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인간이 얼마나 존재에 묶여있나를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유일하기에 우리는 통일돼야 돼.”라는 그 이데올로기, 그사상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진짜 유일자가,그 금이 새롭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걸 전부 다 추적해 내야 됩니다.
그렇게 추적하는 그 용어를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은 자’라고 했습니다
뭔가 통합된 것, 통일된 것을 의도할 때 이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금이라는 말이 적당한데 선, 해안선, 그 선을 긋는데 그 금이라는 것은 폭을 가지면 안 되잖아요.
그 금이 나중에 권력을 가지면 뭐가 되지요? 폭이 되지요.
폭이 되니까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이 폭을 어떻게 합니까? 폭을 다시 분열시키기 위해서,
폭이라 하는 것은 ‘이래서 우리는 단단한 통일체가 되자.’ 하는 것을 추구하잖아요.
추구할 때 여기서 통일 자체가 무엇의 형식이다? 분열의 형식, 그래서 또 하나의 분열이 일어나죠.
그러면 금이 생기지요.금이 생기면 “우리는 금이야.”라고 등장하면서 금끼리 모아지고 해서 하나의 교단이 되지요.
하나의 집단이 되겠지요? 꼭 지방교회처럼.“거듭난 사람 다 모여.” 해놓고 자기들만의 집단을 만드는 것처럼.
그러면 그걸 또 분열시켜 버리지요. 금에서 하나의 통일체가 된다면 여기서 또 분열이 일어나고,
②남은자의 기능은 행함으로 남겠다는 것을 부정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남은 자 앞에 뭐가 붙는가? 그냥 남은 자가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지요.(롬 11:5)
은혜로 남은 자가 등장함으로써 졸지에 그 주변의 은혜로 남은 자에 가담되지 않는 자는 무슨 자로 규정됩니까?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모습들이 다시 균열을 일으키면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살리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결과를 낳고 결국 이것은 하나의 희생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항상 부재자가 보여주는 그 기능에 종속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다운 기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아브라함 자손과 나를 가르는 그 ‘금’에 주목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고
‘나’라는 소유가 천국 간다고 우기면 그 사람은 땡, 탈락이에요.
또 하나의 금이 폭을 가지면 안돼요. 주님 때문에, 이 부재자의 존재,
“없는데서 나온 존재가 저를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이 이렇게 나왔어요.
“제 신하의 병 좀 낫게 해 주세요. 왜? 제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잖아요.” 이러면 땡, 탈락이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③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새로 생산시키는 현실이에요.
‘금’, 경계선, 경계선이 새로 생산해 내는 현실을 위해서
백부장은 독자적인 자기소유의 현실은 을이 되고 이 말씀의 세계가 갑 질을 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맡기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눅 7:8) 군대용어로 “까라면 까겠습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고민하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되고 화내는 것도 검사를 맡아야 된다고.
우리의 화나 고민 같은 것은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현실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의 어떤 의로움과 윤리를 주장하게 되어 있어요.
독자적인 현실이 있으면 그 현실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나오고 이념들이 나와요.
‘이것이 평등일거야.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축복일거야.
이것은 기적 받은 것이 맞아. 방언을 하니까 내가 성도인 것이 맞아.
내가 안수해서 병 나았으니까 나한테 믿음이 있는 것이 맞아.’
나름대로의 자기 폭을 가지면서 그런 것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최면 시키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신자가 맞다.’ 지금 뭘 쳐다보는 거예요?
믿음의 대상이 뭡니까? 본인이라니까요, 본인.
본인의 신앙의 연조, 연륜, 그것이 신앙의 내용으로 점점 차고 들어오니까
그것은 자기 세계지 그것은 천국이 아니에요.주님의 세계가 아니에요.
그것은 아침 열시에 와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뭘 내세웠어요? 자본주의에서 배운 습관을 내세울 겁니다.
“주님이여, 주님에게 노동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해 주세요.”
④“사랑하는 아들 바쳐라.”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아들 바치는 대신 저는 예수를 믿겠습니다.” 이런 타협조로 나오지요.
“아들 안 바치는 것은 예수 믿는 것도 거짓이고 엉터리다.” 이렇게 나올 때는
‘아, 예수 믿기라는 것은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중의 또 다른 하나가 아니고 나의 전부구나.
나의 전부를 요구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아들을 사랑해서 주님보다 내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들이 나의 죄 성을 폭로시키는 첩자로 주께서 심어줬다.’ 하는 겁니다.
내가 몰입하고 내 기쁨의 원천, ‘내가 저거 없으면 나는 살 의미가 없다는 것,
나는 저거 없으면 죽을 거야.’ 하는 그 무엇을 누가 심어줬다고요? 주께서 심어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죄를 생산하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속을 죄의 공장으로 가동시키기 위함입니다.
죄의 공장을 가동시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고 했습니까? 은혜를 넘치게 하는 겁니다.(롬 5:20)
⑤제가 한 때, 물론 지금도 무식하지만 정말 무식할 때가 있었어요.
다방에 가니까 커피가 있고 그 옆에 액체로 된 크림이 있어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커피 맛이 쓰니까 커피는 그냥 놔두고 크림을 가지고 물을 타서 마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크림이라는 것은 커피가 먼저 전제되고 난 뒤에 타 마시라고 준 것이지 그게 주가 되지는 않잖아요.
우리의 구원은 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속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그걸 증거 하라고 덩달아 구원된 것이 우리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 소리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적당하냐? 세리와 강도와 창기가 적합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나는 십일조 하고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주께서 즉결 심판하는데 땡, 탈락이었어요. 전혀 구원과 멀어도 너무 먼 거예요.
자기 속에 뭐가 없어요? 죄가 없어요.죄가 없는 곳에는 은혜가 없고 은혜가 없으면 천국을 만들 수가 없어요.
⑥이게 정말 어려운 거예요. 십자가를 알아야 죄를 알아요.
평소에 밥 먹는 것도 간음죄와 엮여져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엮여져 있어요. 죄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죄와 율법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죄와 율법을 통해서 여기서 금이 가요.
금이 가게 되면 이 안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사랑이 와요. 용서가 온다고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죄란 뭐다? 사랑을 모르는 모든 것이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 머리가 팍팍 돌아간다고요.“그러면 목사님, 사랑을 알면 죄가 아니겠네요?” 이러거든요.
사랑은 죄를 가르고 돌출 될 때만 나오지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사랑이라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에요.
“나는 주님의 사랑을 갖고 싶어요.” 이것은 자기 욕망의 화신이 된 것이지 그런다고 사랑 주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몰라, 몰라, 그냥 죄 지으세요.죄 지으면, ‘아, 이게 죄구나.’ 느껴지면 그게 사랑이라니까요?
얼마나 사랑을 알았으면, “주여,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겠어요?
사랑은 없어요. 없는데 죄를 깨닫는 순간 동반해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⑦“이게 죄야.”라고 지적해 주는, 그걸 아무나 지적해주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지적해 주는 거예요.
귤 잡숫지요. 그거 죄거든요. 귤 가지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보세요. 이게 왜 죄인지.
‘내가 여기서 박테리아를 묻혔나?’ 박테리아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의 민주주의제도 하에서 나온 이데올로기, 하나의 사상이거든요.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전염병이 일면 안 됩니다.” “전염병이 일면 왜 안 됩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죽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에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요?”
이 문제, 이 죽음문제 만큼은 인간들이 말하는 전체, 전체 내에서는 예외에 해당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예외, 전체 바깥에 있는 요소를 인간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 전체 중심에다 심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예수님은 인간의 죽음까지 포함해서 발언을 하는데
인간의 언어체계에서는 어쨌든지 저쨌든지 살고보자는 것이 진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 지면 행복합니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죽은 마당에 행복이 왜 있어요, 죽은 마당에.
차라리 이사야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사 6:5) 이렇게 말해야 돼요.
이번 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물, 나를 앞에 두지 말고 어디에 두라? 나는 제일 마지막에 등장해요.
진짜 나,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 낸 작품의 나는 살아가면서 그게 마지막에 등장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라고.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세계는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세계에요
⑧눈을 뜨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한자말로 두 자로 눈 뜨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개안(開眼)’이지요. 개안(開眼).
첩자가 나를 개안케 하는 겁니다. 내 속에서 죄가 비로소 속에서 나를 통일에서 면제시키는 거예요.
주께서 내 죄를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눈이 감긴 채 나만의 현실을 주장하면서 부질없는 지옥으로 갔을 거예요.
말씀으로 개안되지 아니하면 개안된 그것이 또 자신의 폭이 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이 되기 때문에 그런 구원은 없는 것이거든요.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4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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