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해산의 고통

아빠와 함께 2022. 4. 21. 16:13

해산의 고통

2022년 4월 20일                본문 말씀: 미가 4:9-13

(4:9)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4:10)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4:11) 이제 많은 이방이 모여서 너를 쳐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4:12)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단을 타작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4:13)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이스라엘의 임무는 이 지상에 없는 존재의 출현입니다. 인간치고 그 어떤 자도 하나님 계신 곳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구원이나 천국에 대한 염원은 그저 희구에 불과합니다. 그냥 염원일 뿐입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천국에 가고 싶어도 하나님의 뜻은 요지부동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인간 자리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올 수 없음은 이미 확정지어진 판정입니다. 변경될 수 없는 불변의 최종적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신 이유는, 이 사실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느 누구도 복락을 누릴 자가  없다는 것이 이미 확정난 결론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10계명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최우선적 계명이 ‘우상’에 관한 겁니다. 우상이란 ‘거짓 하나님’을 두고 말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격하시고 노리시는 적은 우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첫 번째 위반 사항이 바로 ‘우상 숭배 죄’였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이 만든 것은 우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 내면의 신 인식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단순히, 돌이나 쇠나 나무나 놋 같은 대상체로 간주되지만 이 우상 제조 및 우상에 대한 선호성은 곧 인간 자체가 우상임을 드러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이상적인 대상체로 신봉하고 싶어합니다. 가시적인 우상체들은 인간의 내면을 구체화한 것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로 도로 포로잡혀가서 망한 것은 우상을 공격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 때문입니다.

이로서 이스라엘마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이 명확해졌습니다. 이는 이미 확정된 사실, 곧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하다보니 나온 결과가 아니라 애초부터 확정이 나버린 사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감히 어디가 어디라고 들어와!” 원칙입니다.

인간의 우상적 기질은 이런 겁니다. 자신의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일하심과 살아계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서 확실하게 노출됩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이 세상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겁니다. (히 1:2/골 1:16) 그런데 그 어떤 인간 치고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창조된 것을 알 자가 없습니다.

알았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고전 2:8)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면, 그 어떤 인간치고 예수님을 안 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우상적 기질에 의해서 신을 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우상적 품성으로 인하여 천국에 합류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잡혀 갑니다. 이 포로잡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이 알아야 합니다. 우상적인 존재는 결코 하나님 계신 속에 들어설 수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29:10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 ‘돌아온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애초에 제공된 그 하나님의 언약, 말씀, 약속 자체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과 약속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자, 곧 하나님과 함께 있어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새로운 집단의 출현과 관련 있습니다. 출애굽기 9:34-35에 보면,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준 계시 앞에서 모든 일반적 인간들의 본성이 감추지 못하고 드러납니다.
아쉬운 것이 없을 때, 인간들의 본성은 강퍅과 완악의 강도를 높여갑니다. 특정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그러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을 허위 신, 곧 우상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딸 시온산’이 나옵니다. 지명이 어떤 인물이 불리워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딸, 곧 여성은 임신하고 하게 되고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임신이란 엄연한 자신의 신체 안에 이질적인 신체가 들어앉아 있어 서서히 자라나는 것을 말합니다. 어차피 분리될 타인의 몸입니다. 이는 천국가는 이가 아무도 없음이 더욱 확정짓기 위한 예언의 취지에서 하늘에서 새로운 몸이 게시에 실려나 나타납니다. 그 인물이 ‘딸 시온’입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란, 이 세상에는 없으나 하늘에게 내려오는 약속 안에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은 잉태한 여인의 죽음을 내용으로 꽉찬 채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죽은 야곱의 본처 라헬의 운명이 그점을 말해줍니다.

이런 새로운 인물은 모든 약속을 한 몸에 받은 유일한 분으로 성취하십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2-14)

이처럼 언약의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으로 꽉찬 내용으로 하여 새로운 피조물을 만듭니다. 그 예가 바로 여리고성에서 구원받은 기생 라합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대주재에서 바친 인물입니다. 더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는 우상적인지 않는 삶을 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이미 우상숭배자에 해당되는 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미가 4장 9-13절(해산의 고통)2204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4장 9-13절까지입니다.

미가 4:9-13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이제 많은 이방이 모여서 너를 쳐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찌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이러한 미가의 예언을 보면서 우선 먼저 생각해야 될 게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지명 같은 것, ‘시온’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들을, 자연현상들을 보면서 오늘날의 과학적인 입장에서는 땅은 땅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땅과 사람 그것을 구분을 못 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 구분 제대로 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서에 있어서 이 지명들, 장소, 도시, 지명들은 그게 하나의 어떤 인간, 인물처럼 간주해서 대화하듯이, 사람과 사람 대화하듯이 특정 지역을 사람으로 생각해서 대화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시간이라든지 지역이라든지 공간 이 모든 것은, 특히 성경, 구약에 나오는 이런 지역들은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이라는, 또 예수님의 몸이라는 그러한 인물 안에 다 이게 집약되게 되어 있어요. 다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생각하게 되면 그냥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단어들, 문법들, 이야기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걸 한데 뭉쳐보게 되면 어떤 인물이 돼요. 그게 과학적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굉장히 이해하기가 힘든 겁니다.

아파트 보고 사람한테 이야기하듯이 이야기하면 이건 뭐 잘못된 거잖아요. 아파트 사는 사람들 보고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해야 될 텐데 미가 선지자뿐만 아니고 모든 선지자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지구 덩어리를 하나의 인물 대하듯이 그렇게 대하는 겁니다. 인격자 대하듯이.

그래서 이 세상은 망하리라, 이 말은 마치 이 세상 전체를 하나의 인격으로 본다면 네가 망한다, 는 그런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물 따로, 인물이 거하는 그 영역 공간 따로, 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님께서 사람 다루듯이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그렇게 간주하시면서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성경 구약과 신약을 통합해서 볼 때에, 사실은 필수적인 안목이거든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여기 우상 나옵니다. 우상이라 하는 것은 나무나 철이나 동이나 돌이나 사람들이 섬기는 어떤 물체라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후대로 가게 되면 이 우상이 하나의 인물이 돼요. 이 우상이. 하나님께서 일을 꾸며서 그렇게 몰아넣어요. 하나의 인물이 된다고요. 하나의 인격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니까 “나는 동화사 부처 같은데 절 안 합니다.”

부처에 절 안 한다고 우상 섬기지 않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물건에 대해서 절하고 절 안 하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자신이 너에게 이미 우상화되어 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장 십계명 나올 때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이렇게 함으로써, 특히 5절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실 때에 어떤 식으로 일하는가, 그게 잘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우상한테 지지 않겠다, 우상을 파괴시키겠다, 우상을 공격하겠다, 우상을 파멸시키겠다, 이게 하나님 일의 확고한 목표가 됩니다. 방향성이 됩니다. 우상을 없애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당부합니다. 내가 너를 애굽에서 끄집어냈는데 제일 먼저 나오는 계명이, 십계명 가운데 제일 먼저 당부하는 계명이 뭐냐? 우상 만들지 말고 그 우상 섬기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계약이 끊어진 제일 첫 번째 일이 뭐냐? 우상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기 32장에서 그들이 우상을 만든 게 아니에요. 그들이 만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들었는데 당사자이신 하나님은 네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게 우상이 된다고 하는 거예요.

신을 네가 만든다면, 신을 만들지 말라 정도가 아니라 신을 만들었던 네가 우상이라는 사실을 노출 시키면서 너는 신을 섬기는 그러한 존재로서 네가 파악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거요,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싶어하잖아요. ‘하나님을 제가 섬기겠습니다.’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상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을 우리 교회 ‘질문답변’란에 하셨는데 저는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필요치 않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인간치고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몰랐어요.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천지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그 하나님도 우상이고 그렇게 믿는 너도 그 우상 중의 하나가 되는 겁니다. 거짓된 자기 자신이 거짓된 존재, 거짓된 신처럼 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의 가짜, 허위, 가짜신앙의 시작이고 엉터리 신앙의 출발을 우리가 벌써 개시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자극 시킨 거지요. 우리 안에 은폐되어 있는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우상이고 신이라고, 신 노릇 하고 있음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딱 자극을 시키니까 인간들이 뭐하냐 하면, 나는 믿습니다, 이 천지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들켰다. 너 들킨 거야, 이제.” 왜냐하면 예수님과 인간을 한번 대조하는 그 경우에만 비로소 인간 자체가 우상성임이 다 폭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내용의 그 핵심은 뭐냐, 주제가 뭐냐 하면, 이미 파국, 파멸은 확정적입니다. 파멸은 끝났어요. 파멸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최종성은, 파국으로 끝나는 최종성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심이 났고 판정이 나버린 상태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은 멸망입니다.

어떻게, 이 이야기가 기쁘지 않습니까? 새삼스럽게 고민할 게 없어요. 우상으로 태어나 우상으로 살다가,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상을 파멸시키는 분이기 때문에 우상으로 살던 우리를 파멸시키기로 모든 게 확정 나 버렸어요. 뭐, 뭐 다른 여지가 없어요.

이미 모든 최종판정을 미리 챙길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은 바로 선지자를 통한 예언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은 우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계속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됨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상하고 전쟁 벌이면서.

그런데 그 전쟁하는 우상이 누구냐? 바로 인간들 자체가 우상인 거예요. 인간 자체가.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희망이라 하는 것은 정말 너무 무지한 태도에요. 재판이 끝났는데 무슨 판결 뒤집을 희망을 갖습니까? 이미 판결이 확정적으로 내려졌어요.

이 확정된 판결이 신약성경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찾아보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아는 거예요, 어리석은 처녀가 신랑이 혼인 잔치하러 왔는데 미처 등불의 기름을 준비 못 했을 때에 신랑 왔다는 소리를 듣고 뒤늦게 기름을 준비해서, 근처에 주유소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준비해서 갔는데 그때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정확하게 묘사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다섯 처녀가 문 열어 달라고 했어요. 문 열어 달라고 하는데 문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게 이 세상의 형편이에요. 문 열고 들어갈 수가 없어요. 문이 닫힌 문이 되어서. 이게 최종적으로 확정 나 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감히 네가 어딜 들어와?”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부터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 우상 주제에 어딜 넘보고 어딜 들어와? 네가 네 주제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못 들어와!”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거기는 문도 닫혀 있고 문을 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요. 오늘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이러한 결말은 확정 났습니다. 그 확정 난 것을 지금 미가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상인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인 자체가 거짓 신이기 때문에, 허위적인 신이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은 이미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 계신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식으로 이스라엘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널리 전파하게 됩니다. 어떤 인간도 우상이기 때문에 들어올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길 때 그들은 하나님께 멸망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수가 없지요. 왜? 우상을 섬겼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을 봅시다. “딸 시온이여.” 라고 되어 있지요. 9절부터 보면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온에 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지역 자체가 하나의 인격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인물로서. 그러면 이 세상 어떤 인간도 이미 확정 났어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 계신 곳에 인간은 들어갈 수 없어요. 인간은 인간 쪽에 있어야지 하나님 쪽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딸 시온, 시온이라는 지역이 나와요. 예루살렘이지요. 이 지역은요,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약속에 의해서 없는데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 지명이에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잘 들어보세요. 여기는 없는 거예요. 없는데 위에서부터 인간세계에 없는 약속이 출현했습니다.

약속이 하늘로부터 이 다윗을 통해서 예루살렘이 다가옵니다. 다가오면서 없는데, 없는 게 맞는데, 이미 없음이 확정되었는데 시온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 어떤 인물, 딸 시온이니까, 그 인물이 예루살렘에 도달됩니다. 그렇다면 딸 시온, 이 시온성이 해야 될 임무가 뭐냐 하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교회 다니면서 선입관이 있어요. ‘우리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많아서 우리를 천국에 넣어준다.’ 지금 이 선입관이 되어버리면 거기는 십자가 의미도 없고요, 우상을 싫어하는 하나님의 의미도 다 빠져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그 취지도 안 살려지고, 이것은 진짜 그야말로 우상적인 허위, 가짜 복음이에요.

출애굽기 9장 33절 –35절에 보면 “모세가 바로를 떠나 성에서 나가서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매” 지금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그 장면이에요.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매 뇌성과 우박이 그치고 비가 땅에 내리지 아니하니라.” 애굽나라에 우박이 내리고 번개가 치고 뇌성이 오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자연이 우당탕탕, 했지요. 그런데 모세가 기도하매 그것이 그쳤다 그 말이지요.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이 말씀을 보고 바로 왕이 나쁜 사람이라고 치지 말고요, 우리가 바로왕의 마음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쪽으로 이걸 봐야 돼요.

바로 왕에게 좀 힘든 일이 있었는데 좀 숨통이 트이니까, 숨을 통할 수 있으니까……, 숨이 통한다는 것은 출애굽기 8장 14, 15절에 나와 있어요.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지금 이 바로가 마음이 완강해서 강퍅해졌다는 이 말을 바로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성경을 근원적으로 크게 오산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에요. 우리의 마음이 바로의 마음, 네 마음 내 마음, 바로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힘들 때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편하면 하나님 찾지 않지요. 찾아도 건성으로 찾고 그냥 기계적으로 찾지요. 진심으로 안 찾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 이 바로 왕이 특이한 게 아니고 바로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에요. 바로의 마음이!

오히려 이상한 것은요, 하나님의 마음이 이상해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나님께서 바로 왕으로 하여금 계속 강퍅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강퍅이 적체되어 있으니까, 날 때부터 죄인으로 꽉꽉 채워져 있으니까 일 하나 터질 때마다 바로 왕 자신도 미처 모르는 강퍅함과 완강함이 계속계속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한 꺼풀 두 꺼풀 계속 나오게 되어 있다고요.

그것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딸 시온을 보세요. 다시 하겠습니다. 잘 들으세요. 자, 지상에는 없습니다. 이 시온이라는 의미는 지상에 없어요. 하늘에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면서 언약이 조명발처럼 도달된 것이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대로 시행하는 순간 그 예루살렘의 산은 무슨 산이 되느냐? 시온산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시온산은 언약을 주신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늘에서 왔다가 땅이 시온산 되고, 그 땅 시온산이 어디로 올라가는가? 하늘로 올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산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봤습니까? 없지요. 백두산이 하늘로 올라갑니까? 한라산이 하늘로 올라가고 저 일본의 후지산이 하늘로 올라갑니까? 화산 폭발해도 못 올라가요.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뭐 이야기했습니까? 지역이 신약에서 하나의 인격화된다고. 하나의 인물로 묘사되는 거예요. 언약의 최종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특수한 어떤 분이에요. 인격이에요. 이것은 지상에 없습니다. 제가 지상에 없다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아울러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선입관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우리를 잘 건져주겠지.’ 이 선입관 자체가, 이것은 너무나 우리가 우상이기 때문에 그런 헛 공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사랑이 많아서 우리를 넣어준다고. 그것은 우리 자신이 우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상이기 때문에 그런 헛생각을 갖는 거예요. 헛생각! 지금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가 봅시다.

그런데 이 시온에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이 시온은 뭐냐 하면, 해산하는 여인이 돼요. 여인이 해산한다는 것은 여자의 몸체 말고 여자의 몸과 다른 이질적인 다른 생명이 여자의 몸의 중앙을 점유하여 장악해서 이게 안에서 작은 어떤 이질적 존재가 여인의 몸 안에서 커져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인의 몸은 어떻게 되느냐?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이게 바로 임신의 고통, 임신 후에 나오는 것은 해산의 고통, 해산의 고통이 일어나는 겁니다. 누가요? 시온이요. 왜? 시온은 딸이니까, 여성이니까, 여성만이 임신할 수 있어요.

하늘의 계시를 받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인격자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느냐 하면, 이질적인 것을 품고 고통하는 모습으로 이 땅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고통 하는 아기를 낳게 되면 너희는 초죽음의 아픔의 극치까지 도달하겠지요. 저는 남자라서 그런 경험 못 했습니다만.

두 인격체가 공유할 수 없어서 하나를 생산하고, 아기를 생산한 엄마는 그냥 초죽음 되지요. 그런데 사실은 초죽음이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그냥 죽었어요. 그냥 죽습니다. 그게 창세기 35장 16절-19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라헬이 죽으매. 라헬은 언약의 아들 하나님의 축복 된 자식 베냐민을 낳고, 열두 자식 다 축복 된 거니까, 그렇게 낳고 그 엄마는 죽습니다. 이 라헬이 야곱의 진짜 아내예요.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아예 아기를 못 낳는 여자가 아기를 낳았지만 이 야곱의 진짜 사랑하는 여인 라헬은 자식 낳으면서 자기가 죽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천국에 갈 사람은 하늘에서 오신 분의 죽음 없이는, 죽음 속에서 잉태한 자가 아니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지금 이 복음이 안 먹히는 이유는, 지금 우리 자신을 우상이라고 생각 안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우상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안 해봤기 때문에 왜 이렇게 딸 시온이라는 인격자가 해산하는 고통을 가져야 되는지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여인이 아픈데 왜 아픈가? 배가 불러서 아프다. 왜 배가 부른가? 그 안에 아직 지상에 태어나지 않은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아픈 거예요. 생명은 아픈 거예요. 날 때도 아프고 그 아픔은 뭐냐? 결국은 죽음의 아픔, 이 땅에 죽음이라는 아픔의 응결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죽었다는 그 내용으로만 몽땅 들어 있는 어떠한 생명체의 탄생, 그 사람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합류가 됩니다.

제가 어떤 강의 하면서 그것을 저는 ‘충무 꿀빵’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요새는 충무가 아니고 통영이지만 그 충무꿀빵, 충무꿀방의 특징이 뭐냐 하면, 대부분이 앙꼬에요. 껍데기는 아주 얇고 대부분 앙꼬가 들어 있고요, 거기다가 땅콩 좀 뿌리고 꿀을 발라놨어요. 그게 충무꿀빵이거든요. 앙꼬가 대부분을 차지해요.

죽음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피부의 껍질에 불과하고 그 안에는 하늘에서 오신 분의 죽음으로 꽉 차 있는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 잉태자 아니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우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안 받아줘요.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뭐 교회에서 애들 까부는 것 봤지요. 교회에서 까불거리면서 예수 믿습니다, 하잖아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농담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교회가 친목 단체도 아니고……. 그래서 이 사실, 이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생명체를, 새로운 피조물 생명체를 자기 죽음을 내용으로 해서 만들어내는 그 신약에 올 때까지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야 되는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야 됩니다. 10절에 나옵니다. 바벨론까지 끌려가야 돼요. 바벨론까지 포로 잡혀 가야 돼요. 포로 잡혀 갈 때 그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나라가 몽땅 망해서 바벨론에 포로잡혀 갔을 때 진짜 그 바벨론에 잡혀간 그 취지를 아는 사람은 ‘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 맞구나.’ 원초적으로 처음부터 어떤 인간도 천국에는, 이스라엘이 못 들어가면 모든 인간이 못 들어가지요, ‘어떤 인간도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바벨론 포로 잡혀가면서 그걸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요소가 있어요. 하늘의 요소가 있어요. 하늘의 요소가 뭐냐 하면, 네가 우상숭배 했기 때문에 포로 잡혀간다, 포로 잡혀간다는 그 소식, 그 알림, 그 광고,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걸 아는 자는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가 성립돼요.

그게 예레미야 29장 10절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29장 10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너희들이 갈 때는 너희의 우상숭배 때문에 포로 잡혀갑니다. 그다음에 70년이 차면 내가 다시 너희들을 너희가 쫓겨갔던 이 자리, 약속의 땅이 있는 여기 시온으로 오게 한다는 그 약속, 그 약속이 살아 있어서 포로 잡혀 죽은 너희를, 살아 있는 말씀이 너희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겁니다.

너희가 쫓겨가는 것은 말씀을 건성건성 듣고……, 뭐 건성건성 들으나 그냥 들으나 못 지키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못 지킵니다. 말씀 못 지켜요. 어느 누구도 못 지킵니다. 왜? 우리는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 자신이 우상이라는 것이 노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하는 이 모든 말이 다 우상적이에요. 그 이유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우리는 우상적이냐? 오늘 설교의 핵심이 이겁니다. 그것은 우리는 새 생명을 임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 생명을 임신할 능력이 없어요.

모든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이뤘다는 증거가 뭐냐? 그 안에 새 생명을 임신할 여자의 후손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 지켰다고 까불까불거리만 했지 새로운 생명을 우상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찢어버리고 나와요. 우상적 이스라엘을 찢어버릴 때 거기에 참 이스라엘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유다 민족한테 처형되는 겁니다. 이방한테 처형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민족한테,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처형당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정말 우상 맞아요. 대표적으로 우상 맞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집단이에요. 왜? 하나님을 못 알아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새 생명을 잉태할 여자의 후손의 기능도 하지 못하면서 그들은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어요. 여호와를 믿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킵니다, 맨 날 이러고 있어요.

그들은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한 겁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도 소위 신학교에 가면 왜 그리 신학자가 많은지, 신학자들이 창세기 1장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히브리어 바라( בָּרָא, 창조하다)하는 것 있어요. 바라, 그 뜻이 뭐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바라, 보라는 뜻인가, “바라,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계시다, 이 세상 사람들은 무신론자들이지만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래가지고 지옥 가는 거예요.

그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는다는 노동을 동원해서 자기의 노력과 결단과 자기 지혜를 동원해서 받아들이면 자기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 넣어주는데요? 분명히 천국에는 못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요, 천국에 가고 싶은 자기 욕심 아닌가요?

그게 그 자체가 본인이 우상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하고 비교가 안 되니까, 예수님하고 비교가 안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9장 13절 1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우리가 우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생각하면 비로소 이해가 돼요.

우리 자신은요, 나 챙기는 것, 나 챙겨서 천당 가는 것만 생각해요. 아,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우상적입니까? 얼마나 강퍅한 거예요? 얼마나 완강한 거예요? 우리가, 남은 지옥 가도 나는 천당 간다는 이 고집이요,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러운지 몰라요.

지금 히브리서 이 거룩한 말씀 보기 전에, 너무나 거룩한 말씀 보기 전에 이 점을 좀 더 알기 위해 말씀드리면, 어떤 새댁이 있는데 그 새댁은 돈 없이는 세상을 못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집안이 가난했고요.

그래서 그 새댁은 생각하기를 한 8억만 있으면 안 살겠나 그래서 남편 이름으로 8억짜리 보험을 들어놓고 남편을 가스라이팅, 완전히 자기의 개로 만들었어요. 주인한테 인정받고 싶은 쪽으로 개를 길을 잘 들여놨어요. 그래가지고 헤엄 못 치는 것 뻔히 알면서도 들어가면 건져줄 게, 라고 약속을 한 거예요. 빠져 죽었습니다.

자, 그 새댁이 뭐만 생각합니까? 본인만 생각하지요. 죽은 남편 생각 안 하지요. 보험금 8억을 자기 혼자 차지하려고 자기만 생각하잖아요. 그 새댁이나 오늘날 우리나 뭐 차이점이 있습니까? 나는 천당 가겠다는 그것이 예수님을 8억 보험금에 팔아먹고 예수님 이용해서 나만 살겠다. 그게 우상이잖아요.

예수님은 반대였어요. 아기를 임신한 여인이었습니다. 자기는 죽고 새 생명이 태어나는 거예요. 히브리서 9장 12-14절에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라고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제물 되신 분이 예수님 빼놓고 이 70억 인구 중에 누가 있습니까? 자격자가 없지요. 더럽다는 이야기거든요. 추잡하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 오셔서 홀로 본인만 제물이 되셔서 그랬어요. 심지어 사도바울도요,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요.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다. 십자가 질 잽도 못하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 더러워서 십자가 어떻게 져요? 오직 속죄제물은 예수님 뿐입니다.

도대체 복음이 뭡니까? 복음은 반드시 우리가 우상이라는 점을 인정을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돼요. 그것도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요. 끝으로 여호수아 6장 17절을 보게 되면, 여리고 성 함락하는 대목이에요.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바치는데 그게 양각 나팔, 다시 말해서 제사장이 양각 나팔 불어서 바쳐요. 그 언약궤를 앞장세우는데 그 언약궤에는 피가 묻었거든요. 그 피로 인하여 생산된 새로운 천국 가는 백성이 누구냐? 기생 라합입니다.

여호수아 6장 17절에 “기생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산다는 게 여기 나와요. 그러니까 기생라합은 하나님의 희생이 없으면 그냥 여리고 성에서 죽었어야 돼요. 그 기생라합은 어떻게 되는가? 오늘 미가 4장 마지막절 13절에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대주재께 돌리리라.”

신약적으로 하면 뭐냐 하면,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고 죽었다가 사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게 되는 것 새 생명이 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게 뭐냐 하면, 딸 시온, 출생, 딸 시온이 잉태한 그 출생물입니다. 시온의 자녀에요.

시온의 자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 새 언약의 백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고통 속에 포로 잡혀서 고생고생하게 하고 왜 그렇게 하는가? 바로 하나님께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못 들어가는데 위에서 온 허락된 약속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만 들어가야 되는거예요.

그러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그 나머지는 미가 4장에 나옵니다. 미가 4장 12, 13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찌어다.”

인격이라 했지요, 인격, 지명이 아니고 인격이지요.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뿔은 뭡니까? 황소지요. 황소같이 들이받으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나머지는 우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쳐서 지옥 보내는 것은 지극히 확정된 판결이지요.

이것은 뭐 새삼스럽게 놀라지 마세요. 진리는, 우리가 아는 진리는 절차입니다, 절차. 어떤 절차? 예수님의 고통 가운데서 고통을 아는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하는 것과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우상처럼 예수님의 고통과 희생과 십자가의 복음을 모독하는 그 모습을 우리는 그 진리의 절차로서 만끽하면서 예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기생라합처럼 못 들어갈 곳에 갈 수 있는 그 세계가 이 땅에 쳐들어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현실의 핵심을 따로 있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저 사람들이 사람들끼리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핵심은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속죄제물 다 이루시고 나머지기 사람들 파멸시키는 것을 확정적인 사태로 이끌어가시는 그 사실을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을지라도  (0) 2022.05.05
가장 위험한 곳  (0) 2022.04.28
바뀐 인생  (0) 2022.04.14
포획된 죽음  (0) 2022.04.07
건드려 주심  (0) 2022.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