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34장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리 되어있지요.
예언이지요. 그러니까 잘못을 지적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이렇게 엉터리 목자가 꼭 필히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예수님만이 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영 아님을 나타내서 ‘아, 나는 영~ 아니구나!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라는 것이 예언의 실현이에요. 이게.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기가 죄인 될 사람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주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가 죄인 맞다라는 그러한 능력은 주님의 예언의 능력이 와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눈이 활짝 열리는 거예요. ‘아이구~ 내가 양이라는 값도 할 것도 없고, 목자라 할 것도 없고, 나는 화가 적당해야 되고 하나님의 분노가 저주가 적절하구나’ 라는 사실을 말씀에 의해서 되는 거예요.
어제 수요 설교 때, 타일 이야기했잖아요. 나전칠기 이야기했어요. 자개농. 자개농 할 때 일단은 바닥에 홈 해놓고요, 조개 같은 걸 붙이잖아요. 붙이고 그 바로 옆에 인접해가지고 또 다른 조개 문양에 맞춰 바닥 긁어내고 붙이고, 그래서 자개농은 전체가 전부 다 완전히 자개로 딱 덮여있듯이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예언의 말씀으로 완전히 빡빡하게 완전히 덮이게 하시는 거예요. 어디를 쑤셔도 말씀 아닌 게 없도록 그게 남은 자의 특징입니다.
자개농 광낼 때 콩기름으로 해요. 반짝 반짝 빛이 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빛이 아니고 빛을 담는 등경이 되는 겁니다. “저 봐! 내 솜씨를 봐!” 주님께서 우리를 들고 하시는 것은 니가 잘났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신의 솜씨를 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빛이 아니고 빛됨이에요. 빛됨. 빛은 우리가 그 존재성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을 우리가 소지하거나 파악할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주님으로 빛이 들어있는 등경들, 빛됨을 발견하지요. 성도들마다 다 빛이 들어있고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이라고 되어있으니까. 디모데전서에 나와요. 그 분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이 있어요. 디모데전서6장16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다만 우리가 만나는 것은 그 빛이 들어있는 등경,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지요. 내 안에 빛이 있다는 것이 말씀의 완성이 있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자부심을 우리한테 안겨줍니다. 나한테는 목숨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생명이 있다. 주님이 살아계시다 그런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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