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를 통해서 베드로가 하고 싶었던 것은 고난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교회가 고난에 대해서 뭔가 두려워하고 이것은 정상적인 사태가 아니야. 라고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는 너희들이 뭔가 정확하게 주님의 복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했는가가 의심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의 집부터 시작되는데 하나의 예를 들면 현재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방탕 하는 자, 호색하는 자들이 있다. 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지난번에 했던 공식을 한번 집어넣어 봅시다. 정말 성도라면 뭣과 뭣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습니까?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이 자아와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의 속죄 받은 용서받은 그런 자아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지요. 방탕하지 마라는 말이 딱 나왔을 때 왜 하나님 말씀은 방탕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자꾸 방탕 하느냐? 라고 고민한다면 이분은 결국 뭡니까? 전혀 지금 복음을 이해 못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여기 방탕하지 말고 이런 자는 호색하지 마라 했는데 왜 자꾸 나는 방탕하고 호색하느냐? 정말 나는 도대체 어떻게 나를 구원해내지. 라고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이 사실을 모르는 그냥 일반사람들,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어떤 복음을 갖는다든지 어떤 신학체계를 갖는다 할지라도 이것마저 마지막 때에 다같이 지워버릴 수밖에 없는 당위성, 정당성을 이유를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기 안정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여기서 자기 신학을 구축하게 될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구축이 진짜 하나님이 제시하는 몽땅 멸망하는 결국에 가면 이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재림하신다 해놓고 멸망하신다고 해놓고 왜 아직 멸망 안합니까? 이것 완전히 사기 아닙니까? 라는 의심이 든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엉뚱한 사고방식에서 안정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멸망한다는 것에서 약간의 의심을 품을 수도 있고 에라이, 이것 교회 사기 아니야, 벌써 온다 하고 몇 천년 지나갔어? 라고 그 어떤 반발이 나올 수 있는 그 근거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 안정성, 이 안정성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과 악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고 자꾸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나는 왜 못사느냐? 라는 쪽이라면 성도는 그것조차 날아가 버려야 돼요. 아, 주께서 그냥 주시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내가 선과 악을 싸우든 안 싸우든 상관없이 그냥 주시는 걸로 구원되는구나. 라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