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답변

두려움

아빠와 함께 2022. 7. 2. 19:36

※두려움

 

질문 : 저기 목사님. 창세기 이제 설교 말씀 중에서 두려움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어요. 그때 이제 주님께서 목사님을 통해서 이제 마지막에 설교 마지막에 그 기도를 시키세요. 얼마나 두려웠으면 매달리고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라는 그런 기도를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감정이 깊었는데요. 그 기도가. 구약에서 언급하는 두려움과 신약에서 언급하는 두려움은 차이가 있습니까?
답변 : 차이가 있어요. 구약에는 결핍 때문에 생긴 두려움입니다. 결핍. 결핍이 구약에서 모형이기 때문에 결핍이 메시아에 대해서 기다리게 만들어요. 결핍이. 이게 다가 아니었구나라는 뜻은 하실 일이 남아 있었구나, 주여 주의 날에 저를 기억해달라는 식으로 시편에 보면 거기에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결핍을 느끼게 만들어요. 결핍을 느껴야 구약 성도들이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특히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두려워했어요. 선지자들은. 선지자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벌벌 떨면서 했어요. 막 반항하기도 하고 그 말은 뭐냐? 선지자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거예요. 메시아 아니면서도 메시아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신약에서의 두렵다는 것은 함부로 까불지 말라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에요. 함부로 까불지 말라.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섬긴다는 말이 그거거든요. 두렵고 떨린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은 까불지 말라는 말은 만족, 자족이 만족 자족이 자신이 전쟁에 군사가 됨을 잊게 만들어 버려요. 사적으로, 됐어. 이만하면 나 구원받았어.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뭐로 보냐 하면은 군인으로 보느냐 하면 군인, 니 전쟁 말고 내 전쟁 하란 말이야. 군인으로 본다고요. 사명감을 줘요. 사명감. 고린도 전서 9장 17절부터 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할 때 뭐라고 하냐면 내가 이 하는 일은 부득불 한다 부득불. 그리고 내가 일을 해서 상을 받는 게 아니고 일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자체가 상이라는 거예요. 일해서 상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감히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벌벌 떨면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주님께 벌벌 떤다는 것은 세상 것에는 추호도 겁내지 않고 있다는 뜻이에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겁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게 되면 자유죠. 왜? 세상에 대해서 평가나 비평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제가 어느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걱정 두려워하는 이유는 지 혼자 자기 놀이 하고 있는데 자기 놀이 하면 될 걸 저쪽 놀이가 부러운 거예요. 부러워서 겁을 내는 거예요. 이번에 주식을 사더니 대박 했다. 그 사람은 지금 자기 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주식 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자기 놀이 하면 되잖아요. 난 주식 놀이 하지 않고 그냥 있는 돈 가지고 쓰겠어. 그건 자기 놀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놀이 하면 되는데 그쪽 주식 대박 난 걸 꿈을 꾼다고요. 자기 꿈을 꾸는 게 아니고 그 사람 꿈에 같이 합세하려고 끼어드는 겁니다. 절대로 합세 안 됩니다. 이용당하죠. 우리는 내 꿈 내 놀이 하면 되지 저쪽 놀이에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에는 메시아가 오는 것을 신약은 다 이룬 그분에 대한 두렵고 떨림 때문에 세상에서부터 편안하게 구애받지 않는 자유와 기쁨을 주죠. 편안함을 주죠.
질문 : 그게 사랑인가요? 주님에 대한 두려움 떨림 이게 주께서 주시는 사랑인가요?
답변 : 우리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질문 : 주께서?
답변 : 주께서 주신 사랑, 사랑 안에 나타난 아주 아름다운 사랑의 현상이죠.
질문 : 두렵고 떨리는 게?
답변 : 예. 지금 사랑을 개념을 굉장히 좋게 보셨는데 사랑을 두렵고 떨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냥 황홀을 하고 감당 못할 축복 감당 못할 은혜 선물에 대해서 황공해 하는 모습, 이게 사랑이죠.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도 같은 말로 자유인데요. 사랑 자유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자발적 예속이라고 했지요. 예속, 자발적으로 예속. 주께서 그냥 조지는 대로 조지소서. 그래도 저는 기꺼이 받겠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든지 가라는 대로 가겠습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강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갔던 것은 로마 갈 때도 마찬가지고 자기 생각을 안 하니까 자발적으로 자기 몸을 예속했잖아요. 던져줬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을 안 하니까 자기 계획이 없죠. 그리고 자기가 뭘 하든 간에 그 현장에 주어진 것이 주님의 계획에 입각해서 나한테 선물로 준 인생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까불지 않고 내가 까불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두려운 마음이. 까불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됐어 이게 아니고 주님만 바라보는 거지요. 나는 됐어 하면 또 나를 챙기는 게 되니까.

그 두려운 마음이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놀이를 해요. 자기 즐거움. 하다가 또 그게 죄인 줄 알고 다시 두려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거죠. 지금 우리 성도님이 질문하는 뜻을 알아요. 두려움과 감사가 어떻게 이게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나가 될 수 있죠. 너무 두려움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게 되죠. 자기 생각 안하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감사고 두렵죠. 사람이요 자식이든 누구든 간에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요. 뭐든지 누구를 만날 수가 있어요. 누구도 만나고 부대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TV 예능에 솔로 하는 거 있거든요. 전 TV 거의 안 봅니다만 후딱 보면 다 보여요. 총각 서른 살 먹은 총각들과 여자들이 선보는 프로그램인데 직장들이 빵빵하고 다 좋아하죠. 돈도 있고 다 좋은데 건강하고 심사해서 그렇게 했겠지만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하는 그게 굉장히 강렬해요. 그게 아까 말씀한 편집입니다. 저 여자는 와도 나는 나 안 받아줄 거야. 이게 자기 게 계속 자기 놀이를 하는 거예요. 저는 설교할 때 이거 굉장히 심사숙고해서 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 놀이한다고. 폐쇄된 자기 놀이한다고요. 그러니까 남의 것을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지는 지 놀이하면 되지. 오징어 게임 같이 전체 게임 할 필요 없어요. 지는 자기 놀이하면 됩니다. 무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탈락. 알았어. 땡 탈락. 집에 갈게. 이러면 끝나는 문제지 일부러 그걸 지킬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다 각자 자기 놀이이기 때문에.

 

'질문 답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른 목사의 설교  (0) 2022.07.02
뭐든지 복음으로 파악  (0) 2022.07.02
막 사세요  (0) 2022.07.02
편집  (0) 2022.07.02
어제의 구원 오늘은 소용없다  (0) 2022.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