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4년 10월 7일 오전 07:21(약함과 강함)

아빠와 함께 2014. 10. 7. 09:18

 

“하나님의 미련함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1;25)고 하십니다.

즉 “너희들 눈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실은 하나님의 지혜요, 너희들 눈에 약하게 보이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강함이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보다 강하고 보다 지혜로우면 적응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을 찾아도 강자의 연장선을 이어 최종 강자로 이해하게 됩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강자이니 이 약자를 불쌍히 여겨 강자로 만들어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이런식의 꼼수를 쓰게됩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힘을 포기해서 남들 보기에 비천하게 여겨지는 삶을 살아서

그것을 내용으로 하여 자신을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새로운 강자나 지혜자로 등극케하려는 꼼수 말입니다.

왜 이런 짓이 자기 절대화로 치닫는 꼼수가 되느냐 하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와 강함은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완성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씀은 인간더러 ‘새삼 지키면 구원해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달성하신 내용을 펼쳐 주신 말씀입니다.십자가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세상에 적응하는 지혜가 아니라 세상자체를 바꾸는 지혜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지고 또한 살아져야 할 존재라는 겁니다.


사람이 구하는 능력과 지혜는 내부의 썩어짐을 외부로 드러냄이 아니라 남들처럼 매끈한 외부인으로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간이 기대하는 그런 힘과 지혜가 아닙니다. 인간을 내부와 외부로 구분 짓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부를 살피시고 그 내용물을 밖으로 토해내게 하십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서 인간들은 아예 자기 밖에 모르는 죄인이었음을 까발리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전에서부터 줄곧 약속되었던 것의 최종 성취입니다.

내부의 죄를 외부로 끄집어내는 작업은 옛 약속 속에서 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건들도 십자가 사건과 연이 닿아있습니다.

그것들중 하나가 바로 여리고성 함락 작전입니다. 여호수아 6:1-5에 보면, 이스라엘의 공격 방식이 나옵니다.

공격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체 남자들에게 할례를 시행토록 했습니다.

할례란 바로 육과 영의 차이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약속증표입니다. 육과 영을 분리시키는 간격을 만드는 겁니다. 
간격. 인간은 결국에는 자기한테 귀소 되고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걸 잘라놓겠다는 거예요

 

여리고성 함락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지혜와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올 십자가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겁니다.

창조가 결코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인간의 기능은 따로 있고, 인간의 목적은 따로 있고

하나님 존재목적은 따로 있음의 그 간격을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여리고성 공격을 못해요.

할례를 행한 뒤에 자기 육이 부정되고 난 뒤에 그 할례의 취지가 이 지상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게 어떻게 단단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지혜가 되고 그 단단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함이 되는지

그 할례, 간격자체가 지혜가 되고 그 간격 자체가 강함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리고성은 있는겁니다.

하나됨의 의미를 하나님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거예요.

참된 인간이 뭐냐? 간격이 보이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난 그 간격을 보고 있는 인간,

그 간격 앞에서 나는 죄인인데 주님께서, 아들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

우리 면류관도 주께 반납하는 그런 관계가 지속되고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한 우리는 우리 자랑하지 않으면서

모든 공로와 은혜를 받고 있음을 느끼면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공로만 높이는 거예요. 그게 천국이에요.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내가 하나님과 어떤 간격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한 덩어리 되는 그것이 하나가 아니에요.

정작 십자가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간격을 만들어냅니다.

“네가 어떤 지경에 있더라도 네 처지가 고마운 줄 알아라.”

여리고성이 무슨 힘으로 무너졌습니까? 할례가 주는 차이의 힘으로,

차이가 유지되면 어떤 것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차이, 예수님이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아들 자리에 있으면서 그 두 분이 하나가 되지요.

그 간격, 그 관계,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인 그 관계가 살아 있는 그 관계에 있음으로서 하나가 되듯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도 그런 차이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 때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성공이 실패고 실패가 성공이고, 강함이든 지혜든 그런 것 의미 없어요.

강해도 주님이 강하고 지혜로운 것도 주님이 지혜롭지,

그 지혜로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따로 지혜롭고 따로 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 죄인과 의인 간의 간격 하나의 관계로 모아지면 그곳이 곧 천국입니다.

즉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서 찬양하는 나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부가 날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더러운 것이 토해지게 해 주옵소서.

"나는 솔직히 이것이 목적입니다." 라는 그것이 성도 아닌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지만

성도에게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늘 쓰레기처럼 내다버려진다는 이 사실.

이 사실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 된 것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약함과 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