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308a-히2장1절(낙하산 구원)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2장하겠습니다. 2장 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라고 되어 있지요. 1장 마지막에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님과 천사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데, 문제는 예수님은 천사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했지만, 우리는 천사는 안 보이고 예수님 당시에만 그렇고 예수님만 보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천사를 누구와 이야기할 때는 그분이 한 경험을 우리도 같이 경험을 해줘야 저 분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말합니다. 천사들은 나와 함께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천사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겠습니까?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주님 눈에는 천사가 보이지만, 예수님이 이런 말 했잖아요. 지금이라도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서 나를 빼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대제사장과 제자들 앞에서 그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백날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우리 눈에는 그 주님이 보고 있던 천사가 안 보이는데. 말씀이 이해가 되려면 반드시 무슨 과정을 거치는가 하면, 경험되었을 때만 우리가 믿는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한 번 정리로 적어볼게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앞에 뭐냐 하면, 경험해서 ‘아!’ 이렇게 되지요. ‘아! 그렇구나.’ 이렇게 된다고요. 이걸 믿는다 하거든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건 믿는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아는 게 되는 거예요. 경험한 게 되지요. 경험했으니까 이미 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 도마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배도 만져봐라, 하니까 “아~ 주님이십니다.”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주님의 엄청난 말씀이 나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니까 진짜 믿음은 ‘아~ 경험하니까 믿는다.’ 는 것을 능가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했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그 믿는다는 말을 주님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경험해야 믿겠습니다, 하고 나올 때 그게 우리네 상식인데, 주님은 그 상식 속에 그걸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 눈에만 보이는 그 천사, 그것을 믿음의 내용으로서 말씀을 줘버린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경험을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안 믿는 거죠. 안 믿는 거고 못 믿는 거죠. 이것을 주님께서는 믿음의 바탕으로 보는 겁니다. “주님, 저는 못 믿겠습니다.”를 믿음으로 본다는 거예요. “믿습니다.”하면 인정 안하고 “못 믿겠습니다.”하면 인정해 주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을 우리가 못 믿으므로 “내가 예수님을 못 믿습니다.”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오죽했으면 우리 있는데서 기적을 행하라, 한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니까 소문에 성전도 사흘 만에 짓는다고 하니까, 이 성전 짓는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는데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중요하기 때문에 또 하는 겁니다.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다고 했을 때, 인간들은 경험해야 믿잖아요. 현재 눈에 보이는 건축 구조물, 요걸 사흘 만에 짓는다고 믿는 거예요. 사람들은.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짓겠다.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을 순수하게 들어버리면 콘크리트 건물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그 말이에요. 다른 거 섞을 수가 없어요. 다른 거 아무리 꼬아도 섞을 수가 없어요. 딱 그 이야기라니까요.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은 요 건물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겁니다. 딱 요 크기의 바로 이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 말이지요.
100m달리기 할 때, 달리기하는 트랙을 그어 놨어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선수는 100m 선을 그어 놓은 것은 달리기하라고 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치매 걸린 할머니가 말하기는 “오, 길이 좋네. 이건 걸어가라는 모양이다.” 하고 걸어간 거예요. 100m 걸어갔어요. 100m걸어가는데 그게 필요한 이유가 없지요. 그렇잖아요.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 이 말은 트랙을 6개에 그어서 나눠 놓은 것은 촌에서 트랙터 몰려고 그어 놓은 거 아니라는 말이죠. 이건 용도가 뭡니까? 선수들 달리는 용도잖아요.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비가 새지 않고 그게 성전이에요. 그래서 그걸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게 되면, 거기에 다른 트랙이나 다른 의미를 삽입시키면 안돼요. 예수님이라도 삽입시키면 안돼요. 하나님이라도 그 내용에다가 추가적인 내용을 집어넣으면 안돼요. 거기에 들어가 보면 사람하고 소통이 안돼요. 사람들의 오해가 뭐냐, 분명히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이야기를 했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하고 소통해서 우리를 건지려고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인간들의 오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못 건져서 환장하신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피 흘려 죽이기 위해서 보내신 거예요. 아직도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날 구원하려고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려고 보냈으니까 날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을 보냈다. 이거 우리나라가 아니고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상식입니다. 성전을 지으리라 할 때, 새 하늘 성전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에 보이는 46년 된 성전 그 성전을 말하지, 일체 다른 성전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라,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로마서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거 있잖아요. 나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모든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다고 믿는 것이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뭘 문제 삼는가 하면, 이 ‘나를’ 지워버린다 말이지요. 이걸 사람들은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것에 구원을 안 시켜줘요.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와서 구원해 버리면 그 나라고 하는 것은 전에 내가 구원받고자 애썼던 그 나가 아니에요. 주께서 새로 만들어낸 ‘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나마 내가 같은 걸로 오해를 하는데 같은 게 아니에요. 그게 차이 나는데 그 중간에 뭐가 있는가 하면, 죽음이란 게 들어가 있어요. 죽음이.
분명히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잖아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뭐냐, 이삭이 약속한 자녀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수풀 속에서 뭔가 음~메 하고 양이 울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은 누구입니까? 사람이 죽인 이삭이 아니고 수풀 속에 음~메 거리고 있는 그 양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한테 하나님이 알려줄 때, 그냥 숲 속에 니 자식이 있다, 이리 하는 게 아니고 이쪽을 죽여가면서 저 쪽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죽어가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죽일 때, 내가 알고 있는 믿음, 내가 알고 있는 소망,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죽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을 못 믿습니다.”하면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나, 하나님 건져줘야 돼요.” “안 건져주면 나쁜 하나님, 나 욕할 거야.” 이렇게 나오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그러거든요. 인간은 선악과 따 먹은 자기중심이니까.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서 좋은 게 아니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 구원 안 해주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에요. 같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탈락시켜 줄 때 우리는 흡족케 하는 마음으로 영광 돌리는 겁니다. 꼴 보기 싫은 남편도 같이 천당 가 보세요. 천당 가서 또 싸울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제발 떨쳐주시는 하나님, 고마운 하나님. 내가 싫어하는 사람 발길을 차서 불교식으로 하면 마지막 팔을 집고 있는 손이 쭉 미끄러져서 완전히 깨져가지고 탈락해서 고물도 못 줍고.
천국에서는 주께서 발길질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자꾸 해당되지 않은, 선택되지 않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은 사람은, 발길질로 자꾸 차요. 그 역할을 천사들이 해주는 겁니다. 지금 천사이야기인데, 어렵기 때문에 지금 쉬운 것을 통해서 어려운 것을 접근해 가는 겁니다. 지금 천사가 경험 안 되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믿어야 되는가,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알지요. 우리는 안 보이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가 접수하거나 이 말씀에 들어오게 되면 도대체 천사는 우리한테 어떤 식으로 경험되고 우리한테 설득이 되는지를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리부터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 여기 있습니다. 천사 보여주세요.” 이러면 나한테 이미 문제가 있는데 나는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고 문제없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는 식이라 이 말이지요. 누구 거래하려고 흥정할 일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하고 거래하고 상대해서 구원할 거 같으면 처음부터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 안했겠지요. 처음부터 했다는 말은 처음부터 말이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자를 통하게 해서 건져내는 몫은 전부 누구 몫이냐 하면, 예수님 혼자 다 담당할 몫이에요. 그러면 예수님만 고생 되게 하는 거예요. 믿지도 않는 인간 믿게 하려고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겁니다.
매일 우리는 믿는다, 믿는다, 하는 게 전부 다 내 속에서 나오는 가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 쪼개보면 “경험했으니까 믿지.” 요런 소리 했는데 그건 도마한테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보지 않고 믿으라 하는데 우리는 뭐라 합니까? “보지도 않고, 싶게 말해서 경험도 안했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라는 게 우리가 할 소리의 마지막 카드는 그거에요. 우리는 할 수 있는 거 다 내놨어요. 어쨌든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할 소리에요. 예수님도 십자가 아픈 거 안 보여주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기껏 보여주는 게 ‘패션오브크리스트’영화나 보여주는데 맬깁슨 감독의 그건 일종의 폭력영화거든요.
안 믿어지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해체시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형식이라는 게 있어요. 인간은 의외로 형식을 위해서 목숨도 버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나는 ~~해 라는 형식을 갖춰나요. 그걸 위해서 목숨까지 아낌없이 소비할 마음자세 돼 있는 게 인간입니다. 그걸 자존심이라 할 수 있겠는데, 쉽게 말해서 나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면 차라리 한강물에 내 몸을 던지겠다. 하는 그런 게 있다고요. 그럼 우리가 만나고 소통하려면 뭐부터 깨져야 돼요. “나에게는 적어도 요 정도 될 때 나는 나답습니다.” 하는 그것이 깨어져야 되지요. 그러면 그걸 깨면 되는가, 그걸 깨게 되면 문제가 돼요. 깨게 되면 알맹이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형식이 깨어지면 얼른 다른 걸로 대용으로 채택하는 인간이 있어요. 그게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죄짓고 난 다음에 뭐냐 하면, 대용품을 가지고 자기를 가린 거예요. 뭔지 가렸다는 것은 사실은 가릴 게 없다는 것을 가리는 거예요. 말도 어렵다. 숨길 것도 없는 게 또 가리는 거예요. 뒤태가 아름다운 여인,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은 내비쳤지만 앞태를 보기 전까지는 장담하지 말아야 됩니다. 긴 머리 하고 멋있어 보이고 잘빠졌지만, 뒤 돌아봤을 때는 무슨 장면이 연출될지 그건 모른다 말이지요. 남자일 수도 있어요. 대박 반전이지요. 분명히 긴 머리인데 남자일 수도 있거든요.
숨길 것이 없던 것을 숨김으로서 신비화시키는 겁니다. 유사형식을 제조해 내지요. 이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발각되면 그것이 주께서 우리 죄인을 건져낸다는 작업의 개시인데요. 우리는 죄가 발각될까봐 죄 아닌 것으로 가리는 겁니다. 이걸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평토장한 무덤이라 해요. 또는 이쁘게 페인트칠한 무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장례비용이 그렇게 많이 드는 모양이에요. 아마 장례비용이 많이 드는 이유는 유족들이 장례비용에 대해서 별로 아깝지 않는 느낌이 들어요. 왜냐 하면, 못 다한 효도를 마지막에 퍼붓는 식으로 뭔가 양심의 가책이 됐는지, 그 장례식 할 때에 죽었는데 마치 산 사람처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이런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았다하는 버릇은 이미 평소에 살아갈 때부터 해오던 버릇이에요. 해오던 버릇이다 말이지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신을 대용으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옷을 가지고 해 입었지요. 그런데 옷을 해 입혔는데, 현대에 와서는 어디까지 됐느냐 하면, 레위기 19장에 보면 애굽 사람들의 풍습에 이런 것이 있어요. 문신을 했던 모양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라 하는가 하면, 문신하지 마! 그런데 문신이라는 게 뭐냐 하면, 옷을 안 입고 있어도 피부가 옷을 대용한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면 뭐가 없어져요? 나체라는 게 없어져요. 옷을 입음으로서 뭐가 가린 게 있는데 피부에다 직접 옷처럼 문신을 해놓게 되면 남는 게 뭐냐 하면, 가리개만 남아요. 자기 몸 자체가 가리개가 돼요. 그러니까 가리개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담을 옷을 할 때는 아담입고, 그 다음에 옷 입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옷을 갈아 입힘으로서 가죽옷으로 치마를 엮어줬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옷이라는 것이 그 안에 옷 입을 그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옷은 그 자체가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옷의 취지에 맞는 인간으로 내가 만들겠다는 작업에 들어가는데, 그냥 문신을 해 버리면 ‘하나님이 나한테 굳이 작업할 필요 없어.’ 이렇게 된다 말이지요.
히브리서 2장에서 천사이야기하면서 내가 이야기하는 멘트 시작이 이겁니다. 주님 쪽에서 작업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모든 구원은 우리하고 협상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내뱉는 것은 전부 다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주님께서. 작업에 나설 때, 그 기준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한 천사, 또는 예수님과 더불어함께 있는 성령, 여기가 출발지가 돼가지고 우리에게 작업을 개시하지요.
얼마 전에 죽었던 설교 안 들어봤습니다만, 노아이야기 하던데 그 사람이 설교하면서 나를 의식해서 설교를 했던 모양이에요. 누가 듣고 화가 나고 했는데, 몇일 전에 죽었던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막 살지를 맙시다. 이렇게 나왔던 모양입니다. 날 의식해서 했겠지요. 그래서 제가 의식해서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린 거예요. 평생 막 살아 놓고 막 살지 말라는 게 뭔 뜻이냐? 결국 이것은 뭐냐, 자기 몸에 문신 새기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는다는 문신, 나는 믿음 있다는 문신, 나는 소망 있다는 문신, 나는 사랑이 있다는 문신, 이게 무슨 뜻입니까? “건드리지 마, 나는 이렇게 예수 잘 믿는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주께서 입혀주는 옷이 제는 필요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보만 흘려주면 우리는 정보를 캐취해 가지고 이제는 내가 내 있는 그 자체로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외부에서 오는 거 성령이지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니까 마지막 카드가 그거에요. 자기 몸에다가 성령으로 쓴 성경 66권을 다 문신으로 완전히 미싱으로 말씀을 수를 놓는 거와 똑같은 짓이에요.
내가 잘 믿는 거 보라, 이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간단해요. “보자, 고추 보자.” 해서 치마만 벗기면 돼요. “니 부끄러운 게 뭐지?” “이게 다야?” 내가 가려줄 때 너와 나는 내가 가려준 가리개로 말미암아 소통이 되고 연락이 되는 겁니다. 결합이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6장에서 그리스도가 없으면 세대라는 게 확립이 안돼요. 그리스도가 본드에요. 본드를 발라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고 다시 살 때, 안전유리 하는 게 있잖아요. 안전유리 다른 게 아닙니다. 유리창 두 개 해 놓고 가운데에 고무합성 물질로 해서 본드로 붙여놔서 파편이 깨도 안 떨어지도록 붙어있는 거거든요. 그것처럼 이제는 저주가 와도 주와 함께 받는 저주기 때문에 복이 되고, 주님께서 지옥에 갔다가 음부에 갔다가 천국에 가기 때문에 주님과 안 떨어지고 같이 붙어있으면 썀쌍둥이처럼 머리가 붙은 쌍둥이처럼, 같이 하기 때문에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주님 덕분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따로 떨어져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 무실화 시켜버리면 이건 뭐예요? 이건 옷을 안 입고 내가 내 옷을 대용하겠다는 행세하겠다는 이것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니 제 말은 성령이 와야 체험화 된다는 거예요. 아까 분명히 했지요. 천사를 안 봤는데 어떻게 체험화 됩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체험화 됩니까? 사도바울은 같이 십자가는 안 졌잖아요. 십자가 진적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왔잖아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안전유리창처럼 그 안에 본드가 붙어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보이지 않고 뭐가 돼요? 보지 않고 믿어지는 기적이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아, 이런 내용이 참 어려운데요. 이왕 어려운 거 해봅시다. 천사는 시간이 없습니다. 천사는 시간대가 없거든요. 그러면 천사를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결국은 세월이 가고 늙어가지만 시간이 우리한테 삭제가 되면서, 묵시적 존재가 되면서 말씀 안에서는 우리는 반복해서 계속해서 천사를 느끼고 성령을 느끼는 삶이 되는 겁니다. 나이가 흘러가고 바깥 세월이 흘러가고 주름이 져있어도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시간에 무관한 사람이 돼 버린다 이 말입니다.
시간에 무관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그 자리에서 깜빡거리는 기표다. 이 말이 어려우니까 언어다, 이리 보면 돼요. 기표니까 비슷한 말이 해수욕장에 보면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표시했지요. 떠있는 표시. 부표. 뜨는 표시인데 파도에 삼켜서 없었는데 파도가 물러가면 또 그 자리에서 스치로폼이 왔다 갔다 하지요. 인간이 그렇습니다. 여기 있다가 해외 놀러가도 맨 그 자리에서 뛰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시고요, 묵시 안에 있는 존재가 그렇다고 보시면 돼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써놓은 거 보셨지요. ‘우는 자가 행복하다.’라는 글, 요한계시록 책 내면서 머리말로 쓴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울고 계속 또 우는 게 성도가 세상사는 방법입니다. 계속 울고 우는 게. 울면 울수록 뭐가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이 가신 발자국이 보이고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우는 가운데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거예요. 안 울면 그 기쁨이 없는데. 운다는 말은 세상에 대해서 너무 너무 실망 많이 했다는 뜻이거든요.
주께서 방법이 그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울게 하는 겁니다. ‘울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를 울리는 거예요. 울리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요번에 WBC 떨어져서 속으로 울었지요? 사람이 이렇게 절망을 느끼고 울 일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가신 핏자국이 비로소 그 때만 잠시 보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기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대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복권 사는 이유가 뭡니까? 시간을 버는 거예요. 1주일만큼의 시간을 돈 주고 사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삶의 동기부여가 되는 거죠. ‘지금은 이렇게 직장에서 욕 얻어먹고 힘들지만 요번 토요일에 보자, 대박 난다.’ 그걸 돈 주고 사는 거예요. 그걸 돈 주고 사다보니까 그 기쁨이란 것은 누구한테 속했느냐 하면, 내가 보고 믿는 곳에 포함된 기쁨이에요. 보고서 기뻐하는 그 기쁨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거기에다가 안 보여주는 성령, 안 보여주는 예수님, 안 보여주는 천사를 이야기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어도 말씀에 합체가 안 되지요. 왜? 우리는 항상 기쁨에 재료를 보는데서 찾고 내가 기다리는데서 찾기 때문에 그래요. 로또를 저는 사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복권도 사본 적이 없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왜? 그걸 산다는 것은 나의 시선이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그런 이야기해서 또 시험 드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네. “취미입니다.” “재미로 삽니다.” “그냥 의미 없이 사는 거지 의미 안 둡니다.” 한 둘이 아닐 건데, 내가 또 이런 소리해서 신앙 측정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시는 것도 주의 뜻이고 복권해서 당첨되면 십일조 내고 십자가마을 헌금할 수도 있는 문제이고. 당첨돼서 십자가마을에 헌금 10억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십자가마을은 망한 거지요. 주님이 세운 것이 아니고 인간의 야망이 세운 단체가 되겠지요.
부표의 특징이 뭐냐 하면, 파도치면 ‘없다’ 잖아요. 그런데 파도 지나가면 ‘있다’지요. 아까 그래서 뭐냐 하면 깜빡, 깜빡 했지요. 전에 김 수희의 남행열차 중에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가사 나오잖아요. 없네, 있네. 없네, 있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흔적’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이걸 흔적이라 하지 않고 ‘그림자’라고 합니다. 또는 ‘표상’이라 합니다. 오늘 강의 참 어렵지요?
지금 강의가 계속 어디서 맴도는가 하면, 지금 보이지 않는 천사이야기 했잖아요.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보고 믿겠다고 하면 우리 믿음 자체를 주께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믿어져야 돼요. 보이지 않고 믿어지려면 작업을 내 쪽에서 시작하면 안 되고 외부에서 해야 돼요. 외부에서 하는데 외부에서 들어오게 되면, 왜 우리가 보고 믿는 것은 안 되는가를 알아야 돼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믿겠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시간대에 묵시가 아니고 역사 시간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 기뻐한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내가 저 만치 기대한 거예요.
아까 성전 이야기했지만,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지만 못 지었잖아요. 그럼 46년 짓는다는 말은 에이, 그만 짓자가 아니라 지금 지어진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짓게 된다, 말이지요. 예수님은 그 46년과 같은 시간을 해버리는 거예요. 뭐냐 하면, 사흘 만에. 46년간과 사흘 이란 말, 주께서 사흘 이란 말을 쓸 때는 사람들은 오해한 거예요. 지금 이 건물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46년 시간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아까 윤 집사님 오시면서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큰 귀신이 있고 작은 귀신이 있고. 분량이 있다고. 물리적 개념이거든요. 크고 작다는 것은 물리적 개념 아닙니까? 천사는 형식이 없잖아요. 형식이 없는 데는 물리적 개념 쓰면 안돼요. 물리적 개념이라 하는 것은 뭐냐, 크기, 질량, 부피 이런 것은 차원개념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개념이란 말이지요.
과학이라는 것은 관찰입니다. 관찰해서 동일한 것을 끄집어낼 때, 성공했다고 보는 거예요. 모든 변화는 수학의 삼각함수를 집어넣어서 모든 변화를 파동화 시키고 삼각 함수화 시켜 버리면 거기서 미분방정식되고 그런 방정식으로 화시킬 수가 있어요.
수학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개념화시켜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원칙이 수학입니다. 그래서 수학은 어디에 있느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중간개념에 있다고 본 거예요. 관념의 세계와 이걸 철학에서는 형이상학이라 해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형이하학 물리적 세계의 중간에 수학이 있어가지고 수학을 매개로 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새 애들이 “엄마, 이 골치 아픈 수학 왜 해야 되는데?” 합니다. 그 이야기 좀 더 하지요. 수학을 더 해보겠습니다. 사과가 3개 있잖아요. 그걸 뭐라 하냐 하면, ‘삼’이라 하는 거예요. 전에 수련회 때 했는데. 다시 해보겠습니다. 전 세계에 만약에 사과가 3개 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 세계에 달랑 3개. 3개 밖에 없다면. 사과가 여기 하나가 있다면 이것은 사과를 1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⅓로 봐야 된다는 거예요. 3은 무엇을 뜻합니까? 전 세계에 3개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1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과를 뭐로 봅니까? ⅓로 안보고 뭐로 봅니까? 1로 보지요. 그러면 사과가 몇 개란 말입니까? 무한대지요. 그런데 따져 보세요. ⅟∞은 수학에서 뭐가 되는가 하면, 0이 되잖아요. 1/7억6천해보세요. 작아도 너무 작지요. 이건 그냥 0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1+1=2가 아니고 뭐가 돼요? 0+0=0이 되는 것처럼, 1+1해도 0이 돼요. 그래서 칸트라는 수학자가 무한대를 발견하고 난 뒤에는 이걸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로 여긴 겁니다. 무한을. 왜냐? 무한이 발견되니까 인간의 수학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게 돼요. 의미 없는 게.
그야말로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소고기 사먹는 식이에요. “그래, 살면 뭐하노?” 살아도 안개니까. 잠깐 깜빡이니까. 잠깐 살았잖아요. 살았다가 죽고 난 뒤에는 한 일주일 동안 기억하지요. 나중 되면 누구 유명한 목사 죽어도 한 6개월 지나면 다 잊어버리지요. 그러면 나중에 “다하면 뭐하노?” “나중에 기분 좋다고 소고기나 사먹겠지.” 그런데 그 소고기 사먹는 자기가 죽으면 뭐해요? 다른 사람이 소고기 사먹겠지요. 또.
그렇다면 수학이 무한을 발견했는데 수학을 발견한 무한이 거꾸로 수학을 무의미한 걸로 했을 때, 무한을 발견한 이 모든 것도 의미 있다? 의미 없다? 의미 없다고 되니까 결국은 발설하지 말자. 왜? 내가 수학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아는 게 아니고 수학을 하기 때문에. 수학자기 때문에 수학을 손해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결국 남는 것은 뭡니까? 무엇이 진리냐? 내가 진리요. 그걸 감추는 거예요. 그걸 현대에서는 들추어내지요.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주체는 분명히 없는데, 있는척한다 해서 주체에다가 이렇게 빗금 쳐 버려요. “에라, 죽어라, 이 주체야!” 주체가 있는 이유는 죽어야 될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주체가 있다는 거예요. 프로이드 이후에 라캉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사람은 왜 사느냐,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이거는 하이데거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사는 이유는 죽음을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죽음을 비현실이라고 내몰지 말고 죽음을 내 안에 담아버리자. 이걸 가지고 실존주의 철학이라 합니다. 실존주의.
실존주의 철학 이게 뭐냐 하면, 옛날에 중세 때, 신학자들이 당나귀 이빨이 몇 개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논쟁을 했어요. 요즘도 그렇지요. 666이 뭐냐, 똑같은 소리에요. 부산강의에서 했잖아요. 촛대의 가지 수가 왜 7개냐, 왜 6개가 아니고 7개냐, 왜 5개가 아니고 8개냐, 그러니 뭐라고 정답을 내렸습니까? 그런 걸 따지는 인간이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요. 그럴 때, 어떤 중세 신학자가 당나귀 이빨이 몇 개 되어야 영광이 되느냐, 하여튼 하나님의 영광 밖에 모르는 시대이기 때문에 충성심이 과해서. 그 사람들 비웃지 마세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커트해야 영광이 됩니까? 파마해야 영광입니까?“ 그 아줌마와 똑같아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우리 애가 법대를 가겠습니까? 의대를 가겠습니까?“ 와 똑같은 거예요. 아까 했지요. 그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내 즐거운 것을 찾고자 하는 내 쪽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기도 제목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떤 학자가 이리 했어요. 그러지 말고 직접 세어보자고 했거든요. 그게 정답인 거예요. 그게 실존주의 철학이에요. 실존주의 철학 이전에 무슨 철학인가 하면, 존재고 이 존재는 뭐냐, 신이 주신 거예요. 존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 있게 했잖아요. 그러면 이 존재는 그냥 있으면 안 되고, 누굴 기쁘게 해야 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될 존재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렇게 연구한 거예요. 저 당나귀가 영광 돌리려하면 이빨이 몇 개여야 하는가,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그러지 말고 직접 세면 될 건데. 세어 보면 될 것 아닙니까? 있는 그 자체가 영광이잖아요.
잠언서에 나오잖아요. 가난한 자는 가난해야 영광이고, 부자는 부자 해야 영광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이렇게 하면 안돼요. 나는 부자니까 영광 돌린다는 소리를 본인이 하면 안돼요.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영광입니다. 이런 소리를 본인이 하면 안 돼요. 잠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다시 할게요. 어려워서 내가 할 말이 없는데. 잠언서에 가난한 자와 부자를 지은 자는 하나님이지요. 그걸 나에게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니까요. 왜? 나는 보는 것대로 믿는 오류를 발생시키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의 율법이라 하는 것은 왜 법을 지키라고 하느냐 하면, 법을 지켜야 우리가 위반자인 것을 알거든요.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어길 때, 비로소 법의 가치가 드러나요. 벌 받기 위해서 법을 줬기 때문에 우리는 법 앞에서 항상 못 지킨다가 돼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못 지킨다가 돼 있을 경우에 문제가 뭐냐 하면, 그러면 이것이 못 지킨다면 그럼 온전하게 지킨 게 뭐냐, 문제가 등장하잖아요. 그걸 모른다니까요. 인간은.
그것은 다른 법을 대용해서 지켜봐야 알아요. 그러니까 이쪽 법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법을 또 동원시키고 다른 원칙과 규칙을 또 동원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계속해서 제자리 뛰기이고 계속해서 그 법에다가 또 그 법이 왜 위반이냐, 모르는 그 자체가 죄인데, 그 죄를 죄답게 그 주께서 원하는 죄가 내가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를 경험하기 위해서 또 다른 법을 동원하다 보니까 또 추가적으로 죄를 더 짓는 거예요.
따라서 죄인이면서도 뭘 모르느냐 하면, 왜 죄인인지를 한없이 모르기 때문에 계속 알아가야 될 그러한 운명을 짓는 자가 인간입니다. 오늘 강의 서너 번 듣던지 해야 돼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말려든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에게 말려든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되는가를 그 사실을 위해서 계속 노리개 감으로 말려든 겁니다.
에버랜드에 조각 레고 있잖아요. 만약에 내가 하나의 조각 레고라면, 신데렐라 사는 공주가 사는 멋진 궁전에 들어가 있는데 아니 그걸 빼가지고 배를 만드는데 해적대의 배를 만드는데 그 부속품으로 들어갈 때, 나는 기분 나쁘다 말이지요. 나는 분명히 공주방에 있던 비데에 박혀 있던 레고인데, 어떻게 해서 내가 애꾸눈 재크의 침대 레고냐 말이지요. “바꿔 줘! 씨~ 바꿔 줘!” 우리는 레고를 만든 아이한테 말려든 거죠. 색깔이 같아서 바꿨다. 할 말이 없지요.
가난한 자나 부자나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영광이다. 이것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이건 성립이 안돼요. 말씀과 우리 사이는 갭이 있어 가지고 창세기3장 24절에 이미 두루 도는 화염검이 있어 못 가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가 법을 봐도 그 법의 밑바닥을 볼 뿐이지 안 보여요. 심지어 모세 같은 경우도 답답하지요. 아예 법을 손에 들고 왔어요. 얼마나 확실합니까?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확실하지 않은 거예요. 분명히 보기 때문에 그걸 믿음이라고 볼 수 없는 거예요. 보니까 믿어지고 믿으니까 그게 믿음이 아니고 어쩌란 말입니까? 보이는데.
예수님을 밀고 당기고 예수님 가니까 밀고 당기고 만지고 주물고 난리 했잖아요. 전혀 안 믿은 거예요. 왜? 만지기 때문에. 보고 있기 때문에. 귀신 쫒아내는 것을 봤고, 물 위를 걷는 것을 봤기 때문에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 거예요. 왜? 뭐가 문제입니까? 자기한테 문제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와서 우리를 부셔버려야 돼요. 우리가 그냥 있어 버리면 이 몸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못가는 몸이에요. 지옥 갈 몸을 천국 갈 몸으로 빼돌려 주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가 안다는 것, 믿는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모조리 다 부서져야 돼요. 사랑은 왠 개 코, 누굴 사랑하는데요.
예수님은 천사들한테 시중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도한테도 와서 시중들어요. 성도가 좋아서 성도 말 들으라고 천사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돌보라고 시킨 거예요. 어제 홍선교사님과 통화하면서 그 선교사님이 아마존 하잖아요. 지금 교회도 몇 군데 되고, 자기는 말기 암 퍼져가지고 지금 언제 돌아가시는지 모르는데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여전도사님이 있어요. 여전도사님을 생활비나 여비까지 다 준비하면서 지금의 선교사님의 남편분도 선교사입니다. 그 분이 지금 아마존에서 왔으니까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당신이 교회 하지 말고 한 달동안 허성세월 섬기라고 오늘 미국에서 온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같이 만나기로 했는데.
이거 보세요. 혼자서 약도 못 챙기고 그 정도로, 강단에 서면 외치지만, 다른 것은 못 챙기는 정도가 아니고 아프지요. 암이 주도권을 쥐니까 아프잖아요. 그리고 혼미한 상태지요. 아무것도 못하니까. 애들도 다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까. 그러니 세상일이 그래요. 처음에는 자기가 일을 하는데 나중에는 일이 자기를 시켜요. 원래 술꾼이 처음에는 술을 먹잖아요. 나중에는 술이 자기를 삼킨다고 하잖아요. 술도 마찬가지, 도박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일을 한다는 것은, 사업한다는 것은, 목회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에 치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증거는 일로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 된 것을 통해서만 증거 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일이 없어서 일 달라고 하지 마세요. 일주면 또 일에 치여서 또 불편하고. 일 주실 때, 살살 주세요. 돈은 되면서 살살 주세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지금 주님과 천사는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 바쁘게 돌아가는 것. 예를 들면, 옛날 방앗간, 정미소, 어릴 때 유일한 가까운 공장 아닙니까? 그대 애들한테 공포를 느껴요. 왜? 기계는 너무 시끄럽고 톱니바퀴에 빨려 들어가면 그 빨리 도는 톱니바퀴에 우리를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이 한가하고 있는데 그 순간에도 주께서는 천사한테 바쁘게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를 집어넣어서 뭐하느냐 하면, 파쇄해요. 우리 뜻대로 안돼요. 만사가. 이거 고함질러야 돼요. 이거 음성 나가도 할 수 없어요. 모든 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돼야 돼요. 뜻대로 안되고 그 하는 말이 “주여, 저들은 저희들이 하는 짓이 뭔지를 모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봅시다. 여기에 2절에 보면,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공변된 보응이란 단어가 어렵지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쉽게 하면 이런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만약에 방앗간을 운영한다든지, 아니면 사업체 한다든지, 아니면 부동산 임대를 할 때는, 그걸 하는 게 아니에요. 죄와 공변된 쉽게 말하면 공인된 하늘나라에서 천사들과 주님이 인정한 그 의로움, 그 의로움을 공변된 공인된 거기서 그들이 1절에 보면, 혹 우리가 간절히 들은 것을, 복음을 떠내려갈까, 떠내려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단어가 재미있는 단어에요.
반지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지는, 빠지는 거예요. 분명히 복음의 가락지를 꼈는데 빨래하다 보니까 어느새 빠져버렸어요. 이처럼 반지라 하는 것은 뭐냐,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반지거든요. 이 반지를 차면 수갑이고, 쇠고랑이다 말이지요. 쉽게 말하면 전자발지. 우리가 전자발지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십자가 전자발지인데,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죽었잖아요. 그게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를 한다는 것은 우리는 전자발지를 차고 있는 죄인이라는 뜻인데, 어느새 보니까 우리가 원하는 일에 하다 보니까 거기에 매진하다 보니까 이 주께서 규정하는 죄에서 우리가 멀어진 거예요.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지는 것처럼, 미끄덩하고 빠지는 것처럼, 이게 빠져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하는 일상이 내 죄와 무관한 일에 나의 즐거움과 내 희망사항에 몰입하고 있는 그걸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때 우리는 천사가 안 느껴지고 성령이 안 느껴지고 주님도 안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일이 우리를 뭐한다? 파쇄하고 우리를 개입한다는 말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전자발지 십자가를 복음을 끼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지적하는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 그 일을 분주하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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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0130308b-히2장1절(낙하산 구원)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절에 보면,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이리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올 때는, “어이, 니 조직 잘 크나?” “부흥되나?” “잘 먹고 잘사나?” 이걸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계속 우리 죄를 가리는 쪽으로 죄를 지어놓고 그 더하기 그 죄마저 죄 안 진척 하는 모든 작용을 우리가 분주하게 벌리거든요. 그렇게 하다 보면 뭐냐 하면, 주님의 말씀이나 복음보다도 내가 벌인 사업체나 내가 지금 신경 쓰고 있는데다가 집중하게 돼요. 이사를 한다든지, 딸애 곧 결혼식을 앞에 두고 있을 때는 말씀이 전혀 생각이 안 납니다. 그리고 주례를 할 때 이 주례는 내가 꾸민 이 결혼식을 빛내고 “아이고, 결혼식 참 좋습니다.” 그거 맞는 주례를 원하지 누구같이 주례를 예수님 복음이야기해서 갑자기 사경 만들고 이런 것들과 겁이 나는 겁니다. 사람이 겁나는 것은 현재 내가 내 죄를 숨기는 작업에 차질이 일어나면 ‘하나님 그러면 안 되기‘ 이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지금 천사들의 분주함의 활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 놓고 우리는 “그래도 바쁜 가운데 열심히 믿으려고 해요.” 이렇게 하거든요. 바쁜 가운데, 그 바쁨이 우리가 무엇을 위한 바쁨이며, 누구를 위한 바쁨이며, 누구 좋아라고 일을 벌이고 있느냐, 누구 좋아라고.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올린 거 보셨지요?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가 마지막 한 말이 뭐냐 하면, 제발 살려달라고 하지요. 그 글을 쓰면서 그 사람이 살려달라는 말은 평소에 자기가 살아왔잖아요. 살아온 것과 마지막 끝의 죽음과 자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계속 살아왔으면 계속 살아온 그것으로 살아와야 되는데 죽음이 왔으니까 그만 죽음아 비켜라, 계속 사는 식으로 살겠다. 이리 나오는 겁니다.
그럼 그동안 죽음이란 것을 한 곁에 제켜놓고 도대체 무슨 일을 벌려온 겁니까? 차베스가 한 일이 뭐예요? 계속해서 죽음을 자기는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을 위해서 행복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주님의 것인 죽음을 계속 지우는 짓을 한 거예요. 계속 죽음을 치운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딴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죄를 생산하는 기계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거든요.
아브라함을 만드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만들어서 아브라함의 경건치 않음과 일 하지 않음과 죄를 끄집어내어서 아브라함과, 요한복음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누굴 기다리는가 하면 예수님을 기다렸거든요. 예수님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서 어떻게 구원될 수 없는 내가 주님이 무슨 일을 하셨기에 내가 구원되느냐와 연결되는 그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다 이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자기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일이 뭐냐 하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관련된 일을 한 거예요. 평소에 ‘양 쳐서 시장에 팔아야지.’ 가 아니라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면서 양을 쳤고 염소를 친 거예요. 모든 하는 일이. 그리고 아들 바치는 것도 이 아들을 바치는 일이 분명히 그리스도가 나타날 일과 관련 있다고 해서 아들을 바친 겁니다. 그 관계가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작업에 대해서 여기 ‘공변’이란 말이 나오는데, 상당히 안 쓰는 말인데 ‘이미 판정 난 정의로움‘이에요. 이미 하늘나라에서 정의는 이것이다. 다른 정의는 없다. 고로 공히 이게 의야, 판정 난 것을 공변이라 합니다.
그러면 판정 된 공변, 이것은 1절에 보면 뭐냐 하면, “모든 들은 것.” 성도들이 이미 들었잖아요. 하나님은 이렇고, 복음은 이렇고, 십자가는 이렇고, 다 들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공변 이에요. 이미 정의로움으로 판정난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천사와 예수님 중심으로 일을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그 나머지는 죄지 뭐예요. 따라서 천사가 하는 일은 주님이 일으킨 일을 우리에게 덮쳐버려서 우리로 하여금 공변된 정의 안에 합류시키려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지금도 그 일에 굉장히 바빠요. 주님께서는. 지금 주님께서는 얼마나 바쁘신지 우리의 세상 기도 안들을 정도로 바빠요. 주님의 자신의 일에 몰입하시기 때문에 쓸데없는 우리의 기도는 안 듣습니다. 왜? 주의 일에 지금 분주하시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앞에 공변된 의를 알고 복음을 알고 다시 한 번 우리의 죄를 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던 시간대가 무너지거든요. 시간대가 무너지면 우리가 기다렸던 어떤 우리 딸의 결혼식, 이사 가는 날, 뭔가 복권사고 이번 토요일에는 대박날거야, 라는 기다림. 모두 시간에 구성된 그것이 와르르 아이스크림 녹듯이 이게 다 녹아져 버리면 우리의 고민과 걱정과 희망과 모든 것도 다 쓸데없는 것으로 녹아져버리고 녹아져버리면 우리는 나의 자아도 주체도 같이 녹아져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주님의 일을 하는 하나의 기계, 하나의 도구가 되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식을 얻습니다. 히브리서4장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이리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그냥 우리를 쉬게 하려하는 거예요. 니가 니한테 시달려도 너무 시달렸다는 거예요. 니한테. 너의 희망에 시달렸고, 너의 믿음 유지한다고 힘들었고, 믿음을 유지하려고 하니까 우리 믿음은 체험이나 경험 된 거라 했지요. 그러면 그 경험한 것을 간직할 이름으로 계속 우리의 기억을 저장해야 돼요. 저장하다 보니까 편집이 돼서 과장되게 편집돼서 오버 되지요. 분명히 고등학교 때 1:1로 싸워 놓고 17:1로 싸워 물리쳤다고 이런 이야기 나오고. 무조건 지 첫사랑 이뻤고. 와서 보게 되면 아무것도 별거 아니고. 첫 사랑을 우리 권사님에게 보여주면 “에이, 못 생겼네.” 그런데 그 추억은 계속해서 저장이 돼 있고 그게 될 때 나는 나름대로의 안식이라고 본 거예요.
그 안식과 진짜 안식을 바꿔치기 하는 그 작업이 광야라는 겁니다. 이건 아주 어렵고 무서운 말이에요. 왜냐 하면, 분명히 광야는 40년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40년을 40년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제자리 뛰는 40년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40년으로 보는데 주님께서는 귀 잡고 군에서 나쁜 짓했을 때, 토끼뜀 뛰지요. 그거 하는 40년 이었어요.
애굽에 있는 피자 먹고 싶다. 자장면 먹고 싶다. 짬뽕 먹고 싶다. 하니까 맨날 주는 것이 메뉴는 항상 동일해요. 학교 급식소도 아니고 말이지요. 만나. “엄마, 내일은 뭐야?” “만나” “모레는 뭐예요?” “만나” 만나가 한결같다는 말은 시간의식을 지워버리는 겁니다. 내일 돼봐야 또 만나인데. 내일은 자장면, 그 다음은 팔보채 나오면 기다리잖아요. 피자 이리 나오면. 똑같은 음식이 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시간의 살맛이 안 납니다.
제가 지금 강의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살맛을 바꾸는 작업이 천사가 우리한테 도와주는 작업이에요. 그래서 천사는 고함지릅니다. “니 뜻대로 안 해줘!” 매사에 범사에 우리 뜻대로 안 해줍니다. 살맛을 다른 맛으로 바꿔주는 무슨 맛? 뭘 해도 우리는 죄밖에 안 나온다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봄빛을 느끼다니, 이 봄빛, 이 죄인에게 허용되지 않는, 죄인은 겨울만 있어야 돼요. 영하 25도. 죄인은 그게 합당해요. 벌벌 떨고 구멍새는 데서 이래야 죄인이 합당한 거예요. 그런데 죄는 지어놓고 따뜻한 봄빛이 왠 은혜입니까? 노란 개나리는 왠 보너스입니까? 분홍빛 목단은 또?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만약에 수갑 차고 사형수가 끌려 갈 때, 따뜻한 오월에 낮잠 자게 만드는 그 따뜻한 빛을 보세요.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사형으로 끌려가면서 기분 좋아져요. 그 순간 몇 발자국 뒤에 5분 뒤에 사형 당한다는 시간적 개념이 사라질 때, 그리고 뭘 느낀다? 햇빛만 만끽될 때, 그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요번에 박 근혜 지지했던 김지하가 감옥에서 쓴 수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민주화를 외쳤고 독재를 부르짖었지만 정작 내가 뭘 몰랐는가, 그 창틀 너머로 넘어온 어떤 씨앗이 창틀 앞에서 꽃을 피울 때, 세상에 저 꽃이란 생명이 그렇게 귀한 줄 내가 무슨 짓하느라 이제서 발견했느냐 말이에요. 들풀보다 더 못한 꽃이에요. 그런데 주체가 깨지니까, 꽃보다 아름답다고? 꽃이 웃겠습니다.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아요. 꽃이 더 아름다워요. 꽃이 더 순수하다고요. 들풀이 더 순수해요. 참새가 인간보다 더 깨끗해요. 솔로몬의 입은 옷이 들풀보다 못 합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무슨 뜻입니까? 염려 속에 모든 게 무너져라, 모든 게 전부 다 와르르 무너져버리라, 너는 무너져야 비로소 니가 상상도 못할 생명의 세계가 보인다 이 말입니다. 안 무너지려고, 죽으면 안 돼, 죽기 싫어, 그러니까 지가 벌린 일이 자기가 주님을 가리는 소경, 장님으로 만드는 겁니다. 내가 벌린 목회 일이 내가 하는 목사일이 주님을 못 보도록 가려 온 거예요. 집사 때 보이던 주님이 권사 되고 난 뒤에 안 보이고, 장권사 때 보이던 주님이 장로 되니 교회만 보이고, 그게 전부 다 마귀 짓이고 그 마귀 짓을 허용한 것도 주님이 하신 거예요. 천사가 한 거예요.
매사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용한 어떤 즐거움, 아주 나쁜 경우가 술이고, 도박이고, 마약이고 그런 거죠. 사업이고 이런 거. 나쁜 경우가 그렇습니다. 나쁜 경우가. 약간 좋아 보이는 경우가 목회고, 교회 다니고, 그것도 나쁜 거예요. 하여튼 인간은 집에서 가만히 두러 누워 낮잠 자고 있는 우리를 “일어나, 일해야지.”하고 깨울 때 비로소 또 다시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낮잠 자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될 때, 비올 때 햇빛 나고, 햇빛 날 때 비와 버리는 거, 애들 오랜만에 수학여행가고 소풍가려고 하는데 비가 와서 미루다 결국 못 갈 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것. 주님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아버지 앞에 예수님의 기도가 어떻게 됐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안식할 때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입니다. 안식 들어갑니다.” 아니지요. 이스라엘? “나는 누구입니다.” 는 못 들어가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무엇 때문에 못 들어가느냐 하면, ‘나’가 앞에 박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나를 사랑합니다. 주님이 주체가 될 때만 받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면 구원받아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천사께서 뭐합니까? 주님 앞에 나를 내세우는 것을 나를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주님의 작품으로 뒤에다가 집어넣는 이 작업을 매일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하는 설거지에서 잠자리에서 매일같이 집어넣어요.
우리는 눈뜨면 매일같이 언제 벌써 내가 주님 앞에 와있어요. 어제 은혜로 꿈꿨다! 누가? 내가! 이렇게 나온다고요. 주께서 꾸게 하신거지, 내가 꿈꿨다는 거예요. 내가. 참~ 안식 들어가는 게 힘들어요. 결국. 믿음에 화합 지 아니 하면 안식에 못 들어간다고 분명히 3장 4장 나와 있지요. 그러면 그 믿음이 뭐냐 하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와요. 왜 4장에서 11장이냐, 그 중간이 뭐냐? 중간에서는 바로 말씀이 들어가서 말씀으로 우리를 벌거벗은 채 다 끄집어냅니다.
4장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살아있는 기계거든요. 파쇄기계. 파쇄기계는 왜 살아있어야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화합하기 위해서 그 쪽에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우리한테 무슨 작업을 해야 돼요. 부셔야 되지요.
제가 여러 번 써먹습니다마는, CF에 이런 게 있잖아요. 튀김 닭 CF에 “도대체 이 닭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CF 기억납니까? 차 태희가 나와서 놀래가지고 “이 닭에다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맛있는 거야?” 이 말을 하거든요. 천국 갔을 때, 주님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렇게 맛있어서 뼈까지 다 잡수시는 이런 사람을 만드는 작업은 주님의 보이지 않는 천사가 말씀을 작용할 때,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될 때, “천사가 또 무슨 짓 했지요?” “주님, 성령님, 무슨 짓했지요? 나한테.” 주의 나라에 안식하기 위해서 우리를 오히려 힘들게 만드는 안식을 부셔버리는 작업을 해주시지요.
우리는 그 순간 맨날 울고불고, 그 깊은 뜻을 모르고, 우리는 아침에 눈 뜨면 울 생각부터 먼저 하잖아요. 또 뭐하고 울꼬? 사람이 우는 이유는 웃었기 때문에 그래요. 웃지만 않았으면 울 일도 없는데. 먼저 웃었던 일이 있었거든요. “아이고, 이거 좋은 일이네.” 좋다고 까불다가 넘어져서 울고. 그래서 의사들이 하잖아요. 애가 우는 이유는 엄마 태반에 있을 때, 그 좋은 환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어서 그래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앉아있어서는 엄마와 같이 죽어요. 그래서 엄마는 애를 살리기 위해서 애를 내보내야 돼요. 내보내면 엄마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엄마 대용품을 찾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25살, 30쯤 되면 엄마 닮은 여자와 결혼하고, 아버지 닮은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고. 했다는 게 아니고 하려고 하고. 천사가 와서 와장창 부셔놓고. 엉뚱한 사람과 하고 그렇지요.
우리 주변에 들어보면 참 희한합니다. 분명히 여자는 참 좋은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쇼핑하는 병이 들어서 월급을 다 날려버렸어요. 월 500만원인데 쇼핑에 400만원 쓰고 이건 지도 못 고쳐. 지가 고칠 것 같으면 지가 알아서 고쳤지요. 고쳐지질 않아요. 그런 이야기 들어보면 끔찍해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콩나물 아까워하는 아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평소에는 당연히 아끼는 줄 알았더니만, 그런 이야기 들으면 또 감사해지지요.
여기 3절에 보면, 우리는 이같이 구원이 아니고 무슨 구원이라 했습니까? 구원이 아니고 무슨 구원? 큰 구원. 우리는 이 큰 구원을 그 다음에 뭐했다? 등한히 여겼다. 뭐한다고 그 큰 구원을 등한히 여깁니까? 고마운 것은 큰 구원을 큰 구원되게 하도록 천사가 주님과 함께 부리시는 천사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너희가 어찌 피하리요, 라는 말씀 요 멘트, 요 문장, “야, 야, 근호야, 니가 큰 구원을 안 좋아했지? 한 번 혼나봐라.“ 라는 요 멘트, 매일같이 달려든다는 그 고마움입니다. 니가 그런 시시한 거 말고,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겼다. 암벽 좀 미끄러줘. 큰 구원 있으면 그건 상관없습니다. 어찌 등한히 여기리요, 애들 공납금 못 내도 큰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돌아서면 큰 구원을 시답지 않은 구원으로 팽개쳐 버리고 내가 생각했던 내가 마음잡았던 나의 시간 속으로, 시간이 괴물이에요. 내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내 시간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려 해요.
사람이 아무리 욕을 얻어먹고 해도, 강호동이 어떻고 해도, 강 호동 떠들어 치지요. 6개월만 지나면 다 잊어버립니다. 요 때만 참으면 다 잊어버려요. 과거에 부정한 국회의원도 3개월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뉴스 날 때, 타이밍이 좋아야 돼요. 무슨 사건해서 다루고 하다가도 북한의 핵문제 나오면 뉴스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뉴스에서 빠져버립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신나는 거예요. 시시한 뉴스거리 없으면 교통사고 일어난 그런 거 하지만, 마침 큰 거 터져버리면 작은 거 저절로 다 묻혀버리지요. 그거 다 누가 했어요? 주님이 하신 겁니다.
여러 번 했습니다만, 하도 이 말씀이 좋아서 다시 한 번 읽어 볼게요. 요한복음 17장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 중에서 김정은이도 포함돼 있어요. 북한의 모든 핵문제, 오바마 대통령의 모든 문제가 지금 이름도 없고 유명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생주기 위해서 지금 천사가 그 만큼 악마가 김정은을 지금 일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은 엮여져 있어가지고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따로 뽑아낼 수 없어요.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인간은 제자리 뛰기라고 했지요. 제자리 뛰면서 뭘 보느냐, 제자리 뛰는 나를 봐요. 어제도 은혜 받았다. 오늘도 은혜 받았다. 남는 것은 주님이 안 보이고 계속 은혜 받았다고 여기는 나가 보이지요. 그러면 지금 은혜 받은 것이 S1, 그 다음 은혜 받은 것이 S2, S3...S4합시다. 그러면 이거 다 합하면, 이게 나냐 이 말입니다. 점선이 있잖아요. 점선이 되게 되면 미지의 은혜 S4가 되겠지요. 이리 되면 이건(S1~S3) 다 지나가게 된 겁니다. 이리 봐가지고는 어느 게 나인지, S1이 나인지, S2가 나인지, 모르지요. 어떨 때는 과거에 했던 글을 보고 이러면 ‘아, 내가 어떻게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했을까?’ 한다고요. 지금 보면 ‘이건 믿음도 아니야.’ 그리 되거든요. 그런데 또 내일 은혜 받으면 어제 것은 또 믿음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S1, S2, S3, S4 속에 어느 것이 내 모습이에요? 어느 게 내 믿음입니까? 모르지요. 이걸 가지고 아까 해수욕장의 부표라 했지요. 그냥 파도치면 하는 거예요. 그럼 파도는 누가 치는데? 이건 바로 위에 있어요. 위에. 이것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위에서 밑으로 조정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히브리서에서는 ‘그림자’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실체가 되겠지요.
보이는 것은 뭐만 보이겠어요? 그림자만 보이지요. 실체는 안 보이지요. 만약에 보이는 실체라면 그건 뭐 돼요? 그러면 S5가 돼요. 왜냐 하면 우리는 보이는 실체를 우리가 본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이 약통이 칼디라는 비타민제라고 봅시다. 이 약이 있다면, 비타민 먹어야지, 하면서 우리는 이 약을 먹는다는 거예요. 먹는데, “그거 말고 다른 거”하면 그러면 이 거 말고 다른 거라면, 일단 이것은 아니라고 하지요. 아니라고 할 때, 또 다른 거 쥐잖아요. 그러면 “그거 말고 다른 거야.” 하면 계속해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저, 비타민 먹었습니다.”가 제대로 먹은 게 아니기에 하시는 거예요. 오늘 강의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가 나중가면 ”그건 지킨 게 아니었구나.“를 알게 만드는 작업을 위에서 해요. 우리는 이 비타민제를 먹게 되면 우리는 비타민을 먹은 사람이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건 비타민이 아니었어. 내가 지적한 비타민이 아니었어.“ 되면 우리는 비타민 안 먹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나는 뭘 했다가 안 되게 하는 일을 성사시키는 겁니다. 내가 선악과 따먹은 죄를 죄로서 해야 돼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것은 영원히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곱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건 완전히 공변된 정의, 완전히 확 규정지으려 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놈은 어떤 경우라도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니가 선악과 따먹은 거기다가 또 생명나무 따먹어서 구원되는 법은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뭐냐, 구원은 선악과나무를 따먹은 자에게는 절대로 생명나무를 따먹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은 아까 안전유리처럼 우리를 붙들 수밖에 없어요.
자, 제가 만약에 방송국 카메라 감독이라면, 공중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고 싶다. 같이 뛰어내리는 거 찍는다. 훈련 받은 적도 없고, 낙하산도 이용 안한다. 그 카메라는 쥐어야 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간단하지요. 낙하산 전문가가 나를 어떻게 하면 돼요? 같이 묶으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이게 믿음이거든요. 그러니 땅으로 낙하산 뛰어내리면서 사람들 박수 칠 때, 절대로 내가 낙하산 조정했다든지 내 힘으로 낙하산 했다든지, 자기를 땅에 와서도 해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하지 말아야 돼요. 그런데 지가 알아서 했다는 게 뭐냐, 개혁주의고 그래서 막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죽은 목사가 한다는 거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막 살게 되어 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막 안 살아서 구원 받는다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그걸 우려하는 목사는 뭐냐, 그러면 교인들이 막 살아버리면 교회가 안 된다는 그거지요. 주님의 합당한 사람이 안 된다는 그 말아닙니까? 왜냐, 그 사람 주장은 뭐냐, 성경에 하라, 하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왜 하라, 하는 것을 빼놓고 막 살아도 된다고 니 맘대로 바꾸느냐? 그게 걱정되는 거예요.
지가 주님의 말씀을 지가 걱정 다하고 있어요. 주의 말씀은 우리가 걱정한다고 될 문제고 안 될 문제가 아니에요. 주의 말씀은 우리가 관리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관리자가 따로 있다고 주신 말씀이에요. 주의 말씀을 줬기 때문에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것은 죄 짓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관리하고 있는데, 왜 자꾸 우리보고 악마가 관리하고 있다고 하느냐, 왜 자꾸 우리 애비가 마귀라고 하느냐, 당신이 해도 너무 심하다.
아~ 참, 한국교회 문제에요. 성도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안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아까 시작 전에 집사님한테 물어봤어요. “낮잠을 주무십니까?” 하니까 이렇게 이야기 했지요. 중요한 이야기라서 적어놨어요. 체질적으로 낮잠을 못 잔다고 했지요. 그게 얼마나 믿음의 예화로서 적당한가 하면, 나는 낮잠 잔다, 안 잔다, 둘 다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낮잠 안 잡니다.”가 아니라 잔다, 안 잔다가 체질이니까 내가 통제할 입장이 못 되는 거예요. 낮잠만이 아니고 우리 인생 전체가 그래요. 인생 전체가.
“천국 간다, 안 간다가 내 손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는 것은 낙하산이 같이 묶인 분을 그렇게 증가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나는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못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은혜 주셨습니다.” 내 곁에 누가 묶였다? 주님이 묶였다는 것을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어디서 믿는다고? 어디서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말이죠.
사도바울이 주님 만나고 알게 된 것이 이런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좋아도 너~무 좋은 거예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아도 괜찮고 도적을 만나도 괜찮고, 도둑을 보내신 분도 주님이니까, 도적을 만나든, 강도를 만나든, 폭풍이 치든, 모든 게, 범사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걸.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주세요.”가 아니라 못하게 하는 환경 속에서 있을 때 주께서 하신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도에게 보이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없다는 게 들어오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곧 주님이 다 하게하고 계신다 이 말입니다. 살든 죽든, 죽든 살든, 그리고 자기가 결혼 못한 것도 주께서 그렇게 결혼 못하게 하신 거예요. 노총각의 푸념이 아닙니다. 노총각의 변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차한 변명이 아니고 진짜로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19장에 보면 사람이 날 때부터 고자로 태어날 사람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가 스스로 고자 하겠다고 또 내시 만들지 말고, 그런 짓하면 안돼요. 그런 육체적인 내시를 말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 중들이 머리 깎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이에요. 그냥 머리 기르는 대로 살면 되는데 머리를 홀라당 깎고 옷도 특이한 유니폼을 입고 신부처럼, 인간 자체가 그것들이 조상기도하고 앉아있는 것도 가관이라니까요. 짐승을 옹립해 놓고 거기다가 아침 먹으니 맛있겠지. 회비 많이 냈어요. 밥값 많이 치른 겁니다.
자, 3~4절 봅시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뭐했느니라? 증거했느니라. 따라서 철공소 차렸다고 매일 쇠만 붙드는 거기에다 몰두하는 사람은 방금 읽은 히브리서 3절, 4절 눈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안 들어오지요. 안 들어오는 것을 들어오게 만드는 것은 간단해요. 쇠붙이 하다가 손 다쳐버리면 돼요. “아이고, 씨~” 그걸 가지고 또 하나님 앞에 불만을 들어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 ‘불평문화’라 했어요. 이 세상의 현대 문화들은 불평할 거리를 찾아내는 문화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불평문화가 생겨버리면 뭘 받느냐 하면, 이걸 보상을 받거든요. 요 보상으로 밥 먹고 사는 시대에요. 비행기장이 있다. 소리가 시끄럽다. 불평을 하는 이유는 불편해서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뭘 노리고 한다? 보상을 위해서. 블랙 컨슈머라 하지요. 질 나쁜 소비자. 자꾸 불평을 해가지고 “바꿔 줘! 바꿔 줘! 물어! 물어!” 해가지고 계속해서 불평을 해서 뭘 기대한다? 보상을. 남의 보상 덕분으로 지가 한평생 살아보겠다는 그러한 인식이 날로 확대되는 시대에요. 이 시대는.
그걸 4자로 무슨 문화? 불평문화. 그런데 이런 불평문화가 하나님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오늘 어려운 거 많이 한다. 창세기18장에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요. 천사를 만났는데, 천사의 낌새가 별로 안 좋아요. 소돔과 고모라의 불바다 만들려하는 천사다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불 질러도 좋은데,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지 조카가 있는 거예요. 조카가 있으니까 급한 거예요. 이제 아브라함이 따지지요. 의인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는 것은 악인을 위해서 심판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벌이라 하는 것은 죄를 만나서, 죄를 겨냥해서 쏘기 위해서 벌이 있는 거다 말이지요.
악인만 있으면 몽땅 벌 내리는 것은 아무 문제없는데, 악인 속에 의인이 섞여 있을 때 지금 천사의 태도를 봐서는 이것은 몽땅 다 뽑아내야 되거든요. 의인이 악인과 함께 벌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를 제시하는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문제에요. 이거 철학자들이 이거 풀려고 2000년 걸렸습니다. 지금도 못 풀었어요. 풀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의롭다고 생각하잖아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악인을 뭐 취급한다? 죄인 취급 해버리면 하나님이 스스로 의가 아닌 것으로 자멸하는 셈이 돼요. 왜냐 하면, 서로 반대 아닙니까? 죄와 의는, 의와 죄는 서로 반대거든요. 반대쪽으로는 논리가 되려면 좋은 쪽은 한꺼번에 다 모이고, 다 나눠줘야 되는데 나쁜 쪽을 좋은 쪽에 섞어버리면 순수한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쪽을 나쁜 쪽에 섞어버리면 순수한 의로운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최후의 징벌을 한다는 말은 전부다 나쁘다는 이야기인데, 그 나쁜 쪽에 의인이 섞여 있을 경우를 아브라함 자기로서는 납득이 안 된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기다렸던 모양이죠. 이게 납득이 돼야 돼요. 자, 그럼 이 문제를 예수님은 어떻게 해결했겠습니까? 간단했습니다.
이거였습니다. 악인 멸망 받는데 의인이 끼어드는 이유는 악을 더욱 더 그 자체적으로 희생자로서의 의와 그 나머지가 악이라는 것을 더욱더 드러내기 위해서. 하늘에서 보기에 악하잖아요. 그런데 의인을 악인 속에 심어져버렸을 때, 하늘에서 보기에 악 정도가 아니고 그 가까이 이웃에 있는 의인을 얼마나 학대하고 미워했느냐를 통해서 악을 더욱 더 궁극적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려운 거 해봅니다.
아까 여기에 그림자라 했지요. 그림자 S1, S2, S3 했잖아요. 악인도 마찬가지로 S1, S2, S3인데 악의 원리는 숨어있어요. 악마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안 보이지만 악한 자들은 있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악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여기에 뭐가 필요한가하면, 의의 실체 자가 악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악 속에 합류될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악은 의의 실체되시는 분을 죽이는 악까지 저질러야 되겠지요.
이 사람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아요? 악마의 지시를 받지요. 악마에 도달될 수 있는 악마를 이 현황 속에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바로 의인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요한계시록11장에서 두 증인이에요. 두 증인. 스룹 바벨과 여호수아지요. 두 증인을 파견시켜서 요새로 말하면 누구인가 하면, 성도에요. 성도로 하여금 사람들로 미움 받게 하지요. 지난 수요일날 들었다 했지요. 제목이 ‘일치된 마음’이지요. 일치된 마음에서 마지막대목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 인간들끼리의 일치된 마음은 소용없다고 했지요. 하나님이 성소 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일치된 마음은 뭐라 했습니까? 우리끼리 하는 것은 단합대회 하는 거지, 주께서 인정하는 집단이 아니지요.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5장에 복음으로 인하여 미움 받게 하는 거예요. 교회로 인하여 미움 받는 게 아니고 복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움 받게 하는 이유가 세상은 이미 교회를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누구를 미워하겠어요? 예수님을 미워하는 거예요. 그거는 교회에다가 예수님을 이야기해 보면 알아요.
제 집사람이 일을 나가면서 설교를 듣는데 돌아서면 예화만 남는다는 거예요. 무슨 예화가 남느냐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빨래하고 세수하는 그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 예화가 너무 강렬해 버리니까 주제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거예요. 에이, 핑계. 어쩠든 간에 사람들은 주님을 할 때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의 큰 구원이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를 않아요. 언제 크게 다가오느냐 하면, 우리가 복음으로 애매한 미움을 받을 때 그 때는 과연 내가 큰 구원을 크게 생각 안했다는 자책감을 들게 만들면서 다시 주님과 하나 되게 그 느낌을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게 느끼는 느낌이 오지요.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의 세계입니다. 주께서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데, 결국 우리가 뭐냐 하면, 희생자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기도 자체를 봅시다.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는 롯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요. 50명만 있으면, 45명만 있으면, 40명, 30명, 자기 딴에는 간절한 기도고, 자기 딴에는 의미 있는 기도인데, 목적이 상당히 수상해요. ‘어쨌든 간에 조카는 살려주세요.’라는 기도한 거죠. 증거가 뭐냐, 다 심판 끝나고 난 뒤에 롯이 산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사 살려냈다 이리했기 때문에 롯에게 찾아간 천사가 다 배후에 아브라함하고 하나님하고 이야기가 돼있기 때문에 산거예요. 천사가 “나가! 나가! 빠져나가! 너는 이제 면제됐어.” 하는 식으로 하는 것은 아까 처음에 한 것처럼, 천사가 바쁘다니까요. 매일같이 우리보고 나가래요. 뒤돌아보지 말고, 쟁기잡고 뒤돌아보지 말고 자꾸 나가래요. 우리는 이 세상이 좋은데. 아들 장가도 보내야 되고, 바쁜 일이 많은데 나가래요.
바로 아브라함이 자꾸 살려달라고 했는데, 주님입장에서는 롯을 뭐로 사용합니까? 그냥 살려주는 게 아니고 소돔과 고모라가 이렇게 심판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인 동시에 그 다음 시대에 그 증거를 가졌다는 것 때문에 희생자가 되지요. 딸과 관계해서 모압과 암몬을 낳지요. 자기 속에서 또 새로운 비 복음적은 요소를 봐야 돼요. 그렇다고 롯이 지옥 간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주께서 철저하게 사용되는 희생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 희생은 원형이 따로 있어요.
이러한 S1, S2, S3 소돔과 고모라에서 잘 살았던 롯-S1, 천사가 찾아왔던 롯-S2, 천사가 찾아와서 아내와 같이 나왔던 롯-S3, 그런데 마누라는 뒤돌아봐서 중간에 빠져버렸다-S4, 우리는 이 땅에서 자꾸 뭔가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게 하신 원형은 누구십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입니다. 똘똘 우리를 뭉쳐놓고 우리를 낙하산에 태우든지, 카메라로 찍든지, 울고불고하던지 간에 이미 묶인 것은 우리 힘으로 풀 수가 없다는 이 행복, 세계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랑의 줄로 꽁꽁 묶인 것처럼 하는 노래가 있지요. 이 세상에 사랑으로 노끈으로 해서 꽁꽁 묶여 있는 것, 이건 내가 묶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풀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맨날 울고불고 하지만, 우는 자가 복이 있다, 하는 말씀이 있지요. 누가복음에. 울어라. 울 때 비로소 묶인 노끈이 그 때 보일 것입니다.
또 예를 들면, 힘세던 삼손-S1, 잘 챙겼다-S2, 밝히기는 어떻게 그렇게 밝히는지-S3, 여자 때문에 힘자랑하다 혼났다-S4, 그래서 머리 홀라당 깎이고, 힘도 빠졌다-S5, 에라 죽는 거 같이 죽자 해서 희생물 되는 것, 이스라엘을 위해서 희생될 때-S6,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삼손이냐, 진짜 삼손은 삼손 되게 했던 진짜 삼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삼손이지요. “삼손아!“ 해 놓고는 예수님이 자기가 자기보고 임무를 맡기는 이야기입니다. 소리입니다. ”삼손아, 이거 하라.“ 이 말은 ”주여! 아버지여! 제가 이 일을 하겠습니다.“ 삼손이 했던 일 아버지가 했고, 모세가 했던 일 아버지가 했고,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3장 5절에 나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사환이죠. 사환으로 했는데 충성했는데, 그리스도는 뭡니까? 그 집 맡은 아들이죠. 집 맡은 아들이라 하는 것은 집 주인이란 뜻이에요. 아버지 있다, 라는 말이 아니고 집 주인이란 뜻이에요. 그러면 아들이 살집이거든요. 왜?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니까. 아들 살 집에 모세가 일했으니까 그럼 모세는 누구 말들은 거예요? 바로 주의 이름 아들 말 들은 거예요. 예수님 말 듣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 하는 일은 모세 본인은 만날 울고불고하지요.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만날 반항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고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자기도 성질 나가지고 엔돌핀이 확 돌았는지 작대기가지고 못해먹겠다고 친 거예요. 못 해먹겠다고. 그래서 주께서 하지 마라해서 귀싸대기 그만하라고. 못해먹겠다면서 그러면 니는 약속의 땅 못보고 여기서 살다 죽어라, 해서 죽었지 않습니까? 딱하긴 뭐가 딱합니까? 또 변화산에서 예수님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좋다고 소고기국 먹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묵시에서 역사밖에 모르는 인물을 철저하게 이용했다니까요. 하나의 레고의 부속품처럼. 지금도 우리를 이용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면 이걸 까맣게 잊어버려요. 치매도 보통치매현상이 아니라. 잊어버려요.
똑같은 전화를 하루에 10번을 받아보세요. 기가 찹니다. 완전히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니가? 내가? 진짜 똑같아요. 똑같아. 돌아서면 몰라요. 돌아서면 또 전화하고. 또 전화하고. 우리가 치매환자입니다. 주께서 낙하산을 끈으로 사랑의 끈으로 꽁꽁 묶어줬으니까 한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 사랑의 끈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됐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너는 됐다는 거예요. 이 말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고, 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제 성경이 뚫리지요. 성령이 임하면 뚫리지요. 이건 지식이 아니고, 우리가 체험된 몽땅은 다 엉터리 체험이기에 하게한 그 체험, 그림자라 하니까 S1, S2, 맨날 체험에 울고불고한 그것을 그런 체험을 주신 분은 바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믿음장에 가면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그런 이야기를 제가 앞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의 이야기가 함축돼서 그렇습니다.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5절에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기에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이 천사와 함께 있는 것은 천사를 위함이 아니고 오는 천국을 천사들만 소복이 쌓아 놓고 만든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누구를 넣어준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사람을 넣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9절에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음을 맛본다는 말은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은 산자가 아니고 무슨 자다?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삶을 사시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봐라,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사실은 니 인생이야. 니 인생을 내가 낙하산에 묶기 위해서 니가 가야 될 길을 내가 가고 있는 거야.” “자, 봐라.” 봐야 뭘 압니까? 나중에 모른다고 하는데. “나는 모른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베드로도 대책 없습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자기가 만든 형식이기 때문에 자기가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여자애가 “아저씨도 갈릴리사람이죠?” “아저씨와 같이 있었지요?” 하니까 무엇이 위태 받아요? 자기가 만든 옷, 자기 수치를 가리는 옷, 그 형식, 이 정도 돼야 나라는 그것, 그래야 나는 잘난 사람이라는 그것, 그것 때문에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버리잖아요. “주님이 누군데?” “내가?” 치매현상이에요. 치매현상. “언제 은혜 받았는데?” “나는 은혜 받은 적 없어.” “수요일날 무슨 설교했는데?” 다 잊어버려요. 말씀을 다 잊어버려요. 본문이 뭐더라~
그냥 맡기세요. 낙하산은 맡기라고 준 낙하산이지, 낙하산을 지가 낙서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냥 몸짓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성령이 오게 되면 믿어집니다. ‘주님 저와 함께 있지요?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되게 하셨지요?‘ 이렇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뜻인데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깨어질 때, 내 뜻이 안 될 때, 주의 뜻이 나타남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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