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지지도 않는 인간 붙들고 왈가왈부하지 말라
이근호 2006-11-13 15:00:40, 조회 : 159, 추천 : 5
이근호는 십자가 지지도 않았다.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이다.
따라서 십자가 지신 분인 예수님 붙들고 항의하라
'정말 당신의 십자가만 있으면 교회는 필요없는가요?'
'정말 당신의 십자가만 있으면 가족도 가정도 필요없는가요?'
'정말 당신의 십자가만 있으면 행함도 필요없는가요?'
'정말 당신의 십자가만 있으면 어떤 짓거리해도 영생얻는가요?'
'정답 당신의 십자가만 있으면 십자가 마을이 없어도 상관없는가요?'
'정말 당신의 십자가만 있으면 내 목숨 날아가고, 굶어죽어도 상관없는가요?'
'정말 당신의 십자가만 있으면 내가 지옥가도 상관없는가요?'
정답은 '그렇다! '이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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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다'가 안되는 십자가 신학-이근호목사님께
손무성 (Homepage) 2006-11-13 17:23:47, 조회 : 185, 추천 : 14
이근호 목사님
목사님의 십자가신학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에 대한 답변으로 '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십자가 신학에서는 성도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수 없는 신학 이라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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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믿습니다'가 안되는 십자가 신학-이근호목사님께
이근호 2006-11-13 17:48:06, 조회 : 181, 추천 : 11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십자가 신학은 '믿습니다'가 안되는 신학입니다.
왜냐하면 '믿습니다'가 되어 버리면 '믿습니다'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개인용 신학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즉 '본인을 증거하는 신학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십자가 능력은 '믿습니다'가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게 하신 분이 누구신가'만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바로 주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답변한 것입니다.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히 8:11)
여기서 '안다'는 것은 '자신이, 주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붙잡는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믿게 하신 주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십자가 신학'을 쥐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개인용으로 소지할 가능성이 있다. 오직 주님이 어떤 분이며 왜 십자가로만 나타내시는가를 보여야 합니다.
이제 '신학'과 '실제 능력'과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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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손목사님께 질의합니다.
이근호 2006-11-13 17:58:18, 조회 : 171, 추천 : 2
손 목사님께서는 본인이 절대로 방종하지 않게 된 그런 인물이 되신 근거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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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저도 손목사님께 질의합니다.
손무성 (Homepage) 2006-11-13 18:15:27, 조회 : 194, 추천 : 5
저는 누구에게도 절대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추측일 뿐입니다.
* 이근호목사님의 어법 참조
이근호목사님은 항상 남의 글이나 말에 대해 추측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상상의 글을 쓰시는데 삼가해주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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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저도 손목사님께 질의합니다.
이근호 2006-11-13 18:35:56, 조회 : 183, 추천 : 0
본인은 절대 방종할 수 없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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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미리 마련해 두신 출구인 지는 모르겠지만...
이준 2006-11-13 19:27:20, 조회 : 167, 추천 : 0
...(생략)...그러므로 인간은 죄만 짓는다는 말은 맞지만 성도는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다 죄를 짓기도 하지만) 성령을 좇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하나님 아버지) 앞에 세우고자하는 것.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게 된 존재로서의 목적’으로 성도 만드신 것이다...(생략)...
출처 : 손무성(2006). '인간과 성도'에 관한 성경적 바른 이해. 십자가마을 칼럼게시판.
->제 생각에...위의 글 표현들 중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다 죄를 짓기도 하지만)..."이라는 표현을 눈여겨 보면 '전적으로 방종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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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미리 마련해 두신 출구인 지는 모르겠지만...
이근호 2006-11-13 20:24:19, 조회 : 167, 추천 : 6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절대로 그런 말을 안했다는 데' 있습니다.
말을 해야만 하는데 그러지를 못한 것이 수상하다는 겁니다.
손목사님의 신학 논리라면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1서 5:18에 "하나님께서 난자 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자가 누구입니까? 사도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누구입니까? 실제로 성령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손목사님의 논리에 의하면 실제로 성령받은 자는, 자신이 내뱉는 말씀의 내용에 실제로 합당된 자에 해당됩니다.
즉 사도 요한은 실제로 자기가 내뱉은 말씀대로 살기에 그런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손목사님이 누구십니까? 성령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손목사님께서는 사도 요한과 동일한 성령을 받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과 같이 동일한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난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이 '우리'라는 개념 속에 이미 손목사님이나 사도 요한이나 합당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도 요한은 해도 될 말이지만 손목사님은 외쳐서는 아니된다는 말은, 손목사님 신학에 논리에는 맞지 않는 겁니다.
손목사님이나 사도요한이나 다 같이 한 성령을 받는 분이라면 마땅히 사도 요한이 하는 말을 손목사님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냥 말만 해서는 참 성령받은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손목사님의 논리에 의하면, 사도요한이나 손목사님이나 본인은 절대로 방종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냥 안 외치고 남겨 둘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쉬쉬하는 말씀'이 아니라 늘 필수적으로 외쳐야 될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에 사도 요한이 본인은 스스로 방종하고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라고 외칠리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목사님도 역시 완벽하게 방종이 없으신 인물로서 이 말씀을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손목사님은 쉬쉬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전한 말씀이라면 본인도 자신만만하게 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도 이 말씀을 완벽하게 지킨 입장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런데 이 말씀을 안 전한다든지 혹은 숨긴다면 이것은 사도 요한 속에 있는 영과 다른 영을 받은 셈이 됩니다.
따라서 손목사님은 반드시 이런 마음 가짐으로 그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즉 "내가 살아보니 과연 하나님께서 난 자는 방종도 절대 없고 범죄도 절대 없더라. 그러니 너희들은 십자가로 미리 도망칠 생각말고, 나처럼 절대 방종없고, 절대 범죄 없는 자가 되어라"라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겁니다.
만약 이런 말씀을 적극적으로 안하게 되면 이것은 사도 요한이 실제로 전하고자 하는 그 중요한 취지를 빠뜨리는게 됩니다.
그런데 손 목사님은 본인의 말대로만 그 누구에게도 남들에게 '자신의 절대 방종없음'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 중요한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사도 요한의 말씀을 빼놓을까요? 제외 시켜도 되는 겁니까?
말씀 전하는 자가 그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전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이근호 신학'으로 빠지는 나락이 아닐까요?
과연 말씀 전하는 자가, 자신이 지킬만한 것만 골라서 편리하게 전하는 것이 사도 요한과 같은 성령받은 자의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말씀 전하는 자가, 자신이 어느 정도 지킬만하다 여기는 그 시점까지 기다려서 전해야 말씀. 따로 있고, 그렇지 않고 영원히 도저히 못전해서 스스로 포기해야 될 말씀, 따로 있습니까?
만약 그런 말씀을 따로 있다면, 도대체 그 목사 속에 계시는 성령님은 뭣 하시는 분입니까?
"애야, 이 말씀 지키겠어 못지키겠어? 못지키겠다고? 그렇다면 전하지마" 이것이 손목사님께서 아시고 계시는 성령의 능력입니까?
도대체 손목사님은 무엇이 무서워서, "나는 절대 방종이 없다"고 왜 말을 못하시는가요?
즉
"여러분 사도 요한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난 자는 절대로 범죄치 않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자신있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살아보니 저도 절대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왜 못하는가 말입니다.
혹시 이런게 아닐까요?
"여러분, 사도 요한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난 자는 절대로 범죄치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방종 안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죄 용서함을 고마워합니다"라는 뜻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동안 몇 개월동안 그렇게 비난을 스스로 퍼부은 '이근호 신학'에 빠지는 꼴이 됩니다.
즉
"성경 말씀에 대해서 소위 십자가를 안다는 작자들이 자신들은 아예 못지키니까 비겁하게 십자가, 십자가만 외친다. 그러니까 방종에 자꾸만 확산시켰다. 이것이 '이근호 십자가 신학의 한계'이다."
여기에 대해서 손무성 목사님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 실제로 말씀 자체를 실천하고 있는 자만이 진정 하나님 말씀을 외칠 자격이 있는 성령받은 영적 사람이다. 그런데 이근호 목사는, 모든 인간을 다 육적으로 간주해서 영적 사람의 말씀 실천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근호 신학의 모순이다. 하지만 나 손무성 목사는 다르다. 이근호 신학이 풀지 못한 것을 풀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쪽으로 내뺄게 아니라 진짜 영적인 사람은 진짜로 성경 말씀을 지켜 낸다는 사실이다 . 이근호 신학은 이런 '영적 새 피조물의 능력'을 빠트렸다. 그러니 이제는 그 신학에서 벗어나자!"
자 손무성 목사님 본인부터 이 이근호 신학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사람, 즉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절대로 범죄치 아니합니다."
이런 말씀을 필히 전해야만 나 손무성 목사 역시 '절대로 방종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논리의 필연성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남들에게 '나는 절대 방종치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체 모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런 예가 사도 요한의 구절 뿐만 아니라 전 성경 구절로 확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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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사님께서 바꾸신 글의 일부에 대해
이준 2006-11-13 20:35:39, 조회 : 149, 추천 : 2
조용히...글(손무성(2006). 갈라디아 2장 20절에 대한 오해에 대한 고찰. 십자가마을 칼럼게시판.)의 일부를 고쳐놓으셨군요.
그런데...최초에 쓰신 글을 제가 백업해 두었었답니다.
--------------쓰신 글의 일부 변동 내용------------------
**고치시기 전**
...(생략)...즉 ‘죽었다’(성도는 죽은 상태로 있다.성도와 내주하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때는 불신자와 동일한 상태,즉 성도는 없고 인간만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생략)...
**고치신 후**
...(생략)...즉 ‘죽었다’(성도는 살았지만 죽은 것 같은 상태, 십자가에 또 반복적으로 죽이심으로 죽어야하는 상태. 내주하는 성령이 우발적으로 역사하지 않을 때는 불신자와 동일한 상태 또 십자가에 죽여야하는 상태)라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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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이해든, 독자들의 이해를 위한 것이든...나름대로 애쓰신 흔적이 엿보이긴 합니다만...제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별 차이 없어 보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맥락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의 목적은, 성도가 되게 된(구원받게 된) 방편이 율법에 의해서냐 믿음에 의해서냐에 우선적인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2장의 전반적인 흐름도 이러한 갈라디아서 전체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함이 타당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절을 한 곳만 지칭하라고 한다면 갈 2:16입니다.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그 구절의 요지입니다. 그 이후의 구절들은 이 핵심 구절에 대한 부연 설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함이 기본입니다. 갈 2:19의 경우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부연 설명이고, 갈 2:20의 경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한 부연 설명입니다.
이러한 갈라디아서의 맥락은 성도(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존재들) 자체의 본질이 여전히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에 일차적인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성도 되게 된 것이 율법에 의해서냐 믿음에 의해서냐에 일차적인 초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도 되게 된 것(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의 방편이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갈라디아서 2장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성도의 처지에 대한 이해도 아울러 수반되는 것은 자연스런 국면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의 전반적인 맥락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의롭다하심을 받게 된 방편이 율법과 믿음 중에 어느 쪽이냐에 있다는 점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갈 2:20의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요...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것이라"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면, "살아 있는 존재는 그리스도이지, 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지 나는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2:19의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는 또다른 국면입니다.
골 3:3은, 성도의 생명(살아 있음)은 하나님 앞에서 더이상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골 3:3) 『이는 너희(성도를 가리킴)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너희, 곧 성도가 죽었다는 말은 성도 자체의 생명은 더이상 생명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는 말은 갈 2:20에 비추어 이해하자면, 그리스도의 생명(살아 계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뜻이지, 성도 자체의 생명(살아 있음)이 하나님 앞에 생명(살아 있음)으로 간주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도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도의 생명이 병존하거나 양립한다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이 역시 갈 2:20에 비추어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생명(살아 있음)을 생명(살아 있음)으로 간주하신다는 말입니다. 갈 2:20 전반부는 분명히 성도더러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 2:19에서 언급된 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한 것과는 또다른 국면으로서, 갈 2:20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에 '대비되는' 성도의 '죽어 있음'을 거론한 것입니다.
고치신 후의 표현 가운데 아래와 같은 글귀가 눈에 띄는군요.
"... ‘죽었다’(...내주하는 성령이 우발적으로 역사하지 않을 때는 불신자와 동일한 상태...)라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위와 같은 표현을 대하면서, 저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주하는 성령이 우발적으로 역사하지 않을 때..."라고 하셨나요?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볼 때, 성령이 우발적으로 역사하지는 않더라도 성령은 성도에게 내주하기는 한다는 말씀이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이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것이라"는 갈 2:20의 표현과 무엇이 다른가요? 성도 자체의 본질이 죽어 있다, 살아 있다라는 논의의 쟁점을 잠시 떠나서, 일단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그 안에 살아 계시는) 존재들"이 곧 '성도'라는 점을 목사님께서도 견지해 오신 것으로 아는데, "성령이 내주하시는" 존재가 '성도'라면, "우발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불신자와 동일한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우발적인 역사"라는 게 어떤 것인가요? 아울러, 그것이 "성도(그리스도 안에 놓인 존재이자 의롭다하심을 받은 존재)"라는 신분을 도대체 어떻게 결정짓는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분명히 "내주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발적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불신자와 동일한 것"이라는 식으로 "죽었다"는 말의 의미를 규정하시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의 논지를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영)께서 내주하시는 존재인데, 살아계시는 분은 바로 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성도도 덩달아 하나님께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이지, 성도 그 자체의 본질이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그 몸이 죽어 있더라도(롬 8:10)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덕분에 성도라고 간주되어 구원되는 것이다"
너무 간단합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의 분투...그리스도 안에서도 여전히 죽어 있는 성도라는 인간들을 살리려(?) 하시는 노력이 참으로 눈물 겹기까지 합니다.
"내(성도)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것이라..."
끝으로, 갈 2:20에서 "내(성도)가 죽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첨언하자면,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다...즉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지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해놓고서 "내가 육신을 입고 지금 살아 가는 현상"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느냐...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도 "믿음"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신불신을 떠나서 인간들은 숨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현상을 놓고서 살아 있다고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살아 있다는 기준은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는 존재라야만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죽어 있다고 선언됨과 더불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오직 살아 있는 존재로 인정되는 그런 처지...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러한 납득하기 힘든 현상에 대해 접근하는 길은 오직 "믿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신 자들에게만 제공되는 것입니다.
(롬 6:1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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