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성도의 선지자노릇

아빠와 함께 2022. 6. 11. 23:52

예언이 예언되기 위해서 역사가 있는 거예요. “역사, 너 똑바로 살아.” 훈계하려고 예언이 있는 게 아니고! 아, 여러분, 이점 모르면요, 전혀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각본대로 범죄해야 돼요. 무엇이 중헌디! 무엇이 중허냐 하면 예언이 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역사 속에서 내가 사는 게 중한 것이 아니고 너도 각본대로 갈 뿐이야.”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언이 중요한 거예요, 예언이! 인간이 속고 속이는 것은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속이는 거거든요. ‘나 살고 너 죽자.’ 하지만 주님께서는 뭐냐? 네가 중요하고 또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을 멸망할 때 전면적으로 멸망시키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 내 멸망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날 위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름대로 뭐 착실하고 착하고,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언대로 다 망해라.” 항상 일은 터지고 난 뒤에 “그럴지 알았지롱!”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게요, 죄짓기 전에 말리면 되는데 절대로 안 말립니다. 왜? 하나님의 망함은,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안 망하고 할 것 없이 전면적으로 다 망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은 다 망해야 돼요. 자기가 정권을 쟁취해 놓고 그들도 똑같이 후손들에게 또는 다른 장군들에게 당해서 자기 자식의 대가 끊어져 버리는 것, 이걸 가지고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 역사는 이렇게 흐릅니다. 역사 안에서는 성공은 없습니다. 역사 자체가 이미 “다 죽자.” 이게 역사입니다. “어느 하나 죽음에서 빠져나올 인간 없다.” 이게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안 망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역사 자체가 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안 망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역사 안에 있으면서 예언에 대해서 미리 눈치채는 겁니다. 예언이 와서 내 가운데를 뚫어서 미리 망하는 거예요. 나 자신이 미리 망해버리는 겁니다. 구멍 난 것처럼 완전히 내 안에 구멍이 나서 이제는 시시하게 인간하고 상대하고 인간하고 경쟁하는 일은 없기, “그런 일은 있기 없기?” “없기!” 절대로 그런 일은 없기. 뭘 해도 지금 살아가는 이 모습이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망하는 각본이기 때문이에요. 각본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 중에서 성도한테만 해당 되겠지요. 성도는 예언을 알았기 때문에, 예언은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완전한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각본을 받게 되면 이렇습니다. 〔오늘 아침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 잘 주무셨습니까?”〕 할 때 각본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각본의 제목이 <이렇게 다 같이 망한다> 시나리오 제목이 그래요. 영화 제목입니다. 중간 26페이지 보게 되면, 〔어머니 일어나실 때 “잘 주무셨습니까?” 하고 인사한다.〕 그래서 인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출근해라.” “예, 알겠습니다.”〕 이거 전체 망하는 가운데 하나의 대사입니다. 뭐 재미있지 않습니까? 인사하나 안 하나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전면적으로.

그렇다면 세 번째가 중요하지요. 다 망하고 망하게, 예언은 역사가 망하도록 추동한다. 추동이라 하는 것은 부추기는 거예요. 역사를 끌고 갈 때 질질 끌어서 “망해라! 이 인간 역사야.” 망하도록 한다면, 그렇다면 세 번째 예언과 예언의 만남은 어떻게 되는가? 열왕기상 11장 3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열왕기하 8장 19절에 보면 좀 더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왜 북쪽은 다 망하는데 남쪽은 꾸역꾸역, 이렇게 가늘가늘 이어가는가? 그것은, 유다 지파는 마지막 하나님이 준비한 다윗에게 약속한 예언한 등불이 있어요. 그 등불은 장차 다윗이 와가지고 영원한, 영원한 왕국 하나님 나라를, 왕국을 세우겠다는 그 예언을 위해서, 그 마지막 예언을 위해서 구약의 다윗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그 예언이 역사 안에서 같이 흘러가다가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다윗의 영원한 왕과 예언과 예언이 입맞춤을 해요. 만나요.이것을 좀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그때그때 역사를 하나의 A4용지로써 생각해 보세요. 그다음 왕 때의 역사는 뒤편에 있는 A4용지, 그 용지에 그 당시 왕들이 한 행적이 죽 되어 있지요. 다시 그 뒤에 A4용지가 첩첩이 있다 합시다. 여기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약속이 있어요. 그게 다윗의 등불입니다. 그 다윗의 등불의 화살을 첫 번째 종이에 쏴버립니다. 쏴버리면 화살이 궤적을 보여주면서 구멍을 뚫고 가는 거예요. A4용지를 뚫고 가는 거예요. 마지막 A4용지를 뚫어서 마지막 도달되는 지점이 뭐냐? 다윗의 아들, 약속한 모든 약속을 집대성한, 그 약속이 구현한, 예언이 구현한 진짜 그 인물이 하나님이에요. 주님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께 화살을 쏘아서 하나님이 친히 그 모든 예언을 다 이뤄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선지자들은 뭐냐? 선지자들은 그 시대에 살면서 인간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후, 아히야, 이 사람들은 예언자들이에요. 오늘 보고 있는 미가,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반드시 역사는 그렇게 망하는 쪽으로 가야 된다는 것, 그것을 마땅한 것으로 미리 눈치채 버렸어요. 알아버렸어요. 백날 까불어도 전면적으로 다 죽는다. 그러니까 그 시대의 예언자는 뭘 이야기하느냐? 그 시대에 구멍을 뚫는 화살의 궤적을 두고 “저것 봐. 저게 다윗의 등불이야!” 다윗의 등불이야 - 다윗의 등불이야……, 릴레이에서 바통을 이어가듯이 다윗의 등불의 궤적, 그 벡터 방향을 한번 보라는 말이지요. 그게 어디로 가는지? “장차 하나님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홀로 다 이루신다.” 이게 바로 구약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어떻게 선지자 노릇을 합니까? 우리는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뭐 예언이고 뭐고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부대끼면서 인간 대 인간, ‘저 인간만 이기면 나는 과장이다.’ 이런 것, 맨날 경쟁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언약을 믿지 말고 자기 자신을 언약에다가 꽁꽁 묶어 버리세요. 사극 영화에 어떤 군인이 사랑하는 공주를 충실하게 지키는데 손에 짧은 칼밖에 없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산적을 만났다 합시다. 이 군인이 나뭇가지에 칼을 꽁꽁 묶어 버려요. 그러면 칼은 제일 앞에 있고 나뭇 가지를 쥐고 흔들면 이게 창이 되거든요. 칼보다 창이 낫잖아요. 공격하기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이렇게 매달아 버려요.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내가 이제 내가 아니라 언약의 사람으로 묶어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언약의 사람으로 사용하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 끄트머리에 나를 강도로서 거기 같이 묶어 버리는 겁니다. 죄인으로, 세리와 창기로서 묶어 버려요. 기생 라합으로서. 옛날에 기생 라합은 창기였습니다. 세리로서.

그러면 우리에게 뭐가 있느냐? 사명이 생깁니다. 사명이 내 목숨보다 우선될 때 우리는 자유를 느낍니다. 내 목숨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이것은 사명 없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사명이 있어 버리면 먹고 사는 것보다 주께서 십자가 언약, 새언약, 다 이루었다, 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창 끝에, 나뭇가지 끝에 묶어서 이 시대에 역사의 A4용지를 뚫고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직장에서도 뚫고, 가정에서도 뚫고, 동창회에 가서도 뚫고 ……. 동창회 모임에서 전부 다 술 마시면서 “위하여!” 하는데 ‘나는 술 안 먹는다. 그거 먹어도 죽는데 뭐하러 먹냐.’ 역사의 한계를 보여주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 바로 “이 어두운 깜깜한 역사 속에서도 예언은 살아 있잖아, 예언은.” 딴 것은 다 망하지만 그 심판 가운데서 예언이 살아나는 모습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줬습니다. 역사 속에서 나는 죽지만 영적 세계에서 나는 사흘 만에 부활했는데 그 부활의 세계가 역사 속에서, 역사의 심판 속에서 부활의 사랑의 나라가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우리를 이 쓰레기 같은 역사 속에 묻으시고 주의 성령이 와서 성령의 세계의 사명자로서, 창끝에 달린 칼날로서, 하나의 압침으로서 조그마한 면도날이라도 주님이 부리시는 사명자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들이 외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진리 그 자체, 온전한 지혜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앞에 붙잡힌 바 된 사실인 줄 압니다. 저희들 내 식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작대기 끝에 달려 있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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