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유의 후사가 되시는 아들(히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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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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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마다 말이 다른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특히 교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뜻이 이미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알고 있기에 전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실컷 듣고 난 뒤에,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습니다” 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동안 자기는 교회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성경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은 것을 챙겨서 전도를 한다고 여겼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그만 맥이 빠지죠. 그럴 때는 순간적으로 작전을 바꿀 생각을 하는데,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일단 맞고,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뜻이 있을 테니까, 이제 2차 전략으로 그 뜻을 전하면 전도가 된다” 라고 말이죠.
그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계시고, 그 하나님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전도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고 난 다음에, 며칠 뒤에 다른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 와서 또 하나님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것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그 하나님의 뜻을 믿기에, 하나님 자체가 한 분이라는 뜻이기에, 한 분 계시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수십 수만 명에게 하나님을 믿게 했다면, 동일한 하나님의 뜻이 동일하게 그들에게 담겼기에,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것이다” 라고 여기고 듣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어떻습니까? 지난번에 다른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이야기한, 즉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하는 하나님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데 이번에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뜻과 대조를 해보니, 비슷하기도 하면서도 뭔가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 그러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사람이 이야기한 것을 조정할 수 있는 인물을 다시 또 찾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또 찾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첫 번째와 두 번째와는 다른 세 번째의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해서 백 명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고 했을 때, 결국 그 사람은 어떤 결론에 도달을 하겠습니까? “아하, 하나님이 계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구나” 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한 분 계셔서, 똑같은 이야기를 전달받은 사람들이 다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존재이유와, 그 존재하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뜻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서, 각자의 살아온 인생경험에 따라서 다들 다른 목소리를 내더라는 겁니다.
참 이상하다. 왜 그렇지?
그러면 헷갈리게 되는데, “참 이상하다.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그러면 사람들마다 자기의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간주하면, 그게 바로 신자라는 것이구나”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를 한다는 말이죠. 각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들 다르니 말이죠. 그러면 어떤 교회에서는 병 고침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아주 강조를 한다고 하면, 그러면 당연히 다음과 같이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 당시에 초대교회에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일이고, 그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초대교회에 있었던 병 고침이나 귀신이 떠나가는 일이 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이죠.
(계속해서) “그러니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말고 뭔가 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간주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는 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믿기만 합니다’ 라고 나오면, 그런 것은 믿는 사람이라고 보장해드리지 못합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 목사들도 있다는 겁니다.
또한 다음과 같이 나오는 교회도 있는데, “기도를 많이 했더니만 기도한 그대로 응답이 되어서 기도생활에 푹 빠진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진 사람들이지, 기도의 응답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자들을 어떻게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은 기도해서 응답을 받은 그 실적들을 내놓으시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인정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기도를 많이 하면 가정이 화목해지고 사업이 잘 된다는 쪽에 비중을 두었던 교회에 다니던 교인이, 만약에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강조하는 교회에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너는 개척교회를 해야한다 !!
그리고 또 하나의 예를 들면, 개척교회를 막 시작한 경우에는, 그 개척교회를 시작한 목사도 군기가 들어서 긴장상태에 돌입하는데 말이죠. 월세는 계속해서 나가고, 그리고 서로 교제하면서 떡을 떼려고 해도 사람도 별로 없고, 심방을 가도 그냥 오전만 하면 모두 다 끝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의 경우에, 거기서 자신의 노동대가를 받고자해도 미안해서 도저히 받지를 못하고, 그리고 교인들은 목회 전문가를 모셔다놓았으면, 그래도 그 사람은 프로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프로라는 말은, 아마추어와는 달라서 그것으로 먹고 살아가야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목사가 생계문제로 인해서 설교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러면 결국에는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정작 자기들은 아무 것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서 설교를 해달라고는, 그것은 미안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목사의 경우에는, 자기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즉 “너는 개척교회를 해야한다. 다른 것은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는 분명한 소명을 받고 시작했는데, 그러면 그때부터는 이것이 진짜 소명인지 자기의 착각인지, 그것을 확인하는 긴장상태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럴 때 그 교회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라고 하는 추상적인 뜻이 아니라, “교회에 헌금을 열심히 해서 개척교회라는 것을 벗어납시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그렇게 나올 것이 거의 분명하다는 말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런 교회에서는 마태복음 5장 3절에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가 그런 설교를 할 가능성도 없지만 말이죠. 심령이 가난하다고 해서 개척교회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런 것은 개척교회를 벗어난 상태에서 가능한 설교인데, 만약에 개척교회에서 그렇게 설교해서 그만 교통사고가 나서 심령이 가난한 교인들이 천국에 가버리면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인도 별로 없는데 말이죠. 어디 개척교회를 말아먹을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장로가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그 개척교회를 얼른 기성교회로 만들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태복음 5장 3절의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되는데,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음흉하다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개척교회를 벗어날 것임이요” 라는 것을 기대한다면, 그런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개척교회를 하든 기성교회를 하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 간다는 것은 명확한데, 그 말씀이 하루 빨리 자립해야한다는 것에 의해서 그만 시들해진다면, 과연 그것이 주님의 뜻이냐는 겁니다. 그렇게 마태복음 5장 3절을 외치는 목사가 있다면, 개척교회를 하는 장로가 얼마나 미워하겠느냐는 말이죠.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 계획은 오직 예수님만이 이루시고 지금도 이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만이 이루신다” 라는 것을, 그것을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이루라고 맡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분이 따로 계신다” 라는 것을 통보해주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 앞에서 우리 뜻은 당연히 포기를 해야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교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들 다르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편리하고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는 하나님의 뜻을 자꾸만 우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어버리시는데, 그래서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 라고 하는, 그것을 전달받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만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데,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에 포함이 됩니까? 전혀 포함이 되지 않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의 요구사항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요구하시고 성취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히브리서 1정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오직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여기 2절에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오직 아들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브라함도 있었고 모세도 있었다는 말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림도 없는데, 물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은 담겨있었지만,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즉 결정적이고 완료된 상태의 뜻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즉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의 뜻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주워 모으든 합치든 그것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하나님의 뜻이란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는 우리는 아니라는 것인데, “우리는 안 됩니다” 라는 것을 항상 전제로 하고, 그 두 가지를 합쳐서 예수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일도 하나님의 뜻이고 자기가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들이 내뱉는 것은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에 대한 자기 해석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해석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마다 거기서 가지고 가는 의미가 다들 다른데, 그래서 “나는 은혜를 받았다” 라도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만의 느낌이고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체험이라는 것도 순수하다기보다는 자기의 욕망과 뒤섞여 있는데, 자기가 바라는 것과 말이죠. 그러니 똑같은 것을 체험해도 자기가 편집을 하는데, 그런데 잘라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다가 과장해서 더 붙이고 하는데, 앞뒤 순서도 바꾸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창작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이처럼 뒤죽박죽인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어제 자기 모습이 다르고 오늘의 자기 모습이 다르고, 그러니 내일의 자기 모습도 당연히 다를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자기가 장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 인간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요? 그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나오는데, 21절입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
여기에 보면 서로 대비되는 용어들이 마구 섞여서 나오는데,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믿으세요” 라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주면 되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라고 하는데, 이게 과연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한다는 것은, 그것은 전혀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뱉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은 다 엉터리라는 것인데, 진짜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수긍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뒤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라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가 하는 일을 미련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가능한 한 자기의 모든 지혜를 다 짜내어서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결코 미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미련하게 일을 하시는데, 인간의 지혜나 판단력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과 양심에 약간의 도움만 주면, 그 미진한 것을 보충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런 계산은 하나님에게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진짜 하나님의 뜻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가면 갈수록 “내가 이래서 미련한 곰탱이로구나. 내가 어리석은 자이고,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아는 척을 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을 더욱 더 깨닫게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밀고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평소에 알았던 것에 찬성하고 합의하는 식으로 일이 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았어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아무 것도 몰랐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십자가 지혜가 문득 찾아와서, 그게 맞다고 믿어지는 능력을 받아서, 그런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미리 답사해서 믿었다” 라는 것은, 그런 것은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일을 하시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한 가지로 모아지는 일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 !!
간단하게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뜻을 전달하시는데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인간에게 미련해 보이는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해결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을 한 가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받으셨는데, 그러면 그 여러 가지가 모이고 모이게 되면, 최종적으로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눈치챌 수 없는 가장 미련한 하나의 사건으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그러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나도 예수님 덕분에 병을 고쳐볼까? 혹은 예수님 덕분에 돈을 벌어볼까?” 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던 간에 그 초점은 바로,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땅에서 죽는 그 의미를, 즉 제대로 가치가 있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삶이라는 것을 수긍하는 것이 곧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대신 죽으신 이 땅에서 최고 가치가 있는 죽으심인데, 예수님은 그 가치가 있는 죽음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셔야 했고, 그 코스를 그대로 밟아오셔야 했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즉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떡을 떼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들이, 그게 예수님을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죽음으로 재촉케 하는 일들이라는 겁니다. 그 목적은 십자가인데, 결국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알고 십자가를 목에 거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아무튼 이 십자가는 우리 인간의 어떤 노력도 인정하지를 않겠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은 인간들이라는 겁니다. 그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종교성과 품위와 양심과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한 곳으로 모아보니, 그것이 어떻게 힘을 발휘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너는 죽어라!” 라는 식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 인간들의 모든 활동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악마의 권세가, 그러한 카리스마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인간의 활동을 통제하고 통치하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말이죠.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냥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예수 당신은 당신 갈 길로 가고, 나는 내 갈 길로 가겠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르는 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죄송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은 일절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모르는데, 전혀 말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모르고 있어야,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드러나고 빛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나도 십자가에 대해서 미리 알았다” 라고 하면서, 건방지게 튀어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심지어 3년 동안이나 같이 동고동락을 했던 제자들도 전혀 몰랐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3절입니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
여기에 보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었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어디에 초점을 맞춘다고 했습니까? 십자가인데, 즉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결국 만물은, 십자가가 어떤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주위에 배치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보좌 옆에 천사들이 배치되어있는 것과도 동일한데, 세상관리에 나선 천사들이 어린양의 보좌 옆에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생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개척교회를 하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그렇게 자신의 일을 토대로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런 행위 속에는 자기 자신과 야망과 포부가 웅크리고 들어있다는 말이죠.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집착에서 비롯되는데, 즉 자기의 가치와 의미를 남에게 자랑하는 집착, 그것이 똘똘 뭉쳐진 것에서 나온 결과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집착은 자기 자신을 더욱 더 강화하는 것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신의 열매인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나오는데, 그게 개척교회를 하든지,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든지 계속해서 터져 나온다는 겁니다. 늘 속으로 궁시렁거리는데, “나도 뭔가를 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서 일이 풀리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오늘 본분에 나오는 “아들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든다” 라는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인데, 사람은 아무리 해도 자기 죄를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자기가 자기를 정결케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죄를 용서받습니다” 라는 것을, 그것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상투적으로 듣는다는 말이죠.
만물을 붙드시는 능력으로 죄 용서를 !!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성도가 죄를 정결케 받는 것은 어느 정도의 능력인고 하니,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그분의 능력으로, 그와 동일한 능력으로서 성도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단 용서를 받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더 이상 죄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죠. 누가 감히 주님의 용서를 취소시킬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행동으로도 그게 취소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만물을 붙드시는 능력이니 말이죠. 그러니 누가 그 능력을 떨치고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에 의해서 떨쳐진다고 하면, 그것은 만물을 붙드시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냥 한 번 붙잡아보는 능력이지, 만물을 붙드시는 능력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행함에는 죄만 가득하지, 자신의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의 금식과 기도가 자신의 죄를 씻는다고 우기면, 그것 자체가 바로 죄의 극치인데, 그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를 밀쳐버리는, 그렇게 죄의 구체화에 나서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인데, 즉 “니가 어떻게 니가 알아서 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아들의 뜻만 의지해라” 라는 겁니다. 아들만을 바라보고 아들만 의지하라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아들만 바라보고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인간은 그야말로 강력한 자기 집착이기 때문에,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나옵니까? 자기의 노동가치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만큼 남들보다 더 많이 했으니, 더 받아야 당연하다” 라고, 그런 것으로 자기가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려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전서 12장 23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데,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겁니다. 개척교회의 성공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도무지 교회에는 성공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개척교회의 성공이 복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우리가 이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데, 큰 교회에 다니면 믿음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군중에 묻혀서 말이죠. 그것을 군중심리라고 하는데, 그런데 교인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교회에 다니면, 자기에게 숨겨져 있는 미움과 불만과 같은 것도, 몇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보면 당장에 그만 불거져 나온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어서 개척교회에서 탈출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로 그러한 죄를 폭로시키기 위해서 개척교회를 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죠.
교회에 와서 지옥으로 가는 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런데 천국이라는 것은, 즉 구원은 복음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런 말씀에 의존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이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이 생기겠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슬퍼하라고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결론은, ‘걱정하지 말자’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걱정하지 마라!” 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은 아드님의 모든 능력으로 말씀을 성취했는데, 그런데 왜 우리는 수시로 걱정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퍼서 올리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까지도 다 정결케 하셨는데 말이죠.
죄가 사라지면 저주도 같이 사라지는데, 저주는 죄가 있기 때문에 들어 붙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한 저주는 아예 없는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자기 책무를 우리에게 제공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우리의 숙제가 아니라 주님의 숙제인데, 우리는 도무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우리에게는 그렇게 걱정할 권리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인데, 그러니 단 하루를 살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를 했지만, 막상 성경말씀에 비추어보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나의 결심을 믿지 않았는지,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그런 터무니없는 믿음을 당장 떼어주시고,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나를 믿지 않는 믿음을 성령의 선물로 허락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5 오후 7시에 마침. - 녹취 구
(1강은 설교가 제대로 녹음이 되지 않아서, 다시 녹음을 위해서 설교를 해주셨는데, 목사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요약’편은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고 나서 다시 정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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