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삶이란
모든 여러 가지 말씀의 끝은 십자가로 끝났을 때 정답입니다. 왜? 거기서 다 이루었으니까요.
예수님 자신이 모든 성경을 자기가 떠안고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룬 모습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될 수 있어요.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의 죽음이다]
말씀을 완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푹 잠긴다, 그런 뜻입니다. 성도의 삶이 뭐냐 하면 어린 양을 따르는 삶이라고 되어 있어요.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주님 가신 그 코스로 들어가야 돼요. 너 자신을 아작 내는 그곳으로 네가 함몰되어 버려라. 지금 이게 성도의 삶이거든요.(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신앙의 증표는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여졌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느냐? (계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도살당한 어린 양이 보좌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동안의 신앙생활에서 오해가 컸던 것은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 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의 죽음을 따른다’ 이게 맞단 말이죠. 이게 맞는 거예요. 내가 멀쩡하게 산 채로 따르면 안 되고 주님을 빨아 당긴 그 도살장의 죽음의 위력에 나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식의 삶이 성도의 삶이 되는 거예요. 살아남은 것이 신앙의 증표가 되질 못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쓰여졌는가’ 하는 거예요. 어떻게 쓰여졌는가?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도살장 가는 것으로 확정이 된 겁니다. 찬양에 합류하려면 우리도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우리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그 위력을 오히려 반겨야 되겠죠.주님이 지상에서 들어갔던 그 장소, 지상과 천상, 천국의 경계선에 쳐져있는 것은 바로 도살장입니다. 도살장으로 들어갔던 자들에게만 천국이 허용된 겁니다. 도살장은 왜 만들어놨는가? 말씀을 다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도살장이 있어야 되는 거죠. 도살장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도살장에 안 들어가겠다고 발악하는 거예요. ‘이걸로 대충 때웁시다. 내가 예수 잘 믿을게요. 이걸로 퉁 칩시다. 나한테 아직 시집도 안간 딸이 있는데 이럴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 잘 믿을게요.’ 주님이 가신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꼭 굳이 노래 부르라 하면 부르죠. ‘다른 길은~ 다른 길은~ 다른 길은 없.어.요!’ 내가 도살장에 가든지 아니면 짐승한테 매여서 이마에 손에 표를 받든지. 그래서 어린 양 앞에서 쏟아내는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진노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님 가신 도살장으로 가든지. 다른 길은,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국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지옥
인생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은 이렇게 알면 돼요. 의견과 현실을 구분 짓는 거예요.
자기가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내 운명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내가 지금 몸이 아프다’ 자, 이게 나의 의견입니까, 안 그러면 현실입니까? (현실.) 그러니까 틀린 거예요. 이것은 나의 의견에 불과해요. 이것은 내가 제시한 이론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있는 이상 나의 의견은 반드시 여기서 선악지식이 표출되게 되어 있어요. 드디어 감추지 못하고 이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면, 세상의 현실은 뭐냐? 선악지식을 부정해서 이걸 지워버리고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가 다 이루었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도배하는 식의 현실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몸이 아파버리니까 그 순간 현실을 잃어버리고 내가 몸이 아프니까 진짜 아프니까 진짜 진짜 아프니까 이것은 현실 그대로라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나의 의견의 특징은 나에게 이익이냐, 나에게 손해냐를 생각하면서 내놓은 의견, 내놓은 뜻이 바로 현실이 아닌 거예요. 이게 가짜인 겁니다. 이 가짜를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 있음부터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말씀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진짜 현실은 뭐냐? 이런 선악체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어린 양과 무관한 것은 지옥이고 어린 양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천국이고. 이것이 현실로 십자가에서 이미 확정나버렸어요. 확정나버렸다고요. 그 사람의 자리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요, 자리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국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지옥인 거예요.
■십자가에서 시작
시작을 뭐로 하느냐? 예수님의 시작은 십자가부터 시작하게 만들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미 그 안에서 무덤 속에 들어온 게 돼요. 말씀 시작이 나의 시작을 바꾼 거예요. 말씀 시작으로 나의 시작을 바꿔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뭘 해도 전부다 말씀이 스스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식으로 우리 주님 만날 때까지 평생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적이(꽤 어지간한 정도로) 안심이 되죠. "세상은 내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갈 6:14)."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천국 가기위해서는 이거 챙겨야 되고 예수 믿어야 되고 성경대로 삶을 살아야 되고 육의 열매 고만 맺고 이제는 성령의 열매 있잖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 양선 그런 거 열심히 추구해야 되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면 그만큼 보너스 상급 주어지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헤엄을 칠 때 물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은 이렇게 해야 되고 물에 들어갔을 때 팔 젓고 이렇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물에 집어넣고 물에 뛰어들게 한 다음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의견, 나의 이론 -나는 몸이 아프다. 감기 들렸다. 며칠 더 못살지 싶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고하여야 되나- 이건 어디까지나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죠. 50년 믿었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이 희미해졌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아무리 봐도 나는 불신자 같아요. 어떡하면 좋아요. 본인이 대책을 세우겠다는 그 자체가 지금 물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치는 요령을 익히려고 아주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의견이에요. 제가 말한 자기 의견이라 하는 것은 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환상이에요. 환각. 환각이에요.
주님께서는 성도를 일깨우기 위해서…… 성도도 인간인지라 맨날 환상을 꾸잖아요, 꿈속에서 꿈을 깨버리죠. 인간이 예상한다는 것은 예상한 내용이 어디서 나왔다는 뜻이에요? 내 의견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내 의견에서 어떤 좋은 이야기가 나와도 그것은 꿈에 불과합니다. 그 꿈은 꿈속의 다른 꿈이에요. 꿈이라는 말로 표현한 이유는, 내가 예상했는데 꿈은 예상대로 됩니까, 안됩니까? 꿈은 예상대로 안 되잖아요.인간이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것, 하나의 자기 견해에 불과하고 하나의 개인의 이론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는 반드시 예상 밖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예상한 것의 밖이에요.
■네가 원하는 것이 왜 굳이 있어야 돼?
내가 원하는 것이 왜 굳이 있어야 됩니까? 무덤 속이거든요. 십자가가 무덤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지금 어떤 아쿠아리움에 세상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서로가 아쿠아리움이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나는 세상 너희들이 따라올 수 없는 무덤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무덤 속에 왜 있어야 된다 했죠? 무덤 속은 모든 말씀을 완성한 거고 모든 말씀을 완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의를 인정해요. 완벽한 거룩과 의를 인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안에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로마서 같은 경우에 나오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이삭을 생각할 때 처음에는 자기 아들, 대를 이을 아들로 생각했죠. 그러나 이삭이 죽고 난 뒤에 또 자기 손으로 이삭을 죽일 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알았던 거예요. 나에게서 이삭이 나온 게 아니고 이삭 안에 내가 먼저 출현되었다, 등장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시간의 역전(逆轉)이죠, 시간의 역전.
현실은 뭐냐? 내가 죄 있는 일을 했던 착한 일을 했던 상관없이 몽땅 그것을 죄로 규정할 만한 최종 규정된 일이 벌써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왜냐?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우리는 졸지에 어떤 행동, 어떤 생각을 하든 죄가 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걸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살아남으로써 우리가 졸지에 뭐가 되었어요? 한 것도 없는데 값없이 의가 된 거예요. 그러면 값없이 의가 되려면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어야 돼요? 나의 자리에 있으면 안돼요. 내가 죽은 자리에 있어야 돼요. 주님의 도살장 자리에 합류해야 그다음에 예수님의 살아남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육체로 갖고 있으면서 개진하는 의견이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우리가 생각하는 견해나 이론 같은 게 현실이 아니고 전부다 가짜라는 거예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생존에 대한 기대와 이해와 이익이 그것들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은 우리가 무덤에 있을 때뿐이에요.
다시 봅시다. 방금 설명한 대로 우리는 죄뿐이죠. 죄뿐인데 죄에서 굳이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까? 원하는 자체가 무엇의 연속입니까? 죄죠. 내가 원하는 건 뭘 원하든 간에 죄가 되죠. 우리 남편이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죄에요. 하나님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주는 대로 먹어라. 주는 대로 먹어야지, 뭐 내가 원하는 게 따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도살장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빼내심을 얻은 자들만
그래서 [무덤의 출발점 의미는 그다음부터 나의 인생관을 모조리 무효화시키는 능력이 충만하다]. 무덤이란 나의 인생을 모조리 무효화시킨다. 내 중심의 인생관을 모조리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라는, 그 무덤 속에 같이 완성되어 있는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을 우리에게 수시로 각인시키고 확인시키는 그 일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죠. ‘어린 양’이라 할 때 앞에 뭘 집어넣어야 돼요. 이 땅에 와서 도살당한 그 양의 노래를 부른다 이 말이에요. 이게 모세의 노래니까 모세가 유월절 이후에 홍해를 건너잖아요. 그러면 홍해를 왜 건너야 하는가? 유월절 어린 양과 동행했기 때문에 동행하는 인간들의 사정을 고려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 힘드냐? 불편하냐?’가 아니라, 어린 양의 그 취지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을 죽음 속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무덤 속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집단 무덤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게 세례 아닙니까(고전 10:2). 죽음 속으로 같이 가는 거예요. 어린 양만 당할 수는 없다, 이 땅에서. 어린 양이 당했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운명을 천국에 합류할 자도 같이 이 땅에서 필히 그 코스로 가도록 이미 확정이 되어있는 거예요.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다른 길은 없어요. 오직 그 길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여기 보면 저희가 알아서 어린 양 따른 게 아니고 부르심을 입었고 불러냄을 당하고 빼내심을 얻은 자들. 누가 같이 가자고. 어디로? 도살장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빼내심을 얻은 자들만이 이 발목 잡는 악마의 세계,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일말의 틈이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갑옷이라면 틈이 없는 갑옷이에요. 옴팍 뒤집어 씌였으니까요. 악마가 죄 있는 아담을 계속 복제시키는 데에 있어서 갑옷과 같이 주형틀처럼 집어넣을 때, 일말의 빠져나갈 균열점은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거기서 이런 현상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신의 관찰(경험)에 의해서 형성된 그 세계관 뒤편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학문의 딜레마입니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복음
항상 하나님 일은 어떻게 한다고요? 우리의 관찰할 수 있는 그 관찰을 부수고 쳐들어오죠. 내가 관찰해서 얻었던 획득된 내 인생관을 가만 두지 않고 그걸 부수면서 오죠. 왜 부숴야 되는가? 그것은 온전한 의가 아니기 때문에. 계시를 안다는 것은 이미 계시 아는 내가 계시를 품고 있어버리면, 말씀으로 시작해야 될 걸 갑자기 계시를 아는 복음을 아는 내가 스타트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완전히 가짜죠.복음에 의해서 ‘나’가 잃어버려져야죠.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자는 말씀에서 멀어지고 반대로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벌써 말씀에게 끌리고 있는 상태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70이레에 관한 대가들의 견해는 모두 잘못됨
p.236부터 p.238 중간까지 나오는, ‘70이레가 뭐냐’에 대해서 세계 대가들, 소위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통한 대가들, 성경 원문에 능통한 대가들이 이 70이레를, 이레란 7이니까 곱하기를 하는 거예요. 70×7=490이잖아요. 490년을 어디서 어디까지 잡아서 490년이라고 할 것인가 견해를 쭉 소개한 거예요, 견해를. 최만수, 칼빈, 카일(C. F. Keil)과 몽고메리(J. A. Montgomery), 헹스텐베르그(E. W. Hengstenberg), 하젤(G. F. Hasel), 에드워드 영(E. J. Young), 최영헌, 간하배, 옛날 선교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견해를 뽑아서 제가 쭉 올려놨어요. 이게 다 틀렸다는 거예요. 이게 다 틀린 거예요. 왜? 흐름의 연속성은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시간 속을 가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인데 시간 바깥에서 그걸 관찰하는 자가 누굽니까? 인간인 거예요. 인간은 시간 속이 어떤 내용으로 가고 있는가는 모르고 ‘내가 보기에는’ 이러고 끝내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인간은 자기 견해를 고집한다.-세상 자체가 인간들의 견해
그러면 예수님만 아는 도살할 양의 원리대로 시간을 보지 않고 달리 보면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 식당에 가면 메뉴판에 스테이크 나오죠. 식당에 가면 메뉴판 쭉 있잖아요. 있는데 여기 ‘스테이크 80.’ 메뉴판 위쪽에는 ‘카푸치노 5.’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스테이크 80. 어디 있습니까, 메뉴판 안에? 스테이크 없죠. 스테이크는 지금 주방에 가있어요. 주방에.
하나님께서 어느 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미 언어를 알고 있는 인간은 상상하죠. 이것은 자기의 사적인 의견이고 이론이에요. 견해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도살할 양 자체가 굉장히 아주 살벌하죠. 도살할 양. 그렇게 하나님의 일이 상상을 넘어 예상을 능가하고 상당히 급진적이에요. 얼마나 급진적인지 우리가 마태복음 7장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7장 6절 읽어보세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걸 제가 글로 써서 풀이하겠습니다.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이죠. [돼지는 돼지다워야 하고 개는 개다워야 한다. 우수한 돼지, 우수한 개는 소용없다. 덕이 많은 돼지, 자애로운 개는 소용없다.] 주변에 자애로운 개, 덕이 많은 돼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걸 더 급진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실험용 돼지에서 민첩성 여부는 부질없는 관찰항목이다] 실험용 돼지가 살쪘느냐, 야위었냐 그것만 구분할 목적으로 돼지를 키웠는데 ‘교수님’ ‘왜?’ ‘이 돼지가 굉장히 민첩합니다.’ ‘민첩한 거 빼. 리스트에서 빼. 그건 필요 없어.’ 돼지가 덕이 많고 자애로운 것,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복음을 모르는데 수능 만점이다. 그거 어디다 써먹습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급진적인 말, 지옥에나 가라, 이렇게 하죠.
인간 자체가 메뉴판에 있는 거예요. 메뉴판에 적혀있는 그러한 언어에 종속된 자에요. 왜냐하면 자기 견해, 자기 의견을 버릴 생각을 아무것도 안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이라는 것은 이마와 손에 악마의 인이 박혔다는 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아무리 봐도 인간에게는 666 그런 건 없어요. 마트에 갈 때 지지직 전자코드 그런 거나 있지 없단 말이에요. 없어요. 그러니까 메뉴판에는, 성경에 있는 현실성이 인간들의 세계에는, 관찰하는 세계에는 없어요. 세계 자체가 인간들의 견해이고 의견이기 때문에. 인간의 견해에 ‘나 돼지입니다. 나는 개입니다. 나한테는 덕도 소용없고 나의 자애로움과 사랑도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이게 인간들 세계에 학교 수업시간에 나오던가요? 안 나오죠.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은 왜 이게 엉터리이냐? 그것은 이 세상에서 도살장에 끌려가서 죽어버린, 죽은 분을 중심에서 빼버리고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사야 53장 7절, 도살장에서 죽어가는 그 죽음을 빼고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게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필히 망해야 하는 이스라엘
이 이야기를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이미 죽어버린 이스라엘 속에서만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나온다] 이 말은 아까 이름과 관련해서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망했다. 이스라엘은 이름으로 망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현실이라고 우겼던 거예요. 그런데 이게 메뉴판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죠. 진짜 이스라엘 이름이 뭐냐? 주방에 있는 스테이크에요. 이스라엘 이름 누구입니까?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죠. 세상은 하나님 중심이지, 인간 중심이 아니었거든요. 이스라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했던 겁니다.
그러면 예수 이름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행이라는 말입니까, 슬프다는 말입니까? 다행이죠. 왜? 그 이름으로 인하여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진정한 인간, 진정한 사람은 주님밖에 없음을 주의 이름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 그렇고 그런 인간들과 같이 한 메뉴판에 쓰여 있는, 그냥 불에 타 없어질 그 세계에 소속되어 있는 하나의 이름일 뿐이죠.
■다니엘이 받은 계시
○오늘 제목이 <70이레의 의미>에요. 70이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70이레에 대해서 인간들은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먼저 그것부터 해야 되니까 제가 다니엘 8장 27절을 언급한 겁니다. 27.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27. Then I, Daniel, was exhausted and sick for days. Then I got up [again] and carried on the king's business; but I was astounded at the vision, and there was none to explain [it.
다니엘이 하나의 사람으로서 계시를 받을 때 자기는 혼절하여 수일동안 앓았어요. 몸이 아팠어요. 그럼 몸이 아픈 것은 비로소 자기가 예상 못한, 상상 못한 새로운 현실이 계시와 더불어서 찾아온 거죠.
○다니엘 10장 2절에서 3절에 보면 “그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21일)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그 이유가 뭐냐? 전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왜 전쟁이 일어나는데 밥맛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전쟁에 대해 네 가지 현실이 나와요. 하나는 전쟁, 또 하나는 죽음, 세 번째는 기근(흉년드는 것), 네 번째가 전염병.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겁니까, 안 그러면 죽이고자 하는 거예요?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모아이 석상에서 이야기했듯이 모아이 석상의 상체는 흙밖에 나와 있지만 밑에는 흙속에 있다 했죠. 밑에는 흙속에 박혀 있어요. 흙속을 멸망당할 이 세상이라 한다면 멸망당할 세상에서 좀비들이 또는 악마가 이 아래 부분을 뜯어먹으면 뜯어먹을수록 윗부분의 다 이루심이 부각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 거예요, 이 땅에서. 성도라 해서 전쟁에서 빠지고 죽음에서 빠지고 흉년에서 빠지고 전염병에서 코로나 안 걸리고 이런 거 없어요. 전쟁 자체가 파괴입니다. 스스로 파괴되어서 도살장으로 갈 위인들이 없잖아요. 이 땅에 위인들이. 그러니까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알아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를 어디로 보낸다? 주님 가신 도살장으로 가서 천국에 가도록 이렇게 이끈다 이 말입니다. 반갑지 않습니까, 이 소식이?
○그것을 신약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라 하지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다니엘에게 이미 그 일이 터졌다 이겁니다. 다니엘에게. 다니엘이 계시 받고 난 뒤에 다니엘 10장 16절,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섰는 자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주여 이 이상을 인하여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힘이 없어졌다. 또 17절,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내가 어떻게 주와 함께 말씀할 수 있습니까. 이 다니엘 10장 16절, 17절의 특징은 뭐냐? 다니엘이 지금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주님 앞에 아랫도리가 허물어져버린 거예요, 완전히. 내 육신이 몸이 아파서 호흡이 남지 않고 몸에 힘이 없어질 정도에요. 이 말은 뭐냐? 내 의견을 개진하고 내 이론을 펼쳤던 그 나의 저력이 주님의 계시 앞에서 비로소 그것이 용납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개가 사람 되고 돼지가 사람 되는 순간이죠.
하나님께서 직접 주방장이 되셔가지고 스테이크를 가지고 ‘아나, 먹어라.’ 하고 주니까 메뉴판에 자기가 상상한 스테이크하고 주방장이 가져온 스테이크의 차이가 너무 나니까 여기에 완전히 맥이 빠진 거예요. 마치 판콜 하나 먹은 것처럼. 감기약 먹고 퍼져 있는 것처럼 힘이 없는 거예요.
■나 중심의 시간이 말씀 중심의 시간으로 전환-피 흘리게 하는 자로부터 피 흘린 자로 바뀜
첫째시간, 둘째시간 여기까지 한 걸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이 말씀의 시간으로 전환] 인간의 시간이니까 나라고 보면 돼요. 나 중심의 시간이 말씀 중심의 시간으로 전환돼요. 바뀌어버려요. 바뀌어버리면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말씀의 시간에서는 ‘다 이루었다’가 되고 인간의 시간은 ‘따져보자.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내게 이익이 되겠는가.’ 이 이익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구원 되겠는가’ 이것도 포함되죠.
그럼 그다음 이야기는 인간의 시간이 말씀의 시간으로 바뀔 때 여기다가 뭘 집어넣는가? 바뀌는 작용이 있어요. 바뀌는 작용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피입니다. 피로 두 가지 경우가 발생돼요. 피 흘리게 하는 자, 그다음에 피 흘린 자. 피로 인하여 두 가지의 경우가 항상 생기겠죠. 발생되겠죠. 누가 죽였으니까 누가 피 흘리고 죽는 거예요. 피 흘리게 하는 자로부터 피 흘린 자가 될 때, 이것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겠죠.
■우연을 내부로 받아들여야-예상 밖의 선택
인간은 어떤 현실이 와도 자기 현실, 자기 이론을 포기 못해요. 예를 들면 앙투아네트 왕비와 루이 16세가 죽은 이유는 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치를 많이 해서가 아니에요. 시대가 바뀌어서 그래요.
시대는 우연적입니다. 시대는 내가 바꾸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돈 버는데 열심히 해서 돈 벌었다 하죠. 열심히 해서 돈 번 게 아닙니다. 열심히 못해서 돈 못 번 게 아니고 우연입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그래요. 그 시대는 내가 사전에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은 말씀의 시간이에요. 돈 못 벌어서 빨리 도살장 끌려가라 이 말이에요. 조기에. 그게 주의 뜻입니다. 그렇게 끌려가면서 뭘 보느냐? ‘누가 나 돈 못 벌게 했어?’가 아니라 ‘누가 예수님을 죽였느냐?’를 보게 하는 거예요.관점이 내 관점이 아니고 말씀 완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이 우연에 대해서, 이 세상 모든 게 우연입니다. 자꾸 내 탓이라 하지 마세요. 전부 우연이에요. 내가 남자고 여자로 태어난 것, 전부 우연입니다.
이 우연을 자기의 내부로 받아들여야 돼요.‘내가 지금 어떠냐’ 보다도 ‘이런 내가 어디에 쓰여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세상에 주어진 모든 것이 네 탓이라고 하면 안돼요. ‘네 탓’이라는 것은 ‘내 탓은 아니다’를 전제로 하거든요. ‘이 일은 내 탓은 아니고 내 탓이 아니면 누가 있지? 어? 네 탓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이것은 무슨 탓이냐? 불편한 진실탓이에요.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악마와 더불어서 지옥 불에 가든지 아니면 예수님과 더불어서 도살장 속으로 들어가서 천국에 도착하든지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연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예상 밖의 선택이에요. 우리가 미리 예상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이익을 계산하는, 역사를 내가 만들고자 하는 그런 잘못이에요. ‘다니엘이 계시 받고 아프다’ 선지자한테는 자기 이익에 대한 생각이 없다 이 말이죠. 그저 아플 때는 아프고 건강할 때는 그냥 건강한 거예요. 이게 뭐냐? 왜 아프냐? 아파서 아픈 거고. 왜 안 아프냐? 안 아파서 안 아픈 거예요. 그냥 손가락이 길어요. 짧다면? 그냥 짧은 거예요. 그래서 뭐? 뭐 어떤데? 그게 뭐가 문젠데? 내가 그것을 내 이익을 위해 판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70이레’가 딱 나오니까 사람들은 와락 달려들어서 이걸 역사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 목적이, 내가 어떻게 이 성경을 해석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김을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신학자들 전부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여기 p.239 봅시다. 위에서 8번째 줄에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그것이 주체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호들의 계열은 대상 세계만이 아니라 주체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만 언표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피흘리게 만든 당사자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선악과 지식을 먹고 난 뒤에 그때부터 자립적 존재가 되죠. 자립적 존재라면 자립성, 이건 주관이고 이 자립성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은 대상이니까 객관성이 돼요. 객관적인 환경이 되겠죠. 환경이 되면 이 자립성은 환경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자립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방어체제가 가동돼요. 가동되거든요. 우리 몸 전체가 자율신경으로 완전히 서로 통신체계가 갖춰져 있어요, 보호 방어하는 거예요. 뭘 보호합니까? 보호한다는 말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안 되고 뭔가 대책을 세웠다는 뜻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있어요. 두렵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나를 지키겠는가, 이 방어체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면역체계에요. 우리 속의 면역체계. 아 내가 나를 방어하는 것이 일상이구나 이게 생리고 본능이구나 나를 방어하는 게. 그 말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당사자란 뜻이에요.
본인이 살겠다는 것은 내 방어체제의 목적은 오직 나만 살리는 데 방향이 그쪽으로 쏠려있다는 뜻이고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그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판정합니까?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로 판정하겠죠. 그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한테 이익 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내쫓죠.
자기 방어체제 자기 손으로 어떻게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와버려요.말씀이 오게 되면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어떤 인간도 뚫어낼 수 없는 아까 그 형틀, 쇠뭉치 형틀, 완벽하게 가두어놓은 거푸집에서 예수님만이 그걸 뚫고 지나가잖아요. 다른 사람은 못 뚫습니다. 자기 방어체제를 벗어던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를 구원해놓고 헤엄은 나중에 배우게 하죠. 이 세상에 탁 던져놓고… 복음 알 땐 기뻤는데 ‘다 압니다. 압니다.’ 해놓고는 조금만 무슨 일 있으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이런 식으로.
■나를 파괴시키고 나를 지배-말씀이 나에게 다른 시작점을 줌
여기 70이레라는 말씀으로 바로 혼절해서 수일동안 앓았던 다니엘처럼 이 말씀자체가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파괴시킬 때 그냥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고 “너 돼지잖아. 너 개잖아. 네가 언제 말씀을 좋아해? 날 속일 생각하지 마. 너는 너 자신도 지금 안 속고 있잖아. 네가 복음보다 돈 좋아하는 거 네가 먼저 알고 있잖아.” 이것을 우리에게 지적함으로써 내가 말씀 지키겠다는 나를 파괴시키고 말씀이 나에게 다른 시작점을 주셨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죠.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씀이 와서 우리를 지배하죠. 그러면 우리 내부에서 나의 싸움은 아니고 주님과 마귀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로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절대로 우리의 바른 선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의 장에서, 인간은 그 실천성을 나타내는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를 붙들고 실존하고 있을 뿐이다.
■주께서 끊임없이 도살장으로 우리를 당기고 계신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고전 16:22). 그런데 그것을 공간 시간 따라서 하라? 아니에요. 시도 때도 없이 어느 자리든 주와 함께 있는 자리라면 주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것이 하나의 행동으로 나와야 되잖아요.
주께서 주신 목숨가지고 주께서 주신 시간가지고 주께서 주신 공간가지고. 이게 무슨 시간? 말씀의 시간이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주께서는 이미 확정했다는 것, 도살장으로 끊임없이 당기고 있다는 거예요. 매순간이 주님의 죽으심에 관심 두는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 도저히 지워낼 수 없고 빼낼 수 없는 본성으로 가득차서 살아가는 엉터리 현실관에 매여 사는 우리 자신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에 완성된 어린 양의 하나님 은혜를 한시도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광주강의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두 종류의 시간 (0) | 2023.02.1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