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9/19

아빠와 함께 2024. 9. 19. 11:06

야고보서3장7절에 나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이 말은 쉽게 해서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규정해 놓았습니다. 짐승은 말 없음, 말 못함. 인간은 말을 함. 이런 차이점이 있어요. 이런 차이점을 가지고 창세기1장을 그대로 가져가버립니다. 그러면 창세기1장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없음. 형상 있고 형상 없고 이렇게 되거든요. 

야고보서3장9절에 보면 그런 암시가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서3장9절에서 뭘 연관시키느냐 하면, 말과 무엇과 연관시켰다? 형상과 이렇게 직접 연관시켰다.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니 말하는 품새, 말하는 내용을 통해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하나님께서는 규정 하겠다. 이 말입니다. 규정하겠다는 말은 심판하겠다는 그런 말과 같지요.

그래서 이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나왔을 때에 야고보는 말을 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형상이 외부로 드러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는 그렇게 보는데 일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는 야고보처럼 이렇게 이야기하지를 않아요.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렇게 규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윤리성과 도덕성을 규정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이에요. 왜 잘못이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되려면 선과 악이라는 체계 안에 있어서만 이게 윤리성과 도덕성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체계 안에서. 그런데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치는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2장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은 이건 옳지 않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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