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강-눅20장 27절-40절(부활세계속의 서열)1203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0장 27절에서 4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0:27-40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니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지금 무슨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사두개인 사이의 이 논쟁은 어떻게 하면 돈 더 잘 벌고 출세하는가, 그 논쟁이 아니고 사람은 죽고 난 뒤에 다시 부활되는 것이 없다, 라고 사두개인들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지금 잘못알고 있다고 반박하는 가운데 있는데 지금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지 마시고 일단 사두개인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사두개인들은 뭐냐, 현재 눈에 보이는 그것이 우리의 미래라, 그런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법칙이 미래에도 같이 적용되는 법칙일 것이다, 라고 보는 겁니다. 동일 과정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 일어난 일이 과거에도 동일하게 일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진화론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법칙은 미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우리 인간들은 도저히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미래에 가면 미래의 법칙은 또 따로 있어요. 그것을 현재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알아채느냐 그 말이지요. 무슨 수로 알아챕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법칙, 이것을 살아 있을 때만 해당되지 죽고 나면 이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라는 주장을 만약에 예수님께서 펼치면 사두개인은 뭐라고 하느냐, 네가 가 봤느냐 하는 거지요. 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봤느냐 그 말을 하는 거지요. 항상 출발점을 삼을 때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출발점을 삼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일관성도 없고 확신될 만한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근본적으로 살아 있고 내 몸이 있다는 이것보다 더 확실한 확실한 것은 없는 겁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을 데카르트가 이야기했듯이 부정할 래야 부정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는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그것은 모르지요. 그런데 내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 옆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것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그것이 엉터리라면, 그것이 죄라면, 그것이 마귀의 속임수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오늘 본문의 이 사두개인이 주장하는 것은 누구보다 가장 인간적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납득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미 넘치는 주장을 사두개인이 내세우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예수님 쪽은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고 믿을 건더기도 없고 이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밖에 안되고 이것은 미친 소리에요. 믿는다는 것은 일단 자기자신을 믿고 그 다음에 내가 나를 믿는 원칙을 확대시켜서 하나님마저 도달되는 그 방식을 취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이것은 확실하지.’ ‘확실하지.’ ‘그럼 내가 말한다는 것이 확실하지.’ ‘확실하지.’ 그래서 1미터, 2미터, 3미터, 확실하지, 확실하지, 따져가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확실한 거야’ 이럴 때 인간은 가장 믿을 만 한 거예요.
학문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도중에 다리가 끊어지면 안돼요. 사다리가 끊어지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갑자기 비약한다든지 도약한다면 그것은 반칙에 해당되는 겁니다. 여기서 부활이라는 것은 없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사두개인인 반면에 거기에 비해 부활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부활절이 언제냐, 하는데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부활절이 언제인지 잊은 지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바리새인들이 교회를 세운다면 부활절 있는 교회를 세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이나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이나 예수님 죽이는 데서는 한 목소리를 내는 거예요. 부활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좋은 세계, 부활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주님하고 생각이 같은 것이 아니에요. 주님은 그것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오히려 더 똑똑해요. 부활이 있다 하는 바리새인보다 더 똑똑해요.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확실할 것부터 출발해서 확실한 것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있다 하면 그것은 한 마디로 부정할 수 있어요. ‘네가 죽어 봤나? 죽어 봤어? 천국 가 봤어? 안 가봤으면 이야기를 하지 마. 그것은 불확실한 거야.’ 이 한마디로 입이 쑥 들어가 버려요.
사람들이 ‘네가 봤어?’라고들 하니까 또 봤다고 하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등장하네요. 펩시콜라인지 무슨 콜라인지(펄시 콜레, <내가 본 천국>의 저자) 가 ‘내가 천국 봤다. 다녀왔다.’ 고 한다든지 혹은 천국 가보니 목사가 몇 안 되더라, 그런 온갖 것들도 다 마찬가지에요. 그런 인간들도 꼭 바리새인같아요. 부활을 본 것은 네가 봤지 내가 본 것은 아니잖아요. 네가 본 부활을 내가 본 부활로 납득을 시키려면 또 다시 거기서 확실한 것, 확실한 것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겁니다. 부활이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둘 다 마찬가지에요.
양쪽 다 문제점이 뭐냐, 현재 눈에 보이는 삶 속에서 부활의 세계를 끄집어 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같은 경우는 부활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끄집어 낼 수 없기에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이렇게 가버리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원리가 없기에 부활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저 논리적인 비약이든지 자기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문제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문제가 돼요. 그 희망이 혼자 상상하는 것인지 실제하는 것인지 누가 그것을 보장해 줍니까? ‘나는 되기를 원한다. 나는 믿는다.’ 너 혼자 기대하고 너 혼자 믿는 것이지, 원한다고 해서 다 그것이 세상 현실입니까?
‘나는 부자 되기를 원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자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거든요. 그것은 말이 안 돼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부활이 있다는 흔적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시형제결혼법’이라고 되어 있어요. 28절에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중 어떤 이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모세 율법이에요) 우리에게 써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가정에 적용하기는 매우 낯선 하나님의 법처럼 느껴집니다. 현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지요.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이 예를 든 것처럼 30절에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근거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자, 세상의 모든 법은 인간이 만듭니다. 그런데 이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듭니다. 그러면 천국이 있다 없다, 부활이 있다 없다 하는 그 결정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율법,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찾아보면 될 것이다, 논리가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 그 율법, 하나님의 뜻 안에 뭐가 있느냐, 형이 자식이 없어서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을 때는 동생인 둘째가 그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데 그 둘째에서 자식이 없을 경우는 셋째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하는데 만약 자식이 일곱인데 그 일곱이 그런 식으로 결혼을 했다고 할 때 사두개인 생각에는 나중에 부활해서 천국에 가게 되면 여자는 하나인데 남편이 일곱이 되는 상황이 생긴다는 aKF이지요.
여자가 ‘여보’ 하는데 일곱명이 달려드는 상황이 생기면 이것은 좀비인지 뭔지, 형이 ‘이 여자는 내 마누라다.’ 하니까 동생이 있다가 ‘형님, 그런 소리 하지 마소. 나하고 있을 때 가장 좋았답니다.’ 하니까 셋째가 듣고 있다가 ‘지금 두 분이 미쳤소? 그 반지는 누가 해줬는데.’ 넷째가 있다가 ‘내가 형수에게 집도 사줬는데.’ 이것은 부활의 세계가 개판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의 법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법이라는 것이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만족을 위해서 법을 만들어요.
그런데 사두개인, 바리새인이 다 동의한 것처럼 율법이라는 것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은 아니잖아요. 형이 자식 없이 죽었다면, 전사를 했다든지 배를 타고 고기잡으러 갔다가 죽었다든지, 소말리아 근처에 갔다가 해적에게 잡혀죽었든지, 그래서 형수만 남았을 때 결혼을 하지 않은 동생이 그 형수와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중고품 아닙니까? 중고는 가치가 확 떨어지는데. 물론 돈이 많다면 고려의 대상이 되지요. 그런데 형이 무슨 돈을 많이 남겨뒀겠습니까? 동생 입장에서는 정력이 넘쳐서 안 그래도 젊은 여자 찾고 있는데 늙은 형수, 두 세살이나 위 같으면 모를까 나이 한 40도 훌쩍 넘었다면 나이 이제 20 갓 넘은 젊은 시동생과 나이든 형수의 결혼이라는 것이 남 보기도 우세스럽잖아요.
무슨 이런 법을 하나님이 줬다 이 말이지요. 지금 사두개인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란 이득 챙기겠다는 선입감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흔히 한국교회에서 부르는 노래가운데 뭐가 있습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것 부르잖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법들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요구하는 것, 내가 갖고자 하는 것, 내가 그리워하는 것, 그런 것을 제공하는 법이 되어야 하는데 막상 신명기 25장 4절에 보면 시형제결혼법이 있어서 그것을 보니 ‘형이 자식 없이 죽거든 동생인 너는 형수와 결혼해라.’ 이게 무슨 개인적인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주신 법입니까?
형수와 하나님의 법대로 결혼하면 하나님께서 잘했다고 하면서 새로 젊은 아가씨를 덤으로 첩으로 준다는 그런 것은 없잖아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뭐냐, 하나님의 법에서 부활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을 찾아낼 때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소망하는 것, 인간이 기대하는 것, 인간이 죽고 나서 좋은 나라 가는 것, 그런 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법을 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 해서 법을 줬잖아요.’
사랑이라 할 때 그 사랑의 개념이 우리가 기대하는 그 사랑 개념이 애초에 아니라니까요. 죽어서 좋은 나라 가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부활의 나라가 아니에요. 부활절, 이것은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죄지은 인간이 무슨 욕심을 부려서 좋은 나라 가려고 합니까? 염치없이 그런 심보가 어디 있습니까? 나쁜 짓 실컷 해놓고 죽어서는 좋은 나라 가겠다고 하는데 무슨 그런 욕심이 있습니까?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데. 말도 안되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흔적과 그림자로서 율법을 줬어요. 그러면 율법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형수와 결혼하라는 동생들에게 주어진 이 법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아가 나네요. 형수가 자식이 없는 채 형이 죽어버렸다, 바로 밑의 동생은 형수와 결혼할 마음이 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안을 일으켜야 된다는 생각을 할 거니까. 그런데 일곱째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남자를 여섯 명이나 거친 여자인데, 자기가 무슨 사마리아 여인이라도 됩니까? 심지어 어떤 대목에 가면 욕심을 내서 더 이상 형의 동생 없으니까 자기 시아버지 보고 동생을 낳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나하고 결혼하게. 이런 경우도 성경에 있어요. 다말이죠. 그것도 지옥 간 다말이 아니고 천국 간 다말이지요. 이런 식이면 명절에 이제 큰집에 못갑니다. 혹시 나중에 젊은 애가 없나 하고 찾을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율법의 정신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아무리 연구해도 몰라요. 제가 한 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삭을 찾아내야 돼요. 이스마엘 말고. ‘육에서 태어난 자식 말고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을 가질 경우에만 구원받는다. 이삭을 만들어라.’ 이 계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삭이라 하는 것은 그 전에 이스마엘이라는 육적인 자식을 낳게 해 놓고 그 자식은 아니거든, 그 노선은 아니거든, 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하면 하나님께서 동일한 인간 중에서 골라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둘로 일단 정리정돈을 해 버려요. 한 쪽은 이스마엘 계통으로, 다른 한쪽은 이삭 계통으로 정리해 놓습니다. 정리를 해 놓으면 이스마엘은 이삭 노선을 쳐다볼 것이고 이삭노선은 이스마엘 노선을 쳐다보잖아요. 청군 백군처럼 서로 쳐다보면서 ‘어?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이고 같은 집안인데 왜 너는 그쪽에 서 있고 나는 왜 이쪽에 서 있는건데? 어? 그럼 나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고 저쪽은 약속의 자녀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우리 보기에는 똑같은 한 집안 식구고 어릴 때부터 같이 소꿉장난 하면서 놀고 똥 싸고 오줌 싸고 노는 똑같은 인간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은 노선을 둘로 쪼개버려요. 한쪽은 약속에 속한 노선으로 다른 한쪽은 약속에 속하지 않은 노선, 천국 갈 노선과 지옥 갈 노선으로 율법을 가지고 둘로 나누어버리는 거예요. 구분시켜 버리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왜 저쪽 줄에 서 있어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왜 이쪽 줄에 서 있어야 되느냐를 감안해서 율법을 다시 해석해야 돼요.
이 율법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두 줄로 나란히 서게 만드는가, 그 능력이 율법 속에 어떤 식으로 담겨 있느냐, 그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 율법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삭을 고집하는 이유가 이삭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삭은 사람의 육적인 능력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삭은 죽은 자에서만 나온 자식입니다. 죽은 자가 만들어내는 자식이 살아 있는 이삭이에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자식이 살아 있을 때 부모가 산 자식을 만들지 완전히 이미 죽어버린 그 부모에서 산 자식이 나와 버리면 그 자식은 죽은 부모의 자식이냐, 아니면 죽은 부모 안에서 활동하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냐, 그것이 결정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제 말이 안 믿는 사람에게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교회 등록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그래서 구원받고, 이것은 얼마나 간편합니까? 왜 이런 쪽의 이야기를 안 해주고 두 노선이 어쩌고 저쩌고 왜 이렇게 이야기를 어렵게 하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고 기대가 있는데 그것이 말짱 엉터리이기에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방앗간에 가서 기계에 고추 넣으면 고춧가루 나오지요. 이것은 아무 신기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요. 그 다음에 쌀 넣으면 쌀가루 나옵니다. 어릴 때는 학원도 없을 때라 방앗간의 피대 돌아가는 것 보면서 ‘와, 무섭다.’ 하면서 구경하곤 했잖아요.
고추 넣으면 고춧가루 나오고 쌀 넣으면 쌀가루 나온다,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오지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내 몸 하나 바쳐서 천국 가는 내 몸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내 한 몸 교회 나와서 바쳐서 내 한 몸 천국가게 되었다, 이것은 고추 넣어서 고추가로 나온 것이고 쌀 넣어서 쌀가루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죽음을 담보로 해서 안 죽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삭계통이 아니고 이스마엘 계통이에요. 죽어서 부활의 나라에 간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능력이 와서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어서 나는 좋은데 가야지.’ 이것은 예수님만 할 소리지 네가 할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 세상살이 고생 많이 했지? 죽어서 좋은데 가거라.’ 그것은 장례식 때 흔히 하는 위로의 멘트고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되는 것은 예수님만 자격이 있고 다른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주님께서 천국 넣어줄 것 같으면 주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할 필요가 없잖아요.
처음부터 생명나무는 너희에게는 없다, 그렇게 되거든요. 죽어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부활되신 살아계신 분이 찾아와 줘야 우리는 부활의 나라에 초대받아서, 허락 받아서 가는 겁니다. 사람은 산채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살아 있는 이 몸을 어떻게 해서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세상이 모든 일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시해서 내가 행동에 나서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출발점이 항상 나에게서 출발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일을 시작한 것은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고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는 곳에 내가 수반되어서 그냥 따라 붙이는 식으로 늘 나는 일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약간 미친 사람, 돈 사람 취급을 받을 겁니다.
나는 회사 갈 때 아침에 내가 알아서 회사 간다, 이것이 아니라 주께서 회사가게 하시고 주께서 일하게 하시는데 나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일한다, 이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예요. ‘너도 인간인데 너도 너 나름대로 행동을 주관해. 네가 네 행동을 주관 하란 말이야.’ 라고 하면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 행동 주관자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고 나는 주님의 행동이 만든 결과물로 계속해서 따라 붙이는 식이야.’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둘 사이는 줄이 다르기에 대화나 소통이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할 행동은 예수님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이 하는 행동이에요. 그 예수님이 하는 행동에 우리는 그냥 말려든 겁니다. 그래서 부활되고 그래서 구원받는 거예요.
‘나 부활되고 싶고 나 구원되고 싶어.’라고 내가 기대하고 내가 그리워한다고 해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어떤 작용을 해요. ‘이제부터 너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내가 너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야 되겠어.’ 하고 끌고 가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누구 집에 붙어 있는 구절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해서 ‘아, 나에게 목자가 있구나. 나에게 주님이 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회사를 가고 그 사람이 농사를 짓고, 그 모든 것은 그 행동의 주인공이 자기가 아니고 그 행동을 먼저 시작하시는 분이 우리를 행동케 하는 거지요.
하게 하시는 겁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도록 조치를 해 주시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규정하기 이전에 창세 이전부터 나를 규정했던 그 규정이 내가 나를 규정한 그 것에 앞서서 나를 장악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것을 성령을 받게 되면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서 확인됩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너희를 택하였다.’ 아, 그렇다면 내가 오늘 아침에 밥 먹고 오줌 누는 이것도 주님의 택함이라는 주님의 액션, 주님의 행위에 포함이 되는구나, 토요일에 목욕가방 들고 목욕탕에 간 그것도 주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택하여 건지시는 그 행동에 주님이 주도적으로 포함되고. 나는 목욕가방 들고 따라갔을 뿐인데 그것이 주님의 행위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시형제결혼법, 형이 자녀가 없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합니다. 물론 형이 죽었을 경우에만 해당되고 형이 살았을 때 하게 되면 그것은 불륜이지요. 형이 죽고 나서 동생이 형수와 혼인하게 될 때에 그 동생의 마음이 ‘아, 재수 진짜 없다. 내가 사귀는 여자가 따로 있는데 헤어지고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하고 결혼하려니 미치겠다. 내 청춘은 어디서 보상을 받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형이 죽은 것도 하나님의 행위이고 형수가 자식이 없는 것도 하나님의 행위고 심지어 더 난처하고 괴로운 것은 나의 유전자, 나의 DNA, 형수와 나의 사이에서 낳은 그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말을 못한다는 거예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못하는 홍길동이도 아니고! 보세요. 형수하고 관계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물론 여자 친구는 삐져서 떠나버렸고, 태어난 자식을 보니 형을 닮지 않고 나를 닮았어요. 그런데 애가 얼마나 영특한지 태어나자마자 ‘아빠, 아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쉿! 앞으로 아빠라고 부르지 말고 삼촌이라고 불러라.’ 이렇게 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겠습니까? 결국 그 와중에 형만 있고 나는 없다, 그렇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삭의 자리는 있는 나를 없다, 로 만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부활에 너는 없거든, 천국에는 너라는 것은 없어, 라고 분명히 지적하기 위해서 먼저 주어진 율법이 뭐냐, 이삭이고 시형제결혼법입니다. 너의 자리는 없어! 정수기에서 필터층을 통과해서 정수된 물이 똑똑 한 방울씩 떨어질 때 그 앞에 일곱 층층이 다 떨어질 때……, 형은 이미 죽어버렸고 그 아래 형들도 다 죽어버리지요. 막내인 일곱째와 형수가 결혼한다는 그 말은 위의 여섯 형제가 다 죽어버렸다는 말이거든요. 이때 그 일곱 번째 동생이 형수하고 관계해서 낳은 자식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형도 아니고 다섯 번째 형도 여섯 번째 형도 아니고 죽어버린 첫 번째 형의 자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룻에게서, 다말에게서’라고 하는 그 원리에요. 이 이야기가 제가 설명하기도 무척이나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 어려운 이야기냐하면, 쉽게 말해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우치기 위해서 잠시 잠깐 등장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있다가 그냥 없어지면 안 되고 있다가 없어지면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왜 없어져야 되는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천국에 등장하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룻에게서’라는 대목과 관련해서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보아스라는 사람도 그렇게 모든 사람이 엑스트라처럼 잠시 등장했다가 빠지고 등장했다가 빠지는 거예요.
이삭이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도 아니고 사라가 낳은 자식도 아니고 죽은 사라, 죽은 아브라함 속에서 예수님이 친히 만든 예수님 자식이고 하나님 자식이에요. 그 자식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우리가 그 자식이어야, 이삭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삭이어야 할 때 우리는 이삭 노선에 설 수가 있고. 내가 여기 있는데 이 있는 나를 어떻게 저 천국에서도 있게 하느냐, 이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면 그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이라 그 말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지은 상태에서는 인간을 천국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생명나무는 없어요. ‘선악과 따먹었나?’ ‘따먹었습니다.’ ‘생명나무 없다.’ 생명나무, 영생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고생 좀 하니까 ‘고생 좀 덜 하는 세상이 없나,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는데 죽어서는 이제 고생 안하고 살아야지.’ 그것은 네 생각이지요. 바리새인의 생각이 그 개념이에요. 오늘날 교회 부활 개념이 그런 개념이고. 그저 자기 편한 것, 자기행복, 자기영생, 자기만족, 자기기대, 소망, 기대, 꿈, 이런 자기의 원하는 바를 위해서 교회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동원해서 이용해 처먹는 인간들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서 출발한 나의 행동에 불과한 겁니다. 시형제결혼법이라 해서 그 여섯 개, 일곱 개의 그 필터층을 거치고 나면 밑으로 똑, 똑 하고 떨어지는 그것이 뭐냐, 죽음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살았다고 우기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완전히 없습니다. 천국 가려면 그 부활의 나라는 깨끗해야 되거든요. 흠 없이 티 없이 맑아야 돼요. 처음이고 중간이고 과정이고 어느 순간이고 어느 순간이든 간에 예수님이 개입해야 돼요. 3월 24일에 목욕가방 들고 목욕탕 갈 때 자기 혼자 목욕가면 안돼요. 주께서 목욕하게 하는 그것에 자기는 그냥 동반해서 따라가야 돼요.
항상 행동의 출발은 예수님이어야 되고 자기는 그냥 예수님 행동의 결과물로 따라가야 된다니까요. 내가 행동에 나서버리면 하늘나라에서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구역질나요. 추잡하고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개 교회가 나오지요. 토하여 내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교회를 만들기는 만들어놓고 토하여 내친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현재 어떤 인간으로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다시 하세요. 주인한테 물어야지요.
‘예수님, 나는 왜 여기 있습니까?’ ‘너는 동생이거든.’ ‘동생이 할 일이 뭔데요?’ ‘자식 없을 때 너의 있음을 포기하고 나는 왜 무엇을 위하여 없어져야 하는 존재인가를 통해서 그 예수님의 행위에 동참하라고 초대받은 모습으로 너는 이 땅에 살아간다.’ 그 말입니다. 모두를 다 없애면서, 없애버리는 그것이 주님의 주특기에요, 없애서 그 없는 가운데서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계획만 있게 만드는 거예요. 결국 등장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그 필터층을 거치고 나니까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전혀 다른 새로운 하늘과 새땅에 합당한 피조물이 율법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나오는 겁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달리 말하면 ‘나는 살고 싶은 사람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고 죽어 마땅한 자를 살리러 왔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시형제결혼법의 어려운 구조가 예수님에게는 간단한 말로 되어 있어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너희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부활이나 생명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나는 내가 주도하고 내가 개시했고 내가 먼저 행위에 나섰던 그 행위에 의해서 너 자신의 모든 행동과 계획은 없어진다는 여러 가지 현상을 수반해가면서, 한 껍질 두 껍질 포장지가 벗겨져 나가면서 내 것은 없고 주님의 것으로만 한 사람의 이삭으로서 등장하는 거예요.
겹겹이 싸였던 그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너는 죽어 없어져야 마땅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야기해도 모를 거예요. 37절에 보세요.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이삭이 화가 나서 ‘아버지, 저분은 내 하나님이야.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야.’ 옆에 있던 야곱이 있다가 ‘할아버지, 아버지, 저 분은 내 하나님인데 왜 갑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여기 끼어들고 그러십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다.’라고 이야기해버려요. 그 말은 나에서 출발한 하나님은 우상이고 마귀고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없는 이삭을 있게 하셨고 하나님은 죽어야 될 야곱을 자기밖에 모르는 야곱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 세 사람 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가지고 일을 꾸몄어요. 그런데 그 꾸민 일의 핵심이 뭐냐, 장차 오실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을 그들에게 앞당겨서 입혀 준 겁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우리는 뭐냐, 이미 오신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에게 덧입혀 줘서 우리 속에서 십자가로 일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실질적인 주인이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관장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그분의 행동에 의해서 딸려가는 시다발이 같은 입장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나는 내가 살게 한 자들의 하나님이다.’ 나는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은,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것은 예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일단 예수님이 부활되고 난 뒤에는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 창세전에 의논되어서 이미 우리를 산자로 간주해서 죽어가는 우리에게 후차적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찾아오면서 우리에게 무슨 변화를 일으켰느냐 하면 ‘네가 생각했던 그 부활, 네가 생각했던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그 생각, 나의 행복과 만족을 갈구하고 이 세상에서 고생했지만 저 세상 가서는 푹 쉬련다.’ 하는 개인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는 그러한 부활의 세계와 전혀 다르다는 것, 네 생각을 만족시키는 차원에서 부활체를 만든 것이 아니고 순전히 예수님의 뜻을 만족하기 위해서 우리는 들러리로 거기에 참여할 뿐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좋으면 좋은 겁니다. 예수님이 기쁘면 기쁜 겁니다.’라는 식으로 참여하게 했다는 말이지요. 광주에서도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만 우리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자꾸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 심어준 것은 예수님이 갖고 싶은 것을 우리에게 심어준 겁니다. 그게 뭐냐, 나는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십자가를 집어넣어 놓고 십자가가 예쁘고 십자가가 참하고 십자가가 좋다고 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거예요. 우리속의 십자가를 보호하고 새언약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 십자가의 그것이 부활의 능력이기 때문에.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능력이고 태가 죽었는데 그래서 아무 능력도 없는데 살아나는 능력이고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는 그 능력이 예수님 십자가의 죄 사하주심, 죄를 없애주는 그 능력에서만 우리는 죄 없는 그 부활의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 부활의 세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되어 있어요. ‘별의 영광 다르고 달의 영광 다르듯이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렇게 달라요.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그 강한 것을 다시 살며.” 우리는 들으면서 ‘우리가 기대했던 그거네. 별 것이 없네.’ 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45절에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사시렵니까? 아니면 살려주는 영에게 여러분이 예속되겠습니까? 우리는 한 자존심 하거든요. 그래가지고 헌금 기도 봉사 이런 것을 해도 ‘내가 열심히 했습니다. 나 천국 보내주세요.’라고 우길 수 있는 자존심이 여전히 우리에게서 발동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살고 싶은 내가 교회 와서도 개 같은 버릇으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만큼 잘났으니까 날 구원해 달라고.
살려주는 영으로만 부활됩니다. 살려준다는 말은 너는 죽었다, 그런 뜻이에요. ‘너는 이 땅에서 뭘 해도 너는 죽었어. 목욕을 하든 야구를 하든 축구를 하든 뭘 하든 이미 죽은 자의 행세인 것’을 일깨워주면서 살려주는 그것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항상 어느 때 어느 장소든지 ‘살려주니 사는 것입니다. 살려주시지 않으면 제가 무슨 힘으로 살겠습니까?’라는 것을 늘 느끼게 만들면서 작용하는 그 성령, 그것이 바로 이미 부활하신 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덮치면 우리는 이미 살았고 그때부터 우리는 왜 죽어야 마땅한가를 다시 일깨워가는 동반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좋은 나라가 천국인데 우리는 자꾸 오해하기를 나 좋은 나라가 천국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족스럽고 예수님이 행복하고 예수님이 사랑스럽고 예수님이 좋아지는 나라가 천국인데 우리는 내가 좋아지고 내가 위대하고 내가 멋있고 내가 잘났고 내가 훌륭하고 내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나라가 천국인양 오해했습니다. 죽어 마땅한 것이 뭔가를 늘 일깨워주셔서 날마다 살려내시는 그 하나님의 행위를 따라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