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강-YouTube강의(위로 누가복음 6:24)20220308-이 근호 목사
제383강, ‘위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요. 성도에게는 땅의 것 가지고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늘의 것으로 위로한다. 그게 맞다, 라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게 옳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은근히 그 뒤에 하나를 더 추가해요.
다시 말씀드려볼까요? 하나님께서는 땅의 것으로 성도를 위로하지 않고 하늘의 것으로 위로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것으로 위로하는 사람에게 땅의 것으로 위로해준다. 그 뒤에 붙이지 말아야 될 것을 하나 떡 갖다 붙이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는 은근히 세상 것을 추구하면서도 세상 것을 추구한다는 이유 때문에 진짜 갖고 있는 세상 것까지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회해서 속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 앞에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체, 그 자체가 세상적으로 받는 위로에 이미 푹 젖어든 거예요. 거기서 나온 습성입니다.
위로가 인간에게는 해당되는 대상 자체가 아니에요, 위로라는 게. 뭐했다고 위로합니까? 나쁜 짓했는데 위로해줘요? 아니 나쁜 짓만 골라 해놓고 위로를 받는다니 이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주님의 위로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그 위로를 비켜나가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해요. 이 세상에서 정작 위로 받을 자는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생산돼요. 그 사람이 따로 있어요. 하늘의 위로받을 사람은 따로 만들어내요.
하늘의 위로받을 사람을 구약적으로 정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하여 마땅한 겁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벌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예 하늘의 위로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않아요. ‘이것보다 더 나쁜 인생으로 더 힘들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이십니다.’ 라고 수긍할 사람들.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함으로써 내가 은근히 노리고 있는 위로로써 주께서는 ‘그래, 착하구나. 내가 원하는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내가 추가적으로 더 주마.’ 그런 식으로 은근히 노릴 생각하지 마세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거기서 등장하면 안 됩니다.
금도끼 보고도 탐을 안 내고 은도끼 보고도 탐을 안 내니까 쇠도끼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신선이 ‘네가 착하구나. 그렇다면 금도끼, 은도끼 내가 덤으로 다 줄게.’ 그 이야기 들으면 원래 금도끼, 은도끼 주인은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거 원래 내 건데...
위로라는 것은 내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내 것도 아닌데 왜 주십니까?’ 할 때만 위로가 돼요. ‘이것은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닌데 내가 잃어버린 적도 없는 이것을 왜 주십니까?’ 할 때 위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6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우선 위로대목부터 먼저 보면 6장 24절,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설명하면 세상적인 위로, 세상적으로 하나님한테 보상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 부요한 자, 두 자로 하면 부자.
연초에 늘 소망하는 것이 뭐냐 하면 다섯 자로, 부자 되세요. CF도 그런 게 있잖아요, 부자 되세요. 부자 되라는데 기분 나빠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사할 때 화장지 들고 가면 화장지 상표이름은 잘 풀리는 집. 이사 가고 난 뒤에 매사가 잘 풀리고 부자가 되는 거예요.
잠언서에도 있죠. 오른 손에는 부귀, 왼손에는 장수. 오래 살면서도 부요하게 사는 것, 이게 하나님의 복이라 생각하죠. 문제는 사람들이 내가 그런 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런 약속을 했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25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 삶의 원리가 사실은 그것이 가짜 위로이고 가짜 행복이라는 겁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그것은 행복을 받을 자격도 없고 위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행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니까. 그것은 아까 382강에서 ‘최선’이라는 이름의 동영상에서도 제가 언급을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위로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 위로받을 자가 누구냐. 그것은 23절에 나옵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23절에는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고 되어있고 24절에는 화 있을진저. 25절에는 화 있을진저.
23절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게 바로 진정한 하늘의 위로가 되겠죠. 그리고 그 위로받은 사람이 23절에 보면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선지자들은 기뻐하고 뛰놀만한 요소를 이 선지자 생활하면서 그걸 구성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다루실 때 하나님이 준비한 상은 뭐냐 하면 하늘의 것이라면 어떤 경우라도 기뻐하고 뛰놀 만큼 너무나 위로가 되는 것들을 주님께서 꽉꽉 채워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이 선지자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신 거예요. 오직 하늘의 것으로만 기뻐하고 뛰놀 정도로. 그게 상이에요, 하늘의 상.
그렇다면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뭐 한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 예상도 못했습니다.’ 이런 말과 더불어서 주어지는 경우들.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고 인간이 생각도 못한 거예요.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집에 재산이 한 100억 있는데 경제 사정에 의해서 당했다. 예를 들면 내가 러시아사람인데 러시아 재벌이 돼서 재산이 한 1조원 되가지고 급할 때 쓰려고 스위스 비밀금고에 1조를 넣어놨는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한 바람에 내 통장에 있는 돈 전부다 완전히 차단되어서 묶여 있어가지고 한 푼도 못 쓸 때 그 때 러시아 재벌이 하는 말이, 기뻐하고 뛰논다.
예상 못했잖아요. 자기는 돈 1조가지고 여생을 행복하게 살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해도 이렇게 철저하게 망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푸틴이 전쟁 일으켰는데 자기는 러시아 재벌이라는 이유로 다 묶였어요. 돈 10원도 못 꺼내요. 돈을 지갑에 갖고 다니는 게 아니라 은행에서 찾아야 되는데 못 찾아요. 망했어요. 쫄딱 망했어요.
쫄딱 망해서 다른 사람이 아이고, 하면서 위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망한 그 사람이 기뻐하며 뛰놀고 있어요.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실성했구나. 미쳐도 저렇게 미치는구나. 사람들이 그렇게 평하겠죠? 그런데 본인은 ‘나는 이제부터 나를 망하게 하신 주님으로 살리라’ 이렇게 나올 때 기뻐하고 뛰놀잖아요.
그런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룻기에 나옵니다. 나오미가 이스라엘 살다가 모압 땅으로 갔다가 재산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재산 없어도 든든한 남자들은 있었잖아요. 남편에다가 아들 둘. 여자한테는 농경시대에 자기가 농사지을 수 있는 든든한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지할 만하고 든든한 겁니까. 남자가 몇 명이죠? 남편 하나 아들 둘, 남자 총 3명이죠. 세 명 다 죽었어요. 쫄딱 망한 거예요. 같이 죽었으면 속 편한데 자기는 살아있어요. 거기다가 또 곁다리처럼 과부된 며느리까지 지금 두 명 달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건데요, 여자 혼자서? 나이도 많은데.
예상 못했습니다. 그럴 때 그동안 내가 가졌을 때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고 쫄딱 망했을 때 쫄딱 망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내가 믿었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받아들일 때 기뻐하고 뛰노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약 선지자들이 경험한 거예요. 주님의 가신 모든 길에서 주님은 다 버리고 갔습니다. 주님 쫄딱 망했죠. 그러나 그 주님, 그 주님을 뒤따라가는 그 사람에게만 하늘의 위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