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하는 존재가 있으면 후차적 존재를 삼킨다.’
선행하는 존재는 뭐냐 하면 ‘내가 있음’이지요. 내가 있음. 후차적인 존재는 뭐냐 하면 ‘신이 있음’입니다. 내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너무나 확실하게 있기 때문에 신의 존재는 나의 있음에 다 가리워지는 거예요. 관심사가 서열상 뒤로 밀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따로 따로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선행하는 존재가 있다면 후차적 존재는 신의 존재는 삼킴을 당하기 때문에 종속되기 때문에 후차적인 존재, 신은 앞서있는 존재, 나를 위하여 있어야 돼요. 나를 위하여, 그 다음에 크게 쓰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조작되어야 되는 거예요. 신이. 그래야 순서가 맞잖아요.일단 내가 있고 신은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나를 사랑하던지, 나를 후원하던지,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되려면 그 뒤따라오는 신은 선행하는 나를 없앨 수가 없어요. 뭘 도와드릴까요? 알리딘 램프에 나오는 서장훈처럼 등치 큰 머슴처럼 “주인님, 뭘 도와드릴까요?” 동물 목소리해가지고 우렁차게 이야기 하잖아요. 조작되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우리 주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끄집어낼 때 애굽에 이스라엘 없어요. 히브리인들이지 이스라엘 나라는 없어요. 나라 끄집어 낼 때 무슨 사건이 주어지는 겁니다. 무슨 사건이냐, 유월절 사건이 들어가지요. 유월절사건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의 특징은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유월절 양이 선제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이 선행해요. 죽음에서 뭘 된다? 죽음을 품은 새로운 백성의 등장.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싫습니다 하는 양을 홍해 속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홍해가 갈라질 줄은 뒤따라오는 애굽사람도 몰랐고 오늘날 우리도 몰랐지요. 주님의 사건은 항상 우리가 예측을 빗나가버려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그걸 예상하잖아요. 빗나가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죄 안에 뭘 집어넣는가, 이미 죄사함을 받은 것을 이 안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우리의 상식은 뭐냐, 원서내고 합격통지서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상식을 벗어나버립니다. 합격통지서안에 내 원서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원서를 내버렸어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천국 원서 내놓고 합격통지서안에 원서도 포함되어있어요. “이 원서 누굽니까?” “너잖아.” “제가 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시작부터 주의 일이지요. “왜 제가 원서를 못 냅니까?” “니는 유월절에 죽어야 돼. 유월절에.” 죽은 인간이 무슨 원서를 내요. 죽은 놈은 죽어야지요. 죽은 인간 되신 어린양의 피 안에 계신 분이 우리를 이스라엘로 만든 겁니다.
그 분이 누구냐, 주의 이름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