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강-YouTube강의(최선 마태복음 19:16)20220308-이 근호 목사
제382강, ‘최선’. 최선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지금은 선을 향하고 있는 태도를 내가 갖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할 때 최선이라는 말을 하죠. 최고의 선은 아직 남아있고 지금은 최고의 선이라 할 수 없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선을 향하여 질주하고 그것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라고 할 때 최선이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최선에 언제 도달될까요? 아무리 해도 최선은 도달되지 못하죠. 최선이라고 했던 그 상황, 그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그 수준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새롭게 발견되는, 지금보다 더 완벽한 최선이 거기 도달해야 비로소 보이는 거예요.
이만하면 나는 최선이라고 여길 수 있다고 장담했던 그 장담이 막상 자기가 목표하는 그 지점에 도달되게 되면 ‘아, 이게 최선이 아니었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럼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최선이지도 않으면서 ‘일단은 최선이라고 시작하자.’ 라는 그 마음가짐이 스스로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봐야 됩니다.
뭐 어렵게 이야기할 게 아니고 성경 본문을 가지고 이야기하게 되면 쉽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보게 되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했어요. 영생 얻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최선의 상태라 생각하고 이 사람은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주장에서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최선, 선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고 또 영생을 얻고자 하는 이 마음가짐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감히 이 사람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그 마음이 옳지 않은 마음이다. 이것은 옳은 마음이 아니다. 그걸 노려서는 안 돼. 그걸 원해서는 안 돼. 그건 나쁜 마음이야.’ 라는 생각을 이 사람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 말에 모순이 있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내가 품었다는 이 자체가 이미 나는 선한 일 맞잖아요.’ 그걸 예수님한테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내가 선한 쪽으로 나가고 그러면 그 선한 일의 열매로서 생명, 영생이 주어지니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이 자체는 절대로 나쁜 일이 될 수 없다는 자신감. 외골수 같이 이것은 누가 뭐래도 진리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은 이미 진리를 모르고 온 게 아니고, 나 진리 이미 알고 있어요. 다만 그 진리 선에 서서 내 마음에 만족스러운 선(善), 아까 이야기한 최선이죠, 영생은 이제 가졌어, 라고 할 만큼의 분량의 선은 그 점이 아직 약간 미흡하니까 어떻게 하면 그 미흡한 선을 마저 채울 수 있습니까? 라고 해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온 겁니다.
이 이야기, 이 사람의 경우를 우리가 남이라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이런 태도에 대해서 힐난하고 비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인가를 스스로 자기한테 돌아보세요. 만약에 같은 교회 다니는데 어떤 사람이 담임 목사한테 가서 “목사님, 내가 어떻게 착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할 때 그 현장에 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분노하면서 질타할 수 있겠습니까?
‘저 사람은 내가 평소에 갖고 있는 마음하고 똑같네.’ 이런 생각일까요? 아니면 ‘아, 내가 내 죄를 모를 때 내가 갖고 있던 태도를 저 사람이 또 저렇게 발설하는구먼. 마치 나의 과거를 보는 것처럼 내가 내 주제파악이 안될 때 그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뭐 이런 식으로 내가 옆에 있으면 질문 받은 목사대신 내가 나서서 “당신은 잘못이야!”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그런 마음입니까?
문항을 제가 두 개 드렸어요.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선을 행해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지금 이런 자세 자체는 잘못이 아니죠? 이건 하나님이 원하는 바죠?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 그게 옳을까요, 나쁠까요?
뭐 놀라울 것도 없지만 놀라운 사실은 신학교 졸업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바로 이것을 장려하고 격려한다는 겁니다. 신학교에서 이렇게 배웠죠. 인간 속에는 선한 게 있고 그 선한 것이 선한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게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적인 속성이라고. 그걸 공유적 속성이라고 배운 적 있죠?
다만 인간의 그 방향은 제대로인데 그동안 죄를 많이 지어가지고 그 양이 하나님이 원하는 선한 양을 못 채웠기 때문에, 방향은 맞는데 그 선을 마저 못 채웠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못 채운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가 의인될 수 있다, 뭐 그런 식으로 신학교에서 배운 적 없어요? 그렇게 되려면 공유적 속성, 비-공유적 속성, 그것부터 문제 있음을 우리가 파악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께 이야기할 때 또는 이 사람이 어떤 목사한테 이야기할 때 그 현장에 예수님이 잠시 딴전 팔고 목사가 딴 데 신경 쓴다고 대답을 안 들었다 생각하고 질문한 것만 우리 귀에 들어올 때 우리가 과연 그 사람을 예수님 자리에서 예수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조언할 수 있는가. 예수님 입장에서 예수님 같으면 예수님의 뜻이라면 뭐라고 조언할 수 있는가.
20절에 보면 온 사람이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 앞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부족하다고 이야기해요. 방향은 지금 최선을 다해서 가면 영생 얻는데 누가 뭐래도 방향은 맞다고 자부하는데 그 최선, 마저 채울 선의 남은 분량만큼은 부족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 청년은 일단 자기가 확고한, 자기가 양보하지 않는 어떤 틀을 갖고 왔어요, 인식의 틀을. 인식의 틀을 갖고 와서 이 틀에 내가 미진한 것을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마저 채워달라고 그 틀 자체를 들고 온 거예요. 그 형틀 있죠, 조각할 때 형틀, 그 프레임 그것을 본인은 수정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가. 그 틀 그대로 사용해요. “무엇이 부족합니까?” 주님께서는 “이게 부족하다.” “무엇입니까?” “네가 모든 것을 다 팔고 그리고 빈털터리 되어서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청년은 최선을 위하여 재물마저 포기할 생각, 영생을 위해서 재물마저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겁니다. 영생보다 더 귀한 게 그 청년은 있었어요. 그게 재물이었습니다. 최선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재물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재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말 안 했죠?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어릴 때부터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는 그걸 내세우는 거예요. 나 재물에 욕심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숨기고.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내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결론 내립시다. 십계명에 나온 것 다 지키면 우리의 기본 마음가짐이 달라질까요? 우리의 욕심이 없어질까요? 재물에 대한 사랑이 없어질까요? 십계명 다 지키면 우리가 다른 사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언급하고 본인 입으로 이걸 다 지켰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 인간이 생각하는 율법은 진짜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율법은 우리가 꽁꽁 감추어놓은, 우리가 진정 노리는 바, 재물에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죠.
그러면 재물에 욕심이 있으면서 거기다 영생을 한자리에 같이 나란히 결합할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No. 영생은 인간의 재물 사랑과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최선, 그것은 본인이 만든 위선이었고 거짓말이었습니다. 영생은 인간 자기 자신이 영생을 추구하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게 하는 식으로 주님 자체가 영생이 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거예요.