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들에게 입 맞추라(히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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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히 1: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히 1: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히 1: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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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요즈음 우리교회가 개척을 한 것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도 같이 휩쓸려서 감정이 동하기가 쉬운데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교회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습니까? 개척교회를 하려고 오셨습니까? 전혀 아닌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재미나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도 역시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죄’ 때문이라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려고 한다면, 진정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오셨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분을 두고 그분 앞에서, “내 교회가 좋으니, 니 교회가 좋으니” 라고 하면서, 이런 쓸데없는 논쟁을 벌리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말이죠. 주님께서 이런 것을 보시면 의아해하지 싶은데, “둘 다 돌았나?” 라고 하시지 싶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죄 때문에 오셨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서로가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하면서 끌어당길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남자들만 무려 5,000명을 먹이셨는데,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야, 나의 배고픔 문제가 해결이 되었구나. 예수님이 해결했구나. 예수님이 이토록 좋은 분인 줄은 미쳐 몰랐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기를 쓰게 된다는 겁니다.
(요 6: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 쯤 되더라
(요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야, 예수님을 붙잡자 !!
왜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까? 왜 자기네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자기를 선호하고 호응하는 사람들과 한 통속이 되어서, 좋다고 하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까? 전혀 아닌데, 예수님은 도리어 도망을 쳤는데, 왜 도망을 쳤습니까? “너희들은 내가 이 땅에 왜 왔는지를 모른다. 근본을 이유를 모른다” 라는 겁니다.
그저 자기네들 입장에서, 자기들의 배가 고프니까, 그래서 경제적인 것과 돈 문제가 다급한데, 그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얼씨구나!” 라고 하면서 달려든 겁니다. “맞다, 저 사람이다. 내가 저분에게 호의를 베풀면, 저분은 나의 호의를 알고 내 제의를 받아주겠지. 오병이어를 행하신 분이니, 나머지는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오늘 좋은 분을 만났구나. 야, 이제 되었다!” 라고 하면서 달려든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붙잡고 자기들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붙들고 왕으로 삼고자 한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슬쩍 돌아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그게 “왜 왔느냐?” 라는 것인데 말이죠.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웃기기 말라” 라고, 즉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빌미 삼아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고민과 한을 풀기 위해서, 자신의 행복추구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인데, 그러니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말이죠. 개척교회를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까?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죄 때문에 왔는데, 그러니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개척교회를 성공하라고 지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나 예수님의 고통의 이유와 아픔을 모르고 있는데, 조금 더 신선하게 이 세상을 살고 싶어서 교회를 찾고 또한 예수를 찾는, 그런 더럽고 추악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우리는 살려고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전혀 핀트가 맞지 않아요 !!
예수님은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살려고 예수님을 붙잡는, 그렇게 핀트가 전혀 맞지를 않아요. 그렇게 핀트가 맞지 않는 상태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해봤자, 그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메시야 당사자는 관심이 딴 곳에 있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전혀 관심이 곳에 있는데 말이죠. 서로 전혀 마음이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겁도 나고 때로는 화도 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을 성령을 통해서 썼던 사도바울이 가지는 마음자세나 정신자세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가 의문스럽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는 이 히브리서를 사도바울이 썼는데, 과연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지금의 이 말씀을 대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여러분, 예수님은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점을 알아요? 몰라요?” 라고 하면서 목숨을 걸고 외치고 있는데,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내장까지도 다 끄집어내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는 겁니다. 그런 갈급함과 감동함으로 이 성경본문을 썼는데,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과연 그런 마음 자세가 갖추어져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오늘의 이 본문을 설명하려고 하니, “과연 이 말씀을 설명해야하는가? 복음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 이 정신을 전해야 하는가?” 라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교회부흥이나 개척에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그런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든다는 말이죠.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가정의 행복만 추구하려는 자들에게 과연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데,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생각까지도 하나님께서 죄라고 명확히 규정해주시고, 그런 죄까지 다 씻어주기 위해서 이렇게 ‘히브리서’ 라는 편지를 내보이신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모든 생각까지도 불쌍히 여기시고 씻어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또 다시 이 성경말씀을 대하는 기회를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과연 우리가 사도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이 말씀을 대하려고 하고 있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오늘 본문내용은 간단한데, 5절을 보겠습니다.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하늘나라에도 아비자가 있고 아들이 있단다 !!
사도바울은 지금 하늘나라의 가정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어요. 즉 “지상에 인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들하고 같이 살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도 가정이 형성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하늘나라에도 가정이 있는데, 거기에도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들고서도 우리는 “아, 있구나. 있었겠지 뭐? 아니 누가 물어봤습니까?” 라고 퉁명스럽게 나올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다는 말씀은,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것과 결코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늘나라에 이와 같은 가정이 있다고 하는 그 내막을 모르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비록 백년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결국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늘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오늘 주보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하늘나라의 내막을 안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아니라, 차라리 세상일을 아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늘나라를 모르는 상태에서 어찌 세상나라에서 마음놓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하늘나라를 아십니까?
하늘나라를 모르는 상태에서 어찌 세상나라에서 마음놓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인데, 자기 머리 위에서 하늘나라가 어떻게 조직되어있고, 어떻게 흘러가고 있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그것도 전혀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해인사나 동화사에 있는 승려들이 과연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분들한테 한 번 물어보세요. “승려님, 실례지만 좀 여쭈어보겠습니다. 하늘나라가 어떻게 조직이 되어있습니까?” 라고 하면, 그 승려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런데 그것은 교회에 가서 물어야지 왜 동화사에 와서 묻습니까?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그것을 알아서 돈이 더 생깁니까? 주식이 올라갑니까? 수능점수가 올라갑니까? 하늘나라에 대해서 알아서 무엇을 할 겁니까?” 라고 하면서 되묻지 싶은데 말이죠.
여러분에게 이번에는 제가 묻습니다. 하늘나라를 알아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몸이 아픕니까? 그러면 병원에 가시면 됩니다. 돈이 없어요?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으면 됩니다. 물론 나중에 갚을 때는 좀 힘이 들지만, 그래도 살아가는데 그렇게 큰 지장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취미생활은 것은 구청의 문화센터에 가면 되면 되는데, 골프 동우회나 낚시 동우회에 가입해도 되고 말이죠. 그리고 건강문제는 매일 앞산에 올라가시면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아쉬우냐는 겁니다. 늙어서 외로우세요? 그러면 동네 노인정에 가시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지금 전혀 시급한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시급한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현상 중의 하나는 무엇인고 하니, 하늘나라에 관심도 없으면서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앞뒤가 전혀 맞지를 않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교회라는 것은, 노는 단체나 사교 단체가 되었을 경우에만 이게 앞뒤가 맞아떨어집니다. 정말 하늘나라가 궁금하고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없다면, 그런 교회라는 것은 일요일에 노는 장소인데, 그러니 그저 놀이동산에서 공간을 이동한 것 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과연 이런 심정에서 이 글을 썼겠습니까? “얘들아, 너희들이 개척하거든 히브리서 가지고 잘 들 놀아라” 라는 마음에서 말이죠. 전혀 아닙니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사람 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그리고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남북통일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하늘나라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면, 사람들이 결국 심판을 받을 때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하늘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왜 사람들이 그토록 하늘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합니까? 그것은 살기에 바빠서 그러한데, 우리가 특별히 하늘나라를 원수같이 생각할 일이 없잖아요. 아무리 마음이 나쁜 사람이라도, ‘하나님’ 이라고 하면 공손해지지, 일부로 하나님에게 악하게 대들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예수가 밉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복음에는 무관심한 세상 !!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너무 산다는 것에 치중하다보니 하늘나라가 별 도움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하늘나라에는 관심이 없어도 나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라는 고정관념 속에 우리가 살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야말로 콘크리트처럼 그만 단단해지고 말았다는 것이죠.
기독교 학교에서도 하늘나라에 대해서 안 가르쳐 줍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를 이야기해주죠. “이런 기독교 역사가 있었고,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러하고, 어느 교회가 부흥했고, 교회조직은 이렇게 되어있다. 거기에는 학생회도 있고,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전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공동체고, 나중에 천국에 간다” 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결사적인 노고와 헌신적인 투지로 오늘날에 이 거대한 기독교가 이 나라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라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분, 그런 이야기는 다른 종교인 불교라든지, 혹은 경제단체라든지, 그런 다른 인간들의 조직체에서도 다들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죠.
21세기의 선교전략에 대한 신학적 고찰 !!
제가 얼마 전에 케이블TV에 나오는 카톨릭 방송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면, ‘21세기의 선교전략에 대한 신학적 고찰’ 이라고 해서 심포지엄을 하고 있었습니다. 2시간이나 했는데, 제가 그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다 보았는데, 즉 “어떻게 전도하고 어떻게 선교해야 카톨릭이 제대로 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겠는가?” 라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이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오셨는데 저들은 카톨릭이란 조직체를 만들어놓고, 그 조직체에다 사람으로 들붙게 하는 것 때문에 노력하고 있구나” 라고 말이죠. 사도바울이 그런 것 때문에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데 말이죠. 사람들은 교회라는 조직체가 있다고 여기니, 그것을 부술 수 없기 때문에, 이왕 있는 것이니 더 키우자고 해서, 그래서 사람을 꼬시는 전략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전혀 무관한 관심사를 표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무런 짝에도 소용없는 짓들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눈에 보이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게 아닌데, 하늘나라가 어떻게 조직되어있고, 하늘나라에 형성된 그 구조로 인하여 어떻게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자가 생겨날 수 있게 되었는지, 거기에 관한 연결고리를 담고 있어야,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의 아버지는 이런 분이고, 또한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그 예수님의 여러 가지 활동으로 인해서 구원이 되었구나” 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 외의 내용을 전하면 교회가 아닌데, 있는 교회를 더 키우고, 있는 교회이기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을 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교회가 아니고, 그것은 일종의 노인정이고 사교단체라는 겁니다.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교회 !!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주동자가 누구냐 하면 목사와 장로들인데, 자기들이 돈을 내어서 교회를 세웠거든요. 그래서 이미 생겨버린 교회를 치울 수도 없고, 그리고 거기에는 자기 자존심도 담겨 있으니, 그래서 나온 것이 교회의 역사이고 그 자랑이라는 말이죠. 즉 “우리교회는 역사가 80년이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름 뼈대가 있다고 하는 집안에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뼈대가 없는 집안은 없는데, 안동의 권씨 집안이 그런 소리를 들으면 웃는다는 말이죠. 각 집안마다 다 그런 것이 있는데, 고고하게 꼬불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식이 자기 교회의 역사자랑은 말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인간들의 역사 자랑을 버리라고 하는데, 지금 하늘나라에서 어떤 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거기에 관심을 두라고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분이 어떻게 일을 하시기에, 우리가 죄에 묻혀 사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과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 거기에 관한 신비와 기적에 관해서 말이죠. 그래서 그 은혜의 내막을, 그 연결고리를 우리가 이 시간에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했는데, 즉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그런 놈들이 있다고 하면 당장 나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보이는 않는 것을 기다리면서, 그것은 인내로서 참으면 나타나게 되어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늘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의 행복을 추구해도 전혀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봐서 잘 알겠지만, 사람들이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챙기고자 하는데, 하지만 그 결과는 절망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권태를 느끼는 것은, 그만큼 그 사태가 절망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자기가 도저히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굴레를 쓰고 사니, 그 세력으로 인해서 권태를 느낀다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나의 세계이다. 내 영역이다. 내 회사이다. 내 가정이다. 내 것이다” 라고 할 때, 그때는 안정감과 포근함을 느끼지만, 하지만 얼마를 가지 못해서 권태를 느낍니다.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파격과 변화를 찾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10년, 20년 아무런 탈없이 지낸 평범한 가정에서도, 왠지 “이까짓 것 이혼이나 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똑같은 마누라에 똑같은 남편을 평생을 보려고 하면 지루하다는 말이죠(ㅋㅋ). 인간은 자신의 절망을 그런 식으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겁니다.
니체 -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권태다’ !!
‘니체’ 라는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권태이다” 라고 했는데, 감옥이 힘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도록 강요를 받는다는데 있어요. 즉 변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자기만의 세계를 소유했다고 할 때는 기분이 좋은데, 하지만 그 안에서 오래 있으면 새로운 신선한 변화를 찾고자 하고, 하지만 감옥은 그게 안 되니 미칠 지경이라는 말이죠.
결국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나의 것’ 이라고 여기는 순간, 그 안에는 진리가 더 이상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진리는 없고 이미 익숙해진 ‘나의 것’ 만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권태롭고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내가 무엇을 소유했는가?” 라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가?” 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곧 진리입니다. 비록 소유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알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것이라고 여긴 것을 가지고 남들과 시합에 나서지 마시고, 그런 것을 다 치워버리고, 차라리 자기 자체가 진리의 사람이 되어버리면 된다는 말이죠. 진리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유함, 이 자유함을 놓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마는데, 아무리 돈을 많이 소유해도 그것도 역시 권태라는 겁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니 우리는 관심이 진리에 있어야 하고, 그게 진짜 진리라고 하면 우리로 하여금 가볍게 해준다는 말이죠. 즉 “나는 나의 가문, 나의 가족, 나의 교회, 나의 역사라는 굴레로부터 간섭받지 않는다. 단지 나는 진리 속의 사람이다” 라는 겁니다. 그 진리만이 여러분을 자유케 하는데, 마치 자기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자기 몸무게가 없는 것처럼, 그게 존재의 가벼움이란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처럼 자유로운데, 마치 누구처럼 말입니까? 예수님처럼 말이죠. 예수님이 죄가 없는데, 죄가 없으니까 이 땅에 와서도 꿀릴 것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런 혜택을 예수님은 자기 것으로만 머물게 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도 같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조치를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죄 사함인데, 우리를 보고 죄가 없다고 선언을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죄가 없으니까 무거운 것이 없어졌고, 무거운 것이 없으니 가벼워진 겁니다. 우리는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 분명히 살고 있지만, 마치 천사와 같이 가벼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 자체가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주님이 주신 것이 적어도 이 정도라는 말이죠.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교회를 하나 세워놓고, “이 교회가 언제 부흥되나?” 라고 하면서 초조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은,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처사인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한심스럽게 바라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 한심한 놈들아, 이 예수가 너희들에게 그것 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스스로 만든 굴레에 빠져서, ‘주여, 이것을 키워주세요’ 라고 부르짖기만 하는 인간들아, 이것이 바로 너희들 인생에서 쇳덩어리가 된다. 왜 너희들은 ‘없다’ 라는 것에서 오는 자유함을 한 번 느껴보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느냐?” 라고 하시면서 따지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질서인데, 그것을 오늘 본문에 보면, 아드님이 천사를 부릴 때 바로 이런 식으로 부리신다고 하는 겁니다.
야곱의 돌 베개 !!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광야로 외롭게 쫓겨나서 길을 걷다가 그만 날이 저물었는데, 그래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잤습니다. 그때 자기 베개 위로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왔는데, 그리고 그 위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또 올라가고 있었다는 겁니다.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1)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전은 수평적이고 직선적이고 시간적인데, 야곱도 그러하고 말이죠. 자기는 형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외톨박이가 되었는데, 그래서 외롭다는 겁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여러분도 다 했지 싶은데, 그게 짧은 사람도 있고 긴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물론 스스로 그런 외로움을 자청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강요로 그렇게 되면 견딜 수가 없는데, 그래서 자살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야곱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로 버림을 받았지요. 미래도 보장되지 못했고, 그야말로 절망상태였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았는데, 야곱 나름대로의 모든 계획과 꿈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꿈에, 사실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 실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수평적인 비전과 꿈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 현재에 있는 장소에서 수직적인 꿈과 세계를 보여주셨는데, 그러자 외로움은 다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 사닥다리 위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데, “야곱아, 내가 너를 허락한 모든 뜻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가지 않으리라” 라고 말이죠.
물론 이것은 땅 값이 오르기만 바라는, 그런 오늘날의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귀신들이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지 싶은데,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해서 자기 인생을 시작한다는 말이죠.
애들아, 하늘나라에는 아들이 있었단다 !!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이 돈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고, 땅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고, 가정의 행복과 교회부흥 이야기를 끄집어내지를 않고, “애들아, 하늘나라에는 아들이 있었단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 이런 세상에서 제발 좀 벗어나라고, 그래서 이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야곱은 이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꿈의 계시를 받고 난 뒤 완전히 달라졌는데,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는 어떻습니까? 자기 꿈과 희망이 다 사라졌으니, 그러면서 그만 하나님의 도구와 수단이 되고 말았기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으니 말이죠.
그 이전까지 야곱은 인간과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렇게 자기 인생을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그 순간부터 야곱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는데, 그래서 사람에게 희망을 거는 인생을 청산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크게 횡재한 것으로, 큰 영광으로 여겼다는 말이죠.
자기는 그동안 형을 상대했고, 아버지를 상대했고, 그렇게 인간을 상대해왔는데, 서로가 이용만 하려고 하는 인간을 말이죠. 그런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자기를 하나님께서 일부로 뜻이 있어 다 찾아오시니, 너무나 감격스러워 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성도가 된 자유함이라는 겁니다.
야곱의 태도 !!
창세기 34장에 보면, 야곱의 딸인 디나는 그곳 청년들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그래서 오빠들이 복수에 나서려고 합니다. 물론 야곱은 말렸는데,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하면서 복수하지 말라고 말이죠. 하지만 자식들이 말을 듣지 않고, 그 동네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서 힘을 쓰지 못할 때, 그만 공격해서 다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그러자 야곱은 자식들의 행동에 대해서 무척이나 속이 상하게 됩니다. 자식들이 자기 영역의 방어에 나서는 것을 보고 말이죠. 그게 변화된 자신이 보기에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마음속의 어두운 그림자인데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창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창 34: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이런 야곱의 모습, 이게 곧 참된 교회의 모습인데,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감격해하고,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생의 그림자는 다 사라지는데, 교회부흥, 가정의 행복, 미래의 설계 등,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데, 이게 바로 주님의 축복이라는 겁니다. 다른 축복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5절에서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아들이라는 관계가 어떠하기에, 구원받은 우리에게 그 관계를 알려주시는 겁니까? 하나님과 아들이라는 관계를 말이죠. 하늘나라의 가정을, 이것을 주님만 아시고 있으면 되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일부러 가르쳐 주시느냐는 겁니다.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여기서 시편 2편을 보겠습니다.
(시 2: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시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시 2: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시 2: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
(시 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
여기 12절에 보면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사도바울에게 알려주셨는데,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알아서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인데, 그러면 왜 보내느냐는 겁니다. 그냥 계셔도 되는데, 이 세상이 더 좋을 리는 만무하고 말이죠.
그 아들에 이 세상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속성을 말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아들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들은 망한다는 것을, 그렇게 이 세상은 절망적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양심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프리카나 북한 아이들을 도우면서 말이죠. 그리고 교회에 충성해서 구원을 받으면 된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하는데, 아들에게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그게 시편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나라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즉 메시야를 공격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조직체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런 인간나라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교육을 받고 늙어 가는데, 그리고는 그 안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편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이 살아간다는 말이죠. 자기 생각에 좋으면 성공한 인생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러한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그것도 초라하고 망가진 모습으로 집어넣으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 세상에 온 그 아들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당연히 살펴보겠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렇다면 그들이나 우리가 그 아들을 환영하겠습니까? 당연히 그 아들을 전혀 환영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고 하니까, 참 아들과 그렇지 않는 인간을 서로 비교해 보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싫어하신 바가 된 마음가짐을 지닌 채로 인생을 살아가는지, 그것이 들통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
오늘 본문에 9절에 보면, “기름을 네게 부어”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님과 그렇지 않는 우리를 서로 대비시키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드디어 말이죠.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이것은 마치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거지꼴이 되어서 남원 땅에 나타났을 때, 춘향이 엄마인 월매가 도령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고 미워합니까? “아이쿠 이 사람아, 도대체 이것이 무슨 꼴이고? 이제 내 딸의 인생은 끝났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탄식을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동일하게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우리 개척교회에 오시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아무런 힘도 없이,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이미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반길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은 무너져야만 하는 세상임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여기서 시편 8편을 보겠는데, 2절입니다.
(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전쟁을 하는 장면인데, 인간의 최신무기로 나오는데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는 엉뚱하게 젖먹이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낯설고 황당하냐는 겁니다. 우리 딴에는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우리에게는 젖먹이의 입으로 전달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무시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존재를 일부러 앞세워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소유의 힘을 말이죠. 그런데 전혀 힘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누르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빈대와 같은 존재로서 그분이 이 땅에 등장하셨다는 겁니다.
젖먹이의 힘으로 !!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세리와 창기는 메시야를 알아보고 “메시야여,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탈출시켜 주옵소서!” 라고 하면서 호소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학을 했다고 하는 성직자들과, 또한 교회의 중직자라고 하는 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은 그야말로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시는데, 즉 하늘에 진리가 가득한 것처럼 이 땅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그렇게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세리와 창기처럼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자들, 그런 자들이 죄 용서를 받아서 가뿐하게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 놀랍고도 특이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대로 노출시키고자 하시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말이죠. 즉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만 하늘나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것인데, 그 하늘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자들이 바로 진리를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진리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인데, 그러면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어려우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무지무지 어렵다는 겁니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말이죠.
왜 어려운고 하니, 이 땅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만이 그 아들에게 입맞출 수 있기에 그렇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힘을 찾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 목회자로서의 성공하고, 교인으로서의 성공을 기대한다고 하면, 결코 아들에게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힘의 세력에 합세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봐라, 예수님과 너는 다르잖아 !!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를 낳았다. 그리고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심어놓고, “모든 백성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만, 오직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만 참된 아들이다” 라고 하시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렇게 그것을 부각을 시키고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말이죠. 우리가 너무나도 잘난 체를 하니, 진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봐라. 예수님과 니가 다르잖아” 라고 하시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즉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야. 예수님만이 참된 나의 아들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이죠. 야곱이 하늘나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까? 그리고 하늘나라에 아들이 있다는 것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아들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도 관심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도 관심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아들에게 입맞춤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죄가 사라지는데, 우리는 야곱처럼 꿀릴 것이 없는, 거칠 것이 없는,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주님의 종으로, 그런 자유함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기에 !!
여러분,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임을 믿고 입맞추신다고 하면, 우리가 전혀 기죽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 다 알아서 조정해주시고 관리해주신다는 말이죠. 절제할 것은 절제하도록 해주신다는 겁니다.
누가 초라한 그 행색의 예수님을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아들인 줄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자칭 멀쩡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은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그런 죄 사함에서 오는 자유, 이게 곧 하늘의 은총이고 기적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은총을 받은 사람들만이 하늘나라의 가정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데,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고 교회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예수님에게 입맞춤으로 죄 사함을 받았는데, 그래서 그들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이 진리를 바로 앞에 두고서, 진리를 외면하면서 살았던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헛된 비전과 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오직 아들에게 입맞추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가벼운 인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12,6 오후 5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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