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질성(남이 생각하는 나로 구축된 나)은 항상 형식으로 구축하게 돼있어요. 형식이 하나님의 정체성, 진짜 내가 누군지 아는 정체성 앞에서 녹아져야 됩니다.
ⓑ성령은 누구 마음이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주면 성도는 나중에 껍질만 남아요. 안의 내용은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미리 경험케 하는데 아직 우리는 다윗처럼 동질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체성과 치열하게 싸움 벌이고 있습니다. 정체성은 내 마음이 아니고 누가 집어넣은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체성에 눈 돌리지 않게 돼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다 하지만 사울에게 쫓기는 게 아니에요. 다윗은 진짜 다윗 되게 하시는 주님한테 쫓기고 주님의 원수, 주님과 싸우는 자는 본인이 고집하는 본인을 놓지 않기 때문에 그걸 쥐고 있기 때문에 주님과 날마다 싸우는 겁니다. 사울이 적이 아니고 내가 나의 적이 되는 거예요. 나의 정체성이 적이 되는 겁니다.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성도가 성도라 하면 안 돼요. 성도가 자기를 믿는 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마을이 이것 때문에 갈라졌거든요. “이근호 목사는 예수도 안 믿는다.” 이것 때문에 갈라졌어요. 그 사람이, 예수 믿느냐고 물었어요. 내가 답변 안 했어요. 그런 건 나한테 묻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는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갈라졌거든요.
ⓕ주님께서 사탄을 우리 주변에 계속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증명하는 것은 전부 가짜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동질성에서 못 벗어납니다. 동질성이 나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 남들의 요구사항, 남들이 인정하는 것이 솜사탕처럼 뭉쳐져서 그게 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아무 내용이 없어요. 남들이 인정한 대로 그냥 따랐기 때문에 주변의 남이 뭘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그때마다 나가 변동되기 때문에 진짜 나는 몰라요.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이렇다. I am ⏿. 우리는 이 네모에 들어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의 소관이에요. 신약에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는 여기에 우리를 죄인으로 집어넣는다니까요. 죄인으로 집어넣을 때 감사해야 돼요. 왜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을 알기 쉽게 하면, 앞에 뭘 집어넣으세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아닌 그분이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그러면 이런 정체성에서 그 다음에 기능이 나오는데 기능은 나의 동질성에서 나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이 나한테 심어준 체면과 명예에 따라서 행동을 조절하는 그런 기능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심어준 정체성에서 나온 기능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기능이 나옵니다. 메시아의 기능이 나와요. 성도는 안에서 메시아의 기능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 해당되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운명이라는 게 필요치 않아요. 죄인에게 운명이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할 때 주님이 보시기에 죄인으로 규정해줄 때 이렇게 들어오신 예수님의 메시아 기능 자체가 우리의 미래가 되고 우리의 운명이 되고 우리의 현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도 되고.
ⓗ예수님을 사탄만 지켜보는 게 아니고 모든 인류와 그 당시 유대사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 지켜보는 거예요. 내가 원했던 오실 메시아 맞는지 자기 기준으로 정립된 게 있고, 그 기준에 준해서 예수님을 파악하고자 한 겁니다.
십자가질 때까지 일반사회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시험을 계속 받습니다. 일단 대장이 사탄이니까 사탄한테 시험받고 난 뒤에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테스트가 예수님 십자가질 때까지 계속해서 주변의 테스트가 이어지는 그런 삶을 예수님은 사시는 거예요.
ⓘ만약에 성도에게 정체성이 들어왔다. 십자가의 정체성, 예수님의 정체성이 들어왔다. 그러면 그걸로부터 해서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사탄이 주는 시험에 성도는 시달리게 돼있습니다. 끊임없이. 시험의 기준이 두 가지인데 사탄이 이야기하는 메시아 상이 어떤 메시아 상이냐? 이것이 바로 땅을 위한 메시아에요. 이 땅은 인간의 생존 터전이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쫓겨나서 땅의 토지를 갈아야 되죠.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사탄에 매여 있으니까 땅을 위한 메시아가 오기를 원해요. 땅이 경작이 안 되면 자기는 못 사니까.
땅은 쫓겨난 결과성이거든요. 인간은 원래 토지에서 농사지을 필요 없었어요. 쫓겨난 존재임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이 땅에서의 삶이에요. 땅에서 살다 결국은 죽게 됩니다. 죽어서 흙이 되지요. 죽어서 흙이 됨에도 불구하고 땅에서 생존하겠다는 말은, 땅에서 죽음이 일어나는 그 취지에 대해서 극구 저지하고 탈피하고 거기서 발을 빼려고 애쓰는 그 노력 속에서 뭐냐 나오느냐 하면, 악마의 본래의 뜻이 거기서 돌출되게 돼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살아야지, 하는 그 말 속에는 사탄의 요구조건이 함유돼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지. 결국 죽는데. 죽을 때 죽더라도 살 때까지 살아야지. 거기에 사탄이 뭔가 의도가 있어요. 그러면 묻지요. “왜 죽어야 될 인간이 삽니까?” 그건 묻지 말고. 하거든요. 그러다 더 화가 나면, “너는 죽고 싶어?” 하고 반대로 공격해 들어오지요.
이런 인간들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땅에다 죽는 이유를 집어넣어요. 죽는 이유가 언약궤입니다. 그러면 땅+언약궤=하나님 언약의 실현, 상태가 돼요. 그런데 언약궤 특징은 캄캄한 데 있어요. 이스라엘 성막 동영상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아 씨가 녹취 다했는데. 이상현 목사님이 통역했거든요. 거기 지성소까지 들어가요. 그 지성소가 캄캄해요. 그래서 다윗이, 너무 캄캄한 데 계셨습니다. 이제 환하게 나오셔야지요. 그래서 성전 구상하게 된 겁니다. 캄캄하다는 것은 스스로 자폐적인 것, 밀폐되고 폐쇄적인 거예요.
왜 언약궤가 어두운 곳에 있느냐? 거기는 정말 캄캄해요. 조명시설이 지성소에 있지 않고 커튼 앞에 성소에 있기 때문에 지성소에는 조명시설이 없어요. 왜 캄캄한 데 계시느냐? 땅의 정체성을 어느 쪽에 있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이 땅에 섞였다고 보면 제일 쉬워요. 하늘과 땅이 끊어졌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이란 이름으로 하늘의 요소를 땅에 집어넣어버렸어요. 그게 언약이고 언약이 오게 되면 이 지상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더라도 노아언약에 의해서 전부 물에 잠겨버려요. 엄청난 저주고 심판인 겁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갈 때 뭘 속이고 남을 해코지해서 멸망한 게 아니에요. 땅 자체가 멸망의 요소의 표현들이기 때문에 땅의 열매기 때문에 땅과 더불어 멸망하는 겁니다. 노아 홍수가 올 때 온 땅을 덮었다는 말이 뭔 뜻일까요? 물이 안 덮친 곳은 한 군데밖에 없어요. 방주 안 밖에 없어요. 방주가 동동 뜨는 겁니다. 뜬다는 것은 다 잠겼다는 거거든요. 이것은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질 자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왜냐하면 인간은 땅에 밀착해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땅은 호소하게 돼있어요. 죽음을 내뿜게 돼있지 피할 곳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산들아, 바위들아, 나를 덮쳐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습니다. 피할 곳이 없으면 안 피하면 돼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우리가 땅 없이는 못 산다는 근원적인 자기 정체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과 인간이 한 통속이에요. 왜냐하면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땅은 흙으로 돼있고 인간도 흙이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땅이 저주받으면 곧 그 땅만 믿고 사는 우리도 같이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시편은 다윗언약이거든요. 언약궤가 함께 있다는 것을 다윗을 주목합니다. 사실은 다윗이 주목하는 게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다윗이 자기의 동일성에서 자아성에서 진짜 자아를 찾아가는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작업에 다윗언약이 여기에 개입하게 돼있습니다. 그 언약이 개입하면서 다윗은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나는 죄인으로 출발했다고 하죠. 그렇게 되면 다윗은 저주받은 땅에 하늘의 언약과 유일하게 만나는 언약지점이 돼요. 그러면서 본인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과 언약의 죽음과의 결합에서 바로 천국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하늘에 올라갔다고 천국 나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 올라가봐야 우리 동질성, 우리 자아성으로 올라가봐야 올라간 그것이 다 허무해요. 허망하고 허구라니까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생 다음에 저 생 있다고? 그건 망상입니다. 없어요. 그런 논리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생이라고 규정한 그 규정을 내 몸에서 규정했기 때문에 내 자아성에서 규정했거든요. 남들에게 들은 이야기 있잖아요. 이 몸은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좋은 데 가야지, 편히 있어야 한다는 그런 계산을 정체성에서 하는 게 아니고 먼저 있는 내가 여기 있음에서 출발하거든요.
나의 있음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내가 예수님께 옮겨와서 예수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내가 가고 싶은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예수의 나라로 옮겨가면서 거기서 나가 손실돼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손실되면서 내 꿈과 내 소망과 믿음도 같이 없어져버려야 돼요. 그야말로 주님 앞에서 우리는 치매 환자가 돼야 됩니다. 껍질만 남아야 돼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와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왜 법궤란 물체로 왔을까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물체로 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옆에 가까이 해서 그리고 기도 간절히 해도 자기 막이 형성된 이상은 절대로 내가 나를 지켜야 된다는 정신이 투철한 이상은 뚫어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뚫어내지 못하면 주의 구원이 안 되지요.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비책을 쓸 수밖에 없지요.
약속의 약속됨은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불가능한 조건이 구비된 그것이 약속의 요소가 된다는 걸 믿는 거예요. 내가 안 되기에 더욱 더 약속답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함은 불가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이 스며든 사람과의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의라고 합니다 의라는 것은 관계거든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이 다니는 그거라니까. 의를 소유할 때 내가 의인 되는 게 아니고 그 의 앞에서 내가 죄인이 될 때 죄인되게 하시는 근원적으로 죄인 되게 하시는 그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주님께선 우리한테 다 이루었다고 하거든요. 할 게 많은 것, 미완료지요. 완료가 계속 싸워나가는 거예요. 싸우면서 우리 안에서 나로 인하여 주님이 심히 가슴 아파하고 주님이 괴로워하는 요소가 우리 육의 죄를 통해서 계속 쏟아져 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그 일을 이제는 적들이, 사탄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유도하지요.
그럴 때 여기서 내가 생각한 메시아와 주님께서 생각한 메시아가, 특히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이게 완전히 격차가 나요. 격차 나는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지금부터 세례요한 이야기를 좀 하겠어요. 세례요한은 묵시적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묵시적과 역사적 차이가 뭐냐? 역사적이라면 서서히 하늘나라가 되는거라면, 묵시적은 돌발적으로 되는 것.
세례요한이 자기의식이 변하려면 뭘 느껴야 되느냐 하면, ⓐ자기라는 물체와 사물과 예수님이란 덩치, 육체 사이에 어떤 틈을 알고 있어야 돼요. 첫 번째는 알아야 된다. 두 번째는 ⓑ그걸 뛰어넘을 가능성은 나에게는 없다. 이걸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만 증거 하게 돼요.
건널 수 없는 갭을 성령 오셔서 알게 하실 때 이 갭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갭에 그대로 덮치는 거예요. 그 갭을 가지고 계속해서 예수님만 증거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이렇게 성립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 부정적이니까 우리는 주님의 언약을 위해서 부정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더불어 동반해서 나와 줘야 되지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없어요. 얼마 전에 누구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자꾸 죄를 떼어내려고 합니다. 죄를 떼어내면 의도 같이 없어져요. 죄가 있고 그 죄에서 벗어날 길이 전무함을 내가 알게 될 때 그 안다는 것이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내 식으로 내 방법으로 나라는 물체를 천국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할 때 그게 바로 바깥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자기부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자기 미움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바람 같이 불 같이 오거든요. 물체가 성령을 받게 되니까 치즈처럼 다 녹아버린 거예요. 나와 너를 가로막는 그 막이 성령에 의해서 완전히 녹아져버린 거예요. 이제는 겁도 두려운 것도 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할 때 저쪽에서 돌 들고 던졌거든요. 돌이란 물체고 던지는 사람도 기계, 물체거든요. 맞는 스데반 집사도 물체로 보이지만 스데반 집사는 이것이 성령께서 조장한 환경으로 본 거예요. 예수님이 만든 물체로 배치된 예수님이 계시는 하나의 상황 극으로 본 거예요.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십자가 사건이 끝난 게 아니고 계속해서 그 다음 사건, 그 다음 사건 속에서 그게 실존화 되고 현존화 돼요. 십자가 사건이 있는 그곳에 주와 함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물체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혼자 노시는 무대가 돼요. 어디든지 주님이 성령이 함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의가 발생되는 장소에요.
본인이 usb 되면 돼요. 그러면 그 현장이 종말이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본인이 설칠 필요 없어요. 주님이 다루시는 마귀들이에요. 아주 충실한 마귀 하수인들이 와서 성도 존재증명을 해줘요.
이게 고난 받은 종의 모습으로 가게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새로운 실존을 드러내죠. 지극히 작은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이 한 것과 자기 사이에 막이, 갭이 없는 거예요.
다윗부터 신약 사이에 다윗에게 주어졌던 모든 내용이 반드시 중간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다시 시편을 봅시다. 나라는 말이 나오고,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전부 다 십자가 안에서 바라봤을 때 인생사는 걸 돌아보니 그들의 설치는 면면이 다 보이는 거예요. 그들은 허사를 좋아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 포함돼있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포함돼있는 거예요.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나는 죽고 이 말씀에 의해서 죄인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기 죄인에게 하는 지적이 곧 나에게 하는 지적이에요. 그래야 우리가 죄인 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와 상관없고 애먹이는 저 사람한테나. 이러면 안 돼요. 주님의 영광을 누가 변하게 하고 욕되게 합니까? 우리가 욕되게 하고. 누가 허사를 좋아합니까? 우리가 헛된 걸 좋아한다는 인식을 성령을 통해서 막이 열린 채 나 때문에 고난 받는 영, 나 때문에 대신 죽은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다윗이 고백했던 현장이 되고 십자가에 일어난 현장을 마음껏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모든 생각이 동일성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그건 자기 물체거든요. 참 폼을 형성한다는 것, 폼 재는 것, 주님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깊숙한 노골적 폼이 점점 더 강렬하게 나와요. 그런데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주님이 더 감사해요. 왜? 이렇게 고집부리고 거의 마귀에 근접한 마귀라고 밖에 할 만한 인간을 다 이루었다는 것으로 쳐들어오니까 성문을 열어버리니까.
그래서 선지자가 중간에 할 것은 뭐냐 하면, 결국 이스라엘은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있으면 그게 소유의 대상이 되거든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방법은 망하라고 기도하는 외에는 없어요.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방법은 자식을 망하라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식 듣는 데서 하면 안 되고. 안 듣는 데서 제발 죄인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기에 망하는 것이 진짜 내 모습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망하면 망할수록 고마움과 감사 외에는 나올 게 없습니다. 모든 게 범사에 감사하고 고맙지요.
다윗의 이런 이야기는 율법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전부 다 우리를 쑤시는 말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6절) 여기서 나에서 갑자기 ‘우리’로 바뀌었지요. 나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 된 우리에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그 우리는 베드로, 요한 등 열두 제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받고 난 뒤의 열두 제자에요.
성령을 받아서 갭을 뛰어넘어서 우리는, 주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고난 받는 그것이 바로 의의 근거임을 분명히 해야 돼요. 내가 있는 게, 내가 잘하는 게 의가 아니라 나는 죄밖에 없는데 죄에 예수의 피가 보태줘서 그게 의가 되는 겁니다. 죄+피=의,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넘어가는 거예요.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공식이 그냥 우리 앞에 머물러있으면 그건 하나에 내가 외울 공식이 되고 예수님은 물체가 돼버려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그걸 안다고 돼버려요. 안다, 이해한다, 소유한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자기를 물체화 시키는 겁니다. 자기의 폼을 만드는 거예요. 자기 폼을 만들고 나는 예수도 믿고, 언약도 알고, 십자가도 알고, 그렇게 테두리를 쳐요. 요게 바로 나라는 겁니다.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건데? 그것 다 잊어버릴 텐데.
삶을 통해서 우리는 죽도록 망가져야 돼요. 결국 어떤 인간도 죽을 때는 망가진 모습입니다. 아무리 화장발이라도 나이 구십 넘으면 화장발 나오는 사람 별로 없어요. 이미 피부가 화장을 밀어냅니다. 화장하면 다 떨어져나가는데. 결국 인간은 누구나 추하게 늙어요. 그런 의미에서 덜 추할 때 죽는 것도 복이에요. 별 할 일 없다 할 때 비행기 타고 죽으면 보상금이나 자식들한테 물려주면 최고지요.
별 할 일도 없는 사람이 살아있으면 이거는 권태란 지옥에서 헤맬 수밖에 없어요. 맛 집 찾아가도 맛 하나도 없고, 요리사가 뭘 넣는 것도 맛을 더 잃어버리게 해. 모르면 그냥 막 조미료 친 것 먹으면 되는데 이건 뭘 넣고 어떻게 만들고 분석하는 건지 음식 먹는 건지 분간도 안 되고. 점점 더 안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어요. 대충 먹으면 되는데 너무 똑똑해서 맛 변별 다하면 안 되거든요.
보세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절) 이걸 지키려 해도 아무도 못 지킵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하면 비록 포도주가 있고 곡식이 풍성하더라도 그게 기쁨의 요건이 안 되지요. 풍성한 그것에 나는 마음 빼앗겼고 풍성한 돈과 재산에 내 혼이 다 나간 이 죄인을 주께서 건너와서 구원해줄 때 그 돈보다 고난 받는 종이 나에게 더 기쁨이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에 시나리오에요. 결국 구원의 시나리오인데 이것은 다윗이 지키는 게 아니고 다윗언약이 지킵니다. 다윗도 이렇게 못 살았어요. 그러면 다윗 그 다음에 다윗 자손, 선지자들에 이어져서 세례요한도. 세례요한도 나중엔 정신 차렸겠지요. 이게 아니구나.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십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소경된 자가 눈 뜨고 죽은 자가 살고.” 이게 뭐냐 하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근거가 있는데 그 근거가 뭐냐? 예수님 자신이 채찍 맞음이에요. 고난이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언약이에요. 우리의 행함이 거기에 섞여 들어가면 안 돼요. 오직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건너가는 것처럼 그 어린양이 우리 내부에 의식으로 자리 잡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집어넣는단 말이죠.
8절에 보면,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여호와가 바로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내신 언약을 본인이 스스로 다 이루신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 백성 만든다는 시나리오가 시편 4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 받아서 증거 할 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얌체 같이 살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갈수록 더욱 더 절실하게 느끼지 하옵시고 노출되게 하옵시고 파악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무 행동도 우리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서 작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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