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여름 수련회 에스겔 강해 제9강 : 전쟁을 통한 구원 - 이 근호 목사
제9강하겠습니다. 교재 제일 먼저 서론을 보게 되면 ‘동일성’이라는 게 있죠. “어떤 대상 O(object)가 관찰 가능한 어떤 세상에서 어떤 속성 P(property)를 가진다면 오직 그때 속성 P는 대상 O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관찰하면서 진리를 획득하려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관찰이 어디서 깨지는가.
그리고 가능한 세계, 내가 속해 있는 이 세계 W1(world 1)에 거주하는 대상 O1이, W1말고 환경이 바뀐 다른 세계인 W2(world 2)에서도 동일하다고 자부하는 O2(object 2), 어떤 대상이 속했을 때에, 처음에 있던 W1, 자기가 처음 속했던 상황에서의 자기와 새롭게 주어지는 상황 속의 자기가 과연 동일하냐,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동일하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러면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나옵니다. 그 대목을 한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거기서 예수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셨다. 새로운 상황입니다.
새로운 상황이 왔을 때 베드로가 기존에 자기가 속해있던 상황, 세계 world 1이죠, 거기에 속했던 본인이 관찰해서 획득한 그 정보와 진리를 world 2, 변화산 상황에서 주님이 해 같이 빛나는 상황에서 똑같이 먹힐 것인가에 대해서 베드로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내가 동일하듯이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도 똑같이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교회 다니면서 나는 천국 간다, 라고 이 세상에서 내가 여러 가지 것을 관찰하고 획득했던 그것이 과연 실제 천국 갔을 때 먹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먹힌다’ 이쪽이었어요. 성경은 ‘안 먹힌다’ 쪽입니다. 이 문제 어떻게 할 거예요? 실컷 천당 간다고 교회 갔는데 안 먹히는 거예요. 먹히질 않는 겁니다.
그 원인이 뭐냐? 관찰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 버릇을 그대로 지닌 채 천국까지 들어가겠다고 무리수를 둔 거예요, 무리수를. 그래서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가 나타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4절에,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주님께서는 이거 받아줬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받아줬습니까? 안 받아줬죠. 베드로야, 너의 관찰로 인하여 획득하고 수집했던 그 진리체제는 이쪽 새로운 천국에서는 써먹을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러한 정보다.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모세, 엘리야하고 베드로하고 소통이 되지를 않아요. 예수님하고는 물론 소통이 되지 않고요. 소통이 된다면 베드로는 그걸로 천국 갔어요. 소통이 안 되고 결국 일본말로 시마이(끝)된 거예요. 그냥 헛으로 끝난 겁니다.
3년 동안 주님 따라다닌 것이 전혀 나의 변화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는 것, 50년 교회 다닌 것이 전혀 천국에 적합하고 합당한 자로 달라지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의 이유가 어디 있느냐. 바로 관찰에 있어요. 눈이 있으니까 관찰해요. 그럼 주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천국에 집어넣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관찰한다는 것은 눈이 정상적으로 가동한다는 뜻이거든요. 요한복음 9장 마지막에서 정상적인 눈을 소경으로 바꿔버립니다, 소경으로.
네가 본다고 하니까, 네가 소경이다. 네가 보는 걸로 추방된 이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천국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는 너의 수완이었고 요령이었던 겁니다. 이 세상에서 관찰해서 획득하고 구축된 결과물이 자아에요.
이 자아는 눈에서 보이는 획득물로 천국에 골인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걸 가지고 세상에서는 종교라고 이야기해요, 종교. 종교가 구원을 방해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걸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하죠. 삼위일체, 예수가 됐든 하나님이든 그것은 내 관찰력에 손상 가지 않는 조건 하에 내가 획득한 정보들이에요. 성경지식들이었고. 내게 문제가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관찰하는 나, 근원적으로 관찰하는 나 자체가 이건 화근이고 잘못된 거야, 라는 인식을 못 가진 채 모든 교회조직 활동을 빨아들이면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관찰해서 자식 잘 키웠잖아요. 직장생활 잘 하시죠? 관찰해서 잘 먹고 잘 살았잖아요. 어디서? world 1에서, 이 세상에서는 잘 먹고 잘 살았죠. 아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존재는 만족하고 존재는 안정감을 취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막상 미리 보여준 world 2, 천국에 대해서는 천국 간 모세, 엘리야, 주님과 대화가 안 될 정도의 엉뚱한 생뚱맞은 언급을 합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더랬습니다, 하는 자기가 살아온 그러한 원칙이 천국에서도 그대로 먹힐 것이라고 제시를 했는데, 그 순간 천국은 휙 하고 사라졌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너무나 절실했던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환상 그 자체, 헛된 꿈 그 자체였습니다. 이처럼 천국과 이 세상 간에는 연속성이 있는 게 아니고 이질적이고 대치되어있고 대립되어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인간으로서 관찰해서 나부터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부터 안정감을 얻고 여유 있을 때 남한테 이웃 사랑하겠다.’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는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접하지 않는 이상은 우리는 거기서 굳이 내 생활방식을 바꿀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도 별반 문제가 없는데, 우리가 문제 있으려면 문제 있음의 계기가 드러나야 되는데 그런 계기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은 뭐 이 식으로 그냥 가면 되겠죠.
인간 자체가 문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하시는가. 하나님의 조치방법은 이겁니다. 전쟁입니다. 시편 24편 한번 보겠습니다. 시편 24편 7-10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하나님 앞에 만군의 여호와라 하는 것은 전쟁에 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전쟁이에요. 전쟁하는 방식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골라서 천국에 넣어주는 겁니다. 전쟁하는 거요. 전쟁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킵니다.
전쟁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키면 인간들이 선악과라는 지식을 알게 되었으니까 눈에 들어오는 모든 지각적이고 감각적인 관찰은 자기 안에 내장되어 있는 선악적인 지식체계를 경유해서 바깥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있어요. 악한 것은 감추고 선한 것은 자랑질 하고, 이런 식으로 바꾸어서 결국 남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나는 정당하다’ 그거 하나 존재할 가치 있다고 행동하는 거예요. 모든 행동과 말씨에 그게 다 묻어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서울에서 쑥떡을 보내셨는데 그 쑥떡을 그냥 먹는 것보다도 콩고물을 묻혀서 쑥떡을 먹으라는 거예요. 콩고물도 같이 포장되어 있었어요. 외부에서 받은 모든 감각은 자기 딴에 관찰해서 그야말로 순전한 진실 그대로 이야기하지만 이미 나의 콩고물이 묻혀 들어간 거예요. 그 콩고물이 뭐냐 하면, 내가 이런 발언과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과연 나의 정당성은 지금보다 up될 수 있느냐, 향상될 수 있느냐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최우선적으로. 그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될 수 있는대로 평화를 누리려고 합니다. 싸우지 않아요. 싸우지 않는 것이 선이고 싸움질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24편 8절에 보면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여호와께서는 시비 걸고 나오십니다. 전쟁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건집니다. 그 전쟁을 통하면, 선악체계에서 나는 선할 것이냐, 악할 것이냐 하는 것은 내가 나의 양심과 윤리에 따라서 도덕심에 따라서 내가 결정해버려요. 결정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결정을 인정하지 않아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그것이 악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기부거든요, 초막 셋이. 요새 농막 하나 짓는 데에 조립식해서 2500~3000만원 됩니다. 세 채하면 7500만원이에요. 단가가 보통 센 게 아닙니다. 농막 하는데, 조립식. 그걸 7500만원 들여서 세 채나 지어드리겠다는 거예요. 얼마나 대단한 선행입니까.
주님께서는 죄라는 것의 기준을, 선악체계를 벗어난 기준으로 새롭게 이해시킵니다. 이건 뭐냐. 전쟁요소를 가미해서 죄의 규정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거예요. 전쟁요소를 끄집어내서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정립하느냐. “내게 패배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예수님이죠. 여호와는 전쟁하는 분이니까. 나하고 한판 붙어서 내게 지는 사람은 죄인으로 규정하겠다는 거예요.
전쟁요소를 주께서 집어넣는 이유가, 악마가 먼저 주님께 시비 걸었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아들에 대해서 악마가 노렸고 아들에 대해서 공격하는 성향을 본래 자기 성향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얼마 전 강의 시간에도 했지만, 그래서 인간이 죽는 것을 겁내는 게 아니고 죽는다는 것이 내게 패배자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여기서 주저앉다니. 아, 나는 정말 패배하기 싫어.’ ‘죽기 싫어’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형태로 패배하기 싫은 거예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내가 패배하는 순간이 온다면 차라리 장렬하게 죽는 것이, 자살하는 것이 패배를 감추는 하나의 방식이 되는 식으로 그렇게 활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하는 방식 가운데 이런 것도 있습니다. 자살하는 방식, 제가 하나 팁을 드릴게요. 자살하는 방식 중 하나가 자기 자존감을 지키는 방향이에요. 일단은 연탄가스, 번개탄, 한강에 뛰어들기 뭐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한 종류가 죽도록 충성하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그게 자살입니다. 자기 딴에 요한계시록에 나온대로 산다 하는데 아니에요, 그건. 신학교 가겠습니다, 수녀가 되겠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자살이에요. 죽어도 나는 패배하기 싫다는 자기 본심을 드러낸 겁니다. 죽어도 패배하기 싫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친구가 자기의 곤란한 상황과 어려운 상황을, 친구를 불러내서 자꾸 쏟아 붓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어렵게 산다.” 그런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아무것도 아니네.” 이러니까 화를 내는 거예요. 그 사람은 곤란한 자기의 형편을 가지고 나처럼 이렇게 곤란하지 않은 친구를 이기는 무기로 활용하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만났는데 이게 먹히질 않네요, 이 수법이. “아이고 야, 너 안됐다. 어떻게 견디나?” 이럴 때는 음매, 기 살아! 그런데 친구가 하는 말이, “그거 뭐? 너 복음이나 아나?” 이렇게 나오니까 갑자기 그 친구가 미울뿐더러 복음도 밉고 주님도 미워지는 거예요. 자기 가난을 무기로 해서 가난이 자기의 자존감을 마지막으로 지탱하는 유일한 무기이자 바탕이었는데 그게 안 먹히네. 그게 안 먹히는 거예요.
이 얼마나 인간이 못돼먹었는지요. 지고는 못 살아요. 이걸 가지고 사자성어로 성깔머리라 하는 거예요. 이게 어른이라서 생활에 찌들어서가 아니라 세상에 1.5살 돌 지난 애까지… 아이고, 고집이 그렇게 세죠. 여러분 손자 키우는 사람들은 다 아실 겁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저 괴물이 어디서 나온 거야? 저 DNA, 여러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손자 1/8 닮았고 아들 1/2 닮은 거예요. 손자는 16%, 아들은 50% 닮은 거예요.
패배하는 자가 죄인이 되는 거예요, 패배하는 자가. 패배하는 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시비를 거는 거예요.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등장해서 뱀의 후손과 싸우는 거예요. 거기서 남자의 후손은 없습니다. 왜? 인간은 빠져라. 인간의 본성과 싸우지, 인간과 싸우지 않아요. 인간에게 그 본성을 준 배후세력과 싸우지, 인간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성깔머리를 자기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의 베드로라도, 열두 제자라도, 사도 바울이라도. 인간의 자기 성질은 자기가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아담의 type 안에서 유형 안에서 주입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걸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시비를 거는데, 시비 걸기 위해서 주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하면 바로 경쟁입니다. 경쟁을 시도하는 겁니다. 자, 부교재 제일 마지막 장에 땅 분배 그림이 나오죠. 에스겔 48장이 땅 분배에 관한 겁니다. 구약에서 땅 분배하는 과정이 여호수아 때 나오죠.
모세의 승리가 아니라 모세 언약의 승리. 그런 것 좀 구분해주셔야 돼요. 모세의 승리가 아니라 모세 언약의 승리. 또는 달리 이야기하면 죽은 모세의 승리인데 같은 이야기에요. 죽은 자가 산 자를 이긴 전쟁에서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구원은 뭐냐? 구원은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 여겼던 것이 빼앗겨서 주님의 것으로 갈아치워지는 게 구원입니다. 그러면 내 것은 뭡니까? 내 것이라 하는 것은 내가 고이고이 키워온 것이 있어요. 싸우기 위해서, 누구하고 붙기 위해서 무기로 장착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무기가 있는데 그 무기를 세 자로 말하면 ‘자존감’입니다. 자존심 아니에요, 자존감입니다. 스스로 나는 존재하는 감각, 이게 최후의 무기로 자리 잡습니다, 최후의 무기로.
이 자존감은 처음에 있을 때는 안 나타나다가 라이벌이 나타난다든지 누가 시비를 걸면 자존감이 가만있지 못하고 자극을 받아서 발작을 일으킵니다, 자존감이. 그걸 유도해요, 하나님께서. 그게 네 본성이라고. world 1, 지금 네가 속해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싸우고 있는데 싸우는 은밀한 무기는 뭐냐. 자존감 대 자존감들의 싸움이다. 팅팅 탱탱 챙챙 자존감들의 싸움이에요. 그것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에 누구 가정에서 튀어나오느냐 하면 바로 야곱의 가정 내에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이 어떤 삼촌 집에 가서 딸을 보니까 딸이 예뻤어요. 예쁜 딸이 라헬. 그때 야곱이 라헬을 좋아할 때는 자기의 자존감이 어떻다는 생각을 안 해요. 그냥 관찰이죠. ‘이상하게 얼굴이 좀 조화됐네. 지루하지 않네. 아, 저걸 예쁘다고 하는구나. 망가지지 않았구나.’ 라고 해서 좋아했어요. 사랑했는데 그 삼촌이 야곱 못지않게 모사꾼이 되어가지고 고향의 친척 조카가 자기 딸 라헬을 좋아하는 걸 알고 이참에 시집가기 영 글러먹은 자기 언니를 1+1, 마트 세일할 때 그냥 섞어서 보내는 방법을 사용했던 거예요. 안 팔리는 상품을 잘 팔리는 상품 옆에 갖다 붙여가지고 팔아버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열심히 일했을 때에 야곱이 라헬을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계속 숨기다가 막상 첫날 밤에 딱 들어가니까 자기가 원하던 상품, 찜해놓은 상품이 아니라 다른 상품이 왔는데 눈이 영 어두워요. 좋게 말해서 눈이 어둡지, 여자의 얼굴이 명승지라 했잖아요, 그림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아닌데? 그땐 전기가 없었거든요, 원자력 발전소가 없어서. 아닌데, 하고 말하니까 삼촌이 7년 간 더 무임금으로 노동하라 했어요. 그런데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14년 세월을 그저 14일처럼 일했어요. 라헬보고 레아와 같이 결혼한 거예요.
그래서 라헬과 언니 레아가 경쟁구도에 들어갑니다. 남편의 자식을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남편의 일부를 소유한 게 되기 때문에 남편은 내 소유가 되는 거예요. 그 소유를 가진 자가 어쩔 수없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감들의 경쟁, 그 경쟁에서 드디어 자식들이 생깁니다.
여기 부교재 마지막에 나오는 땅 지파 있죠. 단, 아셀,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 베냐민,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갓 이게 땅 이름이거든요. 바로 에스겔 48장에서 성전 짓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게 되면 그다음에 땅을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준다 할 때, “그게 어딥니까? 그게 몇 평입니까? 그거 언제 들어갑니까?” 자꾸 묻는 사람이 있어요. 땅이 영토가 아닙니다. 그건 사람이에요. 새 성전 측량할 때 사람을 측량한다 했죠.
촌에 아들하고 엄마, 아빠 세 식구 사는데 갑자기 아빠 돈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아들한테 “돈 좀 생겼는데 뭐 사줄고?” 하니까 아들이 하는 말이 “아빠, 돈 많잖아.” “응, 돈 많아. 네 소원대로 뭐 사줄게.” “아빠, 여기서 이사 갑시다.” “왜 이사 가는데?” “여긴 뭐 재미도 없고 맨날 똑같고 친구도 없고. 우리 다른 데 이사 가요.” 이게 바로 관찰이에요. 이 world 1, 이 세상 사람들이 새로움을 추구할 때 새로운 영토로 이사 가는 겁니다.
인간들의 선택과 결정은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새롭게 살 거주지를 찾는 그것이 인간들이 기껏 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께서 아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그런 식으로 몰고 다닌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찾아가라.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에서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없었습니다.
그럼 약속된 땅은 어디입니까? 아브라함 바로 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되게 했던 그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영토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이삭을 이삭으로 하여금 구원시켜놓고 이삭의 하나님. 야곱을 구원해놓고 나는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신약에 예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 영토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느껴야 되는 것은 내가 눈에 보이는, 우리 눈에 관찰되는 이 영토, 땅이라는 지역에서 도저히 내가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관찰에서 오는 한계를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사로잡혀있는 이 땅이라는, 물질적인 토지라는 데에 묶여있는 인생의 한계를 묶이게 한 그 배후세력과 전쟁을 벌여서, 뱀의 후손이죠, 거기서 빼앗아 낼 경우에만 이게 구원이 되는 그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에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그래서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이 영토는 영토의 구심점, 중심점이 있습니다. 그 구심점이 여기 p.20 그림에 보면 유다와 베냐민 사이에 그 이름이 나오죠. ‘거룩한 땅’. 거룩한 땅의 자세한 구조가 성경에 나옵니다. 여기 부교재에도 나와요. p.19에도 나와요. 여기 단부터 유다 지파까지 일곱 지파가 위에 있는데 이 일곱 지파는 측량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죠. 측량하지 않습니다. 측량할 필요 없어요. 이 땅이 얼마나 넓은지는 그 기본 되는 것만 측량이 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되어지게 돼있습니다. 아래쪽에 베냐민에서 갓까지 다섯 지파가 거룩한 땅 아래쪽에 있죠. 여기도 역시 측량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가 측량되는가? 영원한 제사장(사독의 자손) 그 안에 네모난 것이 있죠. 그 네모난 것이 에스겔 45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 새 성전이 있는 곳이 그 네모난 곳이에요. 그리고 그 왼쪽, 오른쪽 양쪽에 보면 동일하게 왕의 자손(다윗의 아들들), 그러니까 왕들, 다윗의 계보, 세속 된 왕들의 땅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림상 네모라서 그런데 사실 왼쪽 끝은 지중해까지 뻗어지고요. 오른쪽 끝은 사해, 요단강까지 뻗어져나갑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다시 p.20 그림을 한번 보세요. 위에 있는 일곱 지파, 아래 있는 다섯 지파가 그렇게 펼쳐져 있죠. 중간에는 뭐가 있습니까? 거룩한 땅이 서쪽에는 지중해까지 되어있고 동쪽에는 요단강까지 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측량해야 될 구심점이 있는데요. 구심점이 되는 토지는 왜 측량되어야 되는가? 그것이 구심점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뭐냐? 에스겔 45장 7절, 이번 강의의 핵심입니다. “드린바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바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편으로 향하여 서편 국경까지와 동편으로 향하여 동편 국경까지니 그 장이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찌니라”
무엇을 하나님께서 정하느냐 하면 구심점부터 먼저 정해요. 그 구심점이 되는 것이 전쟁에 능하신 왕의 토지입니다. 왕이 거처하고 왕과 관련된 사독 제사장이 있고 그 중앙에 있는 성전은 왕이 들어갈 때 비로소 제 취지가 살아나는 왕의 성전. 왕을 찬양하고 왕을 기념하는 성전이 그 안에 있습니다. 왕과 그 보조 역할을 하는 사독 제사장, 왕과 제사장직의 만남, 그게 구심점이 되는데 그림을 한번 보겠어요.
서편에 지중해 있고 동편에는 요단강 있고 사해 있고 갈릴리 바다 있단 말이죠. 구심점 되는 이 지역에 2만 평 되는 성전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2천백만 평 되는, 크기가 가로, 세로 13km되는 거룩한 구역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것만 정해서 이걸 양옆으로 당겨버려요. 좌우로 쫙 당겨버리면 왕의 거룩한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럼 가운데 하나님의 성소 자리가 구심점, 중심점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중심점 자리에 아까 누가 있다 했습니까? 자존감이 있죠, 자존감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 자존감을 노리면서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시비 걸고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그러면 자존감이 하나님 앞에 패배자가 됩니다. 패배자가 되면 여기서 비로소 죄라는 것이 규정됩니다. 능하신 왕에게 패배하게 되면 그게 죄가 되고 그것이 저주받아야 될 이유에요.
패배자에게 줄 복은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가 야곱의 형 에서가, 야곱이 인터셉트하고 거짓말해서 모든 복을 아버지로부터 가져갈 때, 그 뒤에 헐레벌떡 와서 “사냥고기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짜고 치는 고스톱대로 제가 사냥고기 잡아왔습니다. 아버지, 저한테 복 주세요. 동생은 해내지 못하는 걸 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 “동생이 거짓말해서 다 가져갔다.” 할 때, 그때 에서가 한 말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중한 말이에요. “아버지, 나한테 줄 남은 복은 없습니까?” 아버지의 답변은 “없다.”
패배자에게 남아있는 축복은 없습니다. 이것은 도박판에서 다 탄 거예요. 판돈 남아있는 거 콜! 해서 몽땅 다 들어낸 거예요. 다 날라갔어요. 뺏어서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 자존감 뺏어서 주님의 승리로 바꿔치기해서 주님의 것으로 바꿔치기한 것이 구원이이에요. 이제는 네 자존감은 너의 관찰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이게 천국에는 먹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먹히는데 천국에서는 먹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화산에 나타났던 모세, 엘리야 이 사람들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과의 대화했던 그 대화내용, 궁금하지 않습니까?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 대화내용이 뭐냐 하면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이 자존감을 죄인으로 만드신 그 주의 일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라는 것이 대화의 내용이었어요. 내 자존감을 뺏어가서 더 이상 나로 내 자존감으로 살지 못하게 패배자로 만드신 그 주의 일은 언제 완성됩니까.
그걸 가지고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의 별세에 대해서 대화했다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별세,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대화한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어서 모든 사람 보기에 패배자로 낙인찍혔지만,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 이게 바로 승리라는 거예요. 내가 다 이루어버린 거예요. 내가 속해있는 world, 이 세상의 관점과 주님이 속해있는 천국의 관점이 이렇게 너무나 반대가 되는 겁니다, 반대가.
오늘도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뭐냐.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거예요,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들을라고, 흠 안 잡힐라고, 내 자존감에 스크래치 안 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갑니다. 전국 노래자랑~ 이게 뭐에요, 96년 동안. 이게 뭡니까? 나 죽을 때까지 일했다는 거예요. 그게 자존감이잖아요. 그게 선악체계입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사실. 자존감을 없애란 말이 아니고 내 자존감으로 인해서 내가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나는 패배자로 확정 났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럼 아까 그 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라헬과 레아가 경쟁을 하는데 애 놓고 안 놓고는 하나님 소관에 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부인들이 다 불임여성이에요. 야곱의 두 여자도 다 불임여성이에요. 계시에 맞춰서 조정되어서 아기를 낳습니다.
첫 번째, 레아가 르우벤을 낳습니다. 보라, 아들이다. 내가 아들을 낳았다. 자존감이 확 살았죠. ‘보라, 아들이다’라는 말을 왜 합니까? 라이벌 되는 동생 넌 자식도 없지? 이런 뜻이에요. 두 번째 시므온, 들으심. 3번 타자가 연합됨, 레위. 4번 타자가 유다, 찬송함.
라헬이 보다가 억울해서, 남편은 나를 사랑하는데 주께서는 자식을 안 주니까 사랑을 언니한테 빼앗겼다는 억울함으로 있을 때에 라헬이 자기한테 문제 있는가 싶어서 경쟁적으로 언니를 이기기위해서 자기 종 빌하에게 남편과 동침케 하여 다섯 번째 자식 단을 낳습니다. 단 이름은, 내 억울함을 풀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그거 하나 낳는다고 풀립니까. 여섯 번째 또 빌하를 보내서 남편과 동침케 해서 납달리를 낳았는데, 내가 경쟁에서 질까보냐, 이런 뜻이에요.
그걸 보고 너만 여종 있나? 나도 여종 있다. 레아의 여종 이름이 실바입니다. 실바를 통해서 갓과 아셀 둘을 낳아요. 갓을 낳고, 역시 복은 내 쪽이야. 복되다. 아셀은 기뻤다. 동생한테 이겨서 기뻤다. 그리고 난 뒤에 잠시 휴전에 들어갑니다. 휴전하고 난 뒤에 라헬이 언니가 합환채 식물 좋은 것 갖고 있으니까 그거 나한테 주면 내가 내 남편하고 동침케 해줄게, 이렇게 해요. 그래서 좋다. 합환채 주고 자기가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잇사갈입니다. 값이라는 뜻입니다. 값을 치뤘다. 그다음 다시 남편하고 동침해서 스블론, 이제 남편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승리는 내 몫이구나.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라헬과 남편을 동침케 해서 요셉을 줍니다. 요셉의 뜻은 하나님께서 다 끝난 전쟁에서, 언니한테 진 이 패배감에서 더해줬다, 요셉. 그리고 라헬이 남편하고 다시 동침을 하는데 그때 라헬이 자식 낳으면서 죽게 됩니다. 자식을 놓으면서 라헬은 생각했습니다. 내가 해산하다 죽어버리면 난 언니한테 영원한 패배자란 말인가. 아, 슬프다. 그래서 이름을 ‘슬픔의 아들’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구원한다는 것을 안 이상 야곱은 “여보, 당신은 슬픔의 아들이라 했지만 적절치 않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당신이 낳은 거야. 당신이 바로 승리자야.” 왜? 당신은 죽었기 때문에. 나대신 죽기 때문에. 죽어야 될 야곱대신에 내 사랑하는 자로서 당신은 죽음이라서 이 육의 마지막 모습을 나대신 당신이 다 보여주기 때문에 당신이 낳은 자식은 바로 죽음으로써 비로소 승리한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자식이 당신에게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긴 자식이 열두 명이에요. 자존감의 경쟁의 산물이 열두 명이에요. 그 열두 명에게 주께서 땅을 분배한다는 것. 땅을 분배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육에서 땅을 가질 자격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대신해서 인간들이 이기지 못한 그 자존감, 그 악마의 속성과 이겨서 그 승리의 대가로 얻은 땅을 너희에게 선물로 무상으로 줄게. 그 땅이 바로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그 땅입니다.
그 땅이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그게 사람이 돼요. 십사만 사천이라는 하나님의 딱 정해진, 선택된 자들의 숫자로서 선택된 자들의 구원받은 총집합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입니다. 12, 야곱 아들의 축복, 그 축복(12)에 완전한 영원한 마감(1000), 그래서 12×12×1000=144,000. 여기서는 어떤 개인의 자존감이 섞일 수 없어요. 승리자는 구원받은 본인이 노력한 승리자가 아니라 바로 왕 되신, 전쟁에 능하신 예수님 홀로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성도가 거주하는 성령의 처소는, 영원한 왕 되신 예수님의 영토를 같이 얻어먹은 위 일곱 지파, 아래는 다섯 지파 그 전체를 왕의 크기에 따라서 거기에 준해서 똑같은 크기로 지중해에서 요단강까지 끊어서 분배받을 때, 그것은 바로 전리품이고 하나님의 선물인 겁니다.
에베소서 4장 7-1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사람들이 선물 받으면 선물 받았다,로 끝나잖아요. 그건 자존감이에요. 어떻게 선물이 주어졌는지 그 뒤에 나옵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치러서 거기에 대한 승리의 대가로 저 사람, 저 사람, 저 사람 내가 찜했다. 내 사람이다. 네 사람 아니야. 빼앗아내고 뺏어낸 그 새로운 천국에 살만한 은혜를 우리에게 은사로 성령으로 부여할 때 그것이 바로 에스겔 48장의 완성인 동시에 이게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끊임없이 선물 주시는 바탕이 되는 겁니다.
전쟁이에요, 전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의 결과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 전쟁에서 예수님이 왕으로 승리했고 그 승리의 대가로 땅을 분배받았으면 굳이 나의 승리가 되어야 될 이유가 없죠. 승리자 되시는 주님만 찬양하고 영광 돌리면 되는 겁니다. 주님의 공로이기 때문에.
10절에 보면,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들이 알아 맞춰보세요. 문젯거리도 안 되지만. 물이 있고 물 위에 방주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묻고 싶은 것은 이 방주 안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 셈도 있지 않습니까. 노아 홍수 때 노아의 아들 셈은 방주 안 어디에 처박혀서 같이 왔습니까? A라는 지점이다, B라는 지점이다, C라는 지점이다, 어느 지점에 쭈그려 앉아서 통과했습니까? 모르죠. 중요한 것은 방주 안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죠.
방주 안에 있으면서 무엇을 통과합니까? 심판을 통과 중입니다. 그렇죠? 방주 안에 있으면 A지점, B지점, C지점 상관없이 심판을 통과하고 있어요. 지금 이 세상은 불심판 받습니다. 불심판 속에 여기 방주 역할이 노아 언약이잖아요. 지금은 예수 안이 방주에요.
예수 안에서 우리가 서울에 살든 대전에 살든 대전 찍고 부산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게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캐나다 가고 미국 간들, 북한은 좀 곤란하다만 다른 데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빠 돈 벌었다면서?” “그래.” “이사 가자. 나 심심해서 못 살겠다.” 그런 철딱서니 없는 아들의 생각이 어쩌면 철딱서니 없다고 비난 못할 정도로 우리가 나의 삶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자꾸 이사를 다니는 거예요.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젊은 사람인데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바꿔요. 참 답답해. 이거 했다가 직장 때려치우고 뭐 했다가 때려치우고. 대안학교 집어넣었다가 빼고. 하여튼 뭔가 안정적이지 않아요. 욕망은 크고 세상에 좋다는 것은 관찰에 의해서 world 1, 이 세상에서 딱 눈에 띄니까 젊은 기분에 한평생 원 없이 한번 살아보자. 이것도 찝적, 저것도 찝적, 온갖 거 다 해보는 거예요. 뭐 될까봐. 되기는 뭐 돼요? 자기 전쟁이지. 김의 전쟁, 박의 전쟁, 최의 전쟁이지 주님 전쟁이 아니잖아요.
그게 바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패배자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을 자극시키고 환기시키는 겁니다. 그래도 좀 안정적이라고. 그거 가봐야 별 거 없습니다. 제가 오후설교 때 기도내용이 그거였어요.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행복한 척하는 사람들에 우리는 둘러싸여있다고. 행복하지도 않아요, 보면. 욕망이 커가지고 욕망이 언제든지 출렁거려서 행복하지도 않아요. 행복하지도 않은데 남들에게 행복한 척해서 자기가 괜찮게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조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A,B,C 어디가 되었든 예수 안에 있어야 불심판을 지나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심판을 통과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것은, 서 영춘이 하는 말처럼 서울구경 잘 했네. 그냥 지옥구경 잘 했네, 예수 안에서. 안정감을 가지고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주와 더불어서 세상에서 이겼던 자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같이 주님과 함께 승리자로, 한 것도 없는데 승리자에요, 승리자로 새로운 천국에 사는 성품을 선물로 받으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관찰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수상한지를 검토해본 적 없습니다. 남들이 행복해보이니까 흉내 내면서 따라잡다가 세월 다 보냈습니다. 주여, 주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이야기하는지 귀담아 듣게 하옵소서. 다 이루었다 안에 들어가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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