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강-YouTube강의(자연의 변화 마태복음 24:29)20250715-이 근호 목사
제502강, ‘자연의 변화’. ‘자연은 주인이 없다.’ 보통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연한테 혜택은 입지만, 자연 변화에서 인간이 주도적으로 관장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보고 ‘구름아, 저리 가.’, ‘파도야, 치지 마.’, ‘달아, 한 사흘 동안 휴가가.’, ‘별도 한 서너 개 빠져.’ 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다. 다스린다.’라고 하는 창세기 1장 28절 그 말씀은 한계라는 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 인간이 다스리고 정복하는 정복의 대상은 자연의 틀, 체계, 시스템 그 자체는 손을 못 대고 어떤 동기생, 인간과 같이 만들어진, 인간들보다 먼저 만들어진 기존의 든든한 땅의 구조, 확고한 땅의 구조는 그대로 있고, 거기에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들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을 이야기하고 정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프레임 자체, 해와 달 그 자체, 또는 시간, 공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이 그것을 변조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 속에 있는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는 정복권을 갖지만 자연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수긍해야 된다.’ 자연현상에 대해서 큰소리치지 못하고 고분고분해야 될 그런 처지에 인간이 놓여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의 한계는 ‘자연의 프레임은 그대로 두고 자연 안에 있는 동식물에 대해서 네가 정복하고 먹을 양식 챙길 건 챙겨라.’가 되죠. 그런데 이게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 했으니까 자연물에 대한 정복 자체도 인간의 정복이 아니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유지될 때 그 형상이 자연물에 대해서 지배할 지배권을 갖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나누어서 한번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나누어서. 만약 인간이 범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제 기능을 못하고 형상이 아무 힘을 못 쓴다면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는 이것도 더 이상 우리한테 그런 권한이 없겠죠. 왜냐하면 다스리고 정복하라 할 때 그 형상은 죄의 지배를 안 받는 형상보고 이야기했지, 이미 죄에 물든 형상보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걸 정당화한다? 그건 하나님 아닌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세상을 다스릴 권한도 인간에게는 없습니까?’라고 생각하는데, 형상에 인간 말고 다른 형상이 신약성경에 나타납니다. 골로새서 1장에. 당연히 누구겠어요? 보이지 않는 형상, 원래 형상,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은 어디까지 지배권을 갖느냐 하면 해와 달, 별이라는 프레임 자체에 대한 지배권마저 갖게 됩니다. 동식물은 기본이고 해와 달까지. 인간이 그전에 감히 손 못 대는 해와 달, 별 이것까지 하나님의 새로운 형상으로 오신 분의 권한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정리가 성립될 수 있어요. 인간은 해와 달과 별에 대해서 감히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할 수 없는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 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형상은 해와 달과 별까지 장악해서 해와 달과 별이 이제 누구 편에 들어가느냐 하면 새로운 형상에 속한 분의 편에 속하게 될 거죠.
그게 요엘서 2장 3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 누구의 지시에 따르느냐? 누구 지시에 따르느냐 하는 것은 마태복음 24장 27-31절을 보게 되면 성경 그대로 봐도 이해가 돼요.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자, 어렵죠. 번개라는 것이 자연물에 속하잖아요. 구름과 땅 사이에 있는 대전체의 관계성에서 번개가 일어난다. 프랭클린이 그걸 발견해서 피뢰침 발명했잖아요. +/-의 대전체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이 번개잖아요. 번쩍.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번개가 지금 누구의 등장을 보여주는 징조로 역할을 하느냐 하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그러니까 이 번개가 인자하고 한 패 먹었다,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이 어디까지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번개도 장악하는 거예요.
이 자연물을 어느 정도까지 온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주님께선 이 땅에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냥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덜렁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동안 ‘이건 우리 영역이 아니야. 우리가 관계할 수 없어.’ 했던 해와 달까지, 그걸 마음껏 다스리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인자가 이 땅에 임하는 거예요.
29절에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자 자기가 뭔데? 예수님 자기가 뭔데 해와 달과 별까지 건드리느냐? 그럴 자격이 있느냐?” 만약 이렇게 주님 앞에 시비 건다면 누가 화를 내는가? 해와 달과 별이 가만두지 않고 “우리 예수님하고 한 팬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해와 달과 별이 존재하는 이유는? 기존에 동식물과 가축들이 있는 이유는 범죄하기 전에 인간이 우리를 관장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짐승들이 있는 것처럼, 해와 달과 별은 진짜 하나님, 원래의 형상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그 하나님이 그동안 우리를 이끌었고 만들었고 관리했고 하나님 자신의 뜻, 예수님 자신의 뜻을 위해서 우리를 다루어왔다는 것을 원 없이 드러내기 위해서 해와 달과 별이 그동안 활동한 겁니다.
인간은 해와 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해와 달과 별은 주님 쳐다보고 있습니다. 경상도 말로 하면 ‘시켜만 주이소.’ 이런 거죠, 해와 달과 별이. 그 많은 별. 천문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이 우주에 은하 있잖아요. 은하단. 태양계 정도가 아니고 은하만 해도 3천억 개가 있다고 하는데 그 숫자도 진짜 존재하는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죠. 은하단이 이 우주에 3천억 개 있다는 거예요. 그 별이 하나의 별도 빠짐없이 주님을 겨냥하고 보여주면서 주님의 지시에 따르기를 ‘명령만 내리소서’ 하는 식으로 그들은 반짝이고 있었던 거예요. 온 우주가 주를 찬양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해와 달과 별이, 인자가 이 지구에 재림하러 올 때에 그들은 그 역할을 다 해야죠. “우리 주님이 드디어 여기에 방문하신다. 해와 달아, 봐라. 별들아, 빨리 징조를 보여라!” 징조를 보이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해가 어두워지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29절)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아니, 주님이 그렇게 대단했어요? 그건 인간들끼리만 모르지, 해와 달과 별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항이죠.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31절)
쉽게 말해서 이 우주는 대기상태입니다. ‘주님의 명령만 내리소서.’하는 대기상태에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도 주님한테 ‘명령만 내리소서.’ 우리도 대기상태가 되어야지, 내가 나를 명령하면 되겠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실컷 명령해놓고 살면서 ‘왜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느냐?’
이 범죄한 형상은 해와 달과 별한테 자연물한테도 놀림감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다시 정신 차리고 우리가 믿게 된 주님이 ‘이 정도였어?’라는 것을 늘 감탄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