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되었으면 처음 자리를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처음은 하나님 담당입니다. 그 처음 자리를 후에 등장한 피조물인 인간 주제에 감히 나서서 자기 행복과 자기 치유를 위해 주님이 실시한 그 원리에 수정을 시도한다는 것은 오직 사단의 지시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경우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피조물의 위신이나 권한이나 행복을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그런데 여기에 반발해서 하늘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그 주모자는 사단입니다. (계 12장) 사단이 노리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피조세계 전체가 예수님만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거부하고 피조물 본인들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시도합니다. “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모든 피조세계를 이러한 사단의 일관된 마음으로 한데 뭉쳐서, 결코 피조 세계가 무너지거나 저주받거나 심판받는 것에 대해서 한목소리로 저항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유(有)에서 유(有)’로 기어이 버티면서 이어가겠다는 시도입니다. 즉 이미 ‘있음’의 가치의 무(無)로 전환되는 주님의 시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지하겠다는 겁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막 5:7-8)
여기 귀신이 말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귀신은 알면서도 기어이 버티고 싶은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즉 나를 괴롭게 하면 누구라도 그냥 두지 않고 공격하겠다는 바로 이 정신이 사단의 정신입니다.
바로 이 사단의 정신에 의해서 이 종말 시기에 온 천하를 뒤덮는 것이 바로 과학이요 철학이요 예술이요 종교입니다. 이러한 취지를 유지하기 위해 등장된 단체가 바로 국가요 학교요 교회요 기업체입니다. 곧 이 세상 자체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그 모든 의도에는 “지금 존재하는 나를 괴롭게 말라”는 악마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드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기를 무서워하는 마음을 주었고, 그래서 계속 사단의 종으로 붙들어두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그래서 인간들은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자리 들때까지, 호흡할 때마다 내뱉은 상투적인 자기 설득이요 다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죽으면 안돼, 망하면 안돼, 아프면 안돼, 지옥가면 안돼, 저주받으면 안돼. 누구에게도 미움받으면 안돼. 인기 떨어지면 안돼. 나는 불행하면 안돼, 징계 받으면 안돼. 왜냐하면 나는 없어져서 안되는 영원한 불멸체, 불사체가 되어야 하니까.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무조건 나는 사랑받아야 돼. 그냥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나 다운 삶이야”
해결책을 간단합니다.
주님 십자가 사건으로 이미 중심잡혀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는 망해야 돼, 나는 아파야 돼. 나는 미움받아도 마땅해. 내가 지옥가도 당연해. 나에게는 비극, 실패, 저주 마저도 당연한 운명이야. 모든 이를 나를 저버리고 나는 이용해도 나는 당해도 당연해. 그리고 나는 진작에 죽어야 해. 왜냐하면 나는 근원적으로 주님에게 대든 내 중심으로 살아온 하나님의 원수이니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귀하께서 하시려는 일은 ‘유사 과학’ 혹은 ‘사이비 과학’ 혹은 ‘과학을 옷을 입고 진리의 한분야인양 흉내내는 종교류’입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행복에만 최종 의미와 관심을 두고 산다는 점을 알고 기존 기계적 원리에 따르는 과학이 미처 손 못대고 자신 없어 하는 분야, 모호한 틈새 분야에서 인간들의 심리적 취약점을 노리는 수법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는 사건이지 인간을 치유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다시 태어남=중생’은 기존의 이미 존재하는 내가 은근히 고대하고 기대하는 바로 그런 자아의 다시 태어남이 아닙니다.
자아의 영속성이나 자아의 불멸성적인 욕구를 만족하기 위한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은근히 노리는 자아의 불멸성과 불사성이 곧 예수님을 집단적으로 살해하게 된 사단이 사주한 동기임을 고백하고 마땅히 포기하고 미리 주님으로부터 심판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살이 아니라 예수님 손에 의해서 언약대로 죽는 자만이 주님의 ‘주되심’만을 위해 새로운 피조물이 영생을 얻는 겁니다. 따라서 그 작업은 사람은 못하고 우리 개인들이 하지를 못하는 그런 영역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 19:26)
내가 나에게 뭔가 시도하지 않더라도 지금도 분주하게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겨신 자기 백성을 실패없이 구원해내고 있음이 믿어져야 합니다.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일반 과학마저도 사단의 사주 하에서 기존의 ‘있는 것들을’ 더욱 망하지 않고 계속 있게 만드는 작업에 전념하는 판에 소위 기독교라고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런 유사 진리를 흉내를 내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4-5)
왜 십자가 달린 강도가 강도짓 하고서도 천국에 갔고, 왜 세리나 창기나 불의한 청지기나 탕자가 구원되는 겁니까?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자기네들 자기네들에게 가한 ‘집요한 자기 관리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일생이 죄인이 받는 죄를 주님께서 마땅히 내려주심에 대해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아파도 당연하고 죽어도 지옥가도 당연하고 저주받아야 당연하고, 에덴동산에 추방되는 것’이 너무나도 하나님 보기에 합당한 조치를 행사했음을 인정하고 그런 조치에 찬양하고 있는 것이고 그 모든 조치가 마땅히 일어나야만 한 것이 바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주인공이 ‘자아’가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 계신 ‘예수님’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말이 곧 이미 구원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 사람도 아닙니다. (갈 1:10)
결론적으로 태아에게 동정하지 마시고, 인간 자체에게 동정하지 마세요. 성도는 사람 편에 서서 살아가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다, 돌이 떡이 되고 기적을 많이 행해서 대단한 목회자로 인가가 높고 그래서 세상 영광까지 확보를 제안하고 우리의 전부를 지배하는 사단이 만든 노예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약 말고 다른 계약 곧, 새 계약을 전파증거하세요. 주어진 강의와 발표시간마저 주님께서 십자가 복음 전하라고 마련해주신 귀한 여건이라고 여기시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던 의미를 전하세요.
“여러분들이 태아의 건강과 장래와 운명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를 주님의 복음의 광채에서 눈 돌리려 영원히 공포와 공포의 연속되는 지경으로 밀어 넣는 사단의 짓입니다”고 말입니다.
성도에게는 실패나 심판이 없습니다. 심지어 태아가 병들어 장애인이 된다할지라도 그것마저 성도의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자기 인생입니다. 곧 예수님의 우주의 중심이 됨을 그런 장애를 통해서도 증거시키려고 하시는 겁니다.
“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7-19)
비록 태아의 건강을 사전에 조정해서 건강한 태아를 출산하더라도 그런 시도 자체가 영원한 저주의 빌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사단에 빠져 오직 자기만이 자기에게 전부라는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십자가 사건 앞에서 고백하는 그런 세미나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이근호 15-07-04 10:02
셩경은 태아의 건강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것이 주가 되심을 증거하는 영원한 계약서입니다.(태아가 죽든 말든 그것마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관심사가 비복음적임을 고발하는 책이 곧 성경입니다.)
-우리교회 질문/답변란 ”내적치유(태아기의 상처)와 십자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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