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풀이 안되는 게 사건입니다. 사건은 되풀이가 안돼요.
새로운 인간은 말씀이 생산해야 생기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이란 없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말씀 안에 있겠죠. 그래서 말씀이 한번 들어오고 멈추는 게 아니고 계속 들어오는 이유는 옛 인간이 계속 유지되어줘서 거기서 계속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토해내야 되니까요.
옛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봅니다 그런데 새로운 인간은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탈구형 육신을 보여줍니다, 탈구형 육신. 예를 들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이 태어날 때 어디서 태어납니까? 구유에서 태어나죠. 아기 예수 태어날 때 구유에서 태어났는데 그 분이 왕으로 오셨잖아요.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이미 그 분이 왕이에요.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토해내는 방법이 뭐냐? 그 방법은 제가 아까 언급했어요. 예수님 스스로 자기의 몸을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죄인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그 일을 진행시킵니다. 그러다보니까 옛 사람이 자기를 피해자로 여기는 것과 주님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그들로부터 피해를 받는 진짜 피해자가 된,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가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들고 있던 무기는 뭐였습니까? 공중 속의 동굴.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지롱? 공중에 허공에 동굴이 있을 줄은 몰랐죠. 시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산성이시요’ 있잖아요. 자기 백성을 주께서는 빼내주시는 겁니다. 공중, 허공 속에 있는 동굴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거예요. 허공이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는 없는데 스데반 집사는 죽음으로써 여기 쑥 들어가는 겁니다. 쑥 들어가는 이 동굴 이름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이거 완전 미친 수준 아닙니까?
‘고마워요.’ 이게 무기입니다. 나를 당신네들 세계에서 추방시켜줘서 고맙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선택한 것을 일체 들어주지 않습니다. 박탈당해야 돼요. 왜? as if, 마치 ~인 것처럼 위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장할 때 그냥 위장하지 않죠. 성경말씀 보고 실천에 옮긴다고 위장하죠.
자기를 부인하게 해달라 할 때, 인간은 여기서 예측하고 예상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난 뒤에 내가 기대했던 그 내 모습은 아마 이럴 것이라고 예상했잖아요. 예상한 것을 십자가에서 함께 거꾸로 돌려버리면 ‘나는 나에 대해서 전혀 예상할 자격도 없구나.’ 이게 바로 자기부인이에요. 참 쉽죠잉? 참 쉽죠.
내가, 이 자리는 내 자리이고 이 자리에 있으면서 ‘나는 있다’ 하는 그 자리가 없어지는 게 박탈이에요. 누구한테 빼앗긴 거예요. 주님한테 빼앗기고 없는 자리에요. 그 없는 자리가 올 때 여기서 범사에 감사와 찬송과 그리고 기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 하지만 이게 자기부인이에요, 자기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결론은 한 가지에요. 성경에 나오는 자기부인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한 것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거예요. 주님이 자기 것을 할당시키고 분배한 거예요, 분배. 분배한 거예요. 화투는 주님 화투에요. 화투는 주님 화투이고 에이, 너는 장땡 먹어라, 하고 나눠주는 거예요. 예측도 못했죠.
고민하는 내가 박탈당해야 마땅함을 고민하면서 그걸 몰랐던 거예요. 고민은 어디서 했는가? 수치감에서. 내가 나를 보기에 마음에 안 들어서 생기는 거예요. 걱정도 그렇고 고민도 그렇고. 오븐에 빵을 굽다가 빵을 보니까 빵이 도대체 시커멓게 타서 못 먹는다. 순간 뭘 느끼겠습니까? 자기에 대한 원망과 수치감을 느끼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예상과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으로 하여금 충분히 선택하게 해요. 매일같이 선택하게 해놓고,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다 선택하게 해놓고 그것을 비 선택적 행위의 그림에다가 그걸 집어넣어버립니다.
사람이 있는 것을 믿는 건 믿음이라 하지 않고 그걸 신앙이라 하지 않고 그걸 신념이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신념이기 때문에 자기 밖을 못 벗어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신앙이라 해도 그것은 신념이 돼요. 아무리 해도 인간은 신념 밖을 못나갑니다. 그러면 내가 믿는 것도 나의 신념이에요. 다시 할게요. 신념이라는 것은 나에게 이득이 오는 것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이득이 오는 게 신념이에요.
신앙은 죽음 너머에서 오는 관계가 신앙입니다, 죽음 너머에서. 그럼 죽음 너머이니까 내가 여기 있는 한 죽음 너머를 못 보잖아요.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볼 수 없는 분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선물로서의 신앙입니다. 죽음 너머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나한테 적용이 되지, 나의 행함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함을 약 올리기 위해서 작은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네가 산더러 옮기라 할 때 조그만한 신앙이 있더라도 옮겼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못한다는 뜻이에요.
여호와는 용사죠. 용사라 하는 것은 전술적 군사 개념이에요. 그래서 3번째 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모든 그 현장은, 주님이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모든 현장은, 주님이 하신 공로, 예수님이 하신 것이 선물로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그 역사적 사건이 터지는 그 현장은 무슨 현장이냐? 전쟁터입니다. 전쟁터에요. 여호와의 이름이 군사적 용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용사이기 때문에 용사가 있다는 말은 용사가 용사답게 거기서 설치신다는 말은 뭡니까? 그곳이 전쟁중이라는 말이죠. 예수님, 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뾰로롱 고맙다고 도망칠 게 아니고 우리는 전쟁을 해야 돼요. 내 것이 박탈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전사,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향한 싸움. 정답은 주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에요, 주의 이름을.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주의 이름은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고요. 공중 속의 동굴이 보일 리가 있습니까? 허공 속의 동굴인데 없잖아요. 없는 것을 지키는 전사 또는 군인,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입니다. “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되면서 역시 ‘무(無)’에서 적이 호출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을 벌일 때 우리를 군인으로 부를 때 비로소 그때 적이 등장하는 것이지, 내가 나서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것은 돈키호테에요. 지가 망상에 빠져서 사는 거예요, 망상에.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나와 하나님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데에 실패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요. 모든 사고방식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요. 북쪽의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잡으려고 오십 명과 그 오십 명 대장을 보냈잖아요. 왜 그 오십 명을 보냈습니까? 엘리야를 뭐로 봤습니까? 엘리야는 우리가 있는 것처럼 자기 혼자 있는 줄 알았죠. 엘리야를 건드린 것은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갑자기 여기에 누가 등장합니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가지고 오십 명과 그 대장, 51명이 그 자리에서 몰살당했습니다.
엘리야는 박탈의 장이에요, 엘리야가 있는 곳이.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 전쟁을 하는 거예요.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들고 있어야 될 무기,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 무기가 뭡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선택지를 한다고. 내 하고 싶은대로 막 산다고요. 그게 무기에요.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하는 일대로 하면 되죠, 평소에 하는 일대로. 별다른 일 없어요.
누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누가 감사하느냐 하면 예상 한 게 아니고 여러분 자신들이 놀라야 돼요. 주께서 살아있다는 사실에.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주께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매일같이 순간순간 그것을 발견해야 되죠.
그렇다면 여호와 이름의 적은 누구입니까?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답변 나와야죠. 여러분의 적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죠, 나 자신. 그게 구약이 아니고 신약입니다. 신약에는 우리를 닦달내고 그래서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써 성령께서 찾아오셨다는 자체가 아군 되기 때문에 적이라는 것도 주의 이름이 하는 현장에서 진짜 적을 뽑아내는데 그 적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에 새삼스럽게 적이라는 것을 규정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I'm 쓰레기, You're 쓰레기. 쓰레기들이 모여서 쓰레기임을 드러내면 되잖아요. 쓰레기가 쓰레기 짓하는데 그게 어렵습니까?
자꾸 자기가 성도 티를 내려고 하니까 진짜 적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적이 되어버린단 말이죠. 쓰레기니까 쓰레기답게 굴면 되잖아요. 그 전쟁이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참 쉽죠잉? 나 혼자 쉬운가 모르겠는데......
‘자애로운 특별한 혜택’ 내가 다시는 물로써는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을 하나님의 긍휼과 자애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마음만 먹으면 주께서 옛날처럼 비로써 홍수로 다 죽일 수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자기가 브레이크 걸어서 멈추는 것은 주께서 은혜를 계속 주시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해서. 무지개가 어디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지상에? 무지개가 생기고 난 뒤에 지상에 주목한 곳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 때 그냥 브레이크를 막 건 게 아니고 가치 있는 희생제물다운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심판의 브레이크를 자진해서 stop을 시킨 거예요. 나중에 피의 가치가 다 끝나면 다시 심판은 그냥 지속될 겁니다. 더 혹독하게 줄 거예요. 지금은 브레이크 시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있는 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생기는 피가 있잖아요. 이것은 소용없습니다. 인간 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생긴 피만 유효합니다. 효과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제사라 하고 그 제사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새 사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제물로서 끼어들 때 흘려지는 피에요.
그걸 먹을 때 거룩한 쪽의 것을 먹는다면 먹는 그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피의 혜택을 입었다는 그 거룩 속성을 그대로 유지해줘야 되죠. 구약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서는 as if, 제사 지켰다고 구원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이 말씀을 지킨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그래서 마지막 때 종말에는 완성이죠. 예수님 홀로 다 완성했습니다. 그건 as if가 아니에요. 마치 ~인 것처럼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에요.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계속해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순환구조에다가 집어넣어서 우리가 예상하는 감사와 고마움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고마움이 나오게 만드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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