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라진 시간] 평 –정진영 감독
(줄거리)
시골 학교 교실-교사A가 방과 후 시골학생 하나 만난다. - 교사A는 다정스레 아내와 감따면서 다정한 시간을 보낸다-낡고 허름한 사택에 산다- 교사A는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에게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못했다고 미안해한다- 아내가 갑자기 전에 돌아가신 교사A의 어머니로 돌변하여 남편을 위로한다. “어린 네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내가 안다”
서울서 친구들이 교사부부 사택을 찾아온다. 밤에 자고 가겠다는 것은 기어이 돌려보낸다. 그 이유는 밤만 되면 아내가 돌변하기 때문이다.
뜨개질 교실이 나오면서 교사A의 아내도 뜨개질 강습을 받는다. 젊은 여선생님이 뜨개질 잘한다고 칭찬해준다. 뜨개질해서 토끼인형을 만든 아내를 보고 교사A는 딸을 갖기를 원한다.
밤에 시골아이의 아버지가 무슨 음식을 주려고 몰래 왔다가 교사A의 아내가 코메디안 이주일로 변하는 것을 기겁한다. 교사A가 뒤따라가서 아내의 비밀을 마을사람에게 함구하기를 원했지만 그 시골아이 아빠는 같은 친구인 이장에서 알려서 삽시간에 전 시골마을 전체가 교사A의 아내가 나쁜 기운을 가진 불길한 여자라고 규정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책을 세우는데 그 대책이라는 것이 밤에만 교사A의 부인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다락에 올라가는 문에 철장을 만들고 자물쇠로 채우고 그 열쇠는 시골아이 아빠가 가져갔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교사 사택에 가져다 주는 것으로 교사A와 합의 본다.
교사A는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밤에만 그 사택 다락방에 자진해서 갇히고 아침이 되면 자물쇠를 건네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다락방부터 온 집에 불이 나서 그 교사A의 부부는 불에 타 죽는다.
형사가 등장해서 온 마을에 대해 수사가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형사가 하나하나 조사해 가는 한편, 어느날 밤 읍내에 있는 자기 아파트로 퇴근하면서 주차 실수로 옆 차를 박는다. 미안해 하면서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전화 번호를 앞 유리에 놔둔다. 그런데 그 연락처는 그대로 있다. 차 주인이 없었던 것이다.
수사를 계속하면서 마을사람들은 서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장과 시골아이 아빠가 서로 싸우는 것을 목격하고 멀리서 동영상 찍어둔다. 형사는 이장에게 전 마을 사람을 마을회관에 모아주기를 요청한다.
수사를 시작하려고 마을회관에 들어서자 마을 어른신네 생일잔치와 겸하고 있었다. 거기서 형사는 억지로 독한 술을 먹고 취해 어느 평상에 쓰러진다. 밤늦게 깨보니 교사A의 사택이다. 사택은 불타지도 않았고 거기서 이미 죽었다는 교사A 부부가 이야기하는 소리를 환상 중에 듣게 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자신은 더 이상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가 아니라 죽었다는 그 시골학교 교사A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지루하게 교사A가 아닌 형사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장면들로 이어진다. 교장이 전화해서 ‘왜 출근하지 않고 무단결석하는지’를 전화로 따진다.
자기 살던 아파트에 들어가서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찾기 위해 행패 부리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간다. 이제 교사B가 된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다 잃어버린 것이다. 시골아이 아빠 비닐하우스에 찾아가 상담을 받으려 하다가 ‘무서운 일이 생기면 모든 일이 바뀐다’는 아이디어를 듣고서 그 자리에서 그 아이 아빠를 죽인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교사B 그대로이다. 시골아이 아빠도 죽지 않고 멀쩡하다. 정신과 의사까지 찾아가 상담 받는다. “제발 원상태로 돌려주세요” 부탁한다.
의사는 교사B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망상입니다. 꿈은 기억의 쓰레기를 소각하는 것이고 상상은 뇌 속의 쓰레기를 소각하는 겁니다” 주인공에게 전혀 소용없는 타인의 지식에 불과하다.
상담을 마치고 시골아이 아빠 동창생들과 읍내에서 식사를 같이 한다. 그곳에서 경찰서 서장 부인이 나왔는데 그 여자가 바로 형사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 교사B(=형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교사B는 자포자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저녁이 되면 사택에서 내일 할 수업 준비를 하며 평범하게 살고자 한다.
수안보 온천 목욕탕 로비에서 우연히 한 젊은 여자를 만난다. 뜨개질 강습 교사다. 그 여자가 먼저 형사를 알아본다. “전에 뜨개질 강습 받지 않았어요? 오후 수업 마치고 늘 오셔서 엄청 열심히 뜨개질 하셨는데. 솜씨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젊은 여자가 형사(교사B)의 지갑에 있는 전화번호를 줏게 된다. “어, 이것 2년 전까지 사용한 내 전화번호인데? 당신 날 따라 다닌 스토크예요?” 형사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는다. 형사도 난처하다.
형사는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한다. “확 죽어버릴까 내가 왜 이렇게 사는거야?” 다소 친해진 그 젊은 여자와 온천을 하는데 그 공중 온천탕에 교사A가 자기 부인과 같이 온천탕으로 들어온다.
저녁에 교사B(형사)는 그 젊은 여자를 사택에 초대해서 맛있는 요리(스파게티)를 해준다. 그리고 그 여자의 감추고 싶은 어두운 면을 고백 받는다. “저에게 아픔이 있습니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겁니다. 혼자 살 겁니다. 왜냐하면 밤이 깊어지며 제가 딴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침 되면 멀쩡합니다. 낮에만 접니다.”
형사(교사B)는 말한다. “나 알아요. 많이 아파요. 내 기억 속의 나로 산다는 것이 너무 아파요” 그 형사의 소리를 듣고 여자는 식사하다 말고 슬피 운다. “밤마다 남이 되어 버린 것을 나는 어쩔 수 없어요”
형사는 말한다. “울지 말아요.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니까요”
영화 끝 장면은 첫 장면과 동일하다. 어느 가게가 즐비한 거리를 배경으로 주인공 형사가 혼자 걷는다. 그리고 영화 화면은 검게 꺼지고 다음과 같은 음성만 들린다. “참 좋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평)
일부러 영화는 완성도를 포기한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세간 평도 무의미하게 한다. 영화가 끝지점으로 봉합되지 않고 개방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영화는 영화 말미를 통해서 영화에서 실제 현실 속으로 섞여 들어온 것으로 말하기 위해 만들었다. 영화는 이 영화가 현실 속의 한 허구로 규정되는 것을 강하게 반발하고 싶어한다.
현실이란 모두 다른 시간대의 기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전체를 모르고 부분으로 각자 산다. 현실이 영화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현실 속의 한 영화(허구)일 뿐이다 는 사실을 못 느낀다. “참으로 이 인생만이 나의 전부냐?”고 따져들면 정신병자 취급받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살면 정상인으로 간주된다. 그저 자기 인생만 맹목적으로 살게 된다.
이 영화는 끝이 없다. 마치 이 현실이 바다와 같아서 넓고 끝을 다 모르는 것처럼.
(복음적 평)
지루할 틈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현실 삶이지만 따지고 들면 왜 바빠야 하는지 조차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갈수록 무거워진다는 점이다. 갈수록 가볍지 않다. 신체 탓인가 세상이 탓인가? 내 탓인가 남 탓인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누군가(악마) 인간의 눈을 가렸다. 최후를 모르게 한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든다. 십자가에 준한 심판 자리가 인간들의 최종점이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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