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조직신학
종말론 1-1
06. 5. 12 강의 이근호목사
하나님 아버지!
금요일 늦은 밤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중심으로, 옛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그 피가 오늘날도 여전히 저희들을 구원하는 능력임을 알도록 믿도록 조치를 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만 왜 십자가를 꼭 지셔야 하셨는지 왜 그것만이 다 이루었다고 하심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꼭 품고 가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종말론에 대해서 합니다. 종말론이란 끝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끝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끝장을 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나 연세가 드신 사람이나 끝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습니다.
자 그림을 하나 그릴 테니 어느 그림이 맞는지 한번 보세요! 여기에 길이 하나 있는데 이 길에 사람이 마구 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지 우리 인간이 헉헉거리며 앞으로 달리고 있는데 우리고 달리고 이 길도 달리는 것입니다. 1번은 길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만 달리고 2번은 길도 사람도 다 달리는 것인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2번! 예 2번이 맞습니다. 끝이 정답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간에 이 1번과 2번이 다 틀렸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면 정답이 무엇이냐? 3번이 있는데 3번이 어떤가 하면 우리가 식식거리며 달립니다. 우리의 소망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데 길이 이쪽에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중을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생각한 종말입니다.
장차 있어야 될 일을 미리 거기에서 원천이 되어서 마중 나오듯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라는 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데, 지금 이렇게 된다면 장래에 있는 것이 지금 현재에 도착하였고 그것이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보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희미하게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얼굴과 얼굴로 보는 그것이 먼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천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지금은 희미하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장차 주님과 만난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써 놓고 있습니다.
장래에 있을 일이 먼저 확정되어 있기에 지금 우리에게 여러 일들로 조금씩,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헨델과 그레텔이라는 동화를 아십니까? 콩나물 올라가고 하는 그런 동화인데 집을 찾아오려고 돌멩이를 하나씩 던져 놓습니다. 그 돌멩이를 따라오면 어느새 자기 집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계서서 우리를 따라 오라고 돌멩이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던져진 그 돌멩이를 따라서 돌멩이를 던지신 예수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기 위하여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학생은 지금 몇 살이에요? 13살! 그러면 17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17살이 되어 봐야 그때 사건이 터질 것입니다. 지금 그 길을 향하여 4년 동안 걸어갈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는데 17살 때에 전교 1등을 한다는-그럴 가능성이 희박하지만-그런 사건이 있다면 16살, 15살, 14살 때에 하나님이 돌멩이를 던지는 것처럼 그 사건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마중을 하고 과거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는 이렇게 본다고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는 절대로 시간을 이렇게 보지 않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보기에 그 미래를 어떻게 하는가 하면 두 번째처럼 과거에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현재화되고 그것이 현재에서 더욱 새롭고 순발력 있게 또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또 지난번에 이야기한 돌연변이 속으로 또는 우발적으로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진보 발전해서 점점 더 과거보다 향상된 미래를 이룬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서 더 나은 현재로 현재에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간다고 보면 과거를 버릴까요? 안 버릴까요? 안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탑을 높이 쌓을 때에 밑에 것을 빼버리면 와르르 무너지지요! 그러므로 탑을 점점 높이 쌓을수록 밑에 것을 더 단단히 해야 하고 확실히 해야 하겠지요!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과거를 점점 더 확실하게 다지려고 하는 것이지 과거를 몽땅 다 버릴 생각은 추호도 안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는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지게 하시는데, 하나님은 과거를 잊어버려라! 사라지게 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 하면 과거를 사라지게 하기는커녕 과거를 더 돈독히 하고 더 강렬하게 하고 더 집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충돌하고 마찰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지워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과거가 오늘날 나를 만든다는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써 보겠습니다. 지금 1번과 2번의 차이는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변화되지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그대로다. 이런 생각인데 이것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서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놀았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찾아와보면 큰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면 옛날 그 골목이 남아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불도저로 밀어버려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만 변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세상은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고 다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결혼하지 전에 남자가 당신이 나와 결혼하여 주면 손에 물도 묻히지 않게 공주처럼 살아가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면서 결혼을 한 것입니다.
아내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관심도 없고 친구하고 놀다가 늦게 오고 하니 아내가 남편에게 왜 당신은 결혼 전에 그렇게 말하여 놓고 지금 변하였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나만 변한 것이 아니라 당신도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변하고 사회도 변하기에 서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에 입는 옷을 지금도 입을 수가 있습니까? 어릴 때에 놀던 장난감을 중학생이 되어서도 가지고 놀 수가 있습니까? 마징가 제트 하면서 놀던 것을 장가가서도 할 수 있겠어요! 변하는 것입니다.
왜 변해야 하는가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바보취급을 하기에 그 사회가 어떤 사람을 요구하는가에 적응하면서 맞추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군대를 갔다 왔습니다. 어려운 군대, 남들 다 가지면 저도 갔다 왔습니다. 군에서 제일 힘들다고 하는 것이 유격훈련? 아닙니다. 그러면 총검술? 아닙니다. 구보? 아닙니다. 무엇이 제일 힘 드는가 하면 나는 열심히 잠을 자야 하는데 보초를 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런데 보초 시간에 잠을 자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잠자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군대규칙에 의해서 영창에 가는 것입니다. 군에 감옥에 갔다가 오면 다시 군대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일로 자꾸 길어지면 빨리 군에서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못하잖아요! 그래 시키는 대로 하자. 그래서 시키는 대로 보초 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잘했지요!
그런데 군대를 제대하고 세상에 취직을 하고 보면,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나오면 사회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 저나 여러분이나 안 됐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사회에 적응하느라고 자유를 반납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유를 맛도 못 본 것입니다. 언제 자유를 잠시 맛보는가 하면 백수 될 때에 잠시 맛보고 끝나면 또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미래에서 과거로 이렇게 주어지는데 우리 부모가 죄를 짓고부터 사람들 사고방식에는 미래 현재 과거 이것은 영 믿지를 못하겠고, 우리 몸에 딱 맞는, 과거가 현재를 만들고 현재가 더 찬란한 미래를 만든다는 이것이 몸에 딱 맞기에 하나님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벌이는 일과 우리가 실제로 몸이 느끼는 일과 안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맞으니 하나님이 힘드시겠습니까? 우리가 힘들겠습니까? 우리가 힘든 것입니다. 자꾸만 거꾸로 가니까 구역질나고 멀미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미래의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미래의 이렇게 될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과거에 알던 것과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안 맞는데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주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어떻게 나를 죽입니까? 어떻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과거 현재 미래 식으로 이렇게 가는 것이 얼마나 우리 몸에 딱 달라붙었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시는데 얼마나 엄하신지 숙제를 안 해가면 큰 벌을 내리고 숙제 해 간 사람은 그 다음 숙제도 면제해주고 칭찬도 많이 해주시더라는 것을 알고 숙제를 열심히 하였는데 그 다음날 숙제 검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그래서 선생님 왜 오늘을 숙제 검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때 선생님께서 오늘은 왠지 검사하기가 싫구나! 왜 안 하십니까? 내 마음이다. 너는 나를 믿으라고 하시, 그러면 내 계획과 맞지 않잖아요! 아니 선생님이 네 계획에 맞출 이유가 없잖아! 선생님이 내일 숙제 검사를 할 거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계획한 것이고 학생인 네가 계획한 것을 이 선생님이 꼭 따라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내하고 같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다면 따질 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내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면, 내가 이 세상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면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있게 되었다면 그냥 생긴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뜻이나 고집을 관철하려고 우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분을 위하여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 고집대로 하면 징계 받고 매 맞고 그래야 됩니다.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주기도문에도 나오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대로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제가 기도합니다. 하는 것이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미래에 이미 확정되어 가지고 미래에 확정되어진 것이 현재로 들어와서 과거로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뜻은 무엇입니까? 과거에 내가 이 만큼 노력했으니 현재에 이만큼 성과를 얻었으니 이것에 따라 내가 미래에 보상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이 만날 때에 누구의 뜻이 깨어지겠습니까? 우리의 뜻이 깨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신 분이시니까!
우리가 깨어지는 그 순간에 아하! 내가 계획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따로 있었구나! 하면서 그때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깨닫게 된다고요? 내 뜻이 깨어질 때! 내 뜻이 성취되었을 때가 아니라 성취 되지 않았을 때에, 예상 밖의 사건을 통하여 내 뜻이 무너졌을 때에 그 때에 이미 미래에서 만들어진 사건이 나의 과거에서 만들어진 사건을 내려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예레미야가 선지자가 되는 것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자기가 손들고 선지자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레미야 1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복중에 생기기도 전에 이미 예정되었기에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성령에 의하여 세례요한은 태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물론이고, 사사기 16장에 나오는 삼손 같은 경우에 그 가정은 아기를 못 낳는 가정인데 힘센 삼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나실인으로서 희생할 것이라는 임무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천사 세분이 찾아와서 장차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도 자기가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꿈꾸기 위하여 몇 번을 연습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꿈을 꾸게 되고 그 꿈대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여러분들도 같이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미래의 뜻이 있어서 그 미래가 먼저 확정되고 그 확정된 미래를 보여주기 위하여 돌멩이 던지듯이 미래에서 던져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과거는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만 잊어버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집도 다 사라집니다. 과거가 얼마나 잘 났든, 과거가 얼마나 못 났든, 과거에 성적이 몇 등 이었든, 과거란 것은 이미 다 써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현재의 사건을 주었는데 내일이 되면 오늘의 이 모습은 이미 과거로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이 과거로 사라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데 껍데기만 남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였는데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쉽게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잘 설명이 안 되니 그림으로 해보겠습니다. 2번과 3번을 같이 그려보겠습니다. 우리가 앞을 향하여 가는데 장차 주님께서 알파와 오매가로 미리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여기에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꽝 하고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돌이 일어나면 누가 깨어집니까? 우리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지는 것이 1번입니다. 이렇게 깨어진 현장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나가 있습니다. 과거에 현재에 나는 이렇게 되겠다는 그것이 깨어지면서 지금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새로운 은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한달 수입이 오백만원 되지 않는 거야? 나는 정말 죽고 싶어! 내가 이래가지고 남자인가? 남들은 다 육백만원 천만 원씩 되는데 나는 왜 예수님도 잘 믿는데 오백만원밖에 안되나! 차라리 죽고 싶다! 이렇게 했는데, 그 사람의 지금 수입이 이백만원이라면, 나는 왜 오백만원이 안돼? 하나님이 뭐하고 계시는 거야! 예수님은 뭐하시는 거야? 그런 과정에서 사건이 일어나 꽈당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백만원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만든 나였지만, 사건이 부딪히고 난 다음에는 주님께서 만들어진 바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어려운데! 이것을 듣고 어떤 어린이는 이렇게 말해요! 나는 전에 학급에서 왜 꼴찌일까? 왜 1등을 못할 까? 이렇게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주여! 나는 꼴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겠습니다. 이렇게 또 자기변명과 합리화로 써먹는 아주 머리가 뛰어난 그 머리로 공부하면 잘 할 텐데 그렇게 써 먹는 아이가 있어요! 그렇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보는 나가 아니라 나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나를 끊임없이 나라고 우기면서 자꾸만 살아가고 있어요! 내가 만든 나가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전셋집도 없으셨는데, 주위의 잘 사는 사람들이 인간아! 전세방도 없이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으라고 하니 나는 머리 둘 곳도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인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이야기해서 예수님께서 미래의 소년 코난처럼 미래에서 오셨는데 과거에서 발전을 추구하여 온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 죽였는가 하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존재라고 그렇게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 사람마다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이 다 다르기에, 사람 사람마다 자가의 과거로 구축하여 온 것이 다 다릅니다. 다 다르다 보니까 예수님과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들끼리는 의사소통이 너무너무 잘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돈 벌었다면서요! 아이고 잘 되었네! 축복받았다, 그렇게 의사소통이 잘 되는데, 예수님과는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성경과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라는 것은 안들은 것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는 전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다면 신발은 무슨 돈으로 삽니까? 그러니 안 들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은 이미 하나님의 확정된 뜻을 펼쳐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로 수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원수로 현재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종말론을 하면서 로마서 12:19절을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나의 원수라고 해서 내가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수라고 여긴 사람들 중에 누가 가장 원수인가 하면 우리를 구원하셔야 될 예수님이 우리의 원수로서 얼쩡거리면서 등장하였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괴롭게 하는 원수를 만약에 내가 갚아버리게 되면 이것은 결국 가룟 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예수님을 우리가 살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주위사람들과 나의 과거의 경험과 체험으로 똘똘 뭉쳐진 현재의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미래에 다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품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나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나를 괴롭히면 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타고난 본성이 그런 것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심지어 형제간이라도 나를 건드리면 그 짧은 순간이나마 원수로 간주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어렸을 때에 집에서 개를 키웠습니다. 개한테 너무너무 잘했습니다. 개도 나에게 꼬리를 흔들며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린데도 느꼈습니다. 어려서부터 무엇을 잘 느꼈습니다. 그렇게 잘해주어도 개 밥그릇을 치워버리니 그렇게 잘해준 나의 손가락을 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개만이 그렇겠습니까? 욕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람도 그렇습니다. 잘해줄 때 친구고 잘해줄 때 선생님이고 잘해 줄때 형제고 부모님이지, 만약에 자기를 험담한다든지 자기의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게 되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이 확 하고 강아지처럼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이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선은 제발 넘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넘어오면 나도 못 참습니다. 하는 그것이 경계선이 되어 자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 색을 되게 싫어하는데 제발 친구여! 파란색 분홍색이 다 괜찮은데 나에게 올 때는 빨간색은 정말 싫어 그러니 너도 입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러 빨간색을 입고 오면 그때부터 나는 친구 안 한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빨간 색이 무엇입니까? 모든 색은 다 받아들이는데 빨간색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빨간 색이지 않습니까?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분홍색은 뭡니까? 모든 색 중에 다른 색은 다 흡수하고 분홍색만 반사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빨간색을 입고 왔다고 해서 원수로 여기고 나중에 복수한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나중에 어떤 인간이든 나의 자유를 건드리면 그것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그 누가 되었든 간에 나는 참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예를 자꾸 들어야 이해가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명한 장군의 이름을 들어보세요! 1)이순신 2)전두환 3)노태우 4)김일성 이렇게 시험이 나온다면 내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죽은 이순신 장군이 정답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내가 맞추었다고 하였는데 그런데 선생님께서 전두환이 정답이라고 하면 이때 살짝 선생님이 원수가 됩니다. 왜 내가 알고 있는 진리에 선생님이 호응을 안 해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삼성과 엘지가 야구를 하는데 같은 친구인데 한쪽은 삼성을 응원하고 한쪽은 엘지를 응원하면 나중에 싸우는 것입니다. 아내는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남편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텔레비전 두 대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또 싸웁니다. 더 좋은 텔레비전으로 보려고 또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심판해? 너의 심판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는 심판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을 누가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다 심판을 받으신 분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왜 심판하실 수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싫어하기에 이제부터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건질 자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아담도 원수이도 아담의 새끼들도 원수이기에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너 천국 가! 너도 천국가고! 이렇게 뽑아주실 때에 지옥에 그냥 머물러 있는 자들이 여기에 반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다 같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대적하였던 원수들이기에 일단 다 피고들이며 지옥 가야할 것이 기정사실이기에 그 중에 누구 하나 특별대우를 하여 어이! 너는 내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천국 가! 하면서 뽑아준다고 해서 그 옆의 사람들이 반발하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데 나는 왜 안 됩니까? 하면서 반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동의를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출애굽 때에 유월절이 있었지요! 그때 죽음의 폭격기가 왔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왔을 때에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죽음의 사자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웅변을 잘하는지 태권도를 잘하는지 쌍꺼풀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 절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날 때부터 장애인인지 아버지 계시는지 그런 것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문설주에 피가 발렸는가 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문설주에 피가 발렸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과거에서 우리가 구축한 것이 있잖아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일절 묻지를 않습니다. 무엇을 구축하였던 그것은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볼 때에 종말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자기가 뿌린 씨앗을 회수하는 기간입니다.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냥 본인이 회수하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잠 잘 때에 제가 붉은 매직으로 여러분의 이마에 점을 딱딱 찍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다 자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이제는 천국으로 갑시다하면 사람들이 좋아서 저요! 저요! 할 것입니다.
아니요 안 됩니다. 밤에 주무실 때에 제가 이마에 붉은 점을 찍은 사람만 나옵니다. 하면 그제야 뒤늦게 붉은 매직 구하여 자기 이마에 점을 찍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천국의 엑스레이에 통과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무엇이 되어있는가 하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잠잘 때 찍어 놓았기에 너 왜 건방지에 이마에 점이 있어! 나도 몰라 자고 있었는데 찍혀 있는 것을, 그러면 나는 왜 없어? 나도 몰라! 이것을 가지고 칼빈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한번 점을 찍어놓았으면-여기서 어린이들은 조금 힘들 텐데- 그 점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에 구별하기에 쉬운데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찍어 놓은 점은 어떤 점인가 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이런 복음의 내용과 동일한 점이라는 것입니다.
점이라는 것이 물질적으로 매직으로 찍어놓아서 보이는 것이라면, 아 구원 얻었구나! 이렇게 할 텐데 진짜 구원하시는 고백은 하나의 물질적인 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온전하게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라는 식의 복음전파로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무언가 하면 십자가의 공로로만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나 중에 미래에 확정이 된 사건이 지금 마중을 나가는데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자고 천국으로 가자고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런 것을 일절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를 마중 나와서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야! 그것은 너희 행함이야! 너의 공로가 쌓이는 것이야! 아무리 헌금 많이 하고 전도하여도 안 되는 거야! 하면서 때려 부술 때에, 맞습니다. 또 내가 내 행함을 드러내었군요! 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바로 이마에 찍힌 붉은 점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사람들이 이런 사건인 십자가를 다 알고 그것은 기본인데 왜 자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합니까? 이미 십자가의 사건을 알고 그 후에 내가 얼마나 향상 되었으며 내가 성격이 달라지고 인격이 발전하고 나아진 것을 과거에 비교하여 현재에 더 나아지고 미래에 더 나아질 것이라는 이 놀라운 나의 결심을 왜 안 알아줍니까? 하고서 나온다면 그 사람은 무언가 지옥 갈려고 약을 쓰는 사람입니다. 아직 안 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사건만 받았지 십자가 안에서 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수십 년의 성과를 건드리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원수가 되고 자기가 원수라고 분류해놓은 그 속에 예수님과 십자가도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아니라 밖이고 십자가 안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십자가 바깥을 더 선호하는 그러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골라서 또 심판하기 위하여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종말프로그램의 시나리오를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 더 보태는 사람, 더 나아졌다느니, 더 훌륭해 졌다느니, 전에 술 마셨는데 이제 술 끊었으니 이만큼 인간성이 좋아졌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기에 미래에 다가오시는 주님이 그 사람에게는 원수가 되겠지요!
두 번째 시간에는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봅시다. 십분 쉽니다.
녹취 060928 이장우
종말론 1-2
06. 5. 12 강의 이근호목사
종말에 대해서 어렵기에 다시 하겠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나오는 이런 종말은 거짓입니다. 이것은 허구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종말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종말론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이슬람교, 각종 철학, 또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종말론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이 마지막이 있다. 과거가 있든지 현재가 있든지 마지막은 미래에 끝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한 계시록을 해석해 버리게 되면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가 하면 이 마지막 때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왜? 피하여 보려고! 징조를 좍 보면서 나 이것을 피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기 위하여 몇 가지 정보들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피하면 마지막에 지옥가지 않는다는 그런 것들의 힌트를 달라는 것이지요!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려는 이것은 다 거짓 된 것입니다. 왜 거짓된 것인가 하면,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이것이 진짜 종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진짜 종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인간의 머리에서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기에 전부 다 사기요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종말론이 진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야기한 종말론이 어디에 나와 있는가 하면 히브리서 1장에 나와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등장 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마지막을 몰고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끌고 오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붉은 옷을 입고 무언가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오지요? 예수님께서 종말이라는 선물보따리를 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들고 온 종말이라는 선물보따리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때는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구름을 타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당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말이라는 선물보따리를 들고 오셔서는 내가 심판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전 까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판자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나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저기에 계시는데 하나님은 심판하시는데 무엇으로 심판하시느냐? 말씀대로 잘 지키는가? 십계명대로 잘 지켰는가 하는 것으로 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은 소용이 없고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영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라고, 당신이 부자이니 그것을 팔아서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바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였을 때에 따랐습니까? 뒤로 돌아갔습니까? 뒤로 돌아 집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종말입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으로 쪼르르 따라가면 그곳이 종말인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도 그것을 치워버리고 자기가 생각해 놓은 종말이 안 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종말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종말입니까 하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심판 받는 것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종말을 몰고 오셨는가를 알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서기 몇 년도에서 몇 년도 까지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끝장내실 분이 누구신가를 알 때에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고, 모르면 이미 종말에 의하여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것이 없다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내게 맡기셨으니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이 있다.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최고로 잘 믿는 사람이라고 여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고 좋은 상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바리새인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자신보다 의로운 사람이 없다고 자신 만만해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자신의 의로움을 더 의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을 아예 작살을 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잡아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보시기에 더욱더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고 여기고 또 종말 때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였는데,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바르게 산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이 네게 고생만 실컷 더할 뿐이다. 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못살게 굴던 나사렛 예수다.
이것을 무엇을 뜻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 사람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독자적인 계약을 맺고 일하셨다는 것을 그때 사울이라는 사람이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어떤 일을 하든지 배제해 버리고 아주 독점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이든 심판이든 이런 일은 하나님과 예수님 둘 만의 문제이지 제 삼자인 우리가 거기에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 속 편하지 않습니까? 소화제 하나 드릴까요? 쓸데없이 내 구원을 내가 관리하려고 하니 얼마나 자기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원문제는 우리가 개입하거나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을 감행하실 때에 그 심판의 기준을 우리에게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것이 심판의 기준인 것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에게 구원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 올리고 쳐다보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쳐다 본 사람은 다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말은, 이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는 것은 나머지기 나를 포함해서 수십억의 인구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야 한다는 것은 그 밑에 깔려있는 수백억의 인구들 중국사람, 필리핀 사람, 터키 사람 같은 다른 사람들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주신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위한 예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이 말은 내 선에서 천국가려고 시도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데 왜 하는 것입니까? 참 답답해 미치겠네! 하지 말라는데 왜 하는 것입니까?
해도 소용없는 짓인데,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하다가 안 되니 짜증내고 하나님께 달려들고, 하루에 성경 다섯 장 읽기! 괜히 자기가 정하여 놓고 못 지켰다고 다음날 헌금 더하기 또는 일곱 장 읽기! 그러다가 갑자기 친한 친구가 와서 성경을 읽지 못하였는데 차사고 나면 성경 읽지 않아서 사고 났다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차사고 난 것은 미래의 주께서 너의 행함을 의지하지 말라고 너 성경 보았거나 안 보았거나 상관없이 차사고 일어나야 그 순간 이나마 네 자신을 탈피하고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는 것을 믿고서 차사고 나나 안 나나 내가 구원받았지! 내가 왜 차사고 난 것 때문에 왜 그렇게 신경을 썼는가? 차사고 나나 안 나나 구원받았는데 왜 차사고 안 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이기주의를 챙겼는가? 하면서 회개하기 위하여 차사고 난 것입니다.
작년부터 제 머리 뒤에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동영상 보는데 머리가 훤한 것입니다. 야구장 같습니다. 원인이 교회사 강의하느라고 신경을 써서 그랬구나! 창원에 어느 교회는 목사님이 머리가 빠지면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3천만 원 들여서 머리를 심었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는 3천만 원 대어줄 사람이 없어요! 내가 이만 원 주고 마이녹실 뿌려서 조금 난 게 이정도입니다.
왜 머리가 빠지는가 하면 머리 빠져도 구원됨을 이야기 해주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머리 빠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와 비교해서 과거에는 안 빠졌는데 왜 지금 빠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러하였는데 왜 지금은 과거보다 못 하는가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또는 어제 내가 이런 계획이 있었는데 오늘 왜 그 계획대로 안 되었는가를 과거에 근거해서 오늘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근거해서 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다 의논해서 된 것을 가지고 네가 쓸데없이 거기에 올라가서 흠집 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이 십자가에서 사건에 계속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다운 사건이 뿜어져 나오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형편 따라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자기 행함과 자기 의로움과 자기 자존심을 어떤 것을 가지고 붙여하는 것은 주시하시다가 그것을 레이저 광선으로 때려서 자존심 의지하지 말고 높이 들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라고 지금도 그런 사건들을 계속해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종말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입니다. 종말론이란 쉽게 말해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광고에 보면 ?�빨래 끝?�이라는 것이 있지요! 주님 지금 나는 교회 다니면서 술도 안 끊고 담배도 안 끊었습니다. 하는데 저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종말?�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네가 담배 끊고 술 끊고 하는 것과 상관없이 저쪽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다 이루었다는 것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말씀을 어떤 위인도 지킬 수 없는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행함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 이루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자 어떻게 믿는가? 제가 예를 들어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은즉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앞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며 이것으로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같은 교인끼리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 그러면 목사님은 교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까? 미쳤습니
까? 누가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어떤 경우도 안 됩니다.
성경 말씀에 우리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말씀을 던져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 맞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에 의하여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 몰랐는데 요한일서에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도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 다 이루심을 믿게 되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결국에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에 포함되어 있음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 이거 아무도 이해 못한다.
여기 물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물을 먹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돼요! 마개가 막혀 있으니 못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을 먹어야 된다는 것을 믿느냐? 믿습니다! 믿지! 예! 그러면서 이것을 한번 틀어봐! 이 물이 눈에 보이고! 트니까 열리고 그래서 어느 날 마시게 되고! 이것 다 누가 하신 것입니까?
다 이루신 주님께서 다 이루심이 어떠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2차 3차거치고 보니 형제를 살리기 위한 희생으로서 그렇게 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 더 쉬운 것을 해야겠다.
뭐냐 하면 학교의 교수님인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교수님이라도 골프 치는 것은 사치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온 총장님이 교수님에게 골프를 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수님은 목사님이 골프 치는 것이 사치라고 하였기에 머뭇거리는데 총장님이 치자고 하니 어쩔 수 없어서 골프는 쳤는데 그때 옆의 교수가 고혈압으로 쓰러진 것을 보고 얼른 앰브란스 불러서 살려내었습니다.
결국 왜 골프 치게 된 것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본인은 형제를 구원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그렇게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김 교수님은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골프를 쳤군요! 아닌데요? 저는 골프 칠 마음이 없었는데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형제를 살리는 일을 하도록 누가 조치를 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일을 보고 김 교수님이 주여! 정말 다 이루셨군요! 나는 그 일에 증인으로서 부름을 당하는, 주님께서 다 이루심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하여 증인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골프를 칠 때는 이것은 윤리와 도덕적으로 보아서 사치로 보았는데 그러나 그 사치가 결과적으로 무엇으로 바뀐 것입니까? 성경 말씀을 이루는 재료로서 포함시킨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다윗이 그랬고 스데반 집사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마지막 종말인데 나 구원받아야지! 성경에 보니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되어 있으니 형제를 위하여 재산을 내어 놓아야지! 이렇게 나오신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다 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지켜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나타난 실적이 있어야 그 실적을 보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적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판단한 잘못된 실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형제를 사랑할 때에 한달에 돈을 얼마나 주어냐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니 사람이 어떤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과거에 체험한 것을 대충 끼워 맞춘 엉터리 같은 기준에 불과하지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의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해서 집도 마련하지 않고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 보았자 잠은 어디서 잘 것입니까? 그러면 노숙자 생활을 역 구내에서 할 것입니까? 역도 나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이지 예수님의 기준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킬 수 없다고 안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으니 다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께서 다 이루셨는데 왜 우리가 지켜야 합니까? 다만 남아 있는 것은 다 이루심이 우리에게 적용이 될 때에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반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것이 얼마나 모호한 말입니까? 돈이 얼마가 있는 것이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은 인간이 행할 수 있도록 해석하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종말은 무엇이냐? 다 이루심이 그 내용물을 가지고 공중에서 살포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무엇이냐?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우리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는 것을 위에서 살포하는 행위가 종말의 행위입니다. 위에서 살포하면 우리의 얼굴에 무엇이 묻지요! 그것을 보니 다 이루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3장에 보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보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묻었구나! 은혜이구나! 그러니 은혜를 아는 사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도이고, 아직도 말씀 몇 가지 더 지켜서 복을 받아야 하겠다고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니고 그렇지요!
말씀 하나하나가 다 은혜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가운데 어려운 사람이 있으니 도웁시다. 할 때에 목사님! 우리가 꼭 도와야 되겠습니까?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았는데 도와야 구원을 받습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그때 목사님이 지금 그 성도가 그렇게 어려움에 처한 것도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심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주님의 다 이루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도와줄 마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의 다 이루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이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옵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봉사를 하든지 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종말은 무엇이냐? 다 이루신 말씀을 공중에서 확 흩트리는 것입니다. 그 흩트리는 것이 무엇이냐? 용서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주님께서 너를 용서한 것 같이 너도 남을 용서하라고 되어있습니다. 다 이루심이 살포 되었기에 그 다 이루심을 받았다면 너도 그 다 이루심을 남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네가 용서 받았으면 나는 이런 용서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용서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나 예수님을 저주한다고 할 때에 목사님 저 사람을 치리합시다하면 치리할 필요 없이 베드로도 그랬는데 그럴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설사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주께서 용서하심을 믿습니까? 그렇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는 그런 용서도 받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몇 달 후에 제가 정말 잘못하였습니다. 하면서 올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고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불러서 당신이 예수님을 저주하니 우리가 당신을 치리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옛날에 우리가 잘나서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 예수님께 어떤 욕도 다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옛 모습을 다 보여주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사울도 구원받았습니다. 사울도 사도로 부름을 받고 구원을 받았는데 이 말은 바울 앞에 어떤 누구도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았는데 복음에 대하여 나보다 더 빠삭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예수님을 핍박하던 죄인도 구원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들도 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주님의 용서가 임하면 용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복수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 받아놓고 백 데나리온 안 갚는다고 할 때에 주님께서 그런 인간을 진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주님께서 다 이루셨는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 될 텐데 새삼스럽게 인간들끼리 누가 높으냐! 누가 낮으냐!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짓은 십자가 밑에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말이 왜 중요하는가 하면, 성경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는가 하는 해답이 나옵니다. 성경은 어떻게 지킵니까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눈 감고 찾아서 어떤 본문을 보더라도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떻게 다 이루셨으며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그것만 찾으면 성경해석은 만점입니다.
제가 눈감고 실험적으로 해 보겠습니다. 이 성경을 보니 잠시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오신 다는 것을 이미 확정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앞당겨서 오시리라고 현재 우리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 이루심을 믿는 사람은 장차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것도 이미 내 속에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장차 오신다는 것이 가봐야 안다는 것이 아니라 가보지 않아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안 가보아도 오신다는 것은 미래이지만 그 오신다는 믿음은 현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루심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너는 왜 안 믿어? 내가 이것을 안 믿으면 지옥 가는데! 이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 이루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종말 사건이 있다는 것, 하늘과 땅이 불에 살라진다는 것을 자꾸 안 믿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가 봐야 알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거창하게 나타날 불 심판에 대하여 묻지 말고 지금 예수 안에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왜냐?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떤 선을 그어놓고 어떤 한 인간을 세웁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선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습니다. 그런데 이 선을 지우고 예수님을 그려놓고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습니까? 그러면 어! 나 밖에 없는데! 그러니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안이라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이것은 손에 잡히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안 믿으면서 마지막 때에 불 심판이 온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불 심판을 믿기 전에 지금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네! 나 밖에 없네! 그렇게 나오면서도 나중에 하늘에서 벼락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은 믿고 싶은 이유가 무언가 사적인 맺힌 것이 많은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 한 맺힌 것이 많은 모양입니다.
지금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안 믿는다면, 장차 불 심판이라는 것은 괜히 자기가 상상해서 한번 그려보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 상상해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옳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미래에 될 일이 이미 도착해 있어서 나는 이미 그 미래와 함께 미래로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좀 쉽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힘이 들지만,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능력이 나옵니다.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컵을 드는 것이 누구의 능력입니까? 사람의 능력이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인간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는데 제가 물을 잡지요! 그런데 어떤 인간도 이 물에서 능력이 나와서 나로 하여금 이것을 안 잡으면 못 배길 정도로 만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우리가 십자가를 붙든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우리를 붙들어서 데리고 다닌다고 합니다. 성경을 사람들이 납득이 되도록 믿으면 안 됩니다. 납득이 안 됩니다. 내가 물을 잡고 김치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내가 물을 잡고 사진을 찍었는데, 성경에는 물이 나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주체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보이는 주체의 행동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것 까지 쥔다고 이렇게 보는데, 성경에서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이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부흥회할 때에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사님! 귀찮은 소리하지 말고 우리가 어떤 능력과 어떤 행동을 하면 복이 떨어집니까? 그 이야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귀찮으니 다 치우라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가 어떤 행동을 하였더니 복을 받았다. 어떤 집사가 목사님을 섬겼더니 복을 받았다는 그 이야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성경을 몇 장을 읽었더니 복을 받고, 성경을 얼마를 읽었더니 병이 낫고, 어떻게 하였더니 교회가 부흥이 되고 하는, 인간 쪽에서 어떤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안겨주신다는 그런 이야기만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회입니다.
앞에서 강대상을 열심히 두드리며 찬송을 부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저렇게 열광적으로 두드리면 오늘 은혜를 받을 것이다. 찬송을 열광적으로 부른다는 나의 행동으로 인하여 복이 거기에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부흥회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입니다. 오게 하시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은혜 주고 아니 주고 하는 것도 주님의 손에 달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공로와 영광과 능력과 찬송을 다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 나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서도 나오는 능력이 있는데 이렇게 나에게서 나오는 능력이란 악마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악마에게서 나오는 능력을 때려 부수시는 능력입니다. 악마를 때려 부수는 능력입니다.
악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원수로 만들고 따라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해서 예수님은 왜 내 뜻대로 해주지 않습니까? 하면서 시시로 원한과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혹시나 그것이 들킬까 싶어서 성경보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예배 참석하지만 항상 내부에는 시큰둥한 모습, 주님께서 어이 이근호 할말 있으면 해봐!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요 뭐! 어허 할말 있으면 해보라니까! 아닙니다. 제가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이야기 해보라니까! 그러면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는 왜 5천명 담임목사 안 해주는 것입니까? 그러냐! 또 뭐냐? 저는 왜 벤츠 못 탑니까? 또 이야기 해봐! 저는 왜 백 평짜리 아파트에 못 삽니까? 또 말해봐! 왜 저의 자식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못 됩니까? 진작 그렇게 나오지 또 말해봐! 아닌 척하고 성경보고 또 이야기 해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까발리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니 까발리는 것이지 만약 우리 능력 같으면 우리는 감추기 바쁩니다. 무화과나무 밑에 왜 숨습니까? 감추려고 숨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자기 죄를 까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교묘하게 감추기 위하여 모든 능력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가 꼬깃꼬깃 숨겨 놓은 우리의 진짜 분노, 진짜 자기의 의라고 여기는 것, 진짜 안타깝다고 여기는 것, 진짜 주님이 나에게 실수하고 있다는 것 그런 것 까지 다 파헤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그것조차 다 이루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이룸으로 구원받았다는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에 나온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무엇이냐? 우리 가운데 가진 자가 누가 있으며 잘 난 자가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못난 사람인데 택함을 입었기에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오직그리스도만 자랑하겠다고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라고 고린도 전서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두 번째 시간에 무엇을 이야기 하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컵을 드는 능력, 물을 드는 능력과 다르지요! 어떤 능력입니까? 우리가 컵을 들던 무엇을 들던 우리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것들,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들과 예수님을 시큰둥하게 여긴 것들, 억지로 예수님 믿게 하는 요런 것들을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능력이 들어옵니다.
왜 가진 것으로 감사하지 못하는가? 그동안 살아온 것으로 감사하지 못하는가? 예수님은 33세밖에 안 살았는데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더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보면 얼마나 성경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있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길게 이야기 하였지만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쉽게 그림으로 그리면, 오늘이 며칠이지요! 5월 12일! 오랜만에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2006년 5월 12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믿는 그 순간부터 과거가 되기에, 내일 13일이 되면 12일 믿었던 그것을 계속하여 가져가려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저 어제 믿었습니다. 오늘까지 효과 있겠지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13일 되면 이미 12일 은 과거사가 되기에 미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이것은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 그러면 내가 5월 12일까지 믿을 가지려고 애를 썼는데 그러면 5월 13일 되면 그 믿음이 사라져버린다면 5월 13일 죽으면 지옥 가겠네요!
그런데 제 말을 들어보세요! 5월 12일 믿는 십자가 믿음을 이미 과거물로 여기고 밀어내는 그 능력과 더불어서 5월 13일자 새롭게 십자가 믿음을 만들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꼭 옛날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은 것, 방언 했던 것, 옛날 6.25때 폭탄 맞았는데 살아난 것, 몇 년 전에 큰 부흥회 열어서 은혜 받은 것, 그런 것들을 계속 우려먹고 그런 것을 밑천 삼아서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세요! 목사님 지나간 어제의 이야기 말고 오늘 주님은 어떠셨습니까? 그것을 묻고 싶습니다. 여기 목사님들 계시지만 목사님들의 시험거리가 무엇인가 하면 주일날 설교를 하려고 토요일 까지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 주일날 되면 토요일 까지 은혜롭습니까?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것은 토요일 까지 주님이지 주일날의 주님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을 버려야 됩니다. 또 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토요일까지 은혜 받은 것을 주일날 이야기 해 버리면 이것은 같이 은혜 받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받은 은혜를 교인들에게 강제로 가르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요한 일서 2:27절에서 보면 성령을 받은 자는 누구에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어긋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제가 토요일까지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 또 이 성경을 보니 세상에 이렇게 깊은 은혜가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라고 다 같이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그러면 같은 성령 받았으면 목사님이 토요일까지 은혜 받은 것도 은혜가 되는데 주일날 받은 은혜 그것도 동감이 되네요! 같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장성, 주님께서는 어제의 주님이 아니라 오늘의 주님이지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는 말씀대로 늘 일하는 것입니다. 11일까지 주님이 역사하셨다면 오늘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 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여러분은 주님께서 피곤하게 하셔서 잠이 오게 하십니다. 그래도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높이 들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능력이 나온다. 그 능력은 우리의 과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과거에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무언가 새롭게 규정을 합니다. 자꾸만 틀을 만듭니다. 세상은 이래! 예수님은 이래! 그러나 그러한 틀들은 미래에서 불어오는 십자가의 능력, 미래의 능력에 의하여 모조리 다 늘 상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듭니다. 기도를 하였더니 내 남편의 병이 나았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해야지요! 그것이 12일입니다. 그런데 13일 주님이 묻습니다. 네 남편 병 낫는 것이 낫냐? 네 남편과 함께 지금 낙원 가는 것이 낫냐? 나와 같이 얼굴 맞대는 것이 낫냐? 바울 사도는 빨리 나를 보기를 원하였는데 너는 남편이 나았으니 한 십년간 더 살고 싶으냐고 자꾸 묻지요?
아하- 어제는 남편의 병 나은 것이 감사하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주님의 나라에 가고 싶은 것을 가로 막는 하나의 방해요소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성도이고, 주님께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하셨는데 같이 한 평생 15년간 더 살고 싶습니다. 하면서 내 남편 다시 병들게 하면 예수님 안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은 결국 욕심입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보다 이 세상에서 내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겉으로는 웃고 계시지만 속으로는 뜨끔할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지적하고 누가 깨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합니다. 그렇게 안합니다. 내 남편 내가 기도해서 병 나았다. 1년 뒤에 우리 남편 내가 기도해서 병 나았다. 우리 같으면 우리가 기도해서 그 능력으로 병 나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이 임하면 그것마저 부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3층천에 올라가면 그것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사건화 되어서 계속하여 우리에게 밀어 붙인다는 것이 이 두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존재를 꾸미려고 하는데 꾸며보았자 주님의 능력에 의하여 꾸며놓은 존재를 부수고 내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은 오늘만, 내일은 내일 것을 주님이 주실 것입니다. 내일 주실 것인데 내일 굶어죽으면 그것은 고맙고 무슨 더러운 팔자가 되어서 더 살아야 한다면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팔자가 좋아서 내일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간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팔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해서 주님을 증거 할까 하는 주님의 문제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렇게 이야기 하신 것을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무엇입니까? 주님 우리 자녀가 내일 결혼식 하는데 주님의 재림은 결혼식 끝나고 재림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과거에서 흘러온 나의 자존심 덩어리 같은 것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고맙게도 마귀가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하는 말은 우리가 마귀를 물리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귀는 마귀대로 일을 하여 우리의 과거에 집착하도록 하고, 주님은 주님대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셔서 주님의 기도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주시는 일을 지금도 쉬지 않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쉬고 마지막 시간 하겠습니다. 녹취 061016 이장우
종말론 1-3
06. 5. 12 강의 이근호목사
요한복음 1:1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종말이 시간이 되어서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천국이 위에서 주저 앉아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시간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시간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통하여 해가 뜨고 지는 것이 하루로 구별이 되고 이것이 365일 모이면 1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날과 시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간 속에 가두어 두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갇혀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갇혀있는가? 시간에 갇혀있고, 공간에 갇혀있고, 자기의 육체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등에 날개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없습니까? 때로 차가 막히면 등에 날개가 있어서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왜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는가 하면, 현재 인간의 육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에 갇혀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너는 날게 없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한계를 지은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스러운 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은 뒤에 무한대로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과 육체에 갇혀있기에 자기의 욕망대로 따라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독약을 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해독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해독제를 보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독제가 아니라고 차버렸으니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힘으로 육체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하여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게 되면 육체에 갇혀있었던 영혼만큼은 영원한 천국에 가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상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세계가 천국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전부를 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는 세계를 하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5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는 어디에 속합니까? 하늘입니까? 땅입니까? 태양은 하늘에 있습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땅이라고 합니다. 안드로메다이든 은하계이든 그것을 땅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어디에 가셨는가 하면 하늘에 가신 것입니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에 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다 육체를 따라 생각하기에 모든 것이 육체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5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나보다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섰다고 합니다.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셨다고 합니다.
내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내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먼저 계셨다는 것은 외곽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앞서고 뒤서는 것은 땅에서만 해당되는 법칙이고, 하늘에서는 앞서고 뒤섰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계신분이 주저앉으시면 이 땅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잡혀갈까봐서 무서워서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로 들어왔습니까? 1) 창문, 2) 정문, 3) 벽, 4) 지붕, 어디로 들어오셨습니까? 이 모든 경계들은 땅의 법칙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땅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땅은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학자들도 골치 아픈 이야기 물리학을 따지고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과학적으로 따지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세례요한 보다 더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 분이 먼저 계셨다는 이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 그 증거가 스데반 집사님이 죽을 때에 예수님이 그것을 보시고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돌아 맞아 피가 나고 코피가 나는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올라오너라! 내 영혼 받아주소서! 그래 올라오너라! 그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우리가 잘 때도 주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은 잘 때도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자기를 걱정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주님과 함께 함을 믿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 따 먹고 난 뒤로 자기 자신이 신이 되려고 애를 쓰다보니 이제는 신은 저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리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도 알만큼 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과 육체에 갇혀있습니다. 갇혀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일곱 번째 돌아오는 날을 무엇으로 정하였습니까? 안식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고 예배를 안 드리고 나무를 한다던가 하면 죽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는 안식일에 갇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안식일을 무시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무시할 입장이 못 됩니다. 주일 같은 것은 없고 옛날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갇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에 갇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사람이 갇혀있어야 깨닫지 갇히지도 않고 개망나니처럼 자기가 잘났다고 돌아다니는 자가 깨닫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다 자기 잘났다고 하는데 가두어 놓아야 주제파악을 할 것이 아닙니까? 구약 때에 안식일에 가두어 놓았던 그 주님께서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가두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이 무엇이냐 하면, 안식일은 시간과 공간과 육체라는,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네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그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살게 되지만 인간이 죄인이기에 이 죄가 시간과 공간에도 퍼지게 되지요! 그러니 안식일도 훼손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인간의 죄에 의하여 훼손이 되니까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 의하여 안식일을 완성하시고 완성하신 주님 안에 이 인간 전체를 다 가두어 놓으시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신약에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좀 구조가 복잡하지만 성경책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안식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거룩한 날에 갇혀있다는 것이 요즈음 거룩한 분에게 갇혀있다는 것이 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시간과 공간과 육체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갇혀 있기 때문에, 현재 창조에 의하여 갇혀 있는 것이 그 바깥에서 다 이루었다. -마지막 시간에 어려운 것입니다만 아이들이 다 모르면 어른들이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른이 모르면 할 수 없지만- 지금 이것이 시간과 공간과 육체입니다.
그리고 이 지구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멸망하고 아니하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창조할 때에 이 원리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거룩이 깨어지면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깥에 무엇이 있다고 하였습니까? 하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그대로 있다면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부분인데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할 때에 천국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서 그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다 이루어질 때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어려운 이야기인가 하면 천국이란 이 쪽에서 이 쪽으로 옮겨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다 이루어졌으니까! 그러니까 구약 때는 천국이 없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선물로 가져와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니 천국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실 때에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다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에 먼저 계신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이 저질러놓은 모든 죄를 완성 태로 바꾸어 놓습니다. 완성 태로 바꾸시고 그것을 다 이루었다는 증거를 위하여 부활하십니다. 부활하시고 나면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이것은 필요 있습니까? 필요 없습니까? 여기에 있는 말씀이 다 이루어져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이제 이것들은 필요 없다고 치우는 것을 불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불 심판입니다. 베드로후서에 나옵니다. 현재에 있는 갇혀있음, 현재 인간을 갇혀놓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과 신체는 죄로 말미암아 이것은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이 죄는 따로 보관을 해둡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지옥에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예수님께 이렇게 대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반항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자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하면, 현재 우리를 가두어 놓고 있는 시간과 공간과 신체는 지금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몇 년 더 사는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쌍꺼풀 수술 하는가 마는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날씨가 좋은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 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 의미가 없습니까? 거기서 거룩이 나오지 않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 한다고 해서 거룩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월드컵 16강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시기 위한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 첫째 사건이 이동국의 부상입니다. 이동국이 있어야 16강 희망이 있는데 갑자기 사건이 일어나 혼자 삐걱해서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16강에서 8강이 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순간 아차! 내가 이동국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믿어야 되는데 하면서 중간에서 움찔하는 것입니다. 4강을 하든 우승을 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잠지 그 생각이 바뀝니다. 그래도 한 3초 후에 다시 돌아와서 이동국 믿지 말고 조재진 믿어야지! 하면서 바뀌지만,
차범근 한골 넣고 기도할 때에 차범근의 하나님이 함께 해서 골이 들어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차두리 대표팀에서 탈락한 것을 보니 기도해도 안 되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기도했겠어요! 차두리 뽑히게 해 달라고 그런데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될 수도 있겠지요! 송종국이 부상해서 차두리가 뽑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우리는 거룩에 갇혀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활용 한다. 사용한다는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주여 또 무엇을 사용할까요? 아니야 너는 갇혀있어! 아닙니다. 저는 신입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내가 신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더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인 것을, 내가 마음껏 자유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갇혀있는 것입니다.
내가 날 수가 없습니다. 바쁠 때는 알약 세 개 먹고 때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됩니다. 우리는 밥을 챙겨 먹어야 합니다. 배고플 때는 설교도 안 됩니다. 밥 먹어야 합니다. 잠 안자면 설교도 안 됩니다. 우리는 신체에 갇혀있습니다. 갇혀있는 신체를 더욱 갇혀 있게 만듦으로 이 신체에서 벗어나기를 고대하도록 만듭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우리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그때에는 하늘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플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없는 사람은 아플 때 주여 낫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나오겠지만 그러나 진짜 성도 같으면 아파볼 때에, 주여! 신체가 나를 또 가두어 놓는군요! 주여 제 힘으로는 이 신체를 벗어날 수가 없으니 주여! 이 링거바늘 다 떼버리고 데려가 주시옵소서!
특히 연세 많으신 분들이라면 너희들 애타게 번 돈 여기에 쏟아 붓지 말고 제발 뽑아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소원이다. 정말 주님 보고 싶다. 괜히 식물인간 만들어 형제간끼리 싸움붙이지 말고 너희 애들 피아노나 하나 더 가르쳐라. 나 장렬하게 죽으마. 이게 고려장이다. 내가 죽겠다. 이렇게 말할 때에 예 뽑겠습니다하면서 뽑는 자식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오면 야야! 내 죽겠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라! 삼성병원으로 옮겨라! 이러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 어머니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권사 맞아요? 권사 좋다! 마지막에 저렇게 추잡한 모습이라고 말은 못하지만 아이고 저게 인생의 마지막의 모습이냐? 이러지 않겠습니까?
야야 죽을 때 관 좋은 것 해라! 관? 그냥 화장입니다. 차마 말은 못하지만 관은 무슨 관!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내 것이라고 여기고 마음대로 자유를 발휘하겠다고 하는 것은 종말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옛날 박사교회에 있을 때에 종말 종말하면서 유명하였습니다. 드라마에 종말이 나왔습니다. 서울의 달인가 하는 드라마에서 종말이 나와서 유명하였습니다. 옛날이야기 입니다마는 갈수록 늙어갈수록 육체가 우리를 압박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포기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하면, 몇 년 더 살까가 아니라 나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 하면서 시간을 초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위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가 하면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연세 많으신 분은 땅 한 평 더 넓혀서 내 땅 내땅하지 마시고 그 땅을 초월함이 있어야 합니다.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됩니다. 그것도 돈이 많이 듭니다마는 강남에서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가 6억 정도 됩니다. 여기는 영 적지만, 연세가 들수록 어린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하면, 현재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별 의미 없이 시시하다는 것, 이혼을 한다든지 무엇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젊을 때는 애 하나 아픈 것을 가지고 천하가 난리날 것처럼 난리를 지기지만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런 것은 이제 천사처럼 그런 것을 밟고 뛰고 날아다니면서 다니는 하늘에 가까운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종말 강의를 끝내면서 정말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종말이라면 외부에 둘러싸인 것이 꺼지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나 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을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이 자체가 얼마나 종말적입니까!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목 베어 죽어 쟁반에 담겨도 할 소리 다하는 것입니다. 왜? 이 신체로부터 해방, 공간으로부터 해방, 시간으로부터 해방되는 이것이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당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크게 쓰겠습니다. 자유라고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께서 너희로 하여금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조직신학의 고속도로를 다 끝내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내주하신 뜻인 줄 압니다. 처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요 마지막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지금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려고 고대하고 기대하고 있음을 항상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종말에 처한 다 이루심의 속에 들어있는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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