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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냐 행위로냐

아빠와 함께 2024. 8. 20. 12:25

1.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율법과 복음

2.계시와 해석

3.그리스도인과 율법

4.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

 

■1.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율법과 복음

-믿는다는 것은 거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거룩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믿음이 거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 거룩을 이루셨다느 것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13  믿음은 생명 현상이요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믿는다는 흔적이지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며 또 믿음은 생명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일 뿐 행동이 없는데 행동을 더해야 믿음이 온전해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7  언약적 신율주의

율법은 언약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이다(최갑종 홍인규 교수)

즉 율법은 언약 백성의 신분을 확립하기 위히여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속 사건을 통하여 이미 확립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견해. 즉 율법의 의도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 것이 아니고 신자의 사랑에서 실현된다고 보          는 관점. 이러한 관점은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간과하고 율법성취의 의무를 성도에게 지우고 있          다 이것 역시 율법주의적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8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러한 논지는 구속사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관련    이 되었는지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옛 언약

▲아브라함

19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20  부름받은 후의 아브라함은 그가 무엇을 위해서 부름받았는가를 깨닫게 되는 생애를 살게 된다.

21  여호와 경외란 여호와의 선언에 의의를 제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선언에 굴복하는 것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을 것은 자신도 망할 수 밖에 엄ㅅ는 지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희생양만이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

23  유월절에 희생된 어린 짐승은 하나님의 내려오심 즉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겠다고 하신다(출16:4) 하나님의 희생이 그들의 생명이라는 것을 믿고 있느냐를 시험하시려는 것이다. 그르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희생을 반영하는 언어적인 거울이다.

24  모세는 이스러엘이 여호와의 은총을 입을 시기논 망하고 돌아온 후인 새 언약의 시기임을 암시한다. 율법은 새 시대에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새 시대가 오기까지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희생과 이스라엘의 죄인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다윗

 26  다윗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다윗왕조 안에 심겨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왕조는 이스라엘이 심겨질 거룩한 산이다. 그러므로 이 왕조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약속의 땅이다.

 

새 언약

▲구속사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

29  예수님은 이러한 왕으로 오셨다고 신약은 증언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다.

30  모세가 내다보았던 율법의 행함이 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율법이 완성된 새로운 시대를 가지고 오신 것이다. 의란 옛 언약의 성취를 말하지 인간의 행함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 홀로 이 의를 이루셨다.

31  산상수훈에서 보여준 율법의 해설과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사역으로 인한 율법 성취의 모습을 선포한 것이다

32  바울은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의는 율법과는 상관없는 의라고 했으며 또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율법 완성으로서의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성격

32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율법과 상관 없는 의. 즉 율법에서 나지 않은 의를 제공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전케 했다는 말이다.

33  독생하신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 주셨다. 율법은 은혜와 진리를 보여 주는 그림자인데 배해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의 실체이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안식일은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자기 자신은 안식일 그 자체라는 뜻으로 자기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그림자는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의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다.

37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정리하면 그림자와 실체이며 이 관계는 연속이 아니라 단절이다. 연속선상에서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을 제시하므로 전에 그림자로 있던 것들을 쓸모없이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는 근원이 다르다. 하나는 땅이요 하나는 하늘이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다스리시므로 이 땅에 하늘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

38  성령님은 이 주의 뜻을 따라서 주의 몸을 창조해 내는 일을 하신다.창조되어 나오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즉 교회다.주님의 생명력의 구현체다.율법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의 부활생명인 성령님에 의해 생겨난 성령님의 구현체다.그리스도의 몸이요 부활의 몸이다.교회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성령님을 호흡하며 살고 있다.성령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약속의 땅의 실체이다.이 실체는 하늘이다.땅의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의 세계이다.

39  율법 즉 옛 언약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하시고 또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고 한다.그리스도가 오신 후 그 안에 들어가면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 새로운 세계 속에 있으며 새 관계 속에 있기 떄문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다.이 새로운 시대는 왕을 믿음으로 사는 시대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산다.

 

▲명령법에 대하여

41  인간은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할 수가 없다.성령님의 생명을 보여주는 현상이 어떤 것인가를 명령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43  성경에는 성화 개념이 없다. 온전한 자란 계시를 온전히 깨닫고 믿는 자를 말한다.

46  부활과 오순절 이후의 신약에서는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한 교회의 삶을 율법의 용어와 구절들을 사용하면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새 생명으로 성령님으로 살라는 것을 권면하로 있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완전을 확인하면서 그것이 새로운 자기라는 사실을 되새기라는 것이다.

47  믿음은 본질상 삶이요 움직임이요 역동하는 것이다. 자유함 가운데서 사랑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권면과 교훈으로 이해해야 하겠다.왜냐하면 예수님의 율법 완성 안에 있는 교회에게 주어지는 말씀들이기 때문이다.

48  왜 구약의 어법을 신약이 사용하여야 했던가?

첫째 구약은 신약의  뿌리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인간 역사의 제한성 때문이다. 하늘의 진리는 당시에 있었던 문화의 옷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셋째, 신약의 위치에서도 구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서 신약과 함께 살아 있기 떄문이다. 신약은 구약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으며 구약은 신약에서 그 완성된 의미를 본다.츨발과 성취라는 관계이다.구약 본문이 본래 의도하던 의미의 목적지는 신약에 있다. 신약에서 밝혀진 의미가 구약 본문이 원래 의도했던 의미이다.

 

결론율법은 율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은혜이며 하나님의 희생의 표현이다. 이 희생은 그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은혜이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자는 적으로 규정하시고 심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통일성을 가졌다. 그러나 옛 언약은 그림자요 땅이요 인간이요 죄와 관련되어 있는 세계인데 반하여 새 언약은 실체요 하늘이요 사죄의 세계요 하나님 자신이 실체로서 임재해 계시는 천국이다.이런 점에서 양자는 완전히 다르다. 율법적인 어법으로 말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상태에서 성령님 안에 있는 믿음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새 언약 속에 잇는 자가 어떤 형태의 율법이든지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바을이 말했던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 계시와 해석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책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통일된 전제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발견하지 않고는 성경이 올바르게 해석되지 않는다.계시는 인격이요 정신이다. 계시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다. 계시는 인간의 논리 구조를 통해서 파악되는 것도 아니다.계시는 인간의 역사 자체를 초월하여 있다.계시는 움직이며 활동을 하며 일을 한다. 어떤 결과를 산출한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세상이요 역사요 인간의 언어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의 산물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될 때 하나님을 또 계시하기 시작하셨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특별계시의 역사다. 이 특별계시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인격의 나타남의 연속체다.계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언어와 별개의 위치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시고 또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하기도 하신다. 떠라서 계시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미대로 이해될 때에 계시가 된다.계시는 인간 세계 밖에 있는 것이다. 인간 세계  밖에서 선택된 인간에게로 침투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과 율법 

-하나님의 나라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신자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116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 때문이다.사랑은 사랑의 생명이 있어야만 하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극 그리스도인은 구약적 율법이든 신약의 율법적 말씀이든 그런 것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것들을 자신의 행동 근거로 삼지도 않는다.

117  그리스도인이 영향을 받으며 근거로 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생명이다.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주 예수님의 삶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흔히 주님은 율법을 완하신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주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문자대로 다 지키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게 율법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미를 새롭고 완전케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율법을 대체하는 일을 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다. 안식일에도 죄와 고통으로 허덕이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놓아 보내셨다. 율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전혀 주의하지 않으셨다. 다만 아버지의 생명이 그 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에만 주의하셨다. 

118  한마디로 말해 주님은 율법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으며 오직 율법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만 관심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신 것이다. 그 속에는 율법을 넘어서는 아버지의 완전한 생명이 있었기에 전혀 율법에 주의하지 않으신 것이다. 

 

 

 

 

 

 

 

 

 

 

 

■4.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

-인간은 본능상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언제든지 모두를 적으로 삼는 존재다. 자기 가정의 행복과 자기 교회의 부흥과 보존을 위해 그리스도와 싸운다. 이러한 패역한 행동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이미 허물어 버리신 율법을 다시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와 싸우는 행동이다.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율법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자격자는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어 있는 자들뿐이다. 십자가 안에서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신약 시대에 와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게 된다.

215 참된 성도는 자신의 아픔보다는 주님 앞에 늘 회개하는 기쁨으로 사는 자이다. 

 

㉮ 인간의 조건과 예수님의 구원성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이 평소에 지니고 있는 구원관을 심판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분이시다. 자기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준재를 죽여 버리고 싶어하는 자아 구원론을 공격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인간 죽이기 사건이다. 심판 앞에 세우는 작업이요 죽음의 본질 속에 집어넣는 작업이다. 창조 파괴 작업이 곧 구원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죽음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죽음과 세상살이

인간들의 세상살이는 곧 '죽음살이'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신 것은 선악과의 지식은 인간을 지탱하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자체가 깨어지고 단지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의해서만 창조 세계는 탄생한다. 여기서 인간의 자기 살리기 노력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살리기 노력이 상호 충돌하게 된다. 생명 과실의 능력과 선악을 아는 지식 사이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늘 우상화하는 인간 바로 우상을 최후의 공격 목표로 삼으시고 기 세상에 '남은 자'룰 던져 넣으셨다.

남은 자

이들은 선악의 원리에 따라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니다. 오직 생명나무의 능력으로만 창조된 자들이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능력은 이들 속에서 선악의 지식을 배척하는 모습으로 자리잡게 된다. 선악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버린 창조 세계의 실패성을 함께 보여 주는 생명나무이다. 따라서 왜 선악의 원리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원인과 이유도 동시에 보여 주는 자들이 남은 자들이다. 

227 롬11:3-6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남은 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남게 된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을 뜻한다.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말씀은 인간들의 행함의 결과로 이해하려는 은혜 개념을 모두 거부하는 말씀이다. 은혜가 지상에 떨어질 때 그 주위에서 피어나는 개념들은 바로 남은 자라는 표현이요 택하심이라는 표현이요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음이라는 표현들이다. 이런 개념들과 표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은혜라는 말을 감히 거론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택하심을 거부하고 행함에 미련을 두고 있으면서 계속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비복음적이다. 은혜하는 말은 단독으로 쓰일 수 없다. 대비적 개념과 더불어 등장한다.

228 특히 이사야나 엘리야에 있어 그들의 실존은 그들의 투쟁 과정을 통해 설명되어야 될 실존이다. 알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선지자들이었다. 다른 민족보다는 은혜와 택하심과 남은 자 개념을 함께 믿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 백성과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난처하고 황당했다. 

229 하나님과 엘리야와의 대화를 주의깊게 파헤칠 필요가 있다. '나만 남았다' 이러한 엘리야의 신앙 인식은 전혀 은혜라는 바탕 위에 서 있지 않다.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자신의 행위에 근거해서 신앙인이 사라졌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본인들이 알아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면 결코 신앙이 유지될 수 없다는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은 달리 표현하신다. 7,000명이 있더라가 아니라 남겨 두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릎 꿇지 아니한 행위의 주체는 그 남은 7,000명이 아니라는 것이다.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남겨진 자들이다.

230 하나님이 남은 자의 주체로 등장하시는 이유는 엘리야의 기도에 답변을 주시기 위해서이다.엘리야가 생각한 남은 자 개념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제시한 하나님의 새로운 원칙에 준한 남은 자 개념은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서 남겨진 자들이다. 이 같은 차이는 참 이스라엘을 규정하는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제시한다.하나님은 엘리야의 이러한 틀까지도 깨려고 하신다. 제3의 7,000명이라는 집단이 엘리야 앞에 새로이 부각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론은 성도 자신의 행위가 훌륭하고 대단했음을 보여 주는 구언론이 아니라는 점이 주안점이 된다. 

231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여 남게 한 그 은혜를 그대로 담는 방식에 국한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범죄한 이스라엘 전체와 자신과 비교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남은 7,000명과 엘리야 본인의 차이점을 비교시키신다. 구원론의 중심을 엘리야가 서 있는 자리에 더 이상 있지 말고 7,000명이 있는 자리로 옮기라느 것이다.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원망과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가 아닌 7,000명의 입장에서 보면 엘리야 선지자도 본인의 신앙이 대단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남게 하신 그 은혜의 능력 때문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진실이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만일 은헤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즉 인간의 행위를 거부하는 구원론이 참된 구원론이다.인간의 행위가 아닌 선택하시는 이에게로 초점과 관심이 모아지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234 (롬9:32.33)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남은 자들이 믿는 신앙 안에는 행함과 구원을 연관시키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요인이 들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반대로 남은 자로부터 제외된 자들이 믿고 이해하는 하나님의 법안에는 행함과 구원을 연관시키면 납득이 되고 아무런  탈이 없는 요인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차이성을 결정짓는 것에 서 성경은 부딪힐 돌 혹은 거치는 반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결국 ""라는 인물에 모든 예언의 초점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언어 표현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해석 행위

235 "전제없이 성경을 보자.혹은 신앙의 눈으로 성경을 보자" 이렇게 외쳤던 유대인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주님은 그들의 무전제나 신앙의 눈을 죄악의 극치라고 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이 주님을 해석해 낼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는 신앙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동기로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즉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계시화'이다. '영원한 자아를 형성하는 것'.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부터 모든 욕구는 신이 되고자 하는 데로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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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주신 이유

247 율법은 이스라엘이 잘 되라고 준 게 아니다. 인간에게서 과연 의가 나올 수 있는가를 점검하기 위히여 주신 것이다.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주신 것이다. 롬3:19.20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순종 여하에 따라 취소 무효가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심판으로 인간을 몰고 가려는 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248 율법대로 행해서 거룩을 보이라는 게 아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할 정도로 자신이 죄인인 점을 시인하라는 것이다. 아예 인간을 전적인 죄인으로 단정지어 버리는 하나님이시다. 

250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감추고 있는 인간들의 죄의 근원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 영광성이 우선이 아니라 이미 자기 영광성을 목표로 한 자기 구원관에 완전히 포로로 잡혀 있음을 폭로하기 위해서이다.

251 하나님의 영광성은 죄인인 인간이 아닌 유일한 의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출발할 때만 가능하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오직 주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님에게만 영관이 돌아가야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간다. 

253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3:16)' 이라는 대목에 유념해야 한다. 즉 주님이시기에 '믿음'을 줄 수 있는 입장에 있고

254 인간은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가 될 수 없다. 주님을 믿는 것조차 자기 자신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의 믿음은 옺기 주님의 전쟁 사역의 결과로 얻어지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 그 유일무이한 예수님만을 지향하고 있다는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다. 

255 참된 신앙의 마지막 관심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왜냐하면 그분에 의해서 직접 주어진 믿음은 오직 믿음의 원천을 향하여 찾아가도록 되어 있기 떄문이다. 

 

성령님의 활동 방식

257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배척받으셨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예수님에게 영광이었다. (요13:30-32).

258 그렇다면 성령님께서도 세상 끝날까지 계속적으로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그 십자가 사건을 전하신다. 

261 그리스도께서 받은 저주가 성도에게 속량이 되기 위해서 성도가 행할 율법은 전혀 없다. 육체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262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란 십자가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어 늘 성도 안에서 현실이 되는 삶이다. 십자가를 성도 안에서 늘 유지시키는 능력은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다.성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지 않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가짜 믿음이다. 

263 성도의 믿음 안에는 성도의 행함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받으신 행위가 들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의 저주성은 성도로 하여금 그 어떤 저주의 상황 속에서도 저주가 미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육체의 행함을 내세울 여지가 없어졌다는 말이다.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었다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만 믿는 믿음 안에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성령님을 통해서 완전히 자기 사건으로 발생되어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믿을 것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64 저를 믿는 자란 지금 하늘에 계시는 주님으로서 예수님인 것을 명확히 하는 자이다. 즉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번석오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완전히 내재되어 있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믿음의 현상은 현 시대에서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반복적으로 발생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물론 성령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일하시는 것이다. 

265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지신의 것도 포함시키지 않으신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다. 

 

구약에서의 능력 전수

모세와 여호수아와의 관계

모세의 지팡이와 더불어 생겨난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모세를 다루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전쟁 개입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탄생했다, 따라서 그렇게 생겨난 나라 안에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이 유일하게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이 점을 보이기 위해 산 위에서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있꼬 산 밑에서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이스러엘 군대가 싸우고 있다.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아말렉 군대가 패배하고 내려가면 이스라엘 군대는 무용지물이 된다. 전형적인 붙이시는 전쟁이다.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모세에게 예속되어 있는 인물이고 모세 또한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 예속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범주를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남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다.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단지 모세 언약의 자기 성취력을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만 담당할 뿐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떵으로 들어가는 것은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이다. 이제는 애굽탈출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의 죄로부터의 탈출이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땅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땅에 들어서게 된다. 지파이 대신 모세의 실패의 경험이 담긴 법궤를 앞장세우며 들어간다. 

 

▲엘리야와 엘리사와의 관계

이스라엘 왕을 지적할 수 있는 자격자는 이스라엘 왕이신 여호와밖에 없다, 죄를 공격하는 것은 다윗 언약에 준해서이다. 모든 것이 언약대로 빈틈없이 실시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엘리야를 파견시킨다. 참된 이스라엘은 재창조되어 나가야 한다. 이 전쟁의 한복판에 엘리야가 있다. 엘리야의 위치는 다윗 언약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자만 이스라엘 왕을 심판한다는 의미에서 불의 모습을 띈다.엘리야가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데려가기 위하여 불수레와 불말을 보내게 된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그 동안 전쟁 중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쟁은 개인적인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 전쟁이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이 지상을 떠날 때 그것을 알게 되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자기 옷 대신 삼는다. 엘리야의 범주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독자적인 것이 전혀 없다 즉 엘리야가 했던 행위를 반복한다.이제부터 엘리사를 저주하면 심판만 있을 뿐이다.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와 더불어 살아 있다. 이처럼 하나님과 언약 중심에 서 있는 자의 제자가 되면 그 제자들은 그 언약 안에 예숙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바로 새 언약의 중심이신 예수님의 영을 예수님의 제자인 택한 자들 속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백성들도 철저하게 새 언약에 예속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새 언약인 십자가의 언약이 성도 안에 가서 어떤 양식을 띄게 되는가?

 

㉵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

성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죽은 자도 되고 산 자도 된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이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말은 죄에 대하여 죽어 있다는 말이다.(롬6:11)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죄의 지배권 밑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은혜가 성도에 대하여는 왕노릇하고 있는 실정이다. 은혜의 왕노릇이란 전에 죄가 인간을 지배하던 그 왕노릇 구조와 같은 구조로서 파악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성도의 모든 며에는 죄가 더 이상 주관하진 못하고 은혜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은혜의 왕노릇이란 주님이 의를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제공하시는 사역을 말한다.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선물이 물질 형식이냐 인간 그 자체냐에 따라 선물의 존재 방식이 달라진다. 진정 하나님 백성이 지녀야 하는 것은 거룩의 유지 내지는 거룩의 지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뭔가 세상에 대해 보여 줄 것이 있는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고 마음을 낮추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이 거하시는 집에 불러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독자성 추구의 배후에는 악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 이럴 때 나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증언이다. 

 

㉶ 잘못된 믿음

모세 율법은 인간들이 자기네들 영광을 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론한다는 그 자체를 철저히 파헤치고 고소하고 정죄하는 기능으로서  다가온 것이다. 즉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언급한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영광을 자기네의 양광으로 전환하고자 말씀을 사용했다. 참된 하나님의 영광이 육신으로 오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모세의 율법은 이 독생자의 영광을 소개하기 위하여 미리 주어졌을 뿐이다. 모세와 율법은 서로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모세 자신은 결코 은혜와 진리가 될 수 없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모세를 대단한 인물로 여겼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점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 아들인 자신을 믿지 않느 것을 봐서 너희 아버지는 마귀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혈통적 연관성만 확인할 뿐이었다, 빛이 어두움을 비쳤지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들을 심판 안에 가두어 두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메시아가 심판주라는 공식만이 진정 믿음의 내용이어야 한다. 이제 남은 사항은 우리가 왜 마땅히 심판받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알고 메시아에 대해서 많이 알아 그는 것뿐이다 .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바로 이 메시아로서의 죽음이 그대로 택함받은 자 속에서 계시로 작용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메시아의 죽음안에서 자신과 세계와 우주와 하나님을 다시 보는 것이다. 메시아의 죽음에 함께 동참한 자는 자기 의에 의한 자기 구원이라는 기대는 무산된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메시아의 죽음 속에서 자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며 회개이다.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도록 끊임없이 회개가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해 낼 수 있는 거룩은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가운데 말씀의 능력이 역사하도록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졌다는 사실을 수납한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표출하고 계시느냐에 솬한 것이다. 

 

㉷ 선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

선물이라는 표현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치 못하게 한다는 의도를 지니고 등장한 표현이다. 미련과 약함과 천함과 멸시 그 자체도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천국에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성과급 의미의 차등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만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하등의 차별이나 차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엥서는 상호 비교하는 원칙이 추방되어야 마땅하다. 모두 다 약한 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 여러가지 지시를 통해 드러나는 의(거룩성)

사도들은 무수한 지시와 부탁들을 성도들에게 남기고 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변화시킨 그 능력과 사랑이 도대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지를 온 우주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전에 죄의 종이 되었던 시절에는 죄에게 순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과 믿는 자는 늘 이러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데 주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임의대로 행동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내리시는 말씀의 때가 되어야만 했다. 인간은 행동으로 반응을 나타내는 살아 있는 존재이다.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얼마든지 행위로써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제는 하나님의 지시가 떨아진 자리에는 늘 죄와 대립되게 경계선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죄 용서를 받았기에 마음놓고 악을 행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악하게 살면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는 주장중에서 어느 것이 성도에게 믿음을 계속 확인케 하는 명령이겠는가? 물론 두 개의 문장 중 그 어느 것도 자동적으로 믿음을 유발 시키지는 못한다. 일단 자기 구원을 위하여 말씀에 접근하는 믿음이라면 그 어느 문장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른 믿음이 요구된다. 죄는 믿음에 의하지 않는 실천성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다, 주님의 지시는 주의 실천력과 병행해서 이루어진다. 오직 의롭고 유일하신 주님의 한 몸에 의해서 다 아루어진 것이기에 주님의 지시와 요구는 새삼스럽게 의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위력을 죄의 위력 가운데서 확인시키는 작업이다. 성도들이 달성해야 될 새로운 생활의 기준과 목표를 숙제로 제시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한 몸에 의해 달성된 그 의의 세계로 초청하고자 완전한 의로움 앞에 늘 죄인들을 세우시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하신 실천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부정하는 쪽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왜 놀고 있느냐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때문에 이런 지시를 내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지를 묻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성도르 하여금 자기 행위의 목표점을 부정하고 지시하는 분의 목표점을 의지하면서 행위에 나서게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오직 주님으로부터 도출된 행함과 능력만을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무시하고 소홀히 한다면 성도라 볼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서 성의를 가지고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 명령과 지시들을 자신의 자아 구원론과 연관시키는 자이다.이렇게 되면 정작 무시해야 하고 부정해야 되는 자신의 행함과 실천력을 자기 구원의 기초로서 재등장시키는 것이 된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지시와 명령들은 늘 인간의 죄된 행위를 염두에 두고 주어지기 때문에 성도로 하여금 지기 실천력과 주님의 실천력 사이에서 무엇을 의지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기위해 등장한 것이다. 딛2: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본문은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이 말씀을 믿느냐가 중요하다.나만은 꼭 친 백성이 되고야 말거야 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내가 구원되든지 아니 되든지 상관없이 주님은 반드시 선한 일에 친 백성을 만들고야 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에 근거해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나라고 당연히 제외되리라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말씀은 나 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위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만을 예정하시고 그 몸을 이루시는 데 목표가 있다. 성도는 한 평생을 자기 죄를 아는 시절로 보내야 한다. 

 

㉹ 결론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