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란 본래 나인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된 것’우리가 이미 끝난 상태에서 우리 몸에 남아있는 본성 같은 거 있잖아요. 그 본성이 얼마나 헛짓하고 있는지 보여주시죠.
ⓐ마르크스가 말한 물질적 소외, 먹고 마시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돈으로부터의 소외. 이것은 정치적 소외죠, 경제적 소외.
ⓑ언어적 소외. 말씀이 말씀대로 되게 되면 이스라엘은 늘 완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말씀을 위반하게 되면 우상을 섬기게 되면 언약이 빠져버리면 말씀이 빠져버리면 그 안에 주의 말씀이 없어버리면 소외된 자기 언어의 세계가 여기에 채워지겠죠.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요. 말씀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들춰 보이느냐 그 기능을 해야 되는 거예요. 부재 →결핍 → 과제(사명).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떠맡은 기능이고 역할이에요. 부재→ 결핍→ 과제. 성령의 책망=“이거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다 했는데 왜 그래? 너 왜 그래? 다 끝났어!”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죽는다 하는 것을 순교로 봐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의 죽음은 탈(脫)-소유에요. 나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 탈-소유. 내 소유권에서 벗어나버리는 거예요.내가 죽었다 치고 나를 다시 만들면 이 다시 만들어진 나의 또 다른 영역은 내 소유가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나는 죽었다고 바라보는 또 다른 자를 만드는 게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주님의 십자가 자리에서 우리가 탈-소유를 바라보게 하도록 성령께서는이렇게 우리의 전부를 옮겨놓으신 겁니다. 그래서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주님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의반복,그걸 되풀이하는 거예요.
ⓒ나의 몸으로부터 소외. 소외가 너무 어렵거든 그냥 배제라 하세요, 배제.탈구형 몸, 내 몸에서 소외된 몸의 특징은 항상 피로감을 느껴요. 항상 피로해요. 말씀 듣겠다고 왔는데 오느라 모든 정력 다 낭비해가지고 말씀 들을 때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습이 내가 너무 싫어. 너무 싫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몸을 주시는가. 이게 종말의 현상이거든요. 종말의 현상이 아니고 우리 몸이 예수 믿고 튼튼해져버리면 주님의 완성은 신경도 안 쓰고 그런 데에 관심도 없고 나 하나 잘 챙겼으면 됐지 뭐. 자기에게 찬미하게 돼요. 주님의 완성에 소속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따로 옛날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악마한테 사주 받은 그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나 따로 나만이 따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에서 내게 소속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자기 백성이 그렇게 되는 것을 가만히 방치하지 않죠. 소속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소속을. 너는 너한테 소속이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소속이 나한테 안 되어버리면 소외라는 것이 아예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습니다. 소외란 원래 내 것이었는데 남이 가져가니까 내 돈을 남이 가져가고 나의 몸이 피곤하니까 내 원대로 뜻대로 안 되니까 짜증나고 소외감을 느끼잖아요. 그런데 원래부터 내 것이 없다면 소외감을 못 느낄뿐더러 감사해야죠.
주님이 자기완성을 축하파티 하겠다고 쓰레기 같은 우리를 가지고 거봐, 쓰레기잖아. 사물이잖아. 물체잖아. 물체에서 감사 나오잖아, 봐라. 주님 아니면 누가 그런 솜씨를 하겠어요? 마귀가 하겠어요? 본인이 쓰레기인 걸 알면 알수록 더욱더 감사가 나오니까 마귀는 많이 약이 오르죠, 많이. 약이 많이 오르는 겁니다.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나의 일 자체가 날아가 버리면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나의 소외에서 빠져나온 증거입니다.나의 죽음은 주의 일에 완성을 위한 하나의 조각이고 일부입니다.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빠져나올 때 빠져나온 이 일이 우리는 나의 일이고 싶은 욕망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또 있어요. 빠져나온 이것이 나이고 싶어.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쓰레기 같은 몸을 에라이, 죽을 때까지 돌려버리는 거예요. 끊임없이 돌려버리는 거예요. 빠져나온 내 모습을 가지고 내가 기뻐한다면 이것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지, 주님 일의 완성차원에서 기뻐하는 게 아니잖아요.타인의 등장은 우리에게 수치를 유발하는 거예요, 수치를. ‘아이고 뭐 집사님 찰밥 맛있긴 맛있는데 내가 아는 다른 집사님 거보다 맛없다.’ 곱게 먹으면 될 걸 그저 그걸 긁어가지고...... 긁는데 그걸 누가 긁게 했습니까? 누굽니까? 주님이 그렇게 했으면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면서 ‘내 일은 내 일이 아니다’ 버릇처럼 이래야 하는데 그러고 가만 있으면 되는데 ‘너 이리 와. 오늘 함 보자.’ 한바탕 또 싸우고 이렇게 되면 도대체가 지금 나는 나에게 소외 안 되려고 내가 생각한 표준적 나의 모습에서 육신이 안 벗어나려고 은연중에 잠복적인 그러한 원칙이 계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아다리가 맞아서 수치와 모욕감, 가만 있으면 안 되죠, 터트려야 되죠, 반발 이거 다 누가 하셨습니까? 주께서 하셨으니까 오로지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정답대로 주께만 감사할 뿐이죠. 감사하는데 돌아서면 그게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어서 이런 순환구조에서 벗어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이 말이죠. 본인의 소원이에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떠나지 않는 것도 너희를 위해서 성령 받은 사람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려주는 그 일을 위해서 사도 바울은 그것도 흔쾌히 감수하겠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