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빠와 함께 2022. 5. 19. 14:09

심판하시는 하나님 

2022년 5월 18일                 본문 말씀: 미가 5:10-15

(5: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너의 말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며 너의 병거를 훼파하며

(5:11) 너의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너의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5:12) 내가 또 복술을 너의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장이가 없게 될 것이며

(5:13)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5:14) 내가 또 너의 아세라 목상을 너의 중에서 빼어 버리고 너의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5:15) 내가 또 진노와 분한으로 청종치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

인간이 찾는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본인의 ‘있음’이 그 어떤 ‘있음’보다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신의 있음’은 ‘인간 있음’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인간들이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는 것은 ‘나 여기 있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있음’을 빛내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신이 후차적으로 필요한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세계에 신은 없지만 악이 있습니다. 그 악을 겨냥해서 비로소 나타내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을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이 참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만나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내가 여기 있음을 도모하고 증명하기 위한 모든 것’을 파괴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참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 멀쩡하게 없게 만드십니다. 다 부수십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악이 제대로 숙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하면 아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십니까” 이 질문 대신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저희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무르익게 하셨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처음에 모든 권력은 자연에게 있었습니다. 이 자연 속에서 하나의 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신이 있었습니다.

소위 ‘다신(多神)의 세계’였습니다. 자연은 변함없이 요동치고, 인간들은 그 대자연의 변동에 늘 조심스럽게 대처하면서 생존해야 했습니다. 자연의 변화 하나하나에 신을 설정해놓고 아부하고 협상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는 결코 신이 있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있음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선행해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다음의 존재는 동일하게 중요한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서열이 매겨지게 마련입니다. 인간에게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보면서 신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이 여럿 신이 하나의 신으로 정리되고 뭉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 자체 내에서 서열이 생기고 가족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이는 인간 사회가 자연과 일체감을 갖는 시기가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인간과 짐승이 혼연일체가 되는 시기에는 무장의 존재가 의의를 갖는 시대였습니다. 무당은 제한적인 인간의 언어로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기 보다는 차라리 노래와 춤을 추면서 보여줍니다.

마치 실성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인구가 많아지면서 인간 사회 자체에 힘이 모아지게 됩니다. 자연에 전적으로 힘이 있던 것이 인간 집단에도 자신을 지킨 자신이 생길 정도로 힘이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무당보다 군인과 행정력을 발휘할 왕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민간 신앙은 하나의 신으로 통합됩니다. 왕은 국가의 결집을 위하여 민간신앙을 인정할 필요가 있었고 왕은 그들의 신의 대리자로 행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에도 이름이 붙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제사라는 방식으로 신과 가시적인 교류가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왕상 12:31-32)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된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워놓은 송아지는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자체를 사물화 시켜 고정적으로 옆에 두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물화 되어 백성들에게 제사를 받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건으로 나타나십니다.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수 24:5-7)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소개하시면서, 애굽 나라에 내린 심판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이 이 약속의 땅까지 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의 시대에는 이미 그 이스라엘이 온통 우상화된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죄짓는 나라되게 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생겨나게 하신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심판이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벌써 구원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우상은 심판이 빠진 신입니다. 우상이란 인간에게 재앙을 피할 길을 제시하는 신입니다. 살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우상의 특징입니다. 더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자신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심판을 받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세요.

바로 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을 보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요 14:9) 자기 백성을 통해서 죄를 밝히내므로서 그들로 하여금 사죄의 희열을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벌써 죄인되므로서 벌써 의인되게 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심판 속에만 있으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합니다.(롬 5:20)

그래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매일의 사건은 모두 십자가 사건과 연계되어 전개된 일들입니다. 인간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일의 완성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일상이 바알과 아세라 범벅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9강-미가 5장 10-15절(심판하시는 하나님)2205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5장 10-15절까지입니다.

미가 5:10-1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너의 말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며 너의 병거를 훼파하며 너의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너의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내가 또 복술을 너의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장이가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또 너의 아세라 목상을 너의 중에서 빼어 버리고 너의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내가 또 진노와 분한으로 청종치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민족, 자기가 세우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멸절하고 심판한다는 이야기와, 끝에는 이방나라까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는 이스라엘이 심판받을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말, 전쟁할 때 말이 필요하고요, 그 말과 병거, 마차지요, 요새같으면 탱크, 그것을 훼파하고 부수고 너희들의 견고한 성채 성을 부술 것이며 12절에 보면, “네게 다시는 점장이가 없게 될 것이며” 13절에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의 중에서 멸절”시킨다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필히 심판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낸다 그 말입니다. 심판할 때 우상과 주상을 부순다는 것, 우상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하나의 유행이었습니다. 우상과 주상, 신을 만들어 물체화시켜서 섬기는 것은 그 시대의 풍토였는데 14절에 보면, “내가 또 너의 아세라 목상을 너의 중에서 빼어 버리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우상만 부순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믿는 여호와도 내가, 여호와가 부수리라, 그런 뜻이 담겨 있어요. 왜냐하면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우상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저는 우상도 섬기지만 여호와도 섬깁니다.’ 할 때 그 여호와가 우상과 같은 동격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는 그것을 나타내거든요.

여호와를 얼마나 몰랐으면 여호와 섬기고 우상 섬기겠습니까? 그 여호와가 가짜지요. 가짜 여호와를 진짜 여호와가 부수는 겁니다. “그러면, 다 부숴버리면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까?” 라고 인간 쪽에서 이야기하는데 하나님 뜻은 이거예요. “너희들에게 언제 하나님이 있었냐?”라고 묻는 겁니다.

우상, ‘아세라’라든지 섬긴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신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이 없으니까 인간 손으로 신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신은 없지만 누구는 있는가? 나는 있고 인간은 있잖아요. 그렇지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있는 그 내가 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신을 내가 창안해서 만들면 되잖아요.

만들다가 내가 뭐 좀 바쁘다 하면 내가 만든 신을 내가 없애면 되잖아요. 어차피 신은 없으니까. 있는 것은 인간들만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인간들은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이 과거에 이런 일 저런 일을 했다.’는 그러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요.

하지만 그 옛날에 우리 조상을 도와줬다고 소문난, 또 그런 썰이 있는, 그런 이론이 있는데 그런 전설이 있는 그 여호와가 옛날에 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스라엘의 끝 지점 미가 시대에 와서 중요한 것은 옛날에 여호와가 어떤 하나님이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여기 분명히 있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 그걸 그 당시 이스라엘은 솔직하게 다 드러낸 거지요.

내가 중요하고, 내가 중요한 것을 더욱더 강화하기 위해서 신을 만들어서 내가 만든 신으로 하여금 나를 지켜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에 이방 민족 따로 없고 이스라엘 따로 없고 전부 다 한통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14절에 보면 “내가 또 너의 아세라 목상을” 아세라, 아세라라는 이름이 나오지요. 성경에 이렇게 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그때 그 당시 아세라라는 신이 있었다.’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아세라 요소,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아세라 신상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 등장한 토대가 되는 인간의 품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기 때문에 지금 우리 자신에게 아세라 목상은 어떤 요소로서 우리를 통해서 지금 제시되고 있는지 그걸 우리보고 살피라는 거지요.

아세라 목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어 섬기는 것은, 그걸 수입해서 섬기는 것은 자기한테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되지 않으면 행동에 옮기지를 않거든요. 그래서 신을 섬기는 것도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호와를 섬기든 바알을 섬기든 뭐든지 좋다는 것은 다 끌어당기는 이유가 자기에게 이익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보험을 하나만 드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개 드는 것과 똑같은 거지요. 보험이 나쁜 게 아니잖아요. 좋은 것 다 해야지요.

비타민 먹고, 오메가3 먹고 다 좋잖아요. 비타민 오메가 3가 우상이라고 여러분이 배척할 맘 없지요. 이게 우상인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고 내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타민을 보충해주기 때문에. 왜 비타민을 보충해주는 것이 내게 이익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이걸 지켜내기 위해서 모호하고 애매한 그 신이라는 것, ‘특정 신을 믿을 것 없이 여러 신을 한꺼번에다 걸치다 보면 하나는 아다리 되겠지.’ 그게 내가 이 세상에서 나를 지켜내는 하나의 요령인데 그 요령, 나한테 유리하도록 하는 그것을 마다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뭐냐 하면, 신은 없고 오직 인간만 있다는 이 사실 만큼은 분명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은 없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증명해주는 거예요. “너희들 우상 섬기는 그 짓이 하나님이 없다는 너희의 솔직한 마음을 표했으니까 하나님이 없음을 내가 너 대신 내가 증명해줄 게.” 신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을 없애버리지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여호와, 너희들이 생각하는 예수, 성령, 삼위일체, 그것은 만들어진 거지요. 인간이 제작한 것. 그런 신은 없다는 겁니다. 우상이 물질로 되어 있다면 진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붙잡을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신은 내가 나를 붙잡듯이 나를 지켜주는 신도 이렇게 내가 여기 있듯이 늘 상 있어 줘야 신에게 도움을 얻고 믿을만한 대상이 되는 겁니다. 편리한 대상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건화된 신은 싫고 고정화된 신을 갖고 싶은 겁니다. 그게 예수가 됐든 하나님이 됐든 삼위일체가 됐든 무조건 우상이에요.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이 우상이에요.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 인간에게 피할 길을 주는, 인간에게 재앙이 나타났을 때 피할 길을 주는 하나님이 우상의 하나님이에요. 왜? 내가 하나님 피할 길을 달라고 할 때는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뭘 빠트리냐 하면, ‘주여, 제가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재앙 받아 마땅합니다.’ 그 요소가 빠져버렸어요. 그게 훅 다 빠져버렸어요.

‘내가 심판의 대상 맞습니다.’라는 생각을 못 한 상태에서 ‘내가 신을 믿을 테니까 우리 둘이 좋게 거래합시다. 좋은 게 좋지 않습니까? 이번 일만 도와주신다면 내 한몫 다이아몬드라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될 때 그것이 어떻게 신을 위함입니까, 본인 자신을 위함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가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근거는 창세기 3장 22절입니다, 인간을 하나님 계신 곳에서 쫓아냈다, 그 자체가 심판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에게 없지만 무엇은 있느냐 하면, 악이 있어요. 악, 죄악은 있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없지만 악이 있다고요.

그래서 그 악을 겨냥해서 폭격하고 공격하게 되면, 러시아 미사일 날아오게 되면 거기는 우크라이나 군사시설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심판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얻어맞는 곳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기에 인간이 있는 게 아니고 여기에 악이 있고 여기에 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심판이라는 폭격을 함으로써 비로소 보이지 않던, 나타나지 않았던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진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신을 생각하고 신을 믿겠다 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은 악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너 원래 신 안 믿잖아. 너 자신 믿잖아. 왜 이래? 자꾸 왜 조작을 해? 너 자신을 너는 너 자신만, 그러니까 최종 믿는 것은 너 자신밖에 없어. 너의 지식과 지혜, 너의 행동, 열심, 애씀, 그것만 믿는 거야. 그런데 그게 바로 악이야.”

널 믿다가 힘드니까 어떻게 하느냐? 신을 제작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민간신앙은 전부 다 신으로 되어 있는데 그 신, 민간신앙의 신은 무엇이 신이냐 하면 모든 힘은 자연 세계에 있다고 했습니다. 권력은 자연에 있다고 본 거예요. 민간신앙은. 자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단일신이 있는 게 아니에요. 단일신이 있지 않고 신이 여럿이었어요. 그걸 다신(多神)의 세계라, 다신, 신이 여러 개 있어요. 종교도 없어요. 종교라는게 없고 그냥 신이 여러 군데 있어요. 여기 가면 여기 신, 또 여기 가면 여기신, 날짜별로 신들이 여러 신들이 있어요.

그 말은 신을 인간이 믿는 게 아니고 신과 더불어 함께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흔적이 미국이 아메리카를 점령하기 전에 살던 인디언들에게 그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자연과 나와의 일체성을 갖는 거예요. 일체성이라 하는 것은 사냥을 해서 사슴고기를 먹을 때 사슴고기를 먹는 게 아니고 내 고기를 내가 먹는 거예요.

왜? 사슴과 자기를 일체 시켰으니까. 그래서 인디언 무당들이 몽고에서 나온 몽고무당들이고 몽고무당이 인디언들의 아메리카 쪽으로 가기 전에 한군데 들른 것이 백두산이고 백두산에 자리 잡은 사람이 단군이라는 사람입니다. 무당입니다. 무당인데 이 단군이라는 무당은 곰과 인간을 하나로 봤어요.

짐승과 인간 전부 다 이게 하나에요, 하나. 하나고 그것은 자연과 좋게 친하게 지내는 방법으로 내가 옆에 있는 짐승과 친하게 지내면 저 짐승을 만든 자연도 우리 인간에게 좋게좋게, 친하게 어떤 재앙 같은 것을 없애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걸 영어로 spirit라 해요. 정령(精靈)인데 다신이에요. 그래서 신들은 하나의 신이 아니고 여러 신이 있었어요. 여러 신이 있는데 여기 인간들이 인디언처럼 사냥이나 하고 채집활동이나 할 때는 어디에 가도 다 신들이 있지요.

그래서 평소에는 그냥 자연과 뛰놀다가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는 별다른 신의 세계 다신의 세계에요. 그래서 동굴 속에 알 수 없는 자연의 신에게 그저 사냥 잘 되도록 사슴이나 또 다른 사냥감을 몰아달라고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그렇게 집단으로 살면서 그 일을 하는 전문가가 있는데 그 전문가가 아까 말한 무당입니다. 무당은 하나의 신이 아니고 자연 자체가 신이었어요.

그런데 이 무당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뭘 하느냐? 노래하고 춤을 췄지요. 자연이 자기 맘속에 어떤 기를 넣어줄 때 무당은 넣어주는 기에 따라서 몸을 자연스럽게 맡기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주사 놓을 때 “힘 빼세요.” 하잖아요. 힘 빼고 흐늘흐늘 춤을 추는 거예요.

<마더> 라는 영화에 보면 아들이 살인도 안 했는데 살인자로 몰려서 사형당할 입장에 있을 때 엄마가 미쳐 가지고 그냥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지요. 김혜자라는 유명한 배우가 흐늘흐늘 춤을 춰요. 뭐 그냥 몸을 맡겨요. 미쳐 가지고. 너무 정신이 나가 가지고. 무당은 그냥 신에게 미친 사람이에요.

이 무당은 자기 재산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도 없어요. 그냥 자기 몸이 사슴이라든지 늑대라든지 이렇게 뒤집어쓰는 거예요. 인디언 무당들처럼 뒤집어 써 가지고 죽으면 그냥 맡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삶과 죽음이 일체에요. 동질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인구가 많아지고 농업기술이 발달해서 그냥 자연이 주는 것을 먹고 더 큰 욕심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잉여 재산을 축적을 하게 되고 축적을 하니까 남아도는 것으로 다른 사람과 장사를 하게 되면서 여기서는 노래와 춤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장사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면 이것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요.

여기서 계산을 해야 되고, 이성이 동원되고, 문자가 발달 되고, 그 문자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해야 되고, 그게 그 사회의 엘리트 지도층이 되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군인이 등장해요. 군인. 군인이 등장하면서 이 군인은 일반 사람들, 백성들, 민중들의 신앙을 집대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나중에 왕이 되는데요, 나중에 그게 국가가 돼요. 군인들은 전쟁하는 게 일이잖아요. 전쟁해서 포로를 노예로 삼아서 노동력을 채우는 일을 하다 보니까 신이 여럿이어서는 안되고 단일신으로 묶을 필요가 있었고, 왕 자신을 통해서, 이 자연의 권력이 왕 자신을 통해서 백성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준다는 것으로 자기가 중심체로, 중심축으로 나서게 되는 거예요. 북한의 김정은처럼,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어버이의 은총과 사랑으로서 우리 백성들이, 우리 인민들이 잘 먹고 잘사는 거지요. 거기에 등장하는 신이 뭐냐? 바알신이고요, 바알신의 부인이 누구냐? 오늘 14절에 나오는 아세라라는 겁니다, 아세라. 이 민간신앙에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신은 없는데 내가 있어요. 자연이 있고 내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자연질서가 너무 요동치니까 질서를 뽑아낼 필요가 있거든요. 질서를 뽑아내면서 질서 잡은 자라는 것이, 전에는 여러 신들이 따로따로 놀았는데 국가 하나를 통합하기 위해서 이 신을 하나로 묶는 거예요. 그 묶는데 일반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자식 번창이지요, 뭐.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 하고, 보전하려 하면 자손의 번식이 강해야 되거든요. 번식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각 가정마다 노력한다 그 말이지요.

가정마다 노력하니까 국가 입장에서는 가정마다 노력하는 이 민간신앙에 어떤 이름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야 임금 중심, 왕 중심으로, 군사국가 중심으로 똘똘 단결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민중들의 신앙을 독려하고 그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겁니다.

그게 열왕기상 12장 31, 32절에도 나와 있는데요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우리로 치면 광복절 날이지요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거기에 송아지를 얹어 놨다고요, 송아지를! 송아지가 여호와에요. 이게 남쪽 왕은 르호보암, 북쪽에는 여로보암 왕 시대에요.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졌을 때 송아지를 여호와의 형상으로 딱 모셔놓은 겁니다. 이 송아지의 형상이 뭐냐 하면, 바로 바알형상이에요. 바알. 황소.

인간에게 자연의 질서를 대표하는 것으로 ‘엘’이라는 신이 있고요, 그 엘신의 아들이 바알신입니다. 벌써 바알신은 인간사에 개입하는 신이 바알신이에요. 그 바알신은 비와 폭풍, 하늘에서 번개치는 것 이런 것을 관장하는데 그 바알신을 민중들은 남성화시켰어요.

왜 신에게 남성 여성 이게 왜 필요하냐 하면, 지금 중요한 것은 자기 가족의 자식이 잘 되어야 되고 번식이 되어야 되니까 자기 번식하는데 바알신이 개입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신의 도움으로 내 집안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있고 그다음에 신이 있는 거예요. 나 때문에 신이 있는 거예요. 그걸 국가적으로 조작해 내는 겁니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수천 년 역사적으로 흘러가면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 바알과 아세라 제단에 국가의 왕, 권력, 권력은 이제 자연 권력이 아니고 왕이 권력이잖아요, 왕의 권력과 결탁된 제사장들 이 사람들이 문자를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를 법으로 제정하는 거예요. 법을 제정할 때 신도 남성 신이 있고 여성 신이 있는데 신들을 어떻게 만드는가? 여성 신과 남성 신이 결혼해서 아세라 같은 경우에는 자녀들을 70명이나 낳았어요, 70의 신을.

그러니까 비가 오고 농사가 잘되는 것은 남성 신과 여성 신이 제대로 격렬하게 사랑을 하게 되면 그 뜻으로 이 샘족의 가나안 땅에 풍년이 온다는 겁니다. 특히 4월에서 10월까지는 비가 오지 않아요. 건기라 하는데 10월 달 씨앗 뿌릴 그때에 비가 한번 내려 줘야 돼요. 그걸 ‘이른 비’라 합니다. 이른 비. 그때 비가 오게 되면 농사가 잘되거든요. 제때 비오지 않으면 안 되니까 비를 내리는 식으로 바알과 아세라 제단에 격렬하게 집단적으로 성행위가 이루어졌습니다.

민수기 25장에도 그게 나와 있어요. 민수기 25장에 ‘바알브올’이라 하는 게 바알종교에요. 집단적으로 성행위를 함으로써 추상적인 신의 뜻이 구체화 됩니다. 자기 몸이 있으니까 자기 몸으로 구체화, 체험이 가능한 거예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그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 개개인이 하는 게 아니고 제단에서는 집단과 집단으로 성행위를 해요. 그것을 담당하는 여성들을 성녀, 거룩한 여인이라 한 겁니다. 제단에서 일하는 여성들. 남성들은 거기서 자기 자식들 잘 낳게 해달라고 가장들이 와서 그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과 거룩한 신의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 종교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바알 섬기는 것을 간음했다, 라고 하고 자꾸 음란했다, 간음했다, 표현하는 이유가 그 종교 자체가 내 몸을 위해서 신을 도용하는 이 모든 것, 그게 간음과 음란이에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우상이라는 것은, 내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삭제해서 없는 상태가 우상이에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게 우상이에요. 자꾸 신을 잘 믿으면 내게 올 저주와 재앙이 피해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통해서 악을 만들어내요. 만들어내시고 만들어내야 심판의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건을 일어나게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이 이렇게 알면 참 쉬워요. 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감행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지요.

그걸 신약에서 간추려 이야기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 십자가에 죽는 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하는 아버지, 그 관계만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심판으로서만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자기를 위해서 교회 왔다면 그 교회는 바알의 제단입니다. 악마의 제단이에요.

“가정에 어려운 문제 있는데 제가 십일조 꼬박꼬박 그동안 안 낸 것까지 다 낼 테니까 이 재앙이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그게 음란하고 간음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누구한테 그걸 배웠는가?

이사야 2장 5절에서 8절에 보면,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으로 만든다는 말은, 먼저 내가 있고 그다음에 신이 있는 거예요. 이 풍부하고 잘된 것, 내가 복을 받았는데 자기가 잘됐다는 이 자체가 증명되어야 되니까요. 바알이고 아세라고 하는 이 명칭, 원래 다신에서는요, 이성이 개입되기 전까지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을 못 해요. 그걸 3차원으로 표현하면서 비로소 이름이 거기에 붙는 겁니다.

다차원적인 신을 자연을 이렇게 하나로 표현 못 해요. 그런데 거기서 신을 이미지로 압축하고 치환을 해버리면서 여기서 상징화가 생기면서 그 상징에 맞는 언어가 바로 바알, 아세라, 이렇게 이름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냥 태어나면서 자연을 바라보면서 저절로 신을 느끼는 거예요. 이 웅대한 자연 만장(萬丈)스러운 자연, 거대한 자연, ‘우리는 보잘것 없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그 신은 구체적이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 구체화 되는 것은, 하나의 국가와 임금이 등장하면서 왕 자신이 “너희들이 모호하게 믿는 민간신앙, 그 신의 아들로 자기가 구체화 되어서 노골적으로 여기에 등장했으니까 내가 너희 민간신앙을 하도록 허락은 하되 너희들은 무조건 이 왕의 말을 들어야 된다. 왜? 너희들의 모호한 신의 구체적인 존재가, 아들이, 중보자가 바로 나, 전쟁 잘하는 나기 때문에.”

그러니 이 국가가 잘되기 위해서라도 민간신앙은 장려되고 보호되는 거예요. 그걸 누가 했는가? 이스라엘이 그대로 본받아 따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든 이유가, 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었거든요. 그 주변에다가 전부다 이방신을 믿는 사람들을 좍 깔아놨어요. 민족들을.

그러면 그렇게 이스라엘을 죄로 만드는 하나님의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지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게 악을 의도적으로 유도했지요. 주변에 우상 섬기는 나라로 완전히 둘러싸이게 해서. 지금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실상이 이렇습니다.

신명기 18장 9-11절에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신을 불러내는 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가는 그 땅에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한 자, 박수, 초혼자, 우상, 모조리 다 주께서 미리 깔아놔 버렸어요. “이스라엘아, 죄를 제대로 지으라.” 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이 행위를 본받지 말라.” 했어요. 이것은 마치 선악과 아름답게 심어놓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과 똑같아요.

인간이 무슨 재주로? 그 요술하고, 길흉 말하고, 점치는 나라들은 아까 이사야 2장의 말씀처럼 너무너무 모든 것이 풍부하고 모든 것이 잘 먹고 잘 살아요. 말들과 병거도 많고요. 따라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스라엘도 인간인데 그게 안 부럽겠습니까? 부럽지요. 본 따는 거예요.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겁니다. ‘아, 나도 인간인데 잘 살아보자. 잘살아보자! 사람답게 사는 것처럼 살아보자.’ 그러한 심정이 여지없이 올라오지요. 그 순간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유월절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 사건.

그래서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걸 미리 압니다. 뭐라고 하느냐? 5-7절까지 보면,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이 여호와가 사건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사건을! 어떤 물체로 신을 만들어, 여호와 신을 어떤 물체화해서 내 옆에 고정시킬 수 없고 그냥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사건 하나하나, 어느 것 하나 심판사건이 아닌 게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 때문에 구원받는다 하느냐? 십자가 사건 때문에 구원받는다 하지요. 그 십자가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심판한 사건이에요. 심판사건입니다. 심판이 아니면 하나님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요. 이렇습니다. 진리가 이래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는 점치지 마라, 무당 신을 믿지 마라, 말씀으로 우리를 건드리는 거예요. 건드리면 우리는 그 말씀의 내용대로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죄를 짓는 죄로 거론되면서 죄사함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구원은 심판 속에만 구원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는 방식이 모든 인간에게 몰랐던 숨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를 안다는 것은, 이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 어떤 기쁨보다 더 기쁨과 감사가 들이닥칩니다. 왜냐하면 죄를 아는 순간이 죄사함을 받는 순간과 동일한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죄를 아는 그 자리가 이미 용서받은 자리이기 때문에 그 외에는 다른 용서 받을 재간이 없어요. 우리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나 위하여’가 성사될 수가 없어요. ‘나 지키기’가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 믿고, 십자가 믿고, ‘하나님, 믿습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왜? ‘나를 위해서’가 들어가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왕이 되시는 바로 중보자,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셔서 진짜 중보자로서의 왕, 왕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그 예수님을 봐라,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께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봐라, 이 말이지요. 그분은 심판받았잖아요. 그분이 심판받은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한다고 받는 심판이에요.

그것을 눈치챘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유일한 자기 왕으로 모시는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그 하늘나라 안에서 더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기에 그 심판받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심판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 성도의 남은 인생은 ‘도대체 이 나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죄가 있느냐’를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서 계속 들추어지는 이 신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내가 아세라를 섬겼고 내가 바알을 섬겼다, 라는 사람으로 자인하는 거예요. 스스로 인정하는 겁니다. 이 아세라에 대해서 사람들이 유명하게 제일 잘 아는 대목이 열왕기상 18장에 나옵니다. 18장에 가면 바알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여러분이 또 잊을까 싶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립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남성이고 여성이에요. 바알신의 아내가 아세라입니다. 신이 남성 여성으로 인간들처럼 성이 되어 있다는 말은 그들이 번식을 하는 거예요. 번식을 하게 되면 그 자식 신들이 만들어지겠지요. 신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그리고 그 만들어진 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적절하게 농사가 잘되고 풍부해야 되거든요. 신 자신을 위해서.

따라서 바알신을 믿는 사람은 신이 신 스스로 잘 되기 위해서 하는 모든 자연의 움직임에 같이 끼어들어서 본인도 본인 저절로 잘 먹고 잘사는, 농사도 잘되는 그러한 생각에서 신과 인간을 일체화시켜서 그런 거예요. 내가 신이고 신이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내가 심판받고 내가 버려져야 마땅하다. 나는 쓰레기다.’ 그런 의식은 없어요. 근본적으로 나 잘되기 위해서 신을 이용한 것에 해당되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두고 “목사님, 우리는 예수 믿고 십자가 믿잖아요.” 하지 마세요. 이런 이야기를 바로 지금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돼요.

왜? 그게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죄와 나 상관없다고 돌리지 말고 죄라는 것은 죄다 다 영끌, 영혼 팔아서 다 끌어모으듯이 죄다 다 끌어모으세요.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누굴 욕해요? 윤 호중 욕하고 뭐 조국을 욕합니까? 우리가 그 자리에 가보세요. 마찬가지지요. 모든 경우가 그래요, 모든 경우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금 40대까지 난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아직 90까지 살려면 많이 남았어요. 50년 남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다 끄집어낸다는 것은 이미 용서하셨다는 거예요. 주님의 용서하신 그 십자가사건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 안에 혜택을 입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이야기를 오늘도 이렇게 보게 하시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 내가 심판했다.” 그리고 오늘날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우리를 심판하는 신나는 일, 우리를 심판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를 되새기는 그러한 사건들로 가득 찬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은 원래 없었는데 우리 인간들이 만들고 섬겼습니다. 다 나 좋으라고 믿었습니다. 이게 실상인데 우리 힘으로 우리 노력해서 하나님 믿었으니까 어떤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이 안일함이 이게 바로 악이고 죄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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