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성 아빠-제가 볼 때 언어의 선점 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정치권에서 발생하지만 기독교계라고 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가령,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언어는 구약에서 나오는 말로서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의미의 아주 좋은 뜻을 가진 단어이고, 우리도 당연히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성도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주님의 증인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말을 이단이 먼저 사용하여, 즉 선점하여 이젠 개신교 신자들은 이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사용하더라도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영토록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령받은 자는 하나님의 증인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주님의 증인입니다.
또한, ‘신천지’ 말 그대로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단어도 이 세상과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단어인데, 이단이 선점하는 바람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어 지고 있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는 성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새하늘과 새땅을 부정적 의미로 보는 자는 성도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어떻습니까? 고대에 ‘십자가’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이고, 사형형틀로서 입에 거의 담을 수 없는 정치적인 말이었습니다. 죽음, 저주가 생각나는 이미지입니다. 예전에 희망, 사랑, 대속, 권세라는 개념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십자가’라는 단어와 이미지를 변화시키셔서 기독교의 핵심 상징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젠 그 단어에는 죽음, 저주라는 이미지도 있지만 심판, 사랑, 은혜, 언약, 소망, 권세라는 이미지를 새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 변혁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변혁들이 강력하기 때문에 지금도 이곳에서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대속의 죽음이 맞지만, 그 대속을 받아드리는 입장에서 개인화하고 내면화하라고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개인 대속의 차원에서만 사고한다면,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깊은 의미를 축소하고 단순화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상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맨날 날 대속하신 그 은혜 감사하기 때문에, 내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더 감사하다고 신세 한탄만 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사탄의 노림수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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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신세한탄하는 자가 아닙니다. 님이 이해한 복음이 이런 복음이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래고 돌아 돌아와 결국 자기에게로 와버렸지요.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근호 목사님은 이 ‘십자가’ 또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선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즉 기득권이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근호 목사님의 초창기 글들은 매우 깊이가 있고, 그것을 통하여 복음으로 인도되었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만 좋았습니다. 거기까지만 이근호 목사님의 사명이라고 생각되면 자신을 내려놓고, (이근호 목사님 식으로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주께만 간구하는 자세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근호 목사의 초창기와 지금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좀 글로 써 주면 좋겠네요.
그런데 저는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는데 저에게 깊이의 차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한결 같이 십자가 복음, 즉 예수님이 주님이심만을 전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저 깊이있는 것을 찾아 다니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왜 깊이있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보다 더 깊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요.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 들려지지 않습니다.
들려져야 합니다. 들으려고 하는 자에겐 주님의 일하심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만 눈에 보일뿐이지요.
그것이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의 핵심이고, 그 십자가 정신에 충실한 ‘행위’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근호 목사님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였고, 지금도 펄펄 살아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자신의 신학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근호 목사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님은 자신을 어떻게 부인하나요.
정말 궁금합니다.
님의 글을 보니 저에겐 님이 이근호 목사에 대해 악의에 차서 펄펄 날뛰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님은 이근호 목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는 결국 님이 하고 싶은 말은 이근호 너는 왜 예수님처럼 살고 있지 않느냐라는 것이지요.
나는 예수님처럼 사는데 너는 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니.
어떤 사람이 님처럼 똑같이 이근호 목사를 비판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근호 목사를 욕해요. 님처럼.
그럼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저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저를 욕하는 사람들이 그래요. 자기들이 자기 편당을 만들고, 나를 제단해 버려 놓고 하는 말이 네가 왜 남을 비판하느냐 라고 해요.
참 웃끼지 않나요.
이근호 목사님은 십자가를 개인적으로만 철저화하고, 내면화하고, 세뇌화시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심리학입니다. ‘심리학에 빠진 기독교’라는 책도 있지만, 물론 그 책은 자기 긍정의 심리학 등을 비판한 책인데, 이근호 목사님은 그 반대편의 심리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철저화, 내면화, 세뇌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말씀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지요.
이 이야기는 조금 후에..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이야기하는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다른 사람과 갈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분리작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헐! 그리고 그 사람을 죽일 듯이 상처를 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합니다. 뭐하자는 것입니까? 남은 상처받고 죽어도 자신만 은혜만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까?
-누가 누구를 먼저 분리할까요?
이근호목사 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요?
님은 너무 순진한 사람 같군요.
누가 분리작을 먼저 하는지 아시나요? 님이 편 들은 그 사람들이에요.
이근호 목사가 그 사람을 죽일듯이 상처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이미 이근호 목사를 죽일듯이 상처내 버렸어요.
뒤에서.
님이 누구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하네요. 현재 님의 신학은 그들과 한통속이니 무슨말이 통하겠는지 ...
그러면서 예정론을 들먹입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도 하고, 창세전 이야기도 하고, 그 외 다른 이야기도 합니다. 미리 분리될 자와 구원받을 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바리새인들의 선택 사상과 동일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예정론도 그런 의미의 예정론이 아닙니다.
-님이 아는 예정론을 한편 펼쳐 보여 주세요. 정말 궁금합니다.
이근호 목사의 예정론은 이미 수많은 강의를 통해 이야기 했으니..
필요하면 다시 요청하지요.
그런데, 그 분리작업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그 당사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선택하심은 맞지만 우리들은 그 선택하심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생각이 틀리거나 성경의 해석이 틀리거나 신학이 틀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택받지 못하였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좀 겸손해야 됩니다. 아니 많이 겸손해야 됩니다. 모세의 온유함과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님이 겸손하다면 이근호 목사를 위해 기도하시지요. 이렇게 비판할 것이 아니라.
모세의 온유를 먼저 보여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어떨까요?
언어를 선점한다고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개발한다고 해서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복음과 십자가는 선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공유하는 것이고, 자신만 알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십자가의 긍휼로 구원받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긍휼을) 전파해야 되는 것이고, 그 긍휼을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모습이고, 바울의 모습이고,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복음은 공유가 아니라 자기 백성에서 베풀어지는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 세상을 회피하거나 단절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이 풍진 세상을 성도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복음이 삶이고, 십자가이고, 사랑입니다. 복음은 기복적인 신앙도 아니고, 개인적인 구원의 만족을 누리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이 기쁘고 기가 막힌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삶으로서 전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행위 대 복음”의 도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전복적인 삶만 있습니다.
-행위로써 어떻게 전하는지 궁금하네요.
성도와 함께 어떻게 함께 걸어가는지도 궁금하고요.
입술로만 죄를 회개한다고 회개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서 돌아서야 됩니다. 세례 요한의 외침과 예수님의 외침은 동일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 회개가 우리의 의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제자들과 베드로의 외침도 “회개하라”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초대교회 사람들은 삶으로서 회개합니다.
-어떤 삶을 말씀하시는지요. 자신의 삶에서 돌아서는데 도대체 님은 어떻게 돌아섰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여기에 무슨 “행위”가 있고, 자기 의가 있습니까? 여기에 무슨 십일조의 행위가 있고, 주일성수의 행위가 있고, 교회 봉사의 행위가 있습니까?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선포만 있고, 가르침만 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이런 행위들을 강조하니까 반발심에서 반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십일조, 주일성수, 교회 봉사라도 자기 의나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는 봉사가 있는 반면에 정말 주님의 은혜 감사하여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감사하여 나타나는 경우는 언제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언제인가요. 이것을 누가 판단합니까?
모든 행동들을 ‘행위’로만 보고, 그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도식은 정말 어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숨 쉬는 것도 행위가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받지 못하는 ‘행위’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진짜 죄는 어떤 행위를 하거나 안한 것이 죄가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결론은 이것이네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예수님을 믿고 살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시네요.
결국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와 버렸군요.
믿음 있는 자신이 존재함으로 푸근함을 느끼는 인간.
제가 글을 적다보니,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삭제할 수도 없고...
이 글들이 다른 분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부디, 은혜로 받아주시길...
‘은혜’라는 단어가 남발하고, ‘십자가’라는 단어가 남발하고, ‘복음’이라는 단어가 남발하는 이 불우한 시절에 이런 단어들의 의미가 진정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었습니다....
-십자가 단어는 십자가 마을에서는 많이 사용되어질 뿐이지요. 오히려 님의 글에서는 십자가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렸군요.
십자가 마을에 들어오기 전 열심히 전도, 기도, 십일조, 헌금을 했었다.
그런데 왠지 속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이근호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래 지금까지의 행위는 죄였어. 거짓이었다.
그래서 헌금, 봉사, 기도, 전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사실 이것도 죄고 거짓인데.. 님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 뭔가 불안하다.
이게 과연 신앙생활일까?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살고 주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 같다.
뿐만 아니다 십자가 마을 글들을 보면 사람이 없다.
특히 이근호 목사의 글을 보면 사람이 없다.
춥다.
다른 말로 사랑이 없어 보인다.
물론 님 자신도 사랑이 없다.
그래 이건 아니야.
성경말씀 한번 볼까?
그러나 이 성경말씀은 이미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를 말해 줄 뿐이다. 즉 사랑.
그래 다시 시작하는거야. 헌금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이건 행위가 아니고 은혜로 하는 거라고 스스로 체면을 걸면서 말이다.
그리고 정 많은 모임을 만드는거야.
그래 어느 놈이든 우리 모임을 건드리면 죽여버리겠어.
물론 님 자신도 자기 자신을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아마 십자가 마을에 왔다 간 사람이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죄인의 본성이니 말이다.
성경말씀은 취미일 뿐이다.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주님이다.
주님을 이렇게 우습게 보고 않았다.
이근호 목사의 설교나 강의는 너무 말씀속으로 끌어 들어가기에 이게 싫은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 보면 인간 인정 안해줍니다.
교회 인정 안해요.
주님만 인정하고 주님의 교회만 인정합니다.
이게 기분 나빠요.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싶죠.
그래서 님은 지금 신세한탄을 하면서 그 신세를 바꾸어 보려고 발악하는 사람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