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가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계속적으로 자기 백성을 관리하느냐? 그 점에 대해서 요한 1서 2장 2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계시의 노선의 단일화로 인하여 이미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은 확정되었습니다. 주님 자신이, 자신이 진 그 죽음만이 유일하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이 십자가 복음, 일체 어떤 인간이 추가해서 더 보탤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살전5:14-15)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분명히 ‘형제’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령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왜 불쑥불쑥 가시처럼 교회에서 이런 사람이 계속 등장하느냐? 마음이 약한 자, 힘이 없는 자, 악을 악으로 갚는 자...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 존경받고 싶은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그렇게 시급하게 느껴진 그 세상에서, 허접한 세상에서 물 없이 양식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로의 이끔, 이끄는 그 노선을 계시의 단일화 모습으로 알려준 겁니다. 애굽에서 바로 약속의 땅에 보내지를 않았어요. 중간에 뭘 거칩니다. 중간에 거쳐야 돼요. 네가 환경 바뀜을 이해해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그 환경 바뀜을. 인간 바뀜이 아니고 환경 바뀜을. 환경이 바뀌어서 구원받거든요. 이 세상은 어두움이라고,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에 빠져있다고. 나오라,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애굽에서 일어나는 그것과 약속의 땅의 차이점을 두시는 이유는, 바로 공통자리, 공동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동의 자리. 주님께서 그 당시에 가르치는 자, 사도, 아직 말씀이 확정되지 않았으니까 선지자, 사도, 교사,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르치는 ‘형제’라고 구성시켜 놓았던 그 공동의 자리가 있어요. 세상은 선악 지식으로 가득한 세계에요. 생명 나무가 없는 쪽으로 추방된 세계입니다. 주님께서는 공동의 자리, 공통의 자리를 마련해 가지고 선악 체계가 없는, 생명 나무만 있는 세계로 우리를이동시킨 겁니다. 데려간 거예요.우리 속에 있는 그 선악 체계를 토해버린 겁니다. 주님과의 공통의 자리, 주님 자체가 생명 나무거든요. 주님 자신이 생명 나무가 되어가지고 우리와 공동의 자리를 마련하니까 예수님에게 붙잡힌 바 된 자체가 뭐냐? 자유를 얻은 겁니다. 이게 빛이에요. 너희들이 귀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형제라고 불림을 받은 그 자리,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구성시킨 그 자리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여기서 주님께서는 광야 시절처럼 악은 악으로 갚지 마라, 건방 떨지 마라, 잘난 체 하지 마라, 세상 것에 주눅 들어서 벌벌 떨지 말고, 또는 세상에서 좀 잘되었다고 그걸 자기 자랑거리로 삼지 말고, 라는 그러한 계시노선의 단일화를 추구하시면서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빛을 알아? 너희들이 복음을 알아? 복음을 안다면 왜 악을 악으로 갚냐, 인간아!” 너는 너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있는 자리거든요. 그러면 주님의 자리는 뭐냐?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 그 사이를 벌려 놔요. 마치 아코디언처럼 벌려놓습니다. 근력 키울 때 스프링 잡아당기는 것 있지요. 예수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두 쪽으로 벌리는 거예요. 스프링 근력운동 하듯이. 쭉쭉, 십자가 죽은 예수님과 부활한 예수님, 그 사이에만, 그 사이에만 구원될 수 없는 자가 구원될 수 있는 비밀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 갈 수 없는 사람이 천국 가는 그 비밀이 잡아당기는 데 있어요. 죽었던 예수님을 입자로 보고요, 입자,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도 입자거든요. 그러면 그 사이에 뭐냐? 예수님은 죽어 계시기 때문에 그 사이에 흐르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언약, 파동이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에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선택해요. 사람들이 이걸 좀 궁금해 해야 됩니다. “목사님, 주님이 가룟유다는 선택해 놓고 왜 버리십니까?” 그러한 의문점에 답변이 돼야 돼요. 그 답변이 뭐냐? 7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입자적 성격을 가질 때 이것은 바로 악마가 입자인 것을 드러내는 모델로서 인간은 다뤄지고 있다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의 배후에 있으니까 인간의 입자성은 모두 악마에서 주어진 입자성이에요. 악마의 입자성에서 인간은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아실현이 최고 목표고, ‘남 다 내 앞에 꿇어!’ 이게 뭐 인간의 사는 본성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지기 싫어해서 그래요. 안 지려고 교회 가고, 안 지려고 절에 가고, 안 지려고 종교를 얻는 거예요. 그 종교의 밀림 속에 숨어버리는 겁니다. 안 지려고, 스스로 안 부끄러워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옆에 사탄을 둬요. 악마를 둔다고요. 일부러 선택해서. 악마가 어떻게 입자 노릇을 하는가 보라는 말이지요. 결국 가룟유다는 하나님이 건지지 않습니다. 버림받아요. 왜? 끝까지 자기 입자성을 못 버리고 ‘내가 스스로를 배신하다니. 나는 죽는 게 마땅하다’ 자살해 버렸잖아요.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성령이라는 흐름이 와요. 파동이 온다고요. 성령이 오니까 마치 수영선수가, 박 태환이지요, 박태환이 50미터, 짧은 거요, 긴 것 말고, 짧은 수영 할 때는 물속에 뛰어들자마자 잠영해 버려요. 잠영, 물 위로 나오지를 않아요. 선수 없어요. 물속에 들어가 있어요. ‘선수 어디 갔지?’ 물속에서 헤엄쳐야 돼요. 물속에 저항이 없으니까. 나는 이미 죽었고. 입자가 죽었고, 입자가 죽었으니까 이것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파동이 되는 겁니다. 주인공은 주님이 되고 나는 그 주님이 움직이는 하나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거예요. 잠영으로서 이미 물속에 잠긴 채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를 통과하게 되는 거예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나하고 공동의 영토가 된 이상, 자리가 마련된 이상 난 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는 이 복이나 받아라, 인간아!” 그 사실을 반복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주입 시키는 거예요.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어요. 이미 죽었으니까요. 이미 간음하고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떠날 수가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예수님과 공통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천당 가라고 성령이 온 게 아니고 주님에게 주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 어떤 공로의 효과가 이 정도다,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미천하고 죄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으로 삼았던 겁니다.
끝으로 전도서 3장 18, 19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개보고 개라 하는데 그게 섭섭합니까? 그게 섭섭해요? 아까 기도하신 그 내용처럼 개를 개로 들춰주시는 이 복이요, 이게 십자가로, 입자로 죽으신 주님, 그 앞에서 들통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부활의 입자가 되는 그 과정은 우리 소관 아닙니다. 주께서, 성령이 오셔서 주님이 건너가셨던, 잠영하신 그 파동, 힘이 그대로 우리에게 꽂히니까 우리는 입자의 자격이 아니라 주님의 입자에 속해 있는 형제의 자격으로 주님의 능력이라는 파동의 효력을 선물로 우리가 받은 겁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바로 이것뿐입니다. 주님과 우리하고 공동의 자리를 함께 하기에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었다는 이걸 통해서 주님께만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