지요. 예수님이 마귀가 하는 일을 알듯이 성도는 이게 귀신의 일인 걸 알아요. 다 이루었다에다가 인간의 행함을 집어넣는 일이 귀신의 일인 것을 알아요. 그게 반복이에요. 반복. 예수님이 하신 그것을 그대로 되풀이 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느끼느냐? 아주 고맙고 감사하고 느긋하게 즐기죠. 어떤 분이 제가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제 성도가 새 사람 됐기 때문에 이제부터 죄를 줄여 나가는 방식대로 사셔야 되겠죠 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설교 시간에 죄가 없으면 의도 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죄를 줄이면 의가 남는 게 아니고 죄가 없어져버리면 의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남는 것은 나 잘 난 나 구원받았다. 그것만 남아요. 그게 마귀의 노린 거거든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니까 주께서 활용하시는 거예요. 죄를 안 짓는 게 아니고 반대로 생각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남은 인생 90 몇 살인지 모르지만 남은 인생 본격적으로 죄가 아니라는 것도 죄로 들추어내는 그 신기한 모습을 마음껏 경험해야 돼요. 내가 이토록 죄인이었구나, 신난다. 이렇게 되어야 해요.

질문 : 다음 질문은 제가 한번. 복음서에 보면요. 귀신 들린 자들이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지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가지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오게 했는데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사실은 보면 다 귀신 들린 자라고 이렇게 우리가 보여지는데 그분들이 그러면 진짜 귀신 들려가지고 간질병 걸리는 그런 형태를 보인다든가 뭐 여러 가지 어떤 병적 증세를 그런 보이는 모습 그거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그거하고 같이 이렇게 볼 수가 있는가요?
답변 : 악마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는 악마의 몸체에 해당되고 그리고 간질병이라든지 이렇게 몹쓸 병에 걸린 것은 발가락이라고 보면 돼요. 작은 것, 누가 봐도 그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저건 귀신 들린 거 맞다, 라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주께서 출발하셔서 이게 주님의 사역의 출발이에요. 출발하면서 어느 선까지 계속 깊숙이 들어가느냐 하면 멀쩡한데 자기 애비가 악마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그것까지 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질문 : 그럼 이제 이 시대로 우리가 보는 것 같으면 귀신 들린 자와 안 들린 자의 차이점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안 받아들인 것 그 차이인가요?
답변 :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거는 안 되고요. 입에서 복음이 나오느냐 안 나오냐 이렇게 하세요. 받아들인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그거 말고 모든 것과 복음과 연계시켜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복음과 연관 안 되고 복음 따로 자기 하는 일을 따로 돼 버리면 자기 하는 일이 의롭게 돼버려요. 마치 복음은 내가 죄 지은 것만 용서해주고 내가 의롭다 하는 것은 이건 손도 대지 마세요. 이건 나는 충실히 다한 거고 내가 봐도 하자가 없습니다 라고 따로 자기의 의의 몫을 따로 챙겨버리면 복음이 잔챙이만 주님이 잔챙이만 처리하는 것 밖에 안 돼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잘못이거든요. 이 그림으로 설명하면 칠판 가까이 있는 이유를 감사합니다. 악마는요. 이 악마라면 뿔 났다 하죠. 악마는 인간의 다양한 문화 활동, 문화 활동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 문화 활동에 보면 예술도 돼 있고 요새 말로 하면 과학도 돼 있고 정치도 돼 있고 정치에 필요한 것은 법률적 그물망이에요. 그물망. 모든 현대 사회가 법률로 돼 있잖아요. 그물망을 이렇게 전부다 새끼 치듯이 이렇게 된 겁니다.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이 이제 법적으로 법을 세우는 거예요. 이 땅의 질서를 찾기 위해서 법을 세우는 거예요. 다른 것은 법으로 모든 것을 이렇게 지배할 수가 있어요. 마치 검사나 그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처럼 법을 아는 자들이 엘리트가 되어서 세상을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미술을 하는 사람이 있다. 미술 하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 들였다고, 아까 제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했죠? 그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복음을 받아들이면 미술도 이것도 의롭고 복음도 의롭다 이래 돼버려요. 그러면 이거는 이 선에서 악마의 선에서 이걸 봐야 되는데 자기 선에서 이걸 하니까 이것도 받아들이고 이것도 다 받아들인 게 돼요. 마치 통지표에 국어 수학 미술 체육 전부 다 수우 이래 있는 것처럼 또는 그 파레트에 미술 파레트에 빨간색 노란색 있는 것처럼 여기에다가 종교란에 기독교 이런 것과 똑같은 거예요. 복음은 이 전체를 여기 십자가를 경유해서 전부 다 하나를 꿰야 돼요. 악마까지. 십자가에서 꿰어서 다시 이것을 봐야 돼요. 다시 이것을 보게 되면 미술을 하는 이 작업조차도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미술 하는 재능을 특출한 타인과 다른 재능을 주셨다는 것을 복음으로 뭐 하냐 하면 기뻐하는 거예요. 미술 때려치우고 신학교 가는 게 아니고 미술 하는 것 속에서 뭘 발견한다? 내가 죄인인 것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죄와 더불어 뭐가? 복음은 뭐냐? 의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 게 이 미술 하는 게 음악 하는 게. 이게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피카소의 고상한 그림이 피카소를 지옥 안 보내고 천국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농사짓는 것도 마찬가지고 고기 잡는 것도 마찬가지고 공무원도 마찬가지예요. 이거 잘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거 잘해서. 임윤찬 피아노 잘 쳤잖아요. 그거 잘해서 지가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이제 니도 교회 가면 좋겠다. 교회 다니겠지요. 교회 가면 좋겠다 하면 이거는 이것대로 하나님의 탈랜트고 거기다가 추가해서 플러스 복음까지 곁들였으니까 이 땅에서는 피아노 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좋은 계기고 복음도 복음대로 좋다 이렇게 섞일 수 없는 것을 둘을 섞어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아까 말씀대로 궁극적으로 악마의 뿌리에게 접근을 못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몸까지 멀쩡하고 정신 멀쩡하고 예의 바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일 것 같으면 그럼 도덕적 윤리는 아까 누가 잘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잘하잖아요.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에. 심지어 사울이라는 사람이 뭐라 합니까? 내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로다. 하지만 이걸 뭐로 여긴다? 배설물로 여긴다.
질문 : 전에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대로 복음으로 나오는 그 모습이 의식이 나오듯이 그렇게 고백이 된다.
답변 : 가정주부가 직업도 없이 애만 키웠다. 이게 뭐가 잘못이냐? 이거 대전 강의에 첫 번째 강의 나와요. 이게 뭐가 잘못, 이게 뭐가 문제냐? 그 자녀가 남의 자녀입니까? 어떤 의식이 뭡니까? 내 새끼죠. 벌써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딴 애는 다 굶어도 내 새끼만큼은 하나님이 지켜 달라고 중보기도 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자체가 이 복음과는 상관없는 거예요. 내 자식이 귀한 만큼 그만큼 내가 이 귀한 자식이 이쁠 만큼 이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걸 아브라함이 누굴 바칩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칼로 이삭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언약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난 복음 아니까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가 아니라 자식에 대해서 더욱더 애착을 가지면서 니가 없었으면 내가 죄인이 아닐 뻔 했어, 라는 그런 마음으로 자식에게 다가서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자식을 붙여준 이유가 비로소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부부는 동업자지요. 그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식하고 비교합니까? 부부는 계약에 의해서 김정민이가 불렀던 거룩한 언약식 있잖아요. 계약에 의해서 되는 거고 자식은 내가 원치 않았는데 태어난 거예요. 부부는 갈라서면 되지요. 돈 정리해가지고 니 지분은 얼마고 해가지고 깔끔하게 정리하면 되는 거지요. 그러나 자식은 버릴 수가 없어요. 호적 파라 해도 파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 애를 먹여도 자식은 누가 건사해요? 마지막 자식은 내가 제일 관심 있어요. 여기서 내가 라고 하는 것은 남편을 두고 하는 게 아니고 아내를 두고. 자기 몸의 확장이기 때문에 자기 몸에서 태어났잖아요. 부정할 수가 없어요. 닮은 걸 어떻게 부정합니까? 닮은 DNA가 닮았는데. 또 다른 질문 괜찮아요. 하세요. 하세요. 다른 사람 할 사람 없습니다. 누가 대신 얻어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질문 :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아까 제가 질문 드렸던 거, 구름 타고 이제 오신다고 그렇다고 하셨죠.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시는 이유가 이제 시공간의 세계로 오셔야 되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답변 : 그렇습니다. 네 자연을 떠나서 일하지 않습니다.
질문 : 부활하실 때는 아무것도 안타고 승천하신 게 이 시공간의 세계를 초월해서 그러니까 엑소더스 나가시니까 아무것도 안타고?
답변 : 부활하고 아무것도 안 탄 게 아니고 부활해서 이 땅을 승천할 때 구름 탔는데요. 사도행전 1장에. 그리고 부활은 그때 나타난 부활 영체는요. 주님이 아버지한테 바로 가는 게 아니고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어요. 똑같은 몸을, 부활했는데 몸이 똑같아요. 희한하죠. 몸이 똑같은데 만지지 말라는 거예요. 똑같이 보이지? 그러나 질이 달라. 그걸 언급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그 말씀을 너희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루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해서 너희를 계속해서 사랑한다는 그 뜻은 내 쪽에서 예수님 내 쪽에서 너희를 이룰 거야. 왜? 너희들은 이미 나의 부활을 말씀 자체를 아예 안 믿었으니까 그 안 믿는 것을 유지해 줘야 그 제자들에게 그 다음에 성령이 왔을 때는 저들이 군소리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전합니다. 자기가 믿었다는 이런 걸 전하지 않아요. 자기가 오직 배신한 것만 이야기하죠. 그래서 그 작업이 필요했던 거예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창세기 3장 24절처럼 이미 추방되었기 때문에 건너갈 수 없습니다. 같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게 기본이에요. 안 되는 걸 주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되게 하시되 그 대상은 창세전에 예수님이 선택한 자에게만 그 혜택이 주어지지 다른 사람한테는 혜택이 안 돌아가죠. 내 안에 택한 자만 내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시공간을 온다는 그거는 굉장히 좋은 생각이에요. 맞아요. 예수님이 나타나면 시공간을 통해서 나타나요. 시공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이 상상의 나래를 펴요. 종교성으로 상상의 하나님이 멋지시다,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시다, 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 전부 다 이거는 시공간과 상관없는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에요. 실제로 오신 하나님은 비참한 하나님이에요. 도살하는 양 같이 처참하게 망가진 하나님이에요. 그 외에 그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구약에서는 우상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상상하는 거룩하고 자비롭고 전능하신 하나님 다 우상이에요. 거짓 하나님이에요. 그런 거 알라신한테 찾으러 가세요. 알라신 그런 거 힌두교 신 그런 거 잘 만들어내요. 그게 그 근거가 바로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찾을 때 누구십니까? 나? 나사렛 예수다. 됐냐? 시공간에 있는 나사렛 예수. 옆집에 누구 청년이랑 똑같은 거예요. 난 나사렛 옆집에 있었던 누구잖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님의 아버지는 예수님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막혀 있습니다. 또 다른 질문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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