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4년 5월 26일 오전 08:46

아빠와 함께 2014. 5. 26. 09:14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본인의 힘으로 언약을 이룰 수 없는 그 실패를 오늘날 우리들의 실패로 그대로 인수인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가 실패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돼요. 

자기 분수를 알게 되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무능하고 실패한 것을 안 동시에 세상의 수고한 무거운 짐도 다 사라지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예쁘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자식을 잘 키워야 된다는 책임도 같이 부여되지요. 이것이 엄마, 아빠한테는 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럼 자식 낳고 기쁘지만 또 하나의 엄청난 큰 짐을 지게 될 때, 

그것은 이 세상을 불행스럽게 슬프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치고 자식을 맘대로 제대로 키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부모는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원래 자식은 부모 말 안 듣게 되는 식으로 하나님이 자식을 붙여준 겁니다. 

기존의 윤리 도덕에서는요, 자식들아 부모 말에 순종하라, 이리 하잖아요. 

성경에서는 뭐라 하는가 하면, 앞에 뭘 집어넣어요. 자식들아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 이리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할 자식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어떤 능력도 그것은 실패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식이 부모 섬기는 것 실패하고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되 주 안에서 양육하라, 했거든요. 이것도 실패합니다. 

전부 다 실패자로 만들기 위해서 부모, 자식이 만난 거예요. 

그런데 그 실패가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의 반복이라는 점을 생각해 주셔야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신명기에 보면 

자식이 부모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자식을 죽이되 가만히 죽이지 말고 공개석상, 마을 공터에 가서 온 마을 사람 다 불러놓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부모도 아닌 자로 하여금 내 자식을 죽이도록 그렇게 조치하라, 

라는 법이 신명기에 나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모습이죠. 

인간은 자신의 혈육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친구 정도는 몰라도 

자기 혈육의 가족을 감싸게 마련이지 거기다가 자기 가족에다가 주의 법을 적용시키는 그런 매정스러운 인간은 없어요. 

팔이 바깥으로 굽는 거 없잖아요. 팔이 안으로 굽잖아요. 

팔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내 새끼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이 나를 건드리는 것이다. 이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니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할 때 우리 같으면 돈으로 계산해서 바칠 수 있지만, 

자식을 그것도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능가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식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을 죽이는 거예요.

신앙이라는 것이 기존교회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것은 신앙 아닙니다. 

신앙은 언약 속에 들어가야 신앙이 보여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치는 몽둥이라면 

오늘날 나에 대한 몽둥이는 내 자신이 나를 치는 몽둥이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한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들어서 나를 치는 몽둥이에요. 

그것은 평소에 내 것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애착과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또 누가 압니까?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거든요. 

“주님을 믿어? 주님을 사랑해?”이건 다 빈말이다 말이죠. 

뭘 주님을 사랑해? 나를 사랑하지요. 왜 자꾸 그런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늘어놔요. 

내 자식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했는데.

신앙이라 하는 것은 그냥 남들 보기에 근사하게 신앙, 교회 다니는 척하는 그것은 사람은 속여요. 절대로 하나님은 못 속입니다.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 삽비라를 알지요? 자기 부부끼리“여보, 드릴 거 반만 드리자.” 자기들끼리만 아는 비밀입니다. 

속닥, 속닥 쥐도 몰랐고 참새도 몰랐어요. 그랬는데 설마 교회에 성령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교회에 사도만 있고, 교회에 장로만 있고, 교회에 집사들 있는 건 눈에 보이는데 교회에 성령이 있는 게 눈에 보입니까? 

그러니까 그 부부가 사람만 속이면 모든 속임은 다 완전범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드렸지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당신이 지금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사탄이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베드로의 눈에는 지금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지금 그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사탄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오랜 친국에요. 한두 해 친구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어요. 

항상 우리 위주로 우리 좋은 쪽으로 이익 되는 쪽으로 우리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쪽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실패와 성공은 사실은 은닉된 거예요. 숨겨진 거예요. 

지금 나타난 실패와 성공이란 바로 숨겨진 진짜 성공과 실패를 감추기 위한 이 세상의 어지러움입니다. 

혼란스러움이에요. 거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선지자가 하는 말이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선지자를 잘 안 해요. 선지자의 모든 이야기가 비판하는 것이고 부정적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선지자를 자꾸 본문으로 끄집어내어버리면 

교회가 긍정적 교회가 안 되어가지고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교회로 가버려요. 

성경에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 옛날 언약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망해버려라, 그게 사는 길이다. 그 긴긴 내용이 간단해요. 

망하는 자여, 기뻐하라. 그래야 산다는 겁니다. 망하는 코스를 밟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망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너희들이 지금 좋다고 살고 있는 

이 현실, 이 세상 자체가 너희들이 문제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예전에 그런 걸 눈치 챈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의 정체가 노골화되고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만약에 우리 마음에 찾아오지 않으면 이 세상은 너무 좋은 세상이에요. 

그러나 어느 날 그리스도의 영이 내 마음에 찾아왔을 때는 

‘뭐야? 떠나야 될 세상이네. 내가 나그네잖아. 어디 여기에다가 정주고 붙이고 여기다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산다는 거 

이것은 신앙의 선배들 같은 그 길이 아닌 것 같은데.’라는 감이 오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효과에요. 이것은 사람의 인력으로 되지를 않아요.

그렇다면 만나야 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을.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본다는 그런 이야기를 고린도전서에서 했거든요. 

지난시간의 성경을 이야기해보니까 결국 언약이었고 그리고 언약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이 왜 멸망되어야 되는가, 

하지만 그 멸망 그것이 진짜 이스라엘 만드는 하나의 과정 속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기 자리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성공이 실패의 자리에서 새싹이 피듯이 실패한 내 자리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수원강의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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