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엿같은 인생

아빠와 함께 2021. 12. 10. 12:29

모든 말씀 뒤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날 죽이는 폭탄으로 생각하지 않고 더욱 더 날 살려내는 말씀인 줄 알고 성경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는단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주님이 활성화돼버리면 주의 힘, 죽어도 상관없다는 정도의 대단한 힘이 발휘돼버리면 안 죽으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그러나 그렇게 밀려서 밀릴 수 있는 주님이라면 애초부터 성도가 아닙니다. 그건 아주 고집스럽게 주님께서 네 열심보다 내 고집이 더 세다고 쳐들어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 기쁨에서 생생하게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는 기쁨으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있게 되지요.

성도는 뭐냐? 전쟁하기 전에 여호와의 주님의 적 편에서 꼼짝 마라, 하고 볼모로 잡혔던 포로로 잡혔던 우리가 주님의 전쟁의 여파로 해서 다시 주님 품으로 오지요. 그럼 여기에 경로가 있어요. 악마에서 살다가 주님에 품에 사는 경로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경로에서 본인이 한 게 있어요, 없어요? 본인은 한 게 없지요. 본인이 한 게 없다는 식으로 이 경로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이 있어요.
성도가 기쁨과 자비와 사랑의 기쁨으로 넘쳐서 내놓는 기쁨과 인자하심과 사랑을 형성하는 그 내용에 담기는 단어들, 이런 것들을 내놓는 게 있어야 돼요. 내놓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안 했는데 우리 주님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건져냈다는 그 내용이 실려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 누구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의 거저주심이 주님께서 이런 고생을 했고 이런 희생을 했다는 그 이야기만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엿 같은 인생” 욕하는 것 아닙니다. 왜 엿 같은 인생이란 그런 제목을 다느냐 하면 어릴 때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가잖아요. 어린애들은 집안에 있는 쇠붙이나 병을 주게 되면 엿장수가 달콤한 엿을 주잖아요. 그 엿 먹는 기쁨이 있어요.
어떻게 바꿔치기하는 기쁨, 내 행함 부정하고 주께서 주시는 달콤한 엿 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긍휼을 받거든요. 내 노력과 주님의 자비를 바꿔칠 때 엿 같은 인생이에요. 기쁨의 걸음걸이를 걷는 거예요. 지금 그 노래가 시편 21편 노래에요. 다윗이. 다윗이 지금 얼마나 혼이 납니까. 나쁘게 말해서 다윗은 그야말로 엿 같은 인생, 사울에게 억울하게 쫓기는 인생인데 쫓기는 이 모든 프로젝트, 프로그램은 어디서 나왔단 말이에요? 주님의 힘에서 그것도 영생,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 되시는 분이 양을 인도해서 내 상이 넘치나이다. 평화로운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그 과정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주께서 은혜와 내가 행하지 않은 내가 공들이지 않은 거저주신 은혜, 우연적인 은혜, 자비가 넘치는 그것을 기뻐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주의 원수가, 이겨서 이렇게 달콤한 엿을 먹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어른의 마음이 아니고 내 자랑질하는 마음이 아니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죠. 어린애들은 자기가 하는 프로젝트보다 엄마의 소리가 더 기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은 모든 되어진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됨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견디지요. 로마서 5장에 보면 그걸 연단이라 해요. 불순물을 제거하는, 진짜 아픈 일이에요.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조치가 뭔가를 확인 차 40, 50, 60까지 살고 있는 겁니다. 그 인생사는 동안 복음을 못 받아들인 것은 뭐가 확인됩니까? 처음부터 저주받도록, 멸망되도록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뿐이에요. 주님의 기쁨이요. 주님은 인간의 말을 안 듣습니다. 확인절차 상 피조물을 다루고 있을 뿐이에요.

마태복음 13장 44절이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자,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이란 뭐냐? 천국은 하늘 위에 있는 게 아니에요. 지상의 표면, 파동의 간섭효과로 이미 온 거예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천국은 이미 이 지상에 오신 거예요. 왔는데 무질서가 증식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질서 잡힌 법체계에 모세 법에 의해 체계에 인간의 합리성, 모든 이성을 다 동원해서 산뜻하게 담아놓고 체계 있는 그 구조에 간섭의 흔들림이 시작된 겁니다. 파동의 흔들림이.따라서 그 땅, 토지를 비싼 돈 주고 사는 천국의 파동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다 알아버려요. 뭐 주님의 뜻을 안다는 뜻이 아니고 반대구나, 라는 것, 우리를 지적하는구나. 따라서 우리는 주의 뜻을 다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시킨 대로 하면 되는구나.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이 하신 말씀에 보조 맞춰서 그 현장에 하라면 하고 가라 하면 가면 돼요.

게으르고 악한 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것을 나의 것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나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였어요. 나의 것이 있으니까 뭔가 주어지면 자기 소유로 삼아서 결정과판단과 선택을 누가 합니까? 본인이 하는 거예요. 이걸 내가 땅에 묻을까, 말까? 주님께서 말하기를 그렇게 결정할 테면 이자나 받지.
그러니까 나가 있는 어떤 결정도 천국에서는 받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가 천국 비유에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어떤 자를 내쫓는가를 통해서 천국이 증명된다는 거예요. 천국이 어떤 자가 들어온 자가 아니라 어떤 자가 못 들어오는가를 보여줌으로서 천국이 천국답게 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의 것이 있는 사람은 결단코 내가 지옥으로 밀어 넣겠다는 겁니다. 나의 것, 내 교회, 내 가족, 내 돈, 내 것이 있으면 무조건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두 개의 ‘나’ 중에서 이쪽 나를 버리는 식으로 나가 등장해요. 동반해서. 하나의 무대에 주인공이 졸지에 둘 돼버린 거예요. 기존 주인공은 마귀한테 속한 주인공이고 새로 등장한 주인공은 주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주인공이고.
그러니까 두 주인공이 한 무대에서 공연해줘야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차이 남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여분 또는 잉여. 없다고 여겼는데 불록하게 새로 생긴 것, 주께서 작용했더니만 내가 예상도 못한 볼록한 게 등장하는 여분의 것, 나의 눈과 코와 이성 이런 것 다 가로막아버리고 다시 등장한 여분의 것, 차이 남. 이 차이를 세상의 갈등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파동의 간섭효과.그 차이만 알면 되는 거예요,  성도는 뭔가 업적을 이루고 나라 세우고 그 짓하지 마시고, 교회 세우고 하지 마시고 내부의 차이에요. 내부의 차이를 그걸 그대로 바깥에 드러내는 거예요. 나 이렇게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 주님 오셔서 내가 몰랐던 주님의 활동하심을 이렇게 토해놓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까지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지요. 그래서 이방민족이 난데없이 밀려갔습니다.이제 누구 차례입니까? 이제는 약속의 땅에 걸 맞는 약속의 백성, 달리 할까요? 준비된 왕에 맞는 준비된 백성만 골라내기 위해서  차이 나는 자기 백성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시온의 딸, 다윗언약에 해당되는 백성을 씻어주는데 뭐로 씻어주느냐 하면 여기에 심판하는 영과, 성령이죠. 소멸하는 영.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십자가를 다녀가면 성령이고, 십자가 안 다녀가면 성신이라 했지요. 이미 완성의 맛을 보면 성령이고 아직 미완성의 모습이 있으면 성신이고. 성신은 성령이 되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지요. 십자가 터치하고 난 뒤에는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 돼버립니다. 성령이 돼버리면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함이 돼버려요. 그럼 죽어 마땅한 성도 안의 나는 뭐냐? 주님의 나가 그대로 거기에 꽂히게 되는 겁니다.다시 표면층에서 사람들은 나를 나라고 이야기하고, 두 개의 나가 아니고 하나의 나입니다. 나 말고를 너라고 이야기해요. 표면층에서 나, 너.

그런데 주님께서 나로 오셔요. 나는 하나님이다. 나로 와버리면 기존의 나는 뭐로 변하느냐 하면 전부 다 it, 그것으로 변해요. 하나의 사물이죠. 노골적으로 말해서 기계가 돼요. 모든 인간은 기계와 기계의 만남이에요. 욕망과 욕망의 만남이에요. 그 기계가 무슨 기계냐? 욕망하는 기계에요.

제가 인생은 농담이라 했거든요. 전혀 진담 아닙니다.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농담이에요.그 진지한 심각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 인생을 박살내는 그것이 진지함이고 심각함이고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는 것은 자기 것 지키는 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 아니고 시킨 대로 돈 날린 게 충성된 종이에요. 그래 내 시킨 대로 날렸구나. 아이고, 잘했다. 이 엿 같은 인생아, 너 참 잘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입자에요. 기계니까 실체가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흐름으로 오십니다. 이 실체를 강력한 바람으로 흔들어버리죠. 성령의 바람으로. 흔들어버리면 실체라는 자체가 내가 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내가 붙잡고 있는 나는 전부 다 망상이고 허상이에요. 저 사람처럼 될래, 라고 꿈꾸는 거예요. “나 저 사람처럼 안 될래. 저 사람처럼 되면 무서워. 자살할 거야.”나라는 것이 세상에서 참조해서 들었던 그런 제도들의 규합이에요. 인간은 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남는 건 뭐냐? 봉사지요. 성령은 봉사의 영이거든요. 우리가 감사할 것은 내가 바쳐야 될 섬겨야 될 주님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1편에서 다윗은 뭐냐? 주께서 하신 일을 봉사하는 봉사자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시21:13)  이것이 되려면 나 말고 쳐들어오신 주님의 나가 그 사이의 투쟁 가운데서 나는 주님의 오심을 보여주는 봉사자로서 나타날 때 이러한 찬미가 거기서 생겨나는 거예요. 내가 주의 말씀에 순종 못해요.누가 내 안에 예상치 못한 나가 들어와서 나는 그분 앞에서 옛날식대로 그럼 내 것은요, 돈은요, 자존심은요, 나 창피하잖아요. 이런 발악이 일어나는 거예요. 발악하면서 나는 실체로 여기고 주님께서 바람 같이 흐름으로 파동이 오는 거예요. 그럼 나는 입자가 되어 반항하지요. 나중에서 그 흐름이 이겨요.이겨버리면 그 사이에 내가 몰랐던, 옛날에는 알았다 하지요. 주님을 찬송해야 마땅하다 하고 합당하다고 하는데 그 찬송이 건성이 되는 데요. 찬송과 가스펠송 너무 많이 알아. 하지만 백날 불러 봐도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마구 불렀던 거예요.그런데 나를 깎아버리고 나를 소멸시키고 부정해버리고 그 자리에 주님이 등장해버리면 아까 그 놀라운 대중가요란 이름의 가스펠송, 너에게로 오는 참 힘들었다는. 나는 힘든데 주님께서는 마땅한 거고. 결국 내가 한 것은 주의 봉사가 되도록 나는 숨기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게 되는 거예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란 사실이 성령의 바람으로 우리에게 밀려왔다가 떠나고 또 밀려오고, 떠나버리면 나 잘났다 하다가 또 밀려오면 역시나 주의 말씀은 주의 죽음이 있는 말씀이 진정 살아 있고 나는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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