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있는 자
2010년 8월 2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8:5-8
(눅 8:5, 개역)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눅 8:6, 개역)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눅 8:7, 개역)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눅 8: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씨’와 ‘밭’이라는 용어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라는 조건에 합당하게 하는 말씀으로 제공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이란 인간들이 찾아가는 식이 아니라 하늘 나라 쪽에서 이 세상에 다가오는 식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인간들의 천국행 시도를 무산시켜 버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들을 귀’가 ‘듣지 못할 귀’의 구분을 예수님쪽에서 결정하시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복음이 이 땅에 주어질 때는 기존 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있는 용어나 단어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마치 새 기종의 전자제품이 출시될 때, 그 제품이 작동될 수 있게 하는 부속 장치들이 같이 제작되어 따라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활용하시는 그 단어 활용법이 아니면 복음도 이해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정지어 놓았기 때문에 ‘밭’에 해당되는 내용은 자동적으로 이 인간 세상이 됩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을 ‘밭’으로 전환시켜 놓겠다는 말씀입니다. 밭의 특징은 고정되어 있고 수동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밭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밭은 외부에서 다루어대는 자신에게 내장되어 있는 본색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 비유에서 농부는 ‘움직이는 쪽’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밭’은 ‘고정적인 상대자’가 됩니다. 단지 밭은 자기가 품고 있는 본성을 어쩔 수 없이 다 까발려져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왜 밭이 한 종류가 아니라 네 가지 종류로 나뉘어져야 하는 겁니까?
이것은 천국 입성의 관권이 밭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씨에게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적극적으로 구원의 힘을 터뜨리는 쪽은 씨입니다. 씨는 마치 가루약을 담고 있는 캡슐과 같아서 터뜨리면 약 효과를 여지없이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저항하는 밭이 있다는 말은, 씨가 세상에서 수월하게 천국 열매를 맺는 환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하늘에서 천국 씨가 온 것이 단지 구원받은 우리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구원받는 자라면 우리이 관심사는 우리 자신에게 두지 말고 고난 받는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에 마음이 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아품과 고난과 그분의 승리 중심으로 천국을 꾸미게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의 바람이나 기대감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씨가 씨답게 되기 위해서는 밭이 밭답게 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밭으로 묶는 작업은 대단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을 인간으로 간주하고 싶어하지 결코 움직이지도 못하는 밭이라는 고정적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밭되기 위해서 ‘참을 수 없는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러한 냉혹한 작업은 구약 출애굽 사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애굽을 홍해를 통해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여겼습니다. 약속의 땅을 그들이 즐길 놀이동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광야였습니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해주지 않는 광야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다듬어만할 그 어떤 재료로 제공하지 않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이 광야에서 흔하고 흔해 빠진 그 흙덩이들처럼 한 통속으로 취급받아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즉 사람이기를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자꾸만 하나님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사람입니다. 나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광야에서는 해당되지 구조물입니다. 광야에서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광야이어야 하고 인간도 그 광야의 품으로 흡수 통합될 한 줌의 흙으로 소멸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은 아예 없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실시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새 양식에 부합되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새 인간 만들기입니다. ‘만나’라는 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안에서는 ‘기존의 인간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했음’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그런 내용의 양식이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기존 인간들은 마땅히 죽어야 하고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할만 하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지옥같은 나날이었다’고 말들 하지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축하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옥 같은 나날들’이 원래 처음부터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식으로 한평생을 보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옥이라는 환경이라는 것이 옛 인간에게는 참으로 합당한 삶의 자리입니다.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낼 때, 간만에 제대로 우리 자신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옥 같은 나날이 너무 싫어서 평소에 사람들은 술이나 담배나 쇼핑이나 각종 취미생활에 몰입해서 잊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덧칠은 하나님에 대한 반발을 더욱 키울 뿐입니다. 4 종류의 밭 중에서 먼저 나온 세 종류의 밭은 인간이 저항하고 싶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의 지배성 속의 인간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세상을 동일한 성질의 단일 밭으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양심이나 의로운 의지력과 말씀 실천력을 갖추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잘만 관리하고 발휘하면 보다 성실한 자들과 많이 뒤떨어진 자들의 차이는 발생되겠지만 결코 모두 동일한 원칙과 법칙을 적용하는 영역에 해당된다고 여긴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고,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현재와 비교해서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성질이 있다는 밭에 대해서 예수님은 ‘악에 눌려 있는 각가지 밭’으로 전환시키십니다. 그것은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는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천국의 열매맺는 자들은, 이러한 밭의 숨어있는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뿐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신도 모르는 천국의 속성을 오로지 십자가 피 앞에서 비로소 ‘오직 용서’라는 차원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십자가 피 때문에 우리 속에 예수님의 용서가 작용하고 있음을 외부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042강-눅8장5-8(귀있는 자)-luk100829
2010-09-06 16:53:15 조회 : 17 이름 : 오용익
042강-눅8장5-8(귀있는 자)-luk1008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8장 5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3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8:5-8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천국을 예수님이 설명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이야기 했어요. 하나는 씨에 주목하라, 씨가 어떻게 떨어져서 어떻게 허비되고 또 씨가 어떤 결실을 맺는지, 천국을 설명하면서 씨의 움직임에 대해서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이것이 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들린다는 겁니다. 귀 달렸다고 해서 그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들을 귀가 달린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씨의 움직임과 그리고 그 움직임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귀 있는 사람, 이런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 있어야 되는데 들을 귀 없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씨의 움직임, 씨가 어떻게 뿌려지고 씨가 어떻게 거두어지는가에 관심이 없겠지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고 해서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듣지를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은 이것과 전혀 상관없이 갈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씨 이야기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고 그것 가지고 천국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천국이라는 것은 죽어봐야 알고 죽어보면 어느 길로 가는지 그때서야 알겠지.’라는 생각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이미 천국 갈사람, 안 갈 사람이 이미 여기서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 없다.’라고 한다면 ‘죄송합니다만 이미 천국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니지요.’ ‘예수님 말씀이 끌린다.’ ‘축하합니다. 천국에 갈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주인공 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소개하는 그 천국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할 때에 ‘그게 맞네요.’ 하고 ‘예수님의 하신 그 말씀이 맞고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천국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마음을 먹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로 결정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우리를 마중 나오는 셈이지요. 공항에서 외국에서 들어오는 친구나 혹은 거래처나 그 밖에 아는 사람이 입국하게 되면 더러 플래카드를 붙이잖아요. ‘아무개 씨 아무개 회사에서 환영합니다.’라고 마중 나왔다는 것을 표시하듯이 주님께서는 이 플래카드에 씨 이야기를 하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이렇게 두 가지를 써서 마중을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공항에서 무거운 여행가방 질질 끌고 들어오면서 ‘씨? 들을 귀 있는 자? 아, 마중 나왔네.’ 하고 만나면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끌려서 천국 주님 계시는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펼쳐도 ‘저건 나하고 상관없네.’ 하고 지나가 버리면 그 사람은 천국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지옥 간 부자가 답답해서 동생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천국 간 나사로를 다시 한 번 불러내서 동생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것을 부탁해도 예수님은 그 말을 거부합니다.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이야기한다 해도 ‘이 나사로, 어디서 또 거짓말 하고 있어. 졸도해서 죽은 척 하고 있다고 깨어나서는 천국 갔다 왔다고 사기나 치는데 너 같은 인간 한 둘 본 것이 아니다.’ 하는 식으로 배척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것은 안 통하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도 안 통하는 세계에요. 우리가 이 글자, 성경 읽었다고 해서 구원된다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와도 의심할 수밖에 없고 배척할 수밖에 없는데 이 딱딱한 성경말씀 들이 댔다고 해서 이게 믿어진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능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네 속에 들을 귀 없는 자가 들을 귀 있게 만들고 이것이 문자가 아니라 ‘어이, 아무개 천국에 와.’ 하고 플래카드에 써서 마중 나온 것처럼 이 씨 이야기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한 그런 글자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이 생기는 것도 그 씨 안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뿌려놓은 말씀 안에 그것이 내장되어 있고 그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요.
쓴 약이 캡슐에 코팅되어 있는 채로 먹잖아요. 캡슐채로 뱃속에 들어가면 위속에서 그 캡슐이 녹아서 깨어지면서 그 안에 있는 약이 나와서 효력을 발휘하지요. 그 효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그 약의 효과로 고통이 완화되면서 몸이 나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씨 안에는 죽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는 그 캡슐안의 약처럼 효과 있는 약재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오셨을 때에 그 말씀으로 던져서 그 말씀으로 구원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실 때 그 말씀이라는 것이 눈이나 이마로 듣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잖아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 귀 열렸어? 그러면 너는 구원받은 사람이야.’라는 것이 성립이 되려면 귀에 들리는 소리, 예수님의 말씀이 천국의 엑기스가 담긴 천국의 씨앗처럼 돼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씨앗 이야기 한다고 해서 해바라기 씨앗 같은 것을 주머니에 담아 와서 던져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던지는 말씀이 씨가 될 때 그 말씀을 알아먹는 귀와 말씀의 만남을 통해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그런 말씀이 있지요. ‘사람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어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이것을 어떤 사람은 ‘기적이 있어야 개척교회 부흥되겠습니다. 내가 안수 할 때 병이 나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병 고침을 열 번이나 받고 기적을 천 번이나 맛 봐도 세미한 음성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성경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면서 우리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아니하면 그것은 마귀가 그 씨를 빼앗아 가는 사람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한때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돌아서면 그 맛을 잃는 것처럼 기적을 찾는 사람은 그런 기적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되는데 어느 날 기적이 중단되면 과거의 그러한 짜릿한 것은 한꺼번에 다 날아가는 법이에요.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마중하러 오셨다. 마중하러 오실 때 플래카드에 쓰인 것은 뭐냐, ‘씨, 들을 귀’이다. 문제는 그 내용, 씨를 이야기해서 들을 귀 있게 하는데 ‘씨를 뿌렸다, 그 씨는 열매 맺기 위해서 뿌리신다. 그래서 너희들이 열매 맺었다.’ 이렇게 하면 그것이 하등 어려울 것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씨가 뿌려졌다. 씨는 씨 값을 하면서 열매를 멋지게 맺었다. 30배, 60배, 100배다. 자, 가자.’ 이렇게만 된다면 이야기가 참 수월한데 ‘씨가 뿌려졌다. 그런데 그 씨가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어떤 밭에 뿌려진 씨는 전혀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 세 종류의 밭이지요. 딱딱한 길에 떨어진 것, 돌밭에 떨어진 것,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 이런 경우에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씨를 이야기할 때 ‘어이, 밭!’ ‘예, 밭 여기 있습니다.’ ‘내가 씨 뿌릴게.’ ‘감사합니다.’ ‘열매 몇 배 맺었느냐.’ ‘백배 맺었습니다.’ ‘가자.’ 이렇게만 하면 참 쉬울 텐데 그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가 밭에 씨를 뿌렸거든.’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매를 맺었겠지요?’ ‘아니! 어떤 씨는 뿌려도 뿌리는 족족 새가 와서 다 먹어버렸네. 어떤 씨는 습기가 없어서 말라 비틀어졌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가시가 기운을 막아서 못했다. 그런데 어떤 씨는 열매를 맺었다.’
그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씨를 뿌리는 것이 날 구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고 그 씨 자체, 그 씨를 뿌리시는 예수님 자체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야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오는데 ‘목사님, 주소를 이상하게 가르쳐 줘서 집 찾는데 애먹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하는 것은 나의 수고를 좀 알아달라는 거지요.
목사님의 집을 찾는데 헤맨 그 수고를 알아달라는 겁니다. 바로 오면 되는데, 라는 그것은 우리 입장이고 ‘헤매다가 고생해서 찾았습니다.’ 할 때에 우리는 가만있었는데 찾아오시는 분이 얼마나 애쓰고 고생하고 희생하고 아팠느냐를 말하는 거예요. 그럴 때 제가 ‘쪼다같이 집도 하나 못 찾고.’ 그러면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아이고, 고생하셨군요.’ 이럴 때 그 순간 ‘나는 당연히 천국 가야 된다.’는 생각이 싹 없어지고 ‘천국 갈 사람도 아니고 천국 갈 필요도 없는 인간을 기어이 천국 보내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셔서 일부러 찾아오셨구나.’ 하고 그 초점이 고생하신 주님한테 초점이 모아져야 됩니다. ‘나 구원받았다.’ 여기에 초점이 있게 말고 천국 갈 필요도 없는 인간을 위해서 고생하신 주님한테 초점이 있으라고 씨를 허비한 것처럼 보이는 네 가지 경우의 밭을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씨를 이야기할 때 천국의 내용이 이 씨에 함축되어 있는데 그 씨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히 밭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해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볼수록 짧은 구절이라도 그 짧은 구절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성경 전체 내용이 다 담겨 있어요. 이 짧은 단락과 단락 속에 ‘하나님,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어떤 식으로 구원하는 겁니까?’ 그 내막이 전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한 번 알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단락과 단락 속에서 새롭게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용어, 우리가 아는 개념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필요한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어와 문장들을 새롭게 가지고 짝을 맞추어서 우리에게 다시 주어지는 거예요.
이것을 영어로 키즈라고 하지요. 어떤 전자제품이 왔을 때 220v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제품이라면 그 제품에 맞게 전원에 연결하는 코드가 같이 붙어서 옵니다. 그 코드로 꼽아야 전자제품의 기능이 발휘되잖아요. 휴대폰 사면 충전할 수 있는 장치가 회사에서 딸려옵니다. 그 장치가 없다면 휴대폰 전지 다 떨어져도 전지를 충전할 수 없지요.
휴대폰 장치하고 충전할 수 있는 보조 장치하고 딱 갖춰져서 올 때 계속 충전해서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할 때는 복음에 적합한 단어들을 조립해서 우리에게 준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씨를 줄때는 씨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밭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주님께서 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밭이 뭐냐, 그 밭이 바로 세상이고 그 밭이 우리 인간들이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기분 나쁜 거예요. 우리 인간이 밭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나는 인간이다.’라는 것을 포기해 줘야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나는 인간자격도 없고 개나 돼지만도 못합니다.’라는 것을 수긍을 하시고 난 뒤에 예수님의 씨와 밭 이야기를 들어주셔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나도 인간입니다.’ 하면 ‘예수님, 무슨 말씀 지킬까요? 제가 주의 말씀 잘 지키거든요.’ 이렇게 자꾸 나오면 그것은 제품코드가 서로 안 맞아서 충전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220v로 해야 충전이 되는 방식인데 110v에 맞는 코드로 해서는 백날 천국 충전을 해 봐야 충전이 안돼요.
지금도 십자가마을이 시끄러운데 아무리 복음을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꾸 인간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참 환장할 지경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 있는데 왜 우리를 자꾸 무시하려 드는가, 이런 쪽으로 나오는 겁니다. 주님께서 모든 성경을 설명할 때는 ‘하라, 하지 말라.’ 이런 대목도 내가 인간이라고 여기고 ‘하라, 하지 말라.’를 해석해 버리면 그것은 주님이 주신 복음과 전혀 코드가 안 맞는 용어들입니다.
평소에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사용했던 ‘나는 인간이야, 나는 신이야, 나는 멋있는 존재야.’ 그때 동원되었던 쓸데없는 윤리, 도덕의 개념이 담긴 용어를 가지고 성경해석을 다 뽑아내서 ‘자, 이제 말씀하옵소서. 이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다 버려야 돼요. 주님께서 새로운 용어를 새롭게 포장해서 주십니다. ‘너는 밭이야.’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무관심으로 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참을 수 없는 무관심이에요. 우리 애가 성적이 떨어지고 교회가 부흥이 안 되고 오십견이 오는지 침 맞아도 소용없이 어깨가 아프고 수입은 자꾸 줄어들고, 그럴 때 우리는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새벽제단을 두드리면서 ‘주여, 도와주소서. 어렵습니다.’ 할 그 때에 우리가 느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참을 수 없는 하나님의 냉혹하고 차가운 무관심이에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갈 때는 항상 하나님은 인정이 많고 사랑이 풍부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다가가요. 그런 아이디어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내가 인간이다.’라고 우기면서 ‘이 인간 같은 인간을 천국으로 집어넣어서 천국에서 좀 오래도록 살아보겠다.’ 하는 얍삽한 꾀를 쓰면서 만들어낸, 우리가 조작해 낸 단어의 키즈(조립)들, 문장들이고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해석법들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멋진 단어가 나와요. ‘너 때문에 그 때 내 맘이 지옥 같았다.’ ‘지옥 같았다.’라고 해요. 그 순간 사람하고 악수하고 싶었어요. ‘축하합니다!’. ‘네가 그런 행동을 할 때 한동안 내 맘은 지옥 같았어.’ 그럴 때 제가 손잡고 축하하고 싶은 이유가 원래 우리 마음은 계속해서 지옥 같았어야 해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옥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주님께서 지옥 같은 육신으로 오신 그것과 매치가 되는 거예요. ‘너만 보면 지옥 같았어.’ 보통 여자들이 이혼할 때 뭐라고 합니까? ‘난 그 남자하고 살 때 지옥 같았어.’ 하잖아요. 우리가 평생 지옥 같아야 돼요. 그 순간이 유일하게 진짜 ‘나’라는 것이 누군가가 접촉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지옥 같은 것을 지옥 안 같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비틀거리면서 집구석에 들어오잖아요.
그 지옥이 너무 지옥 같아서 너무 괴로워서 그것을 덧칠하고 그것도 안 되면 쇼핑을 해서 우울증을 없애고 과도한 취미생활을 한다든지 해서 덮으려고 합니다. ‘막 가슴이 아파서 찢어질 것 같아서!’ 축하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본 모습입니다. ‘가슴이 찢어져 어쩔 수 없다.’ 하나님께서 네가 당연히 그런 인간이라고 잠시 맛보여준 주님의 혜택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합창을 해야 되는데 아멘을 한분밖에 안합니다. 진짜 지옥에 가보세요. 그러면 ‘허!’ 하고 말도 안 나올 겁니다. 아직도 살아 있으니까 ‘지옥 같았어.’라고 문장 몇 마디 하지요. 나중에 지옥 가보세요. 아예 너무 뜨거워서 말도 못해요. 그래서 네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했잖아요.
육을 두려워말고, 김정일 같은 인간 두려워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지금 주님께서는 씨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인간을 밭으로 전환시킬 때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무관심 때문에 밭은 그대로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반발을 주님께서는 고대했고 기대한 겁니다. 농부는 움직이는 것이고 밭은 고정되어 있는 거예요. 움직이는 것이 고정된 것에 대해서 그 속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난 착하다. 난 말씀 지킨다. 율법 지킨다.’ 하는 이 모든 것을 동결시키고 응결시켜버려야 돼요. 이것들이 다 얼어버려야 돼요. 모든 것을 다 고정시켜서 밭으로 만들어버려야 돼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통해서 홍해를 건넌 후에 했습니다. 50만정도의 대군 끌고 광야에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소풍간다는 기분으로 왔지요. 우방랜드나 되는 것 같이 신나게 왔는데 이것은 삼청교육대보다 더 심한데 입니다. 삼청교육대는 개죽이라도 줬지 않습니까? 여기는 광야입니다. 물도 없고 양식도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여호와를 아는데 왜 여호와를 아는 인간을 인간취급 안합니까?’ 모세와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광야에서 인간이라는 것을 포기를 해줘야 된다.’ 하는 겁니다. 광야라는 것이 그냥 땅만 광야가 아니고 인간도 광야가 되어야 해요. 같이 광야, 하나의 바람 부는 모래가 되어줘야 합니다. 그 광야에는 사람이 일체 없어야 됩니다.
사람이 일체 없어야 주님께서 만나라는 말씀을 주셔서 광야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새록새록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거예요. 인간은 하나도 없고 흙덩어리밖에 없는 그 광야의 과정 속에서 주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끄집어 낼 때 그 인간은 전에 있던 인간은 아니에요. 전에 있던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새로 만든 인간은 인간되게 하신 분을 증거 하는 새로운 인간입니다.
흙인데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고 동거할 수 있는 그러한 놀랄만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광야에서 새로 제조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는 옛날 애굽에서 먹던 그 음식이 아닙니다. 애굽의 뷔페식당에서는 절대로 만나가 안 나옵니다. 거기에는 만나라는 음식이 없어요. 김밥 옆에 탕수육, 그 옆에 잡채가 있는데 거기에 만나는 없습니다.
만나제과점은 있는데 만나라는 것은 없어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맛보았던 음식은 일체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음식을 제공하느냐, ‘너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너는 더 이상 인간일수가 없어. 너는 죽어야 돼. 너는 흙이야. 네가 인간이라고 우긴다면 내가 너한테 건네줄 양식은 일체 없어.’ 그런 뜻입니다.
신명기 8장에 가면 만나를 음식이 아니라 말씀이라고 했지요. 말씀인데 겉모습은 마치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모양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소화기능에 결합되도록 먹을 수 있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 말씀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희는 나를 원망했었다. 원망을 계속 했었다.’가 재료로 포함되어 있는 양식이 하늘나라 주방장에서 천사들이 만들어서 준 것이 만나에요.
그것을 탁 깨보면 그 안에 ‘너희들은 끊임없이 나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저 괜찮은 밭이지요.’ 라고 나서지 마시고 그 따위 소리를 하지 마시고 밭은 그냥 침묵으로 일관해야 돼요. 수동적이에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밭은 그냥 씨가 왔을 때 말씀이 왔을 때 밭도 미처 알지 못하는 자신의 본연의 색깔이 등장합니다.
그 색깔과 개성과 특징들이 씨와 마주치면서 새롭게 돋아나지요. 떡 집에 가면 백설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솜씨를 집어넣어서 무지개백설기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그 솜씨에 의해서 색깔이 층층이 나오지요. 그 백설기가 각각 네 가지의 색깔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 색깔을 그렇게 만들어 내기 전에는 모르지요.
어떤 밭이 어떤 밭인지 그 밭은 다 똑같아요. 똑같은데 씨가 일단 오게 되면 씨가 갖고 있는 색깔에 변색이 일어나면서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흰 백설기 한 가지 색깔로 하지 않고 형형색색으로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씨가 씨 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씨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30배, 60배, 100백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들로 인하여 이 예수님 씨가 얼마나 큰 고초와 희생과 어려움을 당했는가를, 예수님 자신의 고난당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밭들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이단들과 지옥 가는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는 주님이 그들에게 혼나고 되게 시달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 내리는 판결이 얼마나 합당한 판결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밭들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 밭들 입장에서 보게 되면 자신의 성격은 항상 자신이 결정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 밭 이야기는 누구를 보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류의 대표자 되는 유대인들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유대인들은 전부 다 생각이 뭘 로 하나같이 뭉쳐져 있느냐?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지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건강한 밭이고 옥토 같은 밭이 되었사오니 이제 말씀만 하시면 무럭무럭 열매는 자라납니다.’라고 자부심을 대단하게 갖고 있던 그들이에요.
그런데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하면 8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네 종류의 밭이라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세계에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쉽게 이야기합시다. 사람들 마음을 맞추는 것은 그들 가운데서 필요한 것만 끄집어내면 얼마든지 마음을 맞출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동서가 네 명이 있다 합시다. 동서들끼리 서로 마음이 안 맞으니 제사나 일이 있어서 모이기만 하면 서로 너무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보다 못해서 전부 이 네 명이 개성이 많으니까 이것을 하나로 잡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끄집어 낸 것이 뭐냐 하면 장 동건 나온 영화를 보러 간 거예요.
‘장 동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큰 동서 네가 말해 보거라.’ ‘멋있습니다.’ ‘둘째 너는?’ ‘멋있습니다.’ ‘세 째는?’ ‘당연 멋지지요. 저런 남자하고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네 째 너는 어떠냐?’ ‘저는 장 동건이 같으면 대번 이혼하고 저 남자하고 삽니다.’ ‘자, 우리는 이제 한마음이다! 장 동건이 때문에 한 마음이 되었어요.’
주님께서는 그 씨가 떨어져야만 네 가지 색깔의 백설기로 나눠지는 것처럼 밭의 속성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외부에서 씨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은 인간과 인간들끼리 비교해서 어찌되었든 단결할 수 있는 요소를 다 끄집어낸다는 것을 제가 여러분에 드리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사람하고 비교한다는 말입니다. 좀 어려우면 쉽게 합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난 예수 믿고 착하다.’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2010년도 8월 29일날 자기는 착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착하다고 하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2010년도의 지난주인 8월 22일하고 비교해 볼 때 29일에 내가 착하다는 거예요. 28일까지 술 마시다가 29일에 와서야 술을 끊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착하다는 말인데 그러면 누구하고 누구하고를 비교한 거예요.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비교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 대 인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인간 대 인간, 또는 나와 저 사람하고 비교해서 내가 어느 정도 된다, 항상 사람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들을 귀가 없는 거지요.
그 비교 기준이 기껏 해봐야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기준을 뽑아냈다는 그 말입니다. 제가 외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겁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잘 믿고 못 믿는다는 그 기준이 어디서 나왔다는 말입니까? 인간들의 양심에서 나온 거예요. 그 놈의 양심이 발목 잡는 거예요. 우리의 양심을 도끼로 잘라버려야 됩니다.
양심 안 잘라내면 그 사람 천국에 못갑니다. 오늘 제가 과격한 말을 합니다. 이 이야기 하고 제가 독일 가고 싶습니다. 그 양심이라는 것이 뭔지 알아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에, 씨가 등장하기 전에 인간은 기껏 비교하는 것이 자기보다 더 착실하게 사는 사람, 테레사 수녀랄지 손 양원 목사랄지, 주 기철 목사,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이 근호 목사? 이건 뺍시다, 자꾸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가지고 비교를 하는 거예요.
‘나는 못났는데 저 사람과 가까이 갔으니까 나는 더 훌륭하다.’ 그게 바로 들을 귀 없는 인간들, 볼 눈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씨를 봐라. 씨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봐라.’ 씨는 밭을 네 종류로 일방적으로 나눠버렸습니다. 씨가 떨어지기 전에 밭은 서로가 서로끼리 비교하다 보니까 공통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요.
그 당시 유대사회는 전부 다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제일 우뚝 서 있고 ‘나처럼 되라. 지금 너희들은 약간 미진하지만 나처럼 노력하면 언젠가는 나처럼 될 수 있다.’는 그런 한 성질, 네 가지 밭이 아니고 한 가지 밭이에요. 어떤 밭? ‘말씀을 지키면, 양심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밭.
이구동성으로 윤리 도덕적인 것, 그 기준으로 전부 다 하나가 되고 말았어요. 그 밭 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서 최전방에 선 사람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입니다. ‘주여, 저 허접한 세리와 창기들 저런 것들은 저 뒤쪽에 있으니까 주께서 오실 때 우선 경건하기 짝이 없는 우리 쪽으로 오셔서 저쪽으로 빠지게 하옵소서.’
이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예수님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해서 주님께서 그 당시의 구조와 질서를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를 하고 있었어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성화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그 동네에서 놀았던 사람들이에요. 다 그 속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한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제가 이야기했지요. 대구의 모 교회에 있을 때 그 교회 담임목사가 교회 올 때 양복입고 오라고 해서 한여름에 여름양복이 없으니 겨울양복 입고 왔다가 떠 죽는지 알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한 거예요.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하니까 그 양복을 입고 왔다는 그 나라는 밭과 양복을 안 입고 남방 입은 저 밭과 우열을 비교해서 내가 신앙에 앞장선 밭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기본적이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서 선악과에서 일치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이고, 이 근호 청년선생은 착하기도 하여라. 우리는 저 사람 신앙 못 따라가.’ 어쨌든 못 따라가지만 같은 밭이잖아요.
같은 종류의 밭이라 그 말입니다. 이미 그는 한 종류라고 여길 때 주님께서 씨를 뿌릴 때 그 씨에다 ‘한 종류가 아니야. 네 종류야.’라고 내세우는 거예요. 그 네 종류의 밭을 구분할 때 그 열매 맺는 한 종류의 밭 말고 나머지 세 종류의 밭은 거기서 반발, 반발력이 나옵니다. 숨어 있던 반발입니다.
내가 양심대로 살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가운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저주시는 예수님의 씨 안에 들어 있는 용서와 사랑을 반발하고 모독하는 힘으로 작용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아주 강력하게 반발해요. 왜냐하면 그런 양심이 없으면 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선함과 교회 다니는 충성과 열심 때문에 주님한테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주님한테 어느 정도 관심을 받아서 지금 내가 복 있게 산다고 그런 관계를 구성했는데……. 제가 설교 처음에 언급했지요. 참을 수 없는 무관심. 만약에 그렇게 살아가는 내가 이것은 인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나라는 것은 뭐냐,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는 무관심으로 대한다면 그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 봉사한 그 값은, 그 보상은 어디서 찾습니까? 찾을 길이 없잖아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때려죽이고 싶은 거예요. 물론 제가 옛날에는 그렇게 때려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누가 복음 전하는 사람이 있었어야지요. 아무도 없었는데요.
기껏 만난 것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로마서강해를 만났고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부흥사가 오면 맨 같은 소리를 하고 청년부 헌신 예배 한 두 번 한 것이 아닌데 오는 인간마다 다 똑같은 소리해요. 참을 수 없는 무관심으로 우리를 대한다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방방 뛰고 헌금내고 열심내면 주께서 약간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줄 알았지요.
세상에, 그것이 복음을 욕되게 하고 그것이 복음을 저항하는 악마적인 생각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그게 더러운 밭인데. 주님께서는 말합니다. 그 밭이 아무리 애써도 그 밭을 지배하는 새, 바로 악마, 그리고 아무리 신앙생활 잘해도 어려운 일이 닥쳐버리면 하나님을 욕하고 헤어지는, 결국 고난을 이겨낼 수 없는 그런 모습, 그리고 아무리 교회 나와도 갑자기 로또 되어서 20억 생기면 그만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시들해지면서 ‘20억 가지고 그냥 살지 뭐, 십자가 피는 알아서 뭐하는데, 쓴 잔은 마셔서 뭐하는데’ 이런 식으로 무관심해지는 것.
인간이라는 밭은 자기가 아무리 옥토가 되려고 스스로 시도해도 이 세 가지, 마귀가 와서 말씀을 가져가는 것, 두 번째, 사람이 심한 고난 받아버리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나발이고 다 없다고 하는 것, 세 번째, 사람이 갑자기 여유가 생기면서 사업도 잘되고 부자 되면서 형편이 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 돌리는 것, 이 세 가지의 힘을 이 썩어빠진 이 밭이 버텨낼 수 있습니까?
못 버텨 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밭을 배치한 것은 ‘인간이 아무리 양심껏 바르게 해도 너는 그보다 더 센 힘인 고난과 세상의 육신의 안목인 유혹과 악마의 힘으로부터 눌려 있는 상태다. 그 눌려 있는 상태가 이 세상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성경말씀 지키겠다고 철야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나무뿌리 뽑았다고 해서 그것이 뽑혀집니까?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는 목적이 뭡니까? 은근히 이 세 가지 노리잖아요. ‘하나님, 말씀 지킬 테니까 부자 되게 해주소. 말씀대로 살 테니까 마귀 떠나게 해 달라. 말씀대로 살 테니까 어려움이 아예 안 찾아오게 해 달라.’ 만사형통하게 해 달라는 그것 때문에 교회 오잖아요. 그렇게 기도하는 자체가 밭이 자신이 아직도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백날 기도해 봐야 주님께서는 아주 참을 수 없는 무관심으로 일관해 버립니다. 주께서는 ‘제발, 제발 너라는 몸을 그냥 황토 흙으로, 들을 귀 없는 그 몸을 흙으로 만들어버리고 봐도 모르는 그 눈을 박살내 버려라. 아예 시체가 되고 황토 흙이 되어라.’는 말이지요. 정 황토가 안 되거든 저 보령의 머드축제장에 가서 같이 진흙에 뒹굴어서 ‘황토 맞습니다.’ 하고 진흙 발린채로 오든지.
어차피 70년 살아봐야 우리는 진흙 되잖아요. 인간의 아담이라는 몸 자체가 어차피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길 수 없는 힘이 대기압처럼 인간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그 누르는 힘을 모르고 있어요. 모르는 상태에서 기껏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최선을 다하여, 열심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맨 날 최선을 다 하래요.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누적이 돼요.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이만큼 했다 하는 그것이 마일리지 쌓이듯이 누적이 되는 거예요. 그 누적된 것은 반발로, 하나의 용수철로 작용을 해서 복음 전하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비난을 하고 말이지요. 네 번째 밭은 그냥 멍청한 밭이에요. 자기가 옥토인지도 몰랐지요. 자기는 옥토가 아니니까요.
옥토라 하는 것은 씨가 갖고 있는 네 가지 기능 중에서 한 가지 기능, 옥토 될 밭에 열매를 맺는 기능이 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씨 안에 있다는 거예요. 씨가 밭을 만남으로서 밭이 옥토의 밭으로 돌변한 겁니다. 그렇게 할 때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나도 모르는, ‘나는 창세전부터 옥토 되어야 될 밭이구나.’ 하는 것을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때 비로소 노출되고 비로소 발현되는 겁니다. 외부로 형상화되어서 드러나는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열매를 맺었습니까?’ ‘몰라요. 다만 주께서 말씀이 임해서 그랬습니다.’ ‘말씀이 임했다는 그런 겸손한 소리 말고 당신이 기도해서 고난을 이겨냈잖아요.’ ‘아니요, 고난 못 이깁니다.’ ‘마귀를 쫒아냈습니까?’ ‘마귀는 나보다 더 셉니다.’ ‘그러면 세상 유혹을 이겼습니까?’ ‘유혹이라면 저는 환장하는 인간입니다.’
어떤 것도 우리 힘으로 세상을 이겨서 주님 말씀 받아서 열매를 무럭무럭 맺은 것이 아닙니다. 원기소 먹었습니까, 아니면 영양제를 먹었습니까, 그런 것이 없어요. 그냥 원래 ‘너는 옥토이어야 하는 밭’이에요. 옥토의 특징이 뭐냐, 씨가 씨만의 능력, 만나, 새로운 피조물 되는 그 모든 천국의 복음은 오직 예수님 안에 내장되어 있지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수동적이었습니다. 그냥 나는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움직이신 것은 농부께서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저쪽과의 차이 남을 알지요. 저쪽을 바라보면서 ‘나는 훌륭하다.’가 아니라 ‘나도 저랬는데, 나도 마귀 들렸었는데, 나도 고난을 못 이겼었는데, 나도 힘들 때 베드로가 세 번이나 하나님을 부인했듯이 그렇게 하나님 욕하고 돌아섰었는데, 나도 세상 유혹에 정신없이 빠졌는데. 이제야 내가 구원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냥 자기가 만들어놓은 밭에 내가 알지 못한 채 숨겨놓은, 나에게 이러한 소식이 있는 줄을 미처 나도 몰랐던 그 속성을 말씀이, 복음이, 십자가 피가 와서 바깥으로 활짝 만개하도록 하는 조치를 평생토록 이끌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천국이라 하는 것에서 씨와 밭이라는 용어를 참 잘 사용하셨습니다.’라고 공항에서 피켓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세상은 밭이고 나는 씨다.’ ‘맞습니다. 이제 이해합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밭일뿐입니다.’라고 받아들이죠. 다른 인간들은 ‘우리가 죽었나? 우리가 지금 펄펄 살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데’라고 나오겠지만 주님께서 피켓 들고 ‘내 말씀은 옥토를 옥토 되게 하고 세상을 심판하는 권한은 밭에는 없고 나한테 있다.’고 외칠 때 ‘맞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심판주입니다.’라고 그 사랑을 반길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지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고 사실은 모든 말씀, 모든 율법은 움직이는 율법인데 곧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었고 모든 말씀이 그 예수님 한 몸을 위해서 그 한 몸이 증거 되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예수님 몸으로서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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