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와 남은 자
2022년 5월 11일 본문 말씀: 미가 5:6-9
(5:6)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니므롯 땅 어귀를 황폐하게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
(5:7)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5:8)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5:9) 네 손이 네 대적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앗수르를 구분짓고, 또한 이스라엘과 그 중에서도 남은 자를 구분짓습니다. 이러한 구분지음에 대해서 구분지음을 당했다고 여긴 자들의 입장은 난처해집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원해서 야곱의 남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 남은 자들을 앞장 세워 앗수르 나라를 치겠다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이지 남은 자의 일이 아닌 겁니다.
즉 남은 자들의 특징은 더는 사람 손에 놀아나지 않고 본인의 힘 내지는 타인의 힘과 무관하게 움직이게 되며,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 판단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형편과 처지가 된 남은 자는 세상 속에서 본인의 입장이 난감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타인이 다음과 같이 물어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는 어떤 점에서 너 빼고 나머지 사람과는 다른 특별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라” 이 물음에 대해서 정말 남은 자된 사람은 특별히 내세울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해도 일반인과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더 나아가 본인부터라도 일반인들처럼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을 굴뚝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차별지게 자신을 다루는 것에 대해 남은 자는 부담을 갖게 됩니다. “그냥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이 조용하게 살게 하시지 왜 저를 뽑아내시십니까”라고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치고 앗수르를 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겠다는 이는 남은 자, 곧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차이남이 없는데 남은 자가 되었다는 바로 이 점이 남은 자의 특별남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앗수르가 왜 하나님에 의해서 주목받아야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냥 일반적인 인간 세상 중의 한 나라가 아니라 앗수르를 통해서 세상 전체 나라를 대신하려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채택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라는 나라가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만났다는데 있습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만나서 그 지도자가 내뱉은 말이 이사야 36:18에 나옵니다.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앗수르 군대의 지휘자, 랍사게가 공개적으로 유대나라 백성들까지 다 들어라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 랍사게의 말은 참으로 모든 인간의 내부의 심정을 그대로 밖으로 퍼올려서 공개시킨 발언입니다. 즉 신이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이 신들 사이에 차이가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신들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들이 형국이 어떠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을 위하여 신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괜히 인간들끼리 풀어낼 문제에 신을 거론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을 걷어내면 결국 모든 일의 본질은 인간대 인간으로 해결지울 수 있는 문제로 남는다는 겁니다. 이 앗수르쪽의 이야기가 참으로 중요한 이유는 모든 인간의 근원에 이런 합리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나 자신을 위한 합리성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자기네 나라만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속 마음에서는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앗수르라는 제국을 부러워하고 선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앗수르는 굳이 하나님께서 굽신거리지 않더라도 자력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목숨과 가진 것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숨겨진 본심이 아니었던가요? 오늘날 우리의 본심이 이런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 외형과는 달리 ‘앗수르’였던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럿 앗수르 나라 중의 하나의 나라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앗수르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하십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그 취지가 나타났습니다. “너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로 달아 나누어 두라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네 옷자락에 싸고 또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겔 5:1-4)
여기서는 앗수르가 아니라 그 후임 국가인 바벨론이지만 그 취지는 동일합니다. 즉 ⓐ이스라엘 내부에 있던 불이 먼저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야곱의 남은 자’가 그 속에서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맞아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에 합당합니다”라는 것에 흔쾌히 동의하는 자가 ‘야곱의 남은 자’입니다.
매 맞을 만해서 맞았다는 겁니다. 이로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결코 아니며 도리어 ‘인간을 위한 인간’을 철저하게 공격하는 일관성을 보인다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자는 앗수르였던 겁니다. 하지만 ‘야곱의 남은 자’는 여타의 앗수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망하는 것이 마땅함을 미리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땅에 속한 인간은 어떻게하든지 땅의 말을 할 뿐이지 하늘에 대해서 아는 게 없음을 알게 된 자가 야곱의 남은 자입니다. 자신은 망해야 하기에 망하는 것이 지당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앗수르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뽑기’가 일어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일방적으로 선택하듯이 하늘의 일의 연속성에서 이스라엘 중에 일방적 뽑기를 ‘야곱의 남은 자’ 발생됩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의 세상보는 관점’이 일방적으로 주입되어져 있습니다. 반면에 앗수르 같은 세상은 비록 그들이 평범하게 살아도, 그들은 자신이 왜 망하는지에 관심없이 그냥 망하는 쪽으로 갑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남은 자’, 즉 성도의 특별남이 있습니다. 그들만큼은 하늘의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를 압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4-6)
이들만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모습이 곧 자신의 현 처지에 합당함을 압니다. 이를 미리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 불가능이 도달되었기에 성도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빌 4:12-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부인케 하는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미가 5장 7-9절(앗수르와 남은자)2205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5장 7-9절까지입니다.
미가 5:7-9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네 손이 네 대적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둘로 나누십니다. 그것은 야곱의 남은 자, 야곱의 남은자와 그리고 야곱과의 구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기 야곱의 남은 자가 해야 될 일이 있는데 6절에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앗수르 사람들을 밟게 되는 그 일을 합니다.
그러면 6절에서 9절까지의 본문 내용에서 두 개의 구분 지음이 성립됩니다. 하나는 앗수르와 이스라엘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 두 개의 절차를 통해서 남은자가 형성되는 것, 최종적으로 야곱의 남은자가 형성되는데는 두 개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 더 생각해야 될 것은, 그 야곱의 남은 자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멸망케 한 앗수르를 사정없이 짓밟고, 여기 찢는다고 되어 있어요. 8절에 “밟고 찢으리니” 야곱의 남은 자가 앗수르를 공격할 때 그 앗수르를 건져낼 어떤 것도 없도록 철저하게 밟고, 9절은 그 앗수르를 가지고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해서 앗수르를 하나님의 원수로서 규정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앗수르 제국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만들어놓고, 그 앗수르 제국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처단당할 하나님의 적,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충분히 활용하겠다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자, 방금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대로 추진하겠다는 것이고, 문제는 우리 인간들의 입장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뭔가 차별 짓고 구분 짓는다는 것, 이게 인간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감하고 난처해요.
왜냐하면 사람 사는 것은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사람을 달리 취급한다는 것, 만약에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달리 취급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남은 자로 택정을 했다 칩시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특별조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네가 뭔데? 네가 뭐 그리 유별나? 네가 특별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고 뭐라 하겠어요? “네가 한번 생각해 봐 네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뭐가 차이나는 게 있는지 네 쪽에서 그런 근거 있으면 이야기해봐.”라고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괜히 저를 특별대우해서 나로 하여금 난감하게 만들었잖아요.” 오히려 이런 불평을 하나님께 할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남편이 ‘나는 하나님의 성령 받았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 받았다.’라고 자기는 그걸 느끼는데 성령 받지 않은 자기 아내가 “아이고, 놀고 있네. 참 같잖다, 같잖아! 네가? 네가! 네가 뭐 하나님의 남은자? 개가 웃겠다, 개가! 남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당신이라는 남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인치심을 받았다고? 아이고, 내가 같잖아서……. 내가 당신하고 산 날이 40년이 넘어. 누굴 속여! 아이고, 꼬라지 하고는, 아이고 참 내, 참 다른 사람한테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 앞에서는 하지 마라.” 대번 반박 들어오지요.
그럴 때 그 남편이 하나님에게 뭐라고 하소연하겠습니까? 괜히 나를 선택해 가지고 나로 하여금 너와 나는 다른 존재라는 그것을, 근거 댈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게 만들어버렸어요. ‘나는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너하고는 차이나.’ 차이나는 것 아시지요, 차이나, 중국, 차이나, ‘나는 너하고 이런 점에서 차이 나는 거야. 이런 점에서 너는 버림받았고 나는 선택되었다.’ 뭐 그것을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게 있으면 참 좋겠는데 본인이 봐도 그게 없거든요.
아내가 보는 눈이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전혀 별다른 구석이 없어요. 그게 남은자의 특징입니다. 남들 앞에 내가 이런 점에서 특별하다는 것을 소개할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내 쪽에서 나를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 내가 특별하게 남은자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그 사실이 특별나요, 그런 점에서.
내가 선택되었고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내 쪽에서 나의 정당성과 나의 합당성을 내세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이 일반인들하고 다를바 없다는 것이 그게 특별남이에요. 그것은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사전에 전략을 꾸민다든지 내가 그것을 의식한 적이 없다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께서는 특별히 다루신다는 거예요.
나는 일반인 되고 싶어요. 괜히 유난 떨면서 그들과, 세상사람과 차이 나고 싶지를 않아요. 똑같고 싶어요. 괜히 잘난체 하다가 남한테 욕이나 얻어먹는 것, 그것은 내가 원치 않아요. 우리 자신들이 원치 않아요. 그러나 주님이 원해요.
그러니 세상과 달라지기를 싫어하는 나와 일방적으로 주께서 달라지기 싫어하는 나를 이미 다른 노선으로 다른 길로 가도록 구분 지어 놨다는 그 틈새에 끼어가지고 우리 처지만 난감하게 만들었어요. 우리 처지가 난처하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특별히 야곱,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 중에서도 남은자를 최종적으로 따로 뽑아내서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격시키는 이유는, 이 최종적인 남은자의 특징은 사람 손에 놀아나지 않고 사람의 힘과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 특별히 사람들의 일반적인, 일반적인 보통 인간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의 판단에 전혀 신경 쓰지 말아야 될 그 자체를 사명으로 부여받는 사람들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판단하든, 아내가 어떻게 판단하든, 거기에 전혀 개의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식으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이 남은 자가. 왜냐하면 내가 나를,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조작해서 나를 구원받은 사람으로 만들어낸 적이 없어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적이잖아요. 이 앗수르가 하나님의 적이거든요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적을 처단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누군가 이 땅에 파견되는 분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1절에 보게 되면, 사도요한이 이야기하기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벌써부터 사도요한에 의하면, 예수님 자체와, 예수님이라는 분과 그 외 다른 사람을 이렇게 확실하게 갈라놓고 있습니다. 같이 섞이지 않게 만들어요. 차이 나게, 구별되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고 그 외에는 그냥 땅에 속한 자.
그래서 31절 다시 보면,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하지요.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이야기하는데 예수님 외의 모든 인간들은 땅에 속한 것만 이야기하고, 땅에 속한 것 그 밖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너나 나 나 똑같은 인간 아니냐.’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너나 나나 인간이라면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그 자체가 땅에서나 나올 이야기고 전혀 하늘의 요소가 없을 때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들도 땅에 속했기 때문에 나도 구원받지 않고 지옥 가는 사람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구원받은 자도 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왜? 땅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점을 유념을 해야 되는데요. 오늘 본문에 담긴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과 앗수르를,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을 구분했다는 것, 그 구분을 했다는 이점부터 설명을 드릴게요.
여기서 이스라엘은 특별한 민족이다, 택한 민족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다르고 이 세상 가운데서 특별히 택한 민족이다. 그 이야기를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때문에 앗수르 나라가 특별히 선택된 나라라는 관점도 같이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앗수르 나라 자체가 주목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앗수르 나라는, 도대체 왜 우리 앗수르 나라가 주목 받아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마치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특별히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될 이유를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왜? 그냥 살아가면 되니까,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냥 자기만 의식하고 살아가면 되잖아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 앗수르라는 그 나라가 이게 주목이 대상이 되어야 되는 나라냐, 이 말이지요. 그 이유가.
그 답은 이래요. 이스라엘이 앗수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화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그 이야기 들으면 ‘아이고, 이스라엘 망했구나. 앗수르화 되어서 망했구나.’라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왜 앗수르처럼 변했느냐, 앗수르가 뭔데?’ 앗수르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우리가 가져야 돼요. ‘앗수르가 뭔데, 다시 말해서 세상이 뭔데?’ 그것은 앗수르 그 민족한테 들어야지요.
이사야에 보면 앗수르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36장 18절에 나오는데 거기에 랍사게라는 장군이 등장해요. 얍삽하지요, 얍삽한데요. 거기 이런 말씀 나옵니다.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찌라도 꾀임을 받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이 이야기를 랍사게라는 앗수르의 파견받은 군대장관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그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랍사게가 하는 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돼요. 왜? 모든 인간의 바닥에 있는 모든 인간의 본심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앗수르의 랍사게 이야기는 굉장히 합리적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신들 사이에 굳이 구분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신들 사이에서 특별한 신이 있고 그렇지 못한 신이 있다면 그 관심사는 신들이 누구냐에 관심을 가질 경우에는 그럴수 있는데 어느 인간 치고요, 신에게 관심 있습니까, 본인에게 관심 있어요? 어느 쪽입니까?
모든 인간은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중요해요. 그게 인간의 본심이고 모든 인간은 동일해요. 인간 사이에 차별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우선이에요. 그 우선에서 나오는 그 합리적 사고방식을 랍사게가 바로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신들 사이에 차이 두지 말자. 신이라 하는 것은 민족 따라 신들이 다 다르기 마련이기에 그렇다.” 신의 차이가 없는 이유는, 우리 인간들, 우리들, 우리 인간들에게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게 랍사게의 합리적 의식입니다. 합리적논리에요.
모든 인간은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찾아도 결국 마지막에 이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환원되게 되어 있어요.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일은 인간이 하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는데? 결국 일은 우리가 하잖아.’라는 생각, 모든 인간은 그 바닥에 그게 깔려있어요.
아직 어떤 특정한 일이 터지지 않을 경우에는, 뭔가 생활이 편하고 아무 일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우리가 은혜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자기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말을 상투적으로 하지만 회사에서 어떤 일이 생겼다, 사무실에서 애가 사고 나서 이빨이 세 개가 깨졌다, 이런 일이 있을 때는 ‘결국 일 처리는 우리 인간이 하지 하나님이 뭐하는데?’ 이게 랍사게가 대표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대표적으로!
개척교회 하는데 목사가 무슨 사고를 쳤다. 사고치고 설교도 시원찮게 하고,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님, 다음 달로 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복음 전해준 것이 감사하지만 그래도 월급은 받아먹었잖아요. 그걸로 퉁 칩시다.” 그렇게 나올 때 결국은 그 목사가 나가는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합시다.” 백날 이렇게 구색을 떨고 위장을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 거야?” 결국 돈 문제로 끝나는 거예요.
이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시장이 지배자냐, 아니면 국가가 지배자냐?’ 하는 거예요. 시장경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자냐, 아니면 국가가 지배자냐?’ 이게 앗수르로 대변되는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이 랍사게가 얍삽한 게 아니에요. 랍사게가 정상이에요. 이게 정상이고 그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도, 하나님의 말씀에 속아 넘어가도 랍사게는 아주 이성적으로 정신 바짝 차려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거예요. 가장 인간의 제 모습을 랍사게가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이 앗수르고, 앗수르가 세상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한 모양새였던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받았다, 아무리 하나님한테, 선지자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앗수르, 앗수르라는 이름의 앗수르 말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지만 실상은 앗수르가 되는 앗수르는 앗수르의 침략을 받으면서 내가 앗수르라는 본색을 더는 감출 수가 없고 폭로되어야 되는 겁니다. 속 시원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이게 신앙인척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옛날에는 왕이 처리했어요. 옛날에는 국가의 지배기 때문에 국가의 대표자 왕이 지배를 했던 시대인데 자본주의 발달로, 다른 말로 하면 에너지가, 땅속에서 더 풍부한 에너지가 개발되면서 에너지의 집합이 자본화되고 그것이 새로운 근대자본주의의 국가를 형성하는 거예요.
에너지를 운반하는 그 매체를 가지고 돈이라고 하는 거예요. 화폐라고 하는 겁니다. 화폐가 모이면 자본이 되지요. 과학의 발달로 목재 에너지원에서 석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나중에는 원자력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국가 대 국가의 구별도 시장 앞에 다 허물어지는 겁니다. 우크라이나니 러시아니 관심도 없고 ‘기름값이나 좀 떨어졌으면 좋겠다. 밀가루값이나 좀 올랐으면 좋겠다. 너희가 뭔데 왜 우리를 괴롭게 해?’
지금 중남미 아프리카 죽을 지경입니다. 왜? 전 세계가 왕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고 돈이 지배하는 세계, 시장경제, 자유주의 시장, 마켓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격이라는 것은 없고 시장에서 내가 얼마나 팔리느냐, 얼마짜리냐, 그것이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세계, 그게 앗수르에요. 이스라엘도 거기에 벌써 휩쓸려 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공격케 한 겁니다. 똑같은 인간,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믿는척 하지만 그 본심에는 앗수르가 자기의 이상형국가였습니다. 이상적인 국가, 제발 하나님 없이도 살고 싶은 그런 세상이고 싶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험처럼 걸쳐 놓지만, 나중에 죽어서 지옥 가면 안 되니까 걸쳐 놓지만 평소 모든 생활에서는 ‘하나님, 좀 빠져줄래요?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내가 내 원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냐.’ 그게 우리네 본심 아닙니까? 동의하시면, 가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에서 돈이라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앗수르로 하여금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여러분 생각해야 돼요. 그럴 때 이스라엘과 앗수르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했지요. 앗수르는 비택한 민족, 우리는 택한 민족, 앗수르는 여호와가 없는 민족. 우리는 여호와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지켜준다고요?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앗수르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공, 공격해가지고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의 수중에 들게 만들었다 이 말이지요. 의도적으로. 왜? 똑같거든요. 똑같아요. 주님이 그 껍데기, 종교적인 형식, 그거에 주님이 안 속아 넘어갑니다.
러시아가 스탈린 이전에 국왕 제도였습니다. 군주제도 시대 때 계급제도였거든요. 귀족들이 아래쪽을 그러니까 양반이 상놈을 지배한 세계에요. 귀족들이 아래쪽을 지배하는 세계인데 그 아래쪽이 농노라는 거예요, 농노. 농민이 아니고, 자영민이 아니고 농노, 자기 재산이 없어서 품팔이해서 지주한테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농노로서 유지되는 전제국가, 그게 러시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옹호했던 종교가 러시아정교회입니다. 권력의 맛을 봤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호세아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급 정해놓고 그 계급 따라서 그들은 농노들 조지고 거기서 나온 노동력으로 호사스럽게 사치스럽게 살았던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의식 있고 글자를 아는, 학문을 하는 엘리트들 중에서 토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 1821-1881)라는 작가, 유명한 작가지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이런 책들을 지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농노제 폐지하라는 운동에 가담을 했어요. 그 당시 황제가 니클라우스 1세인데요, 그 니콜라스 1세가 토스토예프스키를 잡아다가, 판사도 전부 왕하고 한패니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사형을 선고해놓고 드디어 사형날짜가 되어서 사형 몇 분 안 남겨놓고 니클라우스 1세가 토스토예프스키를 사면시켰어요. 토스토예프스키의 목숨 가지고 장난친 겁니다. 누가? 왕이. 왜? 왕은 백성들의 목숨 가지고 장난칠 수 있는 권세자로서 지배했기 때문에. 그게 바로 군주제에요. 지금은 돈 가지고 장난치는 거예요. 인간의 생명 가지고.
어쨌든 이게 앗수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야 36장 18절의 말씀에서 이 세상 어떤 신이라 할지라도 이 앗수르의 군대를 막을 신은 없었다, 여호와도 예외가 아니다, 여호와라도 여러 가지 신들, 민족들마다 있는 신들 중에 하나다, 라는 이야기를 랍사게가 그 당시 히스기야 왕에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이스라엘이 들을 만해요. 왜? 외부에서 외부인이, 여호와 믿지도 않는 인간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맘속으로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그 자기 본심을 외부인의 입을 통해서 들통나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래,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이걸 누가 아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아시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이긴다, 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에 남은자가 앗수르를 이긴다, 에요. 이스라엘 중에 남은자. 그러면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점령을 당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제는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남쪽은 앗수르 다음의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는데 뭐 그쪽 세상이나 이쪽 세상이나,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전부 다 이 세상이라는 말이지요.
처음부터 이 인간세계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지요. 없었지만 무엇은 있느냐?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언약은 있거든요. 언약은 계속 살아 있어요. 이스라엘은 죽었어도 언약은 살아 있으니까 그 언약이 다시 이스라엘을 건드려 버리면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말고 이스라엘 남은자가 발생 돼요.
그 이스라엘 남은자, 어떤 식으로 남게 만드는가? 어떻게 남게 하는가? 이스라엘 남은자가 뭐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준다, 하는 것은 이스라엘 남은자가 아니에요.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줘야 돼.’라고 생각하는 우리 생각을 깨트려 가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남은 자에요.
깨트리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착각했던 그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깨트려 지는 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작업인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남은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호세아 5장 14절에 나옵니다.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찌라 내가 탈취하여 갈찌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자같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마치 앗수르 대하듯이 칠 때에 잘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일관된 조치 맞습니다, 라고 그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뜻대로 마시고 주의 뜻대로 나를 묵살하고 박살 내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 맞습니다. 제가 흔쾌히 그 뜻을 따라서 망하겠습니다. 왜? 나는 세상이니까요!” 이렇게 외치는 자, 이렇게 그걸 알아듣는 자, 그게 남은 자에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전쟁은요, 이스라엘의 정체를 밝히는 전쟁이에요. 우리가 앗수르를 이기는 전쟁이 아니고 우리의 본색과 정체가 발각되는 전쟁 밝혀지는 전쟁, ‘내가 바로 죄인이구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의 남은자와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차이점이 뭐냐? 이스라엘의 남은자 이쪽과, 그래서 경계를 거기에 짓고 다른 한쪽에는 이스라엘과 그리고 앗수르 그 두 쪽을 하나로 뭉쳐버리면 이스라엘 남은자, 야곱의 남은자와 그 외 모든 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약속대로 다루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이스라엘 남은자고, 저쪽은 망해가면서도 망하는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합리적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은 어느 하나로 특정할 수 없어. 신들은 거기서 거기야 똑같아 어느 신이든 관계없어. 중요한 것은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목숨이 중요해.’
그러면서도 ‘인간이 이렇게 사는 게 왜 힘이 들지?’ 아무 이유도 모르고 인생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이유도 모르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유를 아는 사람도 늙어 죽어요. 망합니다. 적들도 늙어 죽고 망해가요. 한쪽은, 남은자는 이유를 아는 자에요. ‘잘 하셨습니다. 예. 제가 손써서 제가 새사람 될 일은 없습니다. 왜? 나는 앗수르고, 나는 세상이고 나는 나부터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나만 챙기는 그런 인간, 앗수르 이야기, 랍사게 이야기 딱 맞습니다. 그게 우리 본심 맞습니다.’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망해도 쌉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자에요, 이게! 이게 구원받은 자에요.
주님께서 그 남은자를 앞장세워 가지고 주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멸망시켜 버립니다. 먼저 매 맞는 자로 하여금 뒤늦게 매 맞을 자에게 매가 돌아가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먼저 매 맞은 자는 신났지요. 왜? 구원받았으니까. 하나님을 먼저 알아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아하, 그 이유를 아는 거예요. ‘저건 예수님이 달릴 것이 아니고 내가 진즉에 하나님 앞에 버림받고 저주받아 마땅해.’ 그걸 먼저 알게 된 겁니다. 물론 성령이 와야 알아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수가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의 성령이, 성령이 십자가의 영이거든요, 십자가 사건 터지고 그 사건이 내 안의 십자가로 터져버리면 ‘아, 나는 어제부로 목숨 달아나도 그것은 뭐 잘 하셨습니다. 주님의 일관된 조치 멋집니다.’ 이렇게 동의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일관된 하나님의 일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요한일서 4장 4절에서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구분된다 그 말이거든요. 뭐냐 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 속한 말만 알아들어요. 그 세상에 속한 자가 앗수르고 앗수르가 앗수르 다운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쳐들어왔을 때 앗수르 자기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거예요. 뭐냐? ‘신이 뭐 소용 있노. 우리의 니클라우스 1세가 최고지. 네 목숨 가지고 장난 쳐봐? 토스토예프스키 네가 뭐 진리를 외쳐? 까불지 마.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어. 힘 강한 자가 최고야.’
랍사게라는 사람, 앗수르라는 제국의 본심은 앗수르가 그냥 다른 민족 칠 때는 우리가 우리의 본질이 뭔지를 몰랐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앗수르가 그 약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도 앗수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다가왔을 때 랍사게 입에서 툭 하고 본심이 나와 버린 거예요.
“여호와같은 소리 하고 있네. 모든 일은, 문명은 인간의 손으로 이룬 거야. 하나님이 거기에 들어갈 필요 없어.” 하나님 믿는 것은 이미 성공한 자, 권력을 쥔 자, 여유 있는 자가 부록으로 믿는 게 종교고 교회 가는 거라는 말이지요. 시간 남을 때 “아이고 심심해라.” 이런 것 있잖아요. 몸이 비비 꼬일 때 ‘아이고, 죽어서 천당 지옥 가본 사람은 없지만 혹시 있으면 곤란하니까 하나님 믿자.’ 그래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가게 손님 왔는데 언제 교회 나옵니까? 세상 사람 말하는 것 하나 틀린 말 없어요. 그들이 틀린 말은 안 하는데 하나 모르는 게 있어요. 그래서 망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주님한테 망해서 지옥 간다는 것, 그것 하나 빼놓고 나머지 다 맞는 말이에요.
그들은 자기가 지옥 가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종교를 취미로 여겨요. 마치 오늘날 교회 나오는 사람이 지가 교회 나오는 것을 취미로 여기듯이. 뭐 주님을 섬긴다고요? 본인 안 섬기고요? 본인 안 섬기고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본인은 본인대로 자기와 자기 집구석이 최고인데 자기 빼놓고 누굴 섬긴다고요? 주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망해야 마땅해요.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이 저주받을 짓만 하고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을 알거든요. 그런데 바리새인, 사두개인, 성직자들은 몰라요. 하나님을 위해서 들입다 희생 봉사한 줄 알고 있어요.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본심은 돈인데 마치 돈에서 초월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 6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한테 주지 말라는 거예요. 이걸 염두에 두고 우리가 남한테 선교 전도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그 현장에서 우리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우리가 그들을 개돼지로 취급하기 전에 먼저 복음을 입만 떼면 그들이 우리를 개돼지로 먼저 취급한다는 사실, “이건 뭐 너 나하고 똑같은 인간인데 무슨 다른 개소리를 하고 있어?” 여기 개, “무슨 짐승 소리를 하고 있어? 치워! 너희들 다 돈 벌려고 하는 짓이잖아.” 저쪽에서 먼저 이야기한다고요. 세상 쪽에서.
세상의 관심사는 하나님한테 어떻게 봉사할까, 가 아닙니다. 복음에 내 몸을 어떻게 바칠까, 가 아니에요. 윤석열이가 어떻게 정치를 잘할지 관심이 거기에 있어요. 그게 바로 앗수르의 본심이에요. 앗수르에요. 윤석열이가 미신을 믿든 도사를 믿든 관계 없어요. 그냥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훌륭한 대통령이에요, 그냥.
정말 이 남은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잖아요. 제비뽑았어요. 당첨한 거예요. 남은자도 당첨된 거예요. 남은 자도 성령이 오실 때 그게 남은자에요. 당첨해요. 마치 다윗을 당첨해서 왕이 되었듯이 당첨한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가……,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성도는 자신이 알아요. 뭘 아느냐? 내가 성도 된 것이, 내가 성령 받은 것이 절대로 내 뜻이 아니라는 그것을 압니다.
자기가 성도라는 것이 불가능함을 본인이 알아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가 불가능한 자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책임이 나한테 오는 것을 원장한테 미룰 수가 있어요. 이게 의리고 뭐고 없어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오늘 아주 적절한 적용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빌립보서 4장 12, 13절입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비결이 뭐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이라는 그 조건, 내게 지시를 하는 그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왜?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랑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거예요. 모든 것이.
스가랴 13장 8, 9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13장 8절에서 이런 말씀 합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이 “불 가운데 던져”라는 말은 에스겔 5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다 설명할 수 없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에스겔이 자기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3분의 1을 가지고 뭘 하는데 그 3분의 1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4절에 “또 그 가운데서 얼마를 가져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속에 뭐가 있느냐? 이스라엘을 태워버리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부정해버리는 그 불이, 심판의 불이 먼저 먼저 미리 이스라엘에게는 경험케 했다는 것, 그 경험한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요소는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 주께서 당첨해서 남은자가 생기는데 그 남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마땅함을 아는 자로 남게 되고, 그 남은 자를 앞장세워서 모든 세상을 심판해버리고 모든 세상을 세속이라는 이름으로 저주하는 그 심판행위를, 마지막에 주께서 이 원칙을 성도에게 집어넣어서 성도를 앞장세워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오늘날 형편입니다. 성도는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멈춘 적이 없는데 우리의 관심사는 내가 나를 살리는데 관심 두다 보니 그저 하나님 이용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이제는 날마다 우리 속에서 주의 심판의 불이 나오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